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国で一番偉い者 천국에서 제일 큰 자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8章1節~14節
18:1そのとき、弟子たちがイエスのところに来て、「いったいだれが、天の国でいちばん偉いのでしょうか」と言った。
18:2そこで、イエスは一人の子供を呼び寄せ、彼らの中に立たせて、
18:3言われ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心を入れ替えて子供のようにならなければ、決して天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
18:4自分を低くして、この子供のようになる人が、天の国でいちばん偉いのだ。
18:5わたしの名のためにこのような一人の子供を受け入れる者は、わたしを受け入れるのである。」
18:6「しかし、わたしを信じるこれらの小さな者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者は、大きな石臼を首に懸けられて、深い海に沈められる方がましである。
18:7世は人をつまずかせるから不幸だ。つまずきは避けられない。だが、つまずきをもたらす者は不幸である。
18:8もし片方の手か足があなたをつまずかせるなら、それを切って捨ててしまいなさい。両手両足がそろったまま永遠の火に投げ込まれるよりは、片手片足になっても命にあずかる方がよい。
18:9もし片方の目があなたをつまずかせるなら、えぐり出して捨ててしまいなさい。両方の目がそろったまま火の地獄に投げ込まれるよりは、一つの目になっても命にあずかる方がよい。」
18:10「これらの小さな者を一人でも軽んじ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言っておくが、彼らの天使たちは天でいつもわたしの天の父の御顔を仰いでいるのである。
18:12あなたがたはどう思うか。ある人が羊を百匹持っていて、その一匹が迷い出たとすれば、九十九匹を山に残しておいて、迷い出た一匹を捜しに行かないだろうか。
18:13はっきり言っておくが、もし、それを見つけたら、迷わずにいた九十九匹より、その一匹のことを喜ぶだろう。
18:14そのように、これらの小さな者が一人でも滅びることは、あなたがたの天の父の御心ではない。」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8章1節~14節
천국에서 제일 큰 자
2018년 7월 15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18장 1~14절
교회에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질 때,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해지듯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안에 작은 자들이 있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오늘 설교의 내용은 교회 생활에서 위대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 생활에서 작은 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방금 읽은 18장 시작 부분에「그 때에」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7장에서 베드로가 낚시를 한, 물고기 입에서 돈 한 세겔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전세로 바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의 일로 생각됩니다. 그때 제자들이 모여서 무언가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큰가」라는 서열 다툼의 논쟁이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 제자들의 서열 다툼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예언이 끝난 뒤에, 반드시 시작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7~21에서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예언 이후에 서열 다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후에 순위 다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의미하는 그 중요한 내용보다, 포스트 예수 문제, 즉 곧 세워질 메시아 왕국에서의 자신들의 지위 문제가 그들에게는 더 시급하고 중요한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예수님과 몇 년 동안 함께 생활해 왔고, 몇 주 후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텐데, 제자들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였다는 사실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설명하기보다, 실제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제자들 사이에 세우셨습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낫다, 이 어린 아이를 보라 하신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리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이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적어도 이 말씀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제자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첫째, 제자들의 질문 전제부터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것이 대전제이며, 그 위에 상으로 금메달인지, 은메달인지, 혹은 입상인지, 우월감을 가지면서 그 정도를 교만하게도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고쳐먹고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조차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누가 위대한가 하는 논쟁 자체가 부정되었습니다. 오히려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예수님께서 구속하신 영혼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눈앞의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자신보다 위대한 자인 양, 받아들이라고 권고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야망으로 가득 찬 논쟁이, 예수님에 의해 뒤바뀌어 완전히 무력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근대와 달리 당시 어린이나 아이들은 결코 사랑스러운 천사처럼 우상화되지 않았습니다. 즉,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나 솔직함 등을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어른의 시각에서 어린 아이는 오히려 시시한 바보의 비유로 자주 사용되었고, 가치 없는 존재, 하찮은 존재, 10살에 율법을 배우기 시작하지만 율법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죄 많은 존재라는 의미였습니다. 또한 사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낮게 낮추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겸손하기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낮은 존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우리가 흔히 듣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도덕적 겸손의 권고가 아닙니다. 즉,「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든가, 「능한 매는 발톱을 숨긴다」는 식의 권면도 아니고, 혹은 누구보다 온유하고, 누구보다 온건하며, 누구보다 낮고 겸손한 인격자야말로 천국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은, 「너희 스스로가 하찮은 어린 아이임을 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죄 많고 부끄러운 존재인지 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그 사실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됩니다. 믿음 생활 가운데에서 병과 시련과 어려움을 겪고, 실패와 상처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음을 깨닫고,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가난함을 깨닫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함」이란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믿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씩 자신이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 작고 부끄러운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눈이 뜨여져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란 큰 자,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울은 바울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바울이라는 이름은 헬라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작은 자임을 통해,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공감과 깊은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작은 자, 사회적 약자들에게 특히 강한 관심을 기울이셨으며, 그들에게 특별한 집착과 감정을 보이셨습니다. 이를 잘 알 수 있는 것이 12~13절의 비유입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주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 비유에서는 길을 잃은 한 마리를 찾으러 가기 위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둡니다. 목자가 떠나 있는 동안, 남겨져 방치된, 아흔아홉 마리의 안전은, 목자의 관심 밖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길을 잃은 자, 작은 자에게 그토록 강한 관심을 보이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모욕받으며, 하찮은 작은 죄인으로 오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즉,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에게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 물 한 잔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평소 교회에서 하는 봉사가 있지요. 형제자매를 섬기는데, 특히 구도자나 신앙의 초보자를 섬기기도 합니다. 사실, 작은 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봉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도 이천 년 전,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죄인으로서, 작은 자로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셨다면, 바리새인으로서 오셨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면 사두개인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이 작은 자들에 대한 배려로서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첫째, 그들을 넘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꼽힙니다. 성경에서「걸림돌」이라는 말은 스캔들, 즉 「함정」이라는 영어의 어원에 해당하지만, 사실은 매우 무거운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으로 내몰거나, 믿음을 완전히 잃게 한다는 의미로, 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걸려 넘어져도(믿음이 흔들려도) 다시 일어나겠지」라는 식의 미지근한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에서 이런 걸림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도 걸림돌이 생기고,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이 실제로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걸림돌을 만드는 사람의 책임에 대해서는 분명히 하십니다. 어차피 돌멩이 투성이 길이니, 방해되는 돌을 마구 던져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성을 다해 걸림돌을 제거해야 합니다. 걸림돌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버리는 사람에게는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연자 맷돌」이란 무엇이냐 하면, 탈곡하기 위해 나귀에게 돌리게 하는 도넛 모양의 큰 돌인데, 그것을 목에 걸고 갈릴리 바다에 빠지라는 것입니다. 매우 과격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걸림돌을 주는 자는, 그만큼 무서운 중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타인을 넘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넘어지게 하는 일에 대해서도 엄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작은 자들」에서 벗어난 내용이지만, 8-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우너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은, 산상수훈의 내용인, 마5:29~30절에도 등장합니다. 만약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실천한다면, 교회는 한 손, 한 발, 한 눈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므로 과장된 표현이지만, 어쨌든 타인이든 자신이든, 믿음에서 걸려 넘어뜨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강조하고, 절대로 걸려 넘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작은 자가 배려받아야 하는 이유 두 번째로,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가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즉, 반대로 말하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어른이든 아이든 각자 이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천사들이, 작은 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관심을 가지며 존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호소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시되기 쉬운, 작은 자와 사회적 약자가 가장 소중히 여겨진다는 것이 교회의 특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약자를 존중한다는 것은 계산에 맞지 않고,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정치에서도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다수결로 결정하고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약자를 소중히 여기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세상의 사상과는 동떨어지는 경우가 자주 일어납니다. 그것은 교회에 근본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정치에서도 비효율적이라 할지라도,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도록 기도하며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작은 자가 무시당하고,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만을 추구한다면, 그곳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게 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문제에서 누가 피해자인지, 누가 억압받고 있는 사람인지 정확히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 억압받는 사람, 가장 약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제가 이전에 있던 교회도 마찬가지였는데, 목사의 성희롱 사건 등이 발생했을 때, 억압받는 사람이나 비명을 지르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아, 가해자가 마치 피해자처럼 대우받고, 명예훼손, 누명, 선교에서의 박해라고 말하면서, 문제 목사가 심판받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죄를 저지른 사람은 회개하지 않고, 거짓이 통용되며, 피해자가 무시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에게 특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작은 자와 약한 자, 어린 아이들을 보내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작은 자들을 돌아보고,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작은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서 진정한 사랑이 넘쳐나도록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教会に子供の泣き声や笑い声が響くときに、大変雰囲気が和むように、神の国の共同体の中に小さき者がいることは大変祝福であります。本日の説教の内容は、教会生活における偉い人に関するお話ではなく、教会生活における小さき者に関するお話しです。先ほどお読みした18章の冒頭で「そのとき」とありますけれども、実際は、17章でペトロが釣りをして魚の口から1シェケル銀貨を見つけ、それを神殿税として納めてから、しばらく時間が経過したある日のこと、と考えられます。そのとき、弟子たちが集まって何か議論をしていました。「いったいだれが、天の国でいちばん偉いのでしょうか」という順位争いの議論です。聖書をよく見ますと、この弟子たちの順位争いは、イエス様の死と復活の予告の後に必ず始まっていると解釈することもできます。例えば20:17~21においてもイエス様の死と復活の予告の後に順位争いが繰り広げられています。最後の晩餐の席でも、ルカによる福音によるとイエス様が死と復活の予告をした後に順位争いが繰り広げられています。イエス様の受難と復活が意味する、その大切な内容よりも、ポスト・イエスの問題、つまり間もなく樹立されるであろうメシア王国における自分たちの身分の問題が、彼らにとってもっと緊急で重要な内容だったのです。それにしてもこれまでイエス様と何年も一緒に生活してきて、あと数週間後にはエルサレムで十字架に架けられるというのに、弟子たちのみ言葉に対する理解とはこの程度のものだったということには驚かされます。イエス様は、言葉によって説明するよりも実際に一人の子供を呼び寄せ、弟子たちの間に立たせました。百聞は一見に如かず、この子をご覧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3~4節をご覧ください。
“はっきり言っておく。心を入れ替えて子供のようにならなければ、決して天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自分を低くして、この子供のようになる人が、天の国でいちばん偉いのだ。”
これは一体、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少なくともこのみ言葉は次の二つの点において、弟子たちに大変大きな衝撃を与えました。まず、第一に、弟子たちの質問の前提から大きく揺さぶられています。弟子たちは、既に天国に入っていることが大前提であり、その上で報いとして金メダルなのか、銀メダルなのか、或いは入賞なのか、優越感をもちつつ、その辺りを、高慢にも知りたがっていたのですが、イエス様は、心を入れ替えて、向きを変えなければ、天国に入ることさえできないと言われました。第二に、誰が偉いかの議論自体が否定されています。むしろ、子供から大人まで、イエス様が贖われた魂を大切にすべきであり、目の前の子供に至るまで、自分より偉い者であるかのように受け入れなさいと勧めているのです。弟子たちの野望に満ちた議論が、イエス様によってすり替えられ、完全に骨抜きにされてしまいました。それでは、イエスさまの言葉をもう少し深く考えてみましょう。近代とは違い、当時、幼子とか、子供たちと言えば、決してかわいい天使のように偶像視されてはいませんでした。つまり、幼子の無邪気さとか、素直さなどを美徳としてみな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のです。大人から見るとき、幼子といえば、むしろつまらない愚か者の比喩としてよく用いられ、価値のない者、取るに足らない者、10歳で律法を学び始めるのですが、律法もまだよくわかっていない罪深い存在だという意味です。また、事実、子供は自分を、実際よりも低く遜ることはありません。子供は謙遜であるというより、子供は自分がいかに低いかを知っ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ここでイエス様が言わんとしていることは、私たちがよく聞く、立派な人になるための道徳的な謙遜の勧め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成熟するほど、頭を垂れる稲穂」ですとか、「能ある鷹は爪隠す」というような勧めではなく、或いは誰よりも柔和で、誰よりも穏健で、誰よりも低く遜った人格者こそ天国で一番偉いのだということでも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うではなく、イエス様はあなた方自身、ちっぽけな子供であることを知りなさ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神の御前に自分がどれだけくだらない存在であるのか、取るに足らなく、罪深く、恥ずかしい存在であるのかを知りなさ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私たちは恵みによってそのことに少しずつ目が開かれます。信仰生活の中で、病や、試練や困難に遭い、失敗や、傷を通して、自分が神様に受け入れられていること、そして神様がいなければ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悟り、自らの貧しさを悟り、祈りの中で神に完全に降伏するのです。ですから、「謙遜さ」というのは、道徳的勧めではなく、信仰生活の中で神の恵みにより、少しずつ自分が子供に過ぎないこと、小さく、恥ずかしい存在に過ぎないことに目が開かれ、謙遜にさせられ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キリストの弟子たちとは、大きな者、ひとかどの人物ではなく、小さき者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余談ですが、使徒言行録を見ると、ローマの市民権をもっていたサウロはパウロに名前を変えていますが、パウロという名前はギリシャ語ではなく、ラテン語の名前で「小さき者」という意味です。自ら小さき者ということによって、ローマにいる信徒たちに共感や深い愛情を示しているのです。イエス様も、小さき者、社会的弱者に対し、特に強い関心を払われ、彼らに、特別強いこだわりと感情を示されています。それがよくわかるのが、12~13節のたとえです。12~13節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はどう思うか。ある人が羊を百匹持っていて、その一匹が迷い出たとすれば、九十九匹を山に残しておいて、迷い出た一匹を捜しに行かないだろうか。はっきり言っておくが、もし、それを見つけたら、迷わずにいた九十九匹より、その一匹のことを喜ぶだろう。”
この譬えでは、迷い出た一匹を捜しに行くために、残りの99匹を山においていきます。羊飼いが離れた間、残され放置された99匹の安全については、羊飼いの関心の外にあります。イエス様はなぜ、迷い出た者、小さき者にそのような強い関心を示され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主ご自身、この世において、人々から蔑まれ、辱められ、取るに足らない小さな罪びととして来られたからだと思われます。5節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の名のためにこのような一人の子供を受け入れる者は、わたしを受け入れるのである。”
つまり、小さき者を受け入れることは、イエス様を受け入れることだと言うのです。小さき者に水一杯でも飲ませることは、イエス様に水一杯を飲ませることなのです。このことを現在の私たちに適用するなら、普段教会でしている奉仕がありますね。兄弟姉妹に仕えているのですが、特に求道者ですとか、信仰の初心者に仕えたりします。実は、小さきものを暖かく受け入れる奉仕とは、イエス様を受け入れることなのです。主イエスも二千年前、人々から蔑まれるような、罪びととして、小さき者として世に来られたからです。もし、イエス様がファリサイ人を救うために世に来られたのでしたら、ファリサイ人として来られたでしょう。サドカイ人を救うために来られたのでしたら、サドカイ人として来られたでしょう。しかしイエス様は小さき者を救うために、小さきものとして来られたのです。この、小さき者への配慮として、最重要事項として第一に、躓かせてはならないことが挙げられます。聖書で「躓き」という言葉は、スキャンダル、つまり罠という英語の語源にあたりますが、実は大変重たい意味を持っています。それは、永遠の滅びに追いやったり、信仰を完全に失わせるという意味で、私たちが日ごろ使っているような、「躓いても(信仰がダウンしても)再び立ち上がって来るだろう」というような生ぬるい意味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様は現実において、この躓きが起こることは仕方のないことだと言われます。教会においてもつまずきが起こり、信仰から離れる人が実際い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だからと言って、躓きをきたらせる人の責任については、はっきりさせるのです。どうせ、石ころだらけの道だから、邪魔な石をどんどん放り込んでも構わない、ということにはなりません。むしろ精を出して、つまずきの石を取り除くべきなのです。つまずきの石を平気で投げ込むような人には、いっそ“大きな石臼を首に懸けられて、深い海に沈められる方がましである。”とイエス様は言われます。ここで、大きな石臼とはどういうものかというと、脱穀するために、ロバに挽かせるドーナツ型の大きな石ですが、それを首にかけてガリラヤ湖に沈めなさいと言うのです。大変過激なことを言われました。つまずきをもたらせる者は、それほど恐ろしい重罪人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さらには、他人を躓かせるだけではなく、自分自身をも躓かせることに対しても、厳しく警告しています。「小さき者」から脱線する内容ですが、8-9節のみ言葉をご覧ください。
“もし片方の手か足があなたをつまずかせるなら、それを切って捨ててしまいなさい。両手両足がそろったまま永遠の火に投げ込まれるよりは、片手片足になっても命にあずかる方がよい。もし片方の目があなたをつまずかせるなら、えぐり出して捨ててしまいなさい。両方の目がそろったまま火の地獄に投げ込まれるよりは、一つの目になっても命にあずかる方がよい。”
このみ言葉は、山上の垂訓の5:29~30にも出てきました。もし、このみ言葉を文字通り受け取って実行するのなら、教会には片手、片足、片目の人だらけになってしまいますので、誇張された言い方なのですけれど、とにかく、他人であれ、自分自身であれ、信仰から躓かせるということが、どれほど恐ろしいことなのかを強調し、決して躓かせてはならないと警告しているのです。小さき者が配慮されるべき理由として第二に、彼らがどれほ大切な存在であるのかが10節に書かれています。
“これらの小さな者を一人でも軽んじ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言っておくが、彼らの天使たちは天でいつもわたしの天の父の御顔を仰いでいるのである。”
つまり逆を返せば、共同体のすべての構成員は、大人から子供まで一人ひとりこの上なく大切な価値を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ことを強調するために天にいる彼らの天使について話しているのです。万が一、神の御顔を仰いでいる天使たちが小さきものに関心を持っているのなら、キリスト者同士である私たちが、お互いのために配慮し、関心を持ち、尊敬することがどれほど重要なことだろうかと訴えているのです。世では無視されやすい小さき者、社会的弱者が最も大切にされる、というのが教会の特徴であることが分かります。弱者を尊ぶということは、計算には合わない、大変非効率なことだと言えるでしょう。教会政治においても、この世と同じように多数決で決めて大勢の人の益になることを実行するべきだと思う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聖書ではそのように言わないのです。弱者を大切にしなさい。弱者の声に耳を傾けなさいと教えるのです。このように神の国の考え方は世の考え方とは、かけ離れているということがしばしば起こるのです。それは、教会には根底に愛があるからです。教会政治においてもたとえ非効率であっても、ひたすら父なる神の愛が実現されるように祈りつつ進められるべきです。そして、もし小さき者がないがしろにされ、最小の労力で最大の効果だけを追求しようとするのなら、そこはもはや教会ではなくなるのです。例えば、教会でもし何か問題が起こった場合、私たちが第一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問題において誰が被害者なのか、誰が抑圧されている者なのかを正しく見極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して被害者、抑圧されている者、最も弱い者の声に耳を傾け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私が前にいた教会もそうでしたが、牧師のセクハラ事件などが起こったときに、抑圧されている者、悲鳴を上げている者に耳を貸さないで、加害者があたかも被害者のように扱われてしまい、名誉棄損だ、濡れ衣だ、宣教における迫害だと言いながら問題牧師が裁かれないという事態が起こりました。結局、罪を犯した者は悔い改めをせず、嘘がまかり通り、被害者がないがしろにされるのです。しかし教会ではそのようにしてはいけません。神様は、小さき者にひときわ大きな関心を抱いていることを忘れてはなりません。そして私たちの教会に小さき者、弱い者、子供たちを送ってくださるのは神様の祝福でもあり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常に、小さきものを顧みて、自分自身の言葉や行動によって、小さき者を躓かせていることはないだろうか考えるべきです。そのようにして教会から、真の愛があふれていくように祈ってまいり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