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音のマグナカルタ 복음의 대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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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 1章1節~5節
1:1人々からでもなく、人を通してでもなく、イエス・キリストと、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た父である神とによって使徒とされたパウロ、
1:2ならびに、わたしと一緒にいる兄弟一同から、ガラテヤ地方の諸教会へ。
1:3わたしたちの父である神と、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と平和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1:4キリストは、わたしたちの神であり父である方の御心に従い、この悪の世からわたしたちを救い出そうとして、御自身をわたしたちの罪のために献げてくださったのです。
1:5わたしたちの神であり父である方に世々限りなく栄光が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4/19せんげん台教会祈りの課題
①一日も早く現在の新型コロナ禍の状況が終息するように。
②感染されてしまった方々の速やかの癒しのために。
③医療関係に従事されている方々、並びに食糧など生活に関わる仕事に従事されている方々に主の労いと助けが与えられるように。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 1章1節~5節
복음의 대헌장
2020년 4월 19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갈라디아서1장 1~5절
서론
오늘부터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시작합니다. 이 갈라디아서는「복음 신앙의 대헌장(Magna Carta)」이라 불립니다. 마르틴 루터 역시 이 서신에서 큰 영향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으로, 루터는 「나는 이 서신과 결혼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95개 조항의 논제」를 붙인 것이 계기가 되어 종교 개혁이 시작되지만, 사실 바로 이때 그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갈라디아서에 대한 첫 번째 강의를 마친 직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이 갈라디아서로 인해 교회는 완전히 새롭게 되었고, 교회 성도들의 행보가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가 갈라디아서에 대해 배울 때, 우리 교회에도 천둥이 치는 듯한 충격을 줄 것입니다. 이 갈라디아서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느냐 하면, 첫째로 「바울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는 사도성」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이 가르치는 교리 그 자체, 즉 복음」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① 바울의 가르침을 지탱하는 사도성과 ② 가르쳐진 복음이라는, 두 줄기의 실이 이 서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서신의 서두 인사말에 해당하지만, 이 인사말 또한 실로 깊이 고찰되어 있어 이 두 줄기의 실이 훌륭하게 부각되어 나옵니다. 바울이 왜 이런 서신을 써야 했냐 하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이방인이었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부추기면서 다른, 별개의 복음을 퍼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당황하며 말했습니다. 「새로운 선생님들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하더군요. 바울 선생님과 다른 말씀을 하시는데, 이 새로운 선생님들도 역시 예루살렘에서 파견되었다고 하던데요.」 「아니, 새로운 선생님들은 그 열두 사도와 친족 관계로 매우 친분이 깊다고 하고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바울 선생님은 사실 생전에 주 예수님과 함께 식사도 해본 적 없고, 어쩌면 사도가 아니었다는 소문도 들리는데, 정말 그 가르침으로 괜찮을까요」라며 이러쿵저러쿵 말하자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가르침에서 떠나 곧바로 이 새로운 가르침으로 달려가고 말았습니다.
(주제1) 첫 줄에서 드러나는 분노의 흔적
곧바로 서신을 살펴보겠습니다만, 당시 헬라어로 편지를 쓸 때에는 먼저 발신인을 쓰고, 두 번째로 수신인을 쓰고, 세 번째로 인사말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었습니다. 바울도 일반적인 형식에 따르고 있습니다. 1:1~3절을 보십시오.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 글에서, 보낸 사람은 바울과 바울과 함께 있는 형제들 모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받는 사람은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들이군요. 그런데 발신자인 바울 자신과 수신자에게 붙은 그 수식어를 보면, 양적으로 불균형하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에 대한 수식어는 지나치게 긴 반면, 수신 대상에게는 전혀 수식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전서 1:1~2를 살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여기서는 수신자에 대해「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게」라고 수식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상대방인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감사의 말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정통적인 형태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더라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으며, 로마서, 빌레몬서 등을 보면 수신처를 적은 후에 상대방에 대한 감사의 말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경우 이와 같은 상대를 세워 주는 격려의 말이 없고 지나치게 무뚝뚝한 것이 특징입니다. 즉, 갈라디아서 첫 줄부터 뭔가 불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의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분노의 표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발신자의 수식어에 주목해 봅시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고린도 서신에서도 그러하듯,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때 바울이 자신을 「사도」로 소개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경우 그 부분이 특히 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는 두 개의 부정어 뒤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이라는 긴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는 말은 바울의 사도직이 어떤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도성은 교회나 인간의 권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이라는 표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바울 자신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이방인들에게 보내심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본명이 사울이라 하여 이스라엘의 사울 왕과 같은 이름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바리새파 가말리엘 밑에서 교육을 받고 율법에 매우 정통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사울 왕이 다윗을 추격했던 것처럼, 주님의 백성을 가리지 않고 박해하고 추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사울은 그 자리에서 회심했습니다. 아마도 그때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아,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심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예수님께로부터 파송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랑스러워하던 사울이라는 이름을 고쳐 라틴어인 바울로 바꾸고, 제1차 선교 여행에 파송되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 직접 파송받았음을 거듭 강조하며, 결정적으로 갈라디아서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6:17절을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6장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즉, 「알겠느냐, 나에게는 사도로서의 낙인이 주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졌느니라」라고 입이 닳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제2) 바울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는 사도성
바울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변증을 살펴보면, 「사도」라는 용어를 두고 바울과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 인식의 불일치가 있는 듯합니다. 사도(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는 무슨 의미일까요?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 파송된 자」라는 의미이지만, 본래 「사도」란 사람에 의해 또는 교회 회의에 의해 파송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파송된 자만을 가리킵니다. 이는 좁은 의미의 사도라고도 불리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전권 대사」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바나바나 에바브로디도에게도 사도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지만, 이는 교회로부터 파송된 사도라는 넓은 의미이지, 하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좁은 의미에서의 참 사도이시며, 신실한 하나님의 증인이시며, 아멘이신 분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3:1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3장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 하나님을 증거하셨습니다. 사탄처럼 스스로 마음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는 거짓이 없으셨고, 그분 자신이 로고스이시며 진리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어떤 글도 남기지 않으셨기에, 역사를 통해 자신의 계시가 인류에게 순수하게 전해지도록 조치를 취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택하시고 바울을 택하셔서 그들을 전권 대사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란 교회의 임시적 직분으로 세워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예외적인 봉사를 담당하게 됩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제자를 삼기 위해 파송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도라고 해도 죄가 없고, 오류가 없고,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자신과 같은「참된 증인」은 사도들 자신이라기보다 그들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님이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성령은 사도들의 입에 말할 말을 주셨고, 사도는 성령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과 26절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14장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처럼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변호자 성령을 보내 주셨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새로운 것이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과 인격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전혀 더하지 않으시고, 예수님과 같은 분으로서, 사역하시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직을 세습적으로 계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사도직은 임시적으로 세워진 그들 한 세대에만 한정됩니다. 사도들의 사역으로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은 더 이상 임하지 않으며, 또한 예언자들에게도 주님의 말씀은 더 이상 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들은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의 전권 대사로 파송되었으며, 그들의 증언은 진실하고 바울의 말도 인간에게서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더 나아가 성령을 보내신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께 권위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주제3) 바울의 가르침
다음으로 바울이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3절에서 바울의 편지에 매번 등장하듯「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며 축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와 평강」이란, 4절로 넘어가 보면 바로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인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1:4-5을 보십시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세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즉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란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화가 주어진다는 것이며, 그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시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죄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며,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별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가족에 들어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오로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완성되는 것인지, 이 둘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순전한 복음을 믿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완전히 구원받는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감사가 넘치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며,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살게 되고, 선한 일을 기쁘게 행할 수 있도록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짓 교리를 믿는다면, 즉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만 구원이 완성된다고 믿는다면,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자랑하게 되고, 마음에는 평안이 사라지며, 경쟁심에 사로잡혀 항상 사람들을 비난하게 되고, 시기나 질투나 불평불만이 마음속에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맺는 열매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날 우리에게는,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이 성경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훌륭하기 때문에 거짓 없는 참된 말씀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고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 의해 권위를 부여받은 그 사도성으로 인해 거짓 없는 참된 말씀임을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기억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가르치는 복음에 따르면,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형제자매에 더해져 하나님의 가족에 들어가며 악한 세상에서 구별된 것은 오직 은혜로 인한 것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임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이는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요, 무엇보다도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높임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序論
本日から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に入ります。このガラテヤ書は、「福音信仰のマグナカルタ(大憲章)」と呼ばれています。マルティン・ルターも、この手紙から大変影響を受けた人の一人でありますが、ルターは「私はこの手紙と結婚した」と言い残しています。また、ルターが1517年10月31日にヴィッテンベルク大学の正門に「95箇条の論題」を張り付けたことが契機となって、宗教改革が始まっていきますが、実は、ちょうどこの時彼がヴィッテンベルク大学でガラテヤ書の手紙の第一回の講義を終了した直後のことだったようです。従って、歴史的に見ましても、このガラテヤ書によって教会は全く新しくされ、教会の聖徒たちの歩みが、完全に変えられたと言うことができるかもしれません。そして今日においても、私たちがガラテヤ書を学ぶ時に、私たちの教会にも、雷が落ちるような衝撃を与えてくれることでしょう。このガラテヤ書には、何が書かれているのかと言いますと、第一に「パウロの教えを権威づけている使徒性」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第二に「パウロが教えている教えそのもの、つまり福音」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この、①パウロの教えを支えている使徒性と、②教えられた福音という、二本の糸が、この手紙を最初から最後まで貫通されている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でしょう。本日の聖書箇所は、手紙の冒頭の挨拶にあたりますが、この挨拶文も実によく考え抜かれていて、この二本の糸が見事に浮き彫りにされてきます。パウロが、なぜ、このような手紙を書く必要があったのかと言いますと、パウロの使徒性を疑問視するユダヤ人キリスト者たちがエルサレムからやってきまして、異邦人であったガラテヤの人々に対し、割礼を受けてこそ救いが完成すると、そそのかしながら、他の、別の福音を吹聴していたからです。ガラテヤの人々は戸惑いながら、「何でも、新しい先生たちは、モーセの慣習に従って割礼を受けてこそ、救いが完成すると言うんですよ。パウロ先生とは違うことを言ってますが、この新しい先生たちも、やはりエルサレムから遣わされたと言うんですよ。」「いやー何でも、新しい先生たちは、あの十二使徒と親族の関係で、大変懇意な関係だそうですよ、直接教えを仰いだということですよ。パウロ先生は実際のところ、生前の主イエスと一緒に食事もしたこともないし、もしかしたら使徒ではなかったという噂も聞こえてきますよ、本当にあの教えで、大丈夫なんですかね?」とか何とか言って、ガラテヤの人々は、パウロの教えから離れてしまい、すぐにこの新しい教えに飛びついていってしまいました。
主題1 書き出しの一行目から見られる憤りのしるし
早速手紙を見てまいりますが、当時、ギリシャ語において手紙を書く場合に、最初に差出人を書き、二番目に宛名を書き、三番目に挨拶を書くというのが、一般的な体裁でございました。パウロも通常の形に則っています。1:1~3節を御覧ください。
“人々からでもなく、人を通してでもなく、イエス・キリストと、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た父である神とによって使徒とされたパウロ、ならびに、わたしと一緒にいる兄弟一同から、ガラテヤ地方の諸教会へ。わたしたちの父である神と、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と平和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この文章において、差出人はパウロと、パウロと一緒にいる兄弟一同であることが分かります。宛名はガラテヤ地方の諸教会ということですね。ところで、差出人であるパウロ自身と、宛名にかかっているその修飾語を見ると、量的に、アンバランスであることに気づきます。というのは、パウロ自身に対する修飾語はやたら長いのに、宛先の相手には一切修飾語がありません。例えば、テサロニケの手紙第一の手紙1:1~2を見てみましょう。
“パウロとシルワノとテモテから、父なる神と主イエス・キリストにあるテサロニケの教会へ。恵みと平和があなたがたにありますように。私たちは、祈りの度に、あなたがたを思い起こし、あなたがた一同について、いつも神に感謝しています。”
ここでは、宛名に対し“父である神と主イエス・キリストとに結ばれているテサロニケの教会へ”と修飾されていますし、さらに相手のテサロニケ教会に対する感謝の辞が述べられています。これがオーソドックスな形でしょう。コリントへの手紙を見ましても“コリントにある神の教会へ”という修飾語が付いていますし、ローマ書、フィレモン書などを見ると、宛先をしたためた後に、相手に対する感謝の辞が述べられているのです。ところが、ガラテヤ書の場合こういった、相手を建て上げるような、励ましの言葉はなく、あまりにもぶっきらぼうであることが特徴です。つまり、ガラテヤ書は一行目から何か不穏な雰囲気を感じと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パウロのガラテヤ教会に対する「憤りのしるし」とも言えるでしょう。一方で、差出人の修飾語に目を向けて行きましょう。パウロは自身のことを「使徒」として紹介しているのですが、これは、コリントの手紙でもそうですが、パウロの使徒性を、疑っている人々に手紙を書く場合に、パウロは自分のことを「使徒」として紹介しています。しかし、ガラテヤ書の場合は、その部分が特に長いことが分かるのです。“人々からでもなく、人を通してでもなく”という二つの否定語の後に、“イエス・キリストと、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た父である神とによって使徒とされたパウロ”という長い修飾語が付いていますね。
最初の“人々からでもなく、人を通してでもなく”というのは、パウロの使徒職というのがどのような人からも起因しているのではないと言っているのでしょう。パウロの使徒性は、教会や人間の権威による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続きまして“イエス・キリストと、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た父である神とによって使徒とされたパウロ”というのは、御父が御子イエス様をこの世に遣わされたように、パウロ自身もイエス様から直接、異邦人に対して遣わ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パウロは本名サウロといいまして、イスラエルのサウル王と同じ名前です。彼はベニヤミン族出身でファリサイ派のガマリエルの下で教育を受け、律法に大変精通していました。そしてまさにサウル王がダビデを追跡したのと同じように、主の民をことごとく迫害し追跡し続けていました。ところがある日、ダマスコにおいて復活の主にお会いし、サウロはその場で回心したのです。恐らくその時イエス様から教えを受けて、旧約に書かれているメシアが、まさに十字架に架かられた私(イエス様)であるということを、受け入れたのでしょう。そして異邦人の使徒としてイエス様から派遣されました。その後彼は、自分が誇りに思っていたサウロという名前を改め、ラテン語のパウロという名に変えて、第一次宣教旅行に派遣されガラテヤの諸教会に福音を宣べることになりますが、パウロは自分がイエス様によって直接派遣されたことを念を押すように語り、究めつけとして、ガラテヤ書の一番最後において、再度、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6:17を御覧ください。
“これからは、だれもわたしを煩わさないでほしい。わたしは、イエスの焼き印を身に受けているのです。”
つまり、「わかったか、私には使徒としての焼き印が主イエスから与えられているのだ」というに口酸っぱく言っているのです。
主題2 パウロの教えを権威づけている使徒性とは
パウロの自身の使徒性の弁証を見ると、どうやら「使徒」という言葉をめぐって、パウロとガラテヤの人々の間で、認識の不一致があるようです。使徒(ギリシャ語でアポストロス)とは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使徒とは、「遣わされた者、派遣された者」という意味でありますが、しかし本来「使徒」とは、人によってだったり、教会会議によって派遣された者ではなく、神さまによって直接派遣された者だけを使徒といいます。これは狭い意味における使徒とも呼ばれ、神から遣わされた全権大使という意味です。聖書にはバルナバやエパフロディトにも使徒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ますが、これは、教会から遣わされた使徒という広い意味であって、神から派遣された使徒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して、この狭い意味における、真の使徒であり、信実な神の証人であり、アーメンであるお方は、実は、イエス・キリストしかいないのであります。ヘブル3:1を御覧ください。
“だから、天の召しにあずかっている聖なる兄弟たち、わたしたちが公に言い表している使者(使徒)であり、大祭司であるイエスのことを考えなさい。”
イエス様は御父から遣わされ、父なる神を証しされました。サタンのように自分自身から勝手に語るのではなく、天の父のお考えをそのままお語りになりました。ですから、その語る言葉には偽りはなく、ご自身がロゴスであられ、真理そのものであられました。しかしイエス様は、ご自身によって一切文章を残されなかったので、歴史を通して、ご自身の啓示が人類に純粋に伝えられるようにと、措置を講じ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こで、イエス様は十二使徒を選ばれ、パウロを選ばれ、彼らを全権大使として派遣されたのです。従って使徒たちというのは、教会の臨時的職分として立てられ、教会の設立するために、例外的な奉仕を担当することになります。使徒たちは、復活の主を証しし、イエス様の教えを人々に伝え、弟子にするために派遣されたのです。しかし、いくら使徒だからと言って、罪がなく、誤りがなく、完全であるということではなくて、イエス様が使徒たちをご自身の道具として用いているに過ぎないのであって、従ってイエス様自身のような「真の証人」とは、使徒たち自身というより、彼らと共に働かれる聖霊様であるという方が正しい表現でしょう。聖霊は使徒たちの口に語るべき言葉を与え、使徒は聖霊を通して、初めてキリストの証人となることが出来たのであります。ヨハネ14:16節と26節を御覧ください。
14:16“わたしは父にお願いしよう。父は別の弁護者を遣わして、永遠に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る。”
14:26“しかし、弁護者、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が、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話したことをことごとく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る。”
このようにイエス様と父なる神様は、弁護者聖霊を遣わして下さり、そして聖霊は、神の啓示に対して、何か新しいものや、イエス様の教えとお働きと人格に含まれないことを、一切加えることなく、イエス様のようなお方としてお働きになられ、弟子たちに対し、イエス様の語られた全てのことを思い起こすようにさせるのです。ですから使徒職を世襲的に継承するということはあり得ませんし、使徒職は、臨時的に的に立てられた彼らの一世代に限る訳です。使徒たちの働きにより聖書が完成されたために、主の御言葉はもうこれ以上臨むことはなく、また、預言者たちにも主の御言葉はもうこれ以上臨むことはありません。このような訳で、使徒たちは教会を設立するために、そして聖書を完成させるために、イエス様の全権大使として派遣され、そして、彼らの証しは真実であり、パウロの言葉も人間に権威付けられているのではなく、聖霊によって、さらに言えば聖霊を遣わされたイエス様と、父なる神様に権威付けられているのです。
主題3 パウロの教え
次にパウロの教えている内容について見てまいります。3節において、パウロの手紙に毎度見られるように「恵みと平和」があるようにと祝祷を祈っていますが、そもそも、その「恵みと平和」というのは、4節に進みますと、まさにパウロの教えの中身である、福音によって与えられるということを確認しています。1:4~5を御覧ください。
“キリストは、わたしたちの神であり父である方の御心に従い、この悪の世からわたしたちを救い出そうとして、御自身をわたしたちの罪のために献げてくださったのです。わたしたちの神であり父である方に世々限りなく栄光が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つまりここでパウロの語る福音とは何かと申しますと、父なる神とイエス・キリストから、恵みと平和がもたらされるということであり、その根拠は、キリストが父なる神様のご計画に従って、十字架によってご自身を捧げられ、私たちの代わりに死なれ、それによって私たちの罪を贖い、罪の支配から解放してくださり、この世から取り分けてくださり、聖なる民として神の家族に入れてくださったからであります。この福音を信じるのなら、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す。ところで、専らイエス・キリストに贖いの御業によって、専ら恵みによって救われるのか、或いは、ユダヤ人キリスト者が言うように、割礼を受けてこそ救いが完成されるのか、この二つの間には大変大きな違いがあるのです。もし私たちが純然たる福音を信じ、ただ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によってのみ、完全に救われると信じるなら、私たちは、日々の歩みの中で、感謝が満ち溢れ、御言葉を愛するようになり、日々神の栄光を褒め称え、喜びと平安の中を過ごさせていただき、善い業を喜んです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変えられるでしょう。ところが、もし私たちが、偽りの教えを信じるなら、つまり、律法を全うしてこそ、救いが完成されると信じるなら、日々の歩みにおいて、自分を誇り、心には平安がなくなり、競争心に駆られ、常に人々を非難し、妬みや嫉妬や不平不満が心の中からあふれてく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何を信じるのかによって結ばれる実が全く異なってくるのです。
結論
今日、私たちには、使徒パウロを通して、神の御言葉としての聖書が与えられています。この聖書の御言葉は、使徒パウロが立派だからというので、偽りのない真実な御言葉なのではなく、聖霊によって権威づけられ、イエス様と御父によって権威づけられている、その使徒性によって、偽りのない真実な御言葉であるということを私たちは第一に覚えたいと思います。そして、パウロの教える福音によれば、私たちが罪赦され、キリストを頭とする兄弟姉妹に加えられ、神の家族に入れられ、悪の世から取り分けられたのは、ただ恵みによるのであり、ただイエス・キリストの功によるのであり、ただ信仰による救いであることを覚えたいと思います。それは誰も誇ることがないためであり、そして何よりも、父なる神の栄光が永遠に崇められるため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