隅のかしら石になったキリスト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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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1章33節~46節
21:33「もう一つのたとえを聞きなさい。ある家の主人がぶどう園を作り、垣を巡らし、その中に搾り場を掘り、見張りのやぐらを立て、これを農夫たちに貸して旅に出た。
21:34さて、収穫の時が近づいたとき、収穫を受け取るために、僕たちを農夫たちのところへ送った。
21:35だが、農夫たちはこの僕たちを捕まえ、一人を袋だたきにし、一人を殺し、一人を石で打ち殺した。
21:36また、他の僕たちを前よりも多く送ったが、農夫たちは同じ目に遭わせた。
21:37そこで最後に、『わたしの息子なら敬ってくれるだろう』と言って、主人は自分の息子を送った。
21:38農夫たちは、その息子を見て話し合った。『これは跡取りだ。さあ、殺して、彼の相続財産を我々のものにしよう。』
21:39そして、息子を捕まえ、ぶどう園の外にほうり出して殺してしまった。
21:40さて、ぶどう園の主人が帰って来たら、この農夫たちをどうするだろうか。」
21:41彼らは言った。「その悪人どもをひどい目に遭わせて殺し、ぶどう園は、季節ごとに収穫を納めるほかの農夫たちに貸すにちがいない。」
21:42イエスは言われた。「聖書にこう書いてあるのを、まだ読んだことがないのか。『家を建てる者の捨てた石、/これが隅の親石となった。これは、主がなさったことで、/わたしたちの目には不思議に見える。』
21:43だから、言っておくが、神の国はあなたたちから取り上げられ、それにふさわしい実を結ぶ民族に与えられる。
21:44この石の上に落ちる者は打ち砕かれ、この石がだれかの上に落ちれば、その人は押しつぶされてしまう。」
21:45祭司長たちや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このたとえを聞いて、イエスが自分たちのことを言っておられると気づき、
21:46イエスを捕らえようとしたが、群衆を恐れた。群衆はイエスを預言者だと思っていたからであ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1章33節~46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그리스도
2018년 12월2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1장 33절~46절
33절 시작 부분에「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라고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와의 논쟁에서 두 번째 주제로 들어갑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평소처럼 비유를 사용하시는데, 오늘의 비유 안에는,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내용이 두 가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지난주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질문했는데, 그 답을 오늘의 비유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그 권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권위라는 것입니다. 비유이긴 하지만,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직접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신분을, 공개적으로 증언하신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이틀 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붙잡혀 한밤중에 산헤드린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대제사장으로부터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26:63)」라고 추궁을 받으시게 됩니다. 비유를 통해 두 번째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가 빼앗겨져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 즉 「교회」로 옮겨진다는 충격적인 예언입니다. 참고로 이 예언의 성취로 우리 교회 존재 자체가 꼽히지만, 결정적인 사건으로는 AD 70년 「유대 전쟁」 당시 예루살렘 함락이 있습니다. 이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대부분이 살해당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눈에 보이는 사건은, 바로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라는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예수님의 비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등장인물로는 ① 집 주인과, ② 포도원 소작인인 농부들, ③ 주인에게서 파견된 종들, ④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들이 파견됩니다. 집 주인은 아버지 하나님이시며, 포도원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농부들은 제사장과 장로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자들이었습니다. 종들은 선지자들을,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집 주인은「산울타리로 두루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포도원을 꼼꼼히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포도가 잘 자라고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만든 것일 것입니다. 이를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한다면, 그들의 믿음이 지탱되고 열매를 맺도록 율법의 가르침으로 믿음을 보강하고, 또는 제사와 기타 의식 같은 보조 수단을 통해 질서를 부여하며, 철저히 준비했다는 뜻입니다. 주인은 아름다운 포도원을 꿈꾸었습니다. 그 위에 제사장들을 임명하여 그들을 「관리인」, 「소작농」으로 세웠습니다. 만일 이 관리인이 게을러지거나 맡은 임무를 소홀히 해도, 특히 종으로서 선지자를 보내어 이 선지자가 포도원에서 잡초를 뽑거나 가지치기 작업을 함으로써 관리인인 제사장의 약점을 보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34-38절을 보십시오.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을 잡아, 한 사람은 매질하고, 한 사람은 죽이고, 한 사람은 돌로 쳐 죽였습니다. 또 다른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셨으나 그들은 똑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여기에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내심과 자비로움이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동시에 이 농부들의 끔찍한 죄목을, 거울에 비추듯 그들 자신에게 보여줌으로써, 하나님께 끝까지 반역하려는 그들의 악마적이고 광기 어린 모습을 입증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의 아들이 보내졌을 때, 농부들은「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아들을 죽이고 그 아들을 대신하여 포도원을 빼앗아 포도원의 실질적인 소유자가 되려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이 비유에서 모든 것이 실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마도 자신의 아들이라면 조금 더 존중해 주지 않을까 추측하셨지만, 그 추측이 빗나갔다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비유 속에서 인간적인 생각을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명심해 주십시오. 또한 농부들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실제로 아직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확신이 없었고,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맡기셨다는 것 등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실제 상황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며 비유의 상대적 관계가 깨져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는, 마귀가 제사장들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즉 더 깊은 영적 의미에서 이 비유는 오히려 실상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39절을 보십시오.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먼저 내쫓기고 다음에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쫓겨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극악무도한 죄인의 사형은 진영 밖, 즉 골고다(직역하면 해골의 언덕, 두개골의 언덕)에서 집행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이 당연하다는 것을 스스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시편 118편 22-2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는데,「아들」이라는 말과 「돌」이라는 말의 말장난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십니다. 「아들」은 히브리어로 벤(ben)인데, 여담이지만 「벤허」라는 영화가 있지요. 그건 「허Hur(히브리어의 영어발음)」, 즉 「훌Hur(히브리어 발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유다」라고 자칭했으니, 「훌의 아들, 유다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벤」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돌」은 히브리어로「에벤」입니다. 첫 비유에서는 아들 「벤」이 버려지는 이야기지만, 다음 비유는 「돌」인 「에벤」이 버려지는 이야기입니다. 아들도 돌도, 벤도 에벤도 모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시편 118편이 어떤 상황에서 노래되었는지 말하자면, 본래 적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을 묘사한 시입니다. 즉, 은혜로, 다윗의 왕권이 영원히 지속되며, 만일 그것이 무너질 때가 있다 해도, 신비로운 하나님의 개입으로 다시 이전 상태로 회복된다는 기쁨의 시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이라는, 인물을 그림자로 삼아 어떤 나라를 세우려 하시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즉 참된 메시아를 통해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진 나라이며, 그 나라는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하고 불변하는 나라입니다. 이 「돌」은, 믿는 자들에게는 모퉁이의 머릿돌이요, 없어서는 안 될 기초석, 주춧돌이 됩니다. 건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튼튼한 기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기초 위에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져 갑니다. 이 모퉁이의 머릿돌은 사람이 신중히 골라낸 돌이 아니라, 감춰진 하나님의 계획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드러난다는 의미입니다. 즉, 건물의 책임을 맡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와 적대감 속에서도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 「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걸림돌」, 「무서운 심판의 돌」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2:6-8을 보십시오.
베드로전서 2장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에 자부하며,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마치 상속권처럼 여겨, 그 위에 안주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들의 특권을 제거하시고 이를, 다른 이에게 양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경건 속에 굳건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자연적으로 자란 가지를 가차 없이 제거하신 것처럼, 아마도 접붙여진 가지에게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것은, 말씀을 들은 백성이 그것을 그대로 행하지 않고 그냥 방치하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열매를 맺게 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황하며 「성도의 견인 교리는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항의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도의 견인 교리에 주목하기보다, 오히려 불경건한 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폐지되거나 참된 믿음이 파괴되는 일이 일어나도 그러한 음모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손과 발이 머리를 향해 반역하고, 소작인이 지주를 향해 반역하며, 신하들이 그들의 왕을 향해 반역하고, 건축자들이 건물의 기초를 버리는 이 세상은, 정말 광기에 휩싸인 세상이며 말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척하려는 사람들의 계략과 야망이, 아무리 강력하고 격렬하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시고 자신의 승리를 증거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버린 돌이, 오히려 그들 자신을 쳐 부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예상치 못한 결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를 격렬히 대적하고, 죄에서 완고하게 떠나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행한 공격으로 인해 오히려 스스로 심판을 불러오고 파멸을 초래할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침내 자신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깨닫고, 살의를 품고 예수님을 잡으려 했지만, 군중을 두려워하여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보호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적대자가 격렬하더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습니다. 그때까지 「이방인의 빛」으로서 이스라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지위는, 우리 교회로 대체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모퉁이의 머릿돌에 단단히 고정된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서로 섬기고 서로 용서하며, 갈라디아서 5:22에 기록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실천해 나갑시다.
33節冒頭には、「もう一つのたとえを聞きなさい」とありますように、キリストとの論争において、二番目のテーマに入って行きます。今回も、イエスさまはいつものように比喩を用いられますが、本日の比喩の中には神学的にも大変重要な内容が二つ含まれています。第一点目として、先週、祭司長や長老たちから「何の権威によって、このようなことをしているのか」と質問されましたが、その答えを本日のたとえの中から見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つまりその権威とは「神の独り子」としての権威であるこということです。譬えではありますが、イエスさまの口から初めて、直接「神の子」としてのご自身の身分を公に証しされた場面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この言葉によって、二日後に、祭司長や律法学者に捉えられ、夜中にサンヘドリンの裁判を受けるのですが、その席で大祭司から「生ける神に誓って我々に答えよ。お前は神の子、メシアなのか。」と(26:63)、問い詰められることになるのです。たとえを通して第二点目として重大なことが明かされるのですが、それはイスラエルから、神の国は奪い取られ、新たに、神の国の実を結ぶ民族、つまり「教会」に移転されるという衝撃的な預言です。因みに、この預言の成就として、私たち教会の存在自体が挙げられますが、決定的な事件としては、AD70年の「ユダヤ戦争」におけるエルサレム陥落が挙げられます。この戦争によってエルサレムの神殿はローマ軍に完膚なきまでに滅ぼされ、ユダヤの宗教指導者たちである祭司長たちファリサイ人のほとんどが殺されるという惨劇が起こりました。この目に見える出来事は、まさに、頑ななイスラエルに下った神の裁きであり「神の国が奪い取られる」という預言の成就と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それでは早速、イエスさまの譬えを具体的に見て参りましょう。登場人物として、①家の主人と、②ぶどう園の小作人である農夫たちと、③主人から派遣される僕たち、④そして最後に息子が派遣されます。家の主人とは、父なる神であり、ぶどう園とは神の民です。農夫たちとは、祭司や長老たち、つまりユダヤの宗教指導者を意味します。彼らは神の民である教会を建て上げるために神から任命されたものでした。僕たちとは預言者たちであり、息子とはイエスさまです。33節をご覧ください。
“もう一つのたとえを聞きなさい。ある家の主人がぶどう園を作り、垣を巡らし、その中に搾り場を掘り、見張りのやぐらを立て、これを農夫たちに貸して旅に出た。”
家の主人は、“垣を巡らし、その中に搾り場を掘り、見張りのやぐらを立てて”、念入りにぶどう園を造っています。これらのことは全てぶどうが良く成長し、よい実が結ばれるように願いを込めながら、用意周到に造っているのでしょう。これを当時のイスラエルの民に当てはめるなら、彼らの信仰が支えられ、実を結ぶように、律法の教えによって信仰を補強され、或いは、祭事とその他の儀式のような補助手段を通して秩序を与え、用意周到に整えたということです。主人は美しいぶどう園を思い描いていました。その上で、祭司を任命し、彼らを「管理人」、「小作農」としてお立てになりました。万が一この管理人が怠惰になったり、任された任務をおろそかにしたりしても、特に僕として、預言者が遣わされて、この預言者がぶどう園から雑草を抜いたり、選定作業をすることによって管理人である祭司の弱点を補完しようと考えていました。しかし主人の思惑通りには行きませんでした。34-37節をご覧ください。
“さて、収穫の時が近づいたとき、収穫を受け取るために、僕たちを農夫たちのところへ送った。だが、農夫たちはこの僕たちを捕まえ、一人を袋だたきにし、一人を殺し、一人を石で打ち殺した。また、他の僕たちを前よりも多く送ったが、農夫たちは同じ目に遭わせた。そこで最後に、『わたしの息子なら敬ってくれるだろう』と言って、主人は自分の息子を送った。農夫たちは、その息子を見て話し合った。『これは跡取りだ。さあ、殺して、彼の相続財産を我々のものにしよう。』”
祭司たちは神から派遣された預言者たちに耳を貸さず、彼らを捕まえ、一人は袋叩きにし、一人は殺し、一人は石打にしました。さらに多くの預言者を遣わしましたが、同じことを繰り返しました。ここには父なる神の怒るのに遅く、神の忍耐強さと慈しみ深さが表されています。何人もの僕を派遣されるのです。それと同時に、この農夫たちの恐ろしい罪状を鏡に映し出すようにして彼ら自身に見せることによって、神にとことんまで反逆しようとする彼らの悪魔的で狂気じみた姿を立証しているのです。最後に、主人の息子が送られた時に、農夫たちは“これは跡取りだ。さあ、殺して、彼の相続財産を我々のものにしよう。”と言いました。父なる神様から息子に全権が委ねられていたことを知っていたので、この息子を殺し、この息子にすり替わって、ぶどう園を盗み取り、ぶどう園の実質的な所有者になろうと考えたのです。ここで一点、断っておきたいのですが、この比喩においてすべてが、実相と完全にマッチしているとは限らないと言うことです。例えば、全知全能の神様が、多分、自分の息子ならもう少し敬ってくれるのではないかと推測したけれども、その推測が外れてしまったというようなことは全知全能の神においてあり得ないことです。ですから比喩の中で人間的な考えを神さまに適用しているに過ぎないということを押さえておいてください。また、農夫たちの態度においても同じことが言えます。ユダヤの宗教指導者たちは、実際にはまだイエスさまについて、神の子、メシアであるという確信はありませんでしたし、父なる神が御子に全権をゆだねているということなど知る由もあり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実際の状況とは完全にマッチしてはおらず比喩の相対関係は壊れていると言うこともできます。ただこの点については、悪魔が祭司たちを通して自分の野望を成し遂げようとしているという意味において、つまり、もっと深い霊的な意味において、このたとえはむしろ実相とマッチしていると言えるのです。続いて39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して、息子を捕まえ、ぶどう園の外にほうり出して殺してしまった。”
この箇所をよく見ますと、最初に放り出され、次に殺されたとあります。イエスさまは、神殿から外に放り出され、ゴルゴタの丘で十字架刑に処せられることの描写であると考えられます。当時、極悪人の死刑は宿営の外で、つまりゴルゴタで(直訳すれば、がい骨の丘、されこうべの丘で)なさ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です。この譬えを話し終えた後、イエスさまは祭司長や長老たちに質問しました。「さて、ぶどう園の主人が帰って来たら、この農夫たちをどうするだろうか」彼らは“その悪人どもをひどい目に遭わせて殺し、ぶどう園は、季節ごとに収穫を納めるほかの農夫たちに貸すにちがいない。”と言いました。つまり、自らの口によって自分たちを罪に定めているのです。祭司長や長老たちに下されるであろう神の審判は、尤もなことであると、自分自身を告発しているのです。これを受けてイエスさまは、詩編118編22-23節のみ言葉を引用されるのですが、「息子」と言う言葉と「石」と言う言葉のダジャレから話を進めていきます。「息子」とはヘブライ語でベンですが、余談ですが「ベン・ハー」という映画がありすね。あれは、「ハー」、つまり「フル」の息子という意味です。映画の中で主人公は「ジュダ」と名乗っていましたので、「フルの息子、ユダの物語」ということです。「ベン」とは息子という意味ですね。
石はヘブル語で「エベン」です。最初の譬えでは息子「ベン」が捨てられる話ですが、次の譬えは石である「エベン」が捨てられる話です。息子も石も、ベンもエベンも、イエスさま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42-44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言われた。「聖書にこう書いてあるのを、まだ読んだことがないのか。『家を建てる者(小作農の農夫たち)の捨てた石、/これが隅の親石となった。これは、主がなさったことで、/わたしたちの目には不思議に見える。』だから、言っておくが、神の国はあなたたちから取り上げられ、それにふさわしい実を結ぶ民族(教会)に与えられる。この石の上に落ちる者は打ち砕かれ、この石がだれかの上に落ちれば、その人は押しつぶされてしまう。」”
そもそも詩編118編がどのような状況で歌われたのかと言うと、本来、敵が勝利を得たと思われるような状況からイスラエルが救い出されることを述べた詩です。つまり、恵みによりダビデの王権が永遠に存続するのであって、万が一それが崩れるときがあっても不思議な神の介入によって、再び以前の状態に回復されるという喜びの詩編です。神はダビデという人物を影として、どのような国をお建てになろうとしているのか、私たちは注目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つまり真のメシアを通して建てられる神の国とはとこしえのキリストの王権を持った国であり、その国はどんなものにも動かされることのない、堅固で不動な国なのです。この石は信じる者にとっては隅の親石であり、なくてはならない要石、礎の石になります。建築をする時には、がっちりとした基礎が最も重要になりますね。私たちはイエスさまという基礎の上に、一体となり神の宮として建て上げられていくのです。この親石は人間によって慎重に選び抜かれた石ではなく、隠された神のご計画と不思議な神の力によって現されるという意味です。つまり、建物の責任を請け負っているユダヤの宗教指導者たちの反対と敵対心に遭いながらも、不思議な方法によって神の民の親石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一方で、この石は信じない者にとっては「躓きの石」、「恐ろしい裁きの石」になります。1ペトロ2:6-8をご覧ください。
“聖書にこう書いてあるからです。「見よ、わたしは、選ばれた尊いかなめ石を、/シオンに置く。これを信じる者は、決して失望することはない。」従って、この石は、信じているあなたがたには掛けがえのないものですが、信じない者たちにとっては、/「家を建てる者の捨てた石、/これが隅の親石となった」のであり、また、/「つまずきの石、/妨げの岩」なのです。彼らは御言葉を信じないのでつまずくのですが、実は、そうなるように以前から定められているのです。”
イスラエルの民は自分たちが選民であることに自負し、契約の民としての特権を、あたかも相続権のように考えて、その上にあぐらをかいていた所、神は彼らの特権を取り除き、これを他の者に譲渡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もし私たちが真の敬虔の中にしっかり根を下ろし、神の国の実を結ぶことがないのなら、神は自然に生えた枝を容赦なく取り除かれたように、恐らく接ぎ木された枝に対しても容赦す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神の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のは、御言葉を聞いた民がそれをそのまま用いないで、ただ寝かせておくためではなく、福音を受け入れた人々に実を結ばせようとする意図があるのです。ここから、私たちは慌てふためいて「聖徒の堅忍の教理」は、一体どうなったんだ!と抗議するかもしれません。私たちは、ここで、聖徒の堅忍の教理に目を向けるのではなく、むしろ不敬虔な者によって、キリストの御名が撤廃させられるようになったり、真の信仰を破壊させられるようなことが起こっても、そのような謀は決して成し遂げられないということに慰めを得るべきです。というのは、手と足が頭に向かって反逆し、小作人が地主に向かって反逆し、臣下が彼らの王に向かって反逆し、建築者たちが、建物の基礎を捨ててしまう、この世は、まさに気違いじみた世であり、世も末であるのです。しかし、キリストを排斥しようとする人々のたくらみと野望がどれだけ強力で激しかったとしても、神は必ずキリストの国をお建てになられ、御自身の勝利を証ししてくださるのです。彼らが飛びかかった石が、かえって彼ら自身をたたき壊してしまうということは、思いもよらない結末にちがいありません。キリストに激しく敵対し、罪から頑なに離れることがないなら、自分たちの行った攻撃によって、逆に自らに裁きを招き、破滅を招くのです。祭司長たちはや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ようやく自分たちについて言われていると気づき、殺意を抱いて、イエスさまを捉えようとしましたが、群衆を恐れて実行することは出来ませんでした。ここにおいても、私たちは同じく神の守りを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どれほど敵対者が激しくとも、神の教会は神の守りの中にあるのです。それまで「異邦人の光」としてのイスラエルの選民としての地位は、私たち教会にとって代えられました。それは私たちが隅の親石にしっかりとがっちりと組み込まれた神の宮の中で実を結ぶためであります。互いに仕えあい、互い赦し合い、ガラテヤ書5:22に書かれている聖霊の9つの実、すなわち、愛・喜び・平和・寛容・親切・善意・誠実・柔和・節制の実を結んでいけるよう実践してまいり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