唯一の福音 유일한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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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 1章6節~12節
讃美歌168番
1:6キリストの恵みへ招いてくださった方から、あなたがたがこんなにも早く離れて、ほかの福音に乗り換えようとしていることに、わたしはあきれ果てています。
1:7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の福音があるわけではなく、ある人々があなたがたを惑わし、キリストの福音を覆そうとしているにすぎないのです。
1:8しかし、たとえわたしたち自身であれ、天使であれ、わたしたちがあなたがたに告げ知らせたものに反する福音を告げ知らせようとするならば、呪われるがよい。
1:9わたしたちが前にも言っておいたように、今また、わたしは繰り返して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受けたものに反する福音を告げ知らせる者がいれば、呪われるがよい。
1:10こんなことを言って、今わたしは人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神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あるいは、何とかして人の気に入ろうとあくせく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もし、今なお人の気に入ろうとしているなら、わたしはキリストの僕ではありません。
1:11兄弟たち、あなたがたにはっきり言います。わたしが告げ知らせた福音は、人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1:12わたしはこの福音を人から受けたのでも教えられたのでもなく、イエス・キリストの啓示によって知らされたのです。
4/26せんげん台教会祈りの課題
①一日も早く現在の新型コロナ禍の状況が終息するように。
②感染されてしまった方々の速やかの癒しのために。
③医療関係に従事されている方々、並びに食糧など生活に関わる仕事に従事されている方々に主の労いと助けが与えられるように。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 1章6節~12節
유일한 복음
2020년 4월 26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갈라디아서1장 6~12절
서론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이란, 바울이 제1차 선교 여행에서 세운 여러 교회들에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행전 13~14장에 그 모습이 기록되어 있지만, 권말의 지도 7을 보십시오. 【바울의 선교 여행 1】이라고 쓰여 있는 페이지입니다. 바울 일행은 시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구브로(키프로스 섬)을 거쳐 버가에 상륙한 후, 거기서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며 전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 여러 도시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13:48~49을 보면,「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때 바울의 전도는 크게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에,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다른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들이었을까요. 사도행전 15:1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5장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즉, 나중에 유대에서 온 사람들은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이 완성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을 말하자면 「유대주의적인 그리스도인 교사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은, 일단 자신들 나름대로 인정했던 것 같지만, 바울의 지나치게 자유로운 복음에 대해 자신들이 보완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듯이, 사실 그들야말로 「미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6~7절을 보십시오.
(1) 유일무이한 복음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일반적인 바울 서신이라면 서두의 인사말 뒤에 보낸 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 대신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즉, 「여러분께 놀라고 의아해합니다」라는 표현으로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한 바울 자신의 분노와 실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같이 속히 떠나」라는 점이 꼽힐 것입니다. 그 상황은, 마치 구약 시대에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 십계명의 돌판을 받고 돌아오려 할 때, 시내 산 기슭에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길을 속히 떠나 금송아지를 만들어 모세가 없는 곳에서 우상 숭배에 빠졌던 그 상황과 겹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2:7-8을 보십시오.
출애굽기 32장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길을 속히 떠난 것에 놀라고 의아해했던 것처럼, 바울도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렇게나 속히 떠났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2:8의「길」이라는 말에 주목한다면, 바울이 놀란 또 다른 점은, 은혜 가운데로 부르셨던 분, 즉 길이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갑자기 변절하여 배반하고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서 명하신 「길」에서 벗어나 금을 부어 송아지의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 엎드려 절하고 제물을 드렸던 상황과 같았습니다.
갈라디아서로 돌아가서, 바울은 1:6절에서 「다른 복음」이라는 말을 언급했지만, 7절에서 즉시 그것을 수식하며 정정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이라고 해도, 또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주의 교사들이 하고 있는 일은, 본인들은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유일무이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멋대로 왜곡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갈라디아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일무이하다는 점에 대해 더 나아가 논의를 진행해 나갑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1장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며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받을지어다」라는 말은 히브리어의「성절한다(헤렘)」라는 말로, 하나님의 벌에 넘겨진다는 의미이므로 매우 강한 어조입니다. 8절에서는, 이전에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바울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한 복음이, 유일무이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 전해진 복음의 권위 아래 자신도, 천사도 복종하게 하며, 만약 다른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저주를 받으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어떤 자의 자격에 근거하거나 더 위압적인 권위, 즉 산헤드린의 권위나 현대라면, 국가의 권위나 로마 교황의 권위 등에 의해 복음의 내용이 변경되거나 무언가 추가되는 것은 저주받을 행위이며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과거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면서, 제1차 선교 여행 당시 그들이 분명히 받았던 그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흔들리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변함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이며,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유대주의자들에게 비춰지는 바울의 모습
그렇다면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비난한 점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이 사람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지나치게 애쓰는 나머지, 말해야 할 것을 완전히 말하지 않았다는 점, 즉 중요한 유대인의 관습인 율법의 의식에 대해 전하지 않고 복음을 단순화시켜 지나치게 자유를 강조하고 있지 않느냐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복음 전도에서 사소한 일에는 비교적 관대했다는 점도 유명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22에는「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그것은 신자를 늘리기 위해 결과를 중시한 인기몰이이며, 바울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에게 아부하려 한다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1: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기서「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이 다메섹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 즉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체험을 하기 전이라면, 율법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열렬히 박해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기쁨을 얻으려 하거나 권위자들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지려 애쓰는 동기도 분명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의 종, 즉 사도로 세워진 이상, 하나님께보다, 어떻게 사람에게 아첨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죄 많은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에게는, 자신들이 과거에 이토록 많은 죄를 지어왔기에, 바울의 복음보다 유대주의자들이 전하는 복음이 할례도 받아야 하고, 난이도도 높으며, 구원받기 위해서는 훨씬 설득력 있고 합리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이방인에게는 어리석게 들리는 것이요,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불충분해 보이는 복음이라도,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이며, 진리로서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3)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11~12절)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이 결코 인간의 복음이 아니며, 또한 사람으로부터 전해진 전통이나 가르침에 의한 것도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1절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본질에 대해, 그것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생각해도 결코 떠올릴 수 없는 것, 그 본질은 성경적이며 위로부터 주신 영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12절에는 그러한 성질을 지닌 복음이, 바울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해졌는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가르침으로도, 전승을 통해서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성령의 역사로 인해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 대한 구원의 부르심에는 성경을 실제로 읽어보거나, 교회학교에서의 그림동화극이거나, 혹은 영화를 통해서이거나, 사람과의 교제를 통해서이거나, 일상적인 경험을 통한 「외적인 구원의 부르심」과 성령에 의한 「내적인 구원의 부르심」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부르심은 진정한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매일 성경을 읽어도, 아무리 매주 설교를 들어도, 항상 외적인 부르심을 받으면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령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변하지 않으며, 변화하거나 진화하는 것도 아니고 오래된 것이지만, 주 예수와의 교제에 참여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영적인 의미에서 복음은 항상 새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 속에서의 하나님의 선택은 성령의 부르심(보통 「효과적인 부르심(유효소명)」이라 불립니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11:29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라고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선택되었고 누가 선택되지 않았는지, 누가 유효 소명을 받았고 누가 받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구원의 확신」을 통해, 즉 자신과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주관적으로 알게 되며,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걸음을 통해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더욱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특히 1:11절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형제들아」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 함께 동행한 유대인들에게 형제라 부르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바울은 이방인인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것도 지금 바로 복음에서 떠나려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형제들아」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간절한 소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 번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 하셔서 이스라엘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는 데 매우 빠른 자들이지만, 죄가 드러났다면 회개하면 됩니다. 그때 마음의 밭이 갈리고 잡초가 뽑히며, 우리의 믿음의 뿌리는 깊이 내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의 형제자매들이, 이번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을 통해 흔들리게 되겠지만, 이를 통해, 갈라디아의 형제자매들의 믿음이, 더욱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를 바라는 바울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결론
첫째, 복음은 거기에 무엇이 더해져서는 안 되는, 변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결코 우리의 지식이나 생각으로 복음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복음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며 위로부터 주신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의한 구원의 부르심에도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이 있는데, 외적인 부르심에는 효과가 없지만 내적인 성령에 의한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이 실현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오래된 것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복음과 함께 역사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듯 영의 눈이 열리며,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로 구원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감사하며 걸어가도록 합시다.
【序】
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とは、パウロが第一次伝道旅行において建てられた諸教会に対して送られた手紙です。使徒言行録の13~14章にその様子が書かれていますが、巻末の地図7を御覧ください。【パウロの宣教旅行1】と書いてあるページです。パウロの一行は、シリアのアンティオキアから出発して、キプロス島を経て、ベルゲに上陸し、そこから小アジアの町々を訪問しながら伝道したことが分かります。ビシディアのアンティオキア、イコニオン、リストラ、デルベの町々に教会が建てられました。使徒の働き13:48~49を見ますと、“異邦人たちはこれを聞いて喜び、主の言葉を賛美した。そして、永遠の命を得るように定められている人は皆、信仰に入った。こうして、主の言葉はその地方全体に広ま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ので、この時のパウロの伝道は大いに成功したようです。ところがパウロが去った後に、この地域にある人々が入って来て、別の異なる福音を伝えたというのです。彼らは一体どのような人々だったのでしょうか。使徒言行録15:1を御覧ください。
“ある人々がユダヤから下って来て、「モーセの慣習に従って割礼を受けなければ、あなたがたは救われない」と兄弟たちに教えていた。”
つまり後からユダヤからやって来た人々は、割礼を受けてこそ救いが完成すると教えていました。彼らのことを、言ってみれば「ユダヤ主義的なキリスト者の教師」と呼ぶことができるかもしれません。彼らは、パウロが使徒であることは一応、彼らなりに認めていたように思われますが、パウロのあまりにも自由な福音に対して、自分たちが補完してやっているだと考えていたようです。しかしパウロに言わせるなら、実は彼らこそ「惑わす者たち」でありました。ガラテヤ書1:6~7節を御覧ください。
【1】. 唯一無二の福音
“キリストの恵みへ招いてくださった方から、あなたがたがこんなにも早く離れて、ほかの福音に乗り換えようとしていることに、わたしはあきれ果てています。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の福音があるわけではなく、ある人々があなたがたを惑わし、キリストの福音を覆そうとしているにすぎないのです。”
通常のパウロの書簡であれば、冒頭の挨拶の後に送り手に、感謝の辞が述べられるべきですが、このガラテヤ書に関してはそのようには行きません。「あなた方に感謝している」という言葉の代わりに、「あなた方に、あきれ果てている」つまり、「あなた方に驚き怪しんでいます」という表現によって、ガラテヤの人々に対するパウロ自身の憤りと失望を明らかにしています。というのは、「こんなにも早く離れた」という点が挙げられるでしょう。その状況は、あたかも旧約時代にモーセがシナイ山に上り十戒の石板を授与されて戻ろうとしていた時に、シナイ山のふもとに残されたイスラエルの民は、早くも金の子牛を鋳造し、モーセのいないところで偶像崇拝に走っていた、あの状況と重なるからです。出エジプト記32:7~8を御覧ください。
“主はモーセに仰せになった。「直ちに下山せよ。あなたがエジプトの国から導き上った民は堕落し、早くもわたしが命じた道からそれて、若い雄牛の鋳像を造り、それにひれ伏し、いけにえをささげて、『イスラエルよ、これこそあなたをエジプトの国から導き上った神々だ』と叫んでいる。」”
モーセが早くも主が命じた道からそれて、驚き怪しんだように、パウロも、まさか、こんなにも、早くガラテヤの人々がそれて行ったことを驚き怪しんでいるのです。そして、32:8の「道」という言葉に注目するなら、パウロが驚かされたもう一つの点として、恵みの中に招いてくださったお方から、つまり、道であり、真理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から、ガラテヤの人々が突然変節し、背いて離れて行ったことです。まさに旧約のイスラエルの民が、主の命じられた「道」からそれて、金で若い雄牛の鋳像を造り、それにひれ伏し、いけにえをささげたような状況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ガラテヤ書に戻りまして、パウロは、1:6節で“ほかの福音”という言葉を口にしましたが、7節ですかさずそれを修飾し、訂正しています。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の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ユダヤ主義の教師たちがしていることは、本人たちは気づいていなかったかもしれませんが、唯一無二のキリストの福音を自分勝手に歪める行為であり、従って、ガラテヤの人々を惑わしているに過ぎないと言っています。パウロはキリストの福音が唯一無二であることについてさらに、議論を進めて行きます。8~9節を御覧ください。
“しかし、たとえわたしたち自身であれ、天使であれ、わたしたちがあなたがたに告げ知らせたものに反する福音を告げ知らせようとするならば、呪われるがよい。わたしたちが前にも言っておいたように、今また、わたしは繰り返して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受けたものに反する福音を告げ知らせる者がいれば、呪われるがよい。”
「呪われるがよい」という言葉は、ヘブル語の聖絶する(ヘレム)という言葉でありまして、神の罰に引き渡すという意味ですから、大変強い語調であります。8節では、以前、ガラテヤの人々にパウロが聖霊によってガラテヤの人々に告げ知らせた福音が、唯一無二であることを証明するために、この語られた福音の権威の下に、自身でも、天使でも、服従させて、もし、違う福音を告げ知らせようとするなら呪われるがよいと言っています。つまり、ある者の資格に基づいたり、より威圧的な権威によって、即ち、サンヘドリンの権威によったり、現代であれば、国の権威や、ローマ教皇の権威などによって、福音の内容が変更させられたり、何かを加えられすることは呪われる行為であり、決して許されな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9節では、ガラテヤの人々に過去の教えを想起させながら、第一次宣教旅行において、あの時、あなた方が確かに受け取ったあの福音とは、異なる福音を告げ知らせる者が、もし、いるなら、その人は呪われよと言っています。つまり、キリストの福音とは、右にも左にもぶれることがなく、時代によって変化していくものでもなく、それは不動のものであり、神の真理であり、唯一無二のものであ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
【2】. ユダヤ主義者たちから見えるパウロ像
それでは、ユダヤ主義者たちがパウロを非難する点とは何だったのかと言いますと、それは、異邦人に対して福音を宣べ伝えるに当たって、パウロが人々の人気取りに一生懸命になる余りに、言うべきことを完全に語っていない、つまり肝心なユダヤ人の慣習である律法の儀式のことを伝えず、福音を簡素化させて、あまりにも自由を強調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点です。実際、パウロは、福音伝道にあって、細かいことには割と寛容であったということも有名でした。1コリント9:22には、“弱い人に対しては、弱い人のようになりました。弱い人を得るためです。すべての人に対してすべてのものになりました。何とかして何人かでも救うためです。”と書かれています。ですから、ユダヤ主義たちは、パウロの教えに対して、あれは信者を増やすために、結果を重視した、人気取りであって、パウロのことを神のことを思わず、人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と非難していたのでしょう。このことに対してパウロは、1:10において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御覧ください。
“こんなことを言って、今わたしは人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神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あるいは、何とかして人の気に入ろうとあくせく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もし、今なお人の気に入ろうとしているなら、わたしはキリストの僕ではありません。”
ここで、「もし、今なお、人の気に入ろうとしているなら」と言っているのは、パウロがダマスコの途上において復活の主と出会うまでは、目から鱗が落ちる体験をする前であるなら、律法を間違って解釈していたために、神の教会を熱心に迫害し、人々の間で気に入れられようとしたり、権威者たちにも喜んで迎え入れられようと、一生懸命しようとする動機も確かにあった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今では、キリストの僕、つまり、使徒とされた以上、神さまより、どうして人に取り入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かと言っているのです。一方で、罪深いガラテヤの異邦人から見るなら、自分たちが過去にこれほど多くの罪を犯してきたのだから、パウロの福音よりも、ユダヤ主義たちが伝える福音の方が、割礼も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し、難易度が高いし、救われるためには、いかにも説得力があり、合理的に聞こえたのでしょう。このように福音とは、異邦人にとっては愚かに聞こえるものであり、ユダヤ人にとっては躓きとなるものなのです。しかし人間の目にはそのように不充分に見える福音であっても、神の力、神の知恵であり、真理であって、唯一無二なものなのです。
【3】. 外的召命と内的召命(11~12節)
パウロは、ガラテヤの人々に伝えた福音というのは、決して人間の福音ではなく、また、人からの伝承や、教えによって伝えられたものではない、それは啓示によるものだと断言します。11~12節を御覧ください。
“兄弟たち、あなたがたにはっきり言います。わたしが告げ知らせた福音は、人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はこの福音を人から受けたのでも教えられたのでもなく、イエス・キリストの啓示によって知らされたのです。”
11節には、パウロが告げ知らせた福音の性質について、それは人によるものではないと書かれていますが、つまり人間的なものではないという意味です。人が一生懸命考えても決して思いつくようなものではないもの、その性質は、聖書的であり、上から与えられた霊的な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続いて12節にはそれでは、そのような性質を持った福音というものが、パウロに、どのような仕方で伝えられたのか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それは、人の教えからでもなく、伝承によってでもなく、イエス・キリストの啓示を通して与え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従いまして福音とは、人間の知識によっては理解することは出来ませんが、ただ信仰によってのみ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り、さらに言えば聖霊の働きによってはじめて受け入れることが出来るものなのです。聖書についても同じことが言えるでしょう。聖書は決して私たちの知性によっては理解できないし、イエス・キリストを人間的な方法によっては決して信じることは出来ないということです。従って、私たちに対する救いの招きには、聖書を実際に読んでみたり、教会学校での紙芝居であったり、或いは映画を通してであったり、人との交わりを通してであったり、日常の経験を通した、「外的な救いの招き」と、聖霊による「内的な救いの招き」の二種類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外的な招きは、真の救済には導くことがありません。極端な話、いくら毎日聖書を読んでも、いくら毎週説教を聞いても、常に外的な招きに与りながらも、救われない人がいるということです。ただし、聖霊によって招かれた人、聖霊によってキリストとの交わりに入れられた人こそ、神によって選ばれた人なのです。従いまして福音とは不動であり、変わるものでも、進化するものでもなく、古いものでありますが、主イエスとの交わりに入れられるという意味において、霊的な意味において、福音とは常に新しいもの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そして永遠における神の選びは、聖霊の招き(普通「有効召命」と呼ばれますが)によって実現されるのです。ローマ書11:29に“神の賜物と招きとは取り消されないものなのです。”と書かれている通りです。従って救いとは、人間の行いには一切寄らない、全面的に神の恵み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るのです。誰が選ばれていて、誰が選ばれていないのか、誰が有効召命を受けていて、誰が受けていないのかについては、客観的には誰にもわかりませんが、しかし、それは聖霊によって与えられる「救いの確信」を通して、つまり、自分とイエス様との個人的な関係を通して、主観的に分かるようにされ、キリスト者は信仰の歩みを通して、もっと主を愛するようにされて、もっと御言葉を愛するようにされるのです。ところで、パウロは特に1:11節においてガラテヤの人々に対して兄弟たちと呼びかけています。パウロの伝道旅行に共に同行したユダヤ人に対して兄弟と呼ぶのなら分かりますが、パウロは異邦人であるガラテヤの人々に対して、しかも、現在まさに福音から離れようとしている人々に対して信仰によって「兄弟たち」と呼びかけています。ここにパウロの切なる願いを見て取ることができます。旧約の時代イスラエルの民が何度も罪を犯しても、神さまは、めんどりが雛を集めるようにされて、イスラエルに悔い改めて帰って来なさいというメッセージを送り続けました。私たちは罪を犯すことに、大変早い者でありますが、罪が示されたならば、悔い改めれば良いのです。その時、心の畑が耕され、雑草が引き抜かれ、私たちの信仰の根は、深く根を張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ガラテヤの兄弟姉妹に、今回のユダヤ主義者たちの惑わしを通して、揺さぶられることになりますが、それを通して、いよいよ地に深く信仰の根が張るようにとパウロの願いが込められているのです。
【結論】
第一に、福音は、そこに何か付け加えられたりしてはならない、変わらない、唯一無二の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ユダヤ人にとってはつまずきとなり、異邦人にとっては愚かなものに見えますが、決して私たちの知識や考えによって福音を歪めたりしてはなりません。第二に、福音とは、人によるものではなく、聖書的であり、上から与えられた霊的な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福音による救いの招きにも、外的な招きと、内的な招きがあって、外的な招きには効果はありませんが、内的な聖霊による「有効召命」によって、神の選びが実現されるのです。従いまして福音とは旧いものでありますが、同時に新しいもの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るのです。なぜなら、聖霊が福音と共に働く時に、キリストとの交わりに入れられ、目からうろこが取れるように霊の目が開かれ、私たちは神の全き恵みによって、救いに入れられるからです。そのことを感謝しつつ歩ま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