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年09月30日「キリストに何をしてほしいか 무엇을 하여 주기 원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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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リストに何をしてほしいか 무엇을 하여 주기 원하느냐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0章29節~34節

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20:29一行がエリコの町を出ると、大勢の群衆がイエスに従った。
20:30そのとき、二人の盲人が道端に座っていたが、イエスがお通りと聞いて、「主よ、ダビデの子よ、わたしたち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叫んだ。
20:31群衆は叱りつけて黙らせようとしたが、二人はますます、「主よ、ダビデの子よ、わたしたち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叫んだ。
20:32イエスは立ち止まり、二人を呼んで、「何をしてほしいのか」と言われた。
20:33二人は、「主よ、目を開けていただきたいのです」と言った。
20:34イエスが深く憐れんで、その目に触れられると、盲人たちはすぐ見えるようになり、イエスに従っ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0章29節~34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マタイ20:29-34

イエスさまはいよいよ、公生涯の最終局面である十字架に近づいてまいりました。21章からは、パームサンデーから始まるエルサレムでの最後の1週間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までは約25キロの距離ですが、イエスさま一行は北のガリラヤを南下し、ペレア地方を通過して、ヨルダン川を東から西へ渡り、そしてエリコの町を通り過ぎて、目的地でありエルサレムはもう目と鼻の先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過越しの祭りを間近に控え、待望の王であるメシアがいよいよエルサレムに近づいてきたということで、人々の興奮も次第にエスカレートしていきました。そして大勢の群衆が、その世紀の瞬間を見ようとして、イエスさまを歓迎し、後についていきました。そのような時に、道端に座っていた二人の盲人が、イエスさまがお通りになると聞いて「主よ、ダビデの子よ、わたしたち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叫んだのです。平行記事のルカによる福音書18:35を見ると、盲人の「物乞い」と書か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を取り囲んでいた多くの群衆と、弟子たちは、「神の国が今や来たらん」として、今、まさに王国が設立されるだろうと思っているわけですから、人類のためにも、国家設立のためにも重要な局面を迎えているのに、自分たちのメシアが物乞いの要望というような、あまりにも日常的で些細な問題に悩まされることは勘弁してほしいと考えたのでしょう。取り巻きの群衆は「シッ、うるさい、向こうへ行け!」という具合に叱りつけて黙らせようとしました。物乞いというのは、わずかなお金でも恵んでやれば静かになるものですが、無視して、そのまま通り過ぎても特に問題はないかと思われます。しかし二人の物乞いは、いっそう叫んで「主よ、ダビデの子よ、わたしたち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言いました。その声がイエスさまの耳に入ったのでしょうか。20:32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立ち止まり、二人を呼んで、「何をしてほしいのか」と言われた。”

イエスさまは立ちどまり、二人を呼んで「何をしてほしいのか」と言われ、二人の盲人の願いを聞き入れてくださいました。この出来事を通して、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がこの世に来られた目的を再度、深く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つまり、イエスさまは、群衆の期待とは異なって、物乞いたちに低くへりくだり、彼らの要望に耳を傾けられ「何をしてほしいのか」と言われ、彼らに仕え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メシアの目的とは、罪びとに仕え、罪びとのために十字架にまで架かられることだったからです。そしてこの盲人たちこそ、実は少し前にイエスさまの譬えで話された、ぶどう園に夕方5時に雇われた、あの、「後になってやってきた労働者」だったと言う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イエスさまはそのような人にも同じように恵みを施そうとされたのです。それとは反対に、イエスさまを取り囲む群衆は、神の御心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ないため、このような状況を見ても不機嫌になるだけでした。ここで話を進める前に、そもそも、メシアのエルサレム入城とは何だったのでしょうか。イエスさまはそれまで歩んでこられた三年と数か月の間、所謂、公生涯において、弟子たちを教えられたり、訓練されたりしてきました。しかし、試行錯誤しながら色々やってみましたが、結局ダメで、最終的に想定外の結果として十字架に架けられるという事態を招い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は最初からご自分が神の犠牲の子羊として、罪を贖う身代金として、十字架上で死ぬためにこの世に来られたのです。私たちの罪を贖う方法が他にはないためです。ということは、イエスさまの公生涯の間、弟子たちに御言葉を教えられたことも、祈りを教えられ訓練されたことも、すべてのことはこの十字架に帰結していくのです。ですから実は、群衆の期待とは違う意味において、イエスさまは、ご自身の生涯における最高潮、クライマックスへと進みつつあって、今、まさに最も重要な局面に差し掛かっていたわけです。ただしイエスさまにおいて十字架とは、最高潮は最高潮ですけど、その意味するところは群衆の誤解していた最高潮とは全く正反対でした。それは政治的王として独裁者として人々の上に高く君臨するためのクライマックスではなく、人々の僕としてへりくだり、仕えることのクライマックスだったのです。従って群衆の高まる期待は、メシアの十字架の死によって完全に裏切られることになりましたが、逆に神の目から見る時、この瞬間、全て事が成就されたのです。

一方で、私たちは「主よ、ダビデの子よ、私たち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いう叫び声が響いたとき、この誤解していた群衆が大変不機嫌になったことも、また、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つけられ殺されたときに、誤解していた群衆は大変失望したことも十分に理解できるのです。なぜなら、イエスさまはこの世を治める王として来られたはずだからです。なぜなら、父なる神はイエスさまを、私たちを敵から解放してくださる王として、派遣してくださったはずだからです。洗礼者ヨハネが、「私はこのお方の履物のひもを解く資格もない」とまで言うほどの畏れ多いお方が来られたはずだから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父なる神さまが、この世にイエスさまを派遣された目的について、もう一度整理して考えてみなければなりません。父なる神さまが、イエス様をこの世に派遣された目的、しかも、イスラエルの民が伝統的に守っている過ぎ越しの祭りの日に合わせて、つまり、出エジプトによって奴隷から解放されたことをお祝いする、その祭りに合わせて、エルサレムに入り、クライマックスを迎えた目的とは何だったのでしょうか。その目的はイエスさまではなく、罪びと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の御業の中で、メシアとして来られるイエスさまが、世に君臨し、広く認められ、諸国の中で高く挙げられ、崇められることが目的ではなく、御自分の民を救済することが真の目的だったのです。

タイタニック号を考えてみてください。乗客と船と船長がありますが、この中で最も大切なのは何だと思われますか。もしかしたら船を操る船長や乗組員が大切だと思うかもしれません。一番大切なのは乗客なのです。乗客を目的地まで運び届けることが、船と、船長・乗組員の目的だからです。従って船や船長は目的を達成する道具にすぎません。また、私たちは、子どもの勉強を見させるために、子どもに家庭教師を雇ったりします。その時、子供たちは、「自分の親は、自分にお小遣いを毎月千円しかくれないのに家庭教師には、毎月5万円も支払っている。あー、お父さんは、子どもより家庭教師を大切にしているんだな。将来自分も父親から大切にされる家庭教師になろう」などと思う子供はいません。父親が道具に過ぎない家庭教師に5万円を支払うのは、自分の子供を導くためであり、子どものために家庭教師を雇い、用いているに過ぎません。

同じように、神さまはご自身の民イスラエルのために、モーセを立てたりダビデを立てたりエリヤを立てたりしました。それは、彼らを僕として用いて御自分の民を導くため、乗客を導くためなのです。モーセがどれほど人より抜きんでていたのか、ダビデが、エリヤが、どれほど人より優れていて、抜きんでていたのか、(それもあるかもしれませんが)そこが重要なのではなくて、そのような道具を用いて神は一体何をなさろうとしておられるのか、その点こそ重要なのです。つまり神様はご自身の民を養育し導かれるために、モーセやダビデやエリヤやパウロのような道具を用いられるのです。1コリント3:4-9をご覧ください。

“ある人が「わたしはパウロにつく」と言い、他の人が「わたしはアポロに」などと言っているとすれば、あなたがたは、ただの人にすぎないではありませんか。アポロとは何者か。また、パウロとは何者か。この二人は、あなたがたを信仰に導くためにそれぞれ主がお与えになった分に応じて仕えた者です。わたしは植え、アポロは水を注いだ。しかし、成長させてくださったのは神です。ですから、大切なのは、植える者でも水を注ぐ者でもなく、成長させてくださる神です。植える者と水を注ぐ者とは一つですが、それぞれが働きに応じて自分の報酬を受け取ることになります。わたしたちは神のために力を合わせて働く者であり、あなたがたは神の畑、神の建物なのです。”

今、お読みしたこの箇所では、神の目的は明らかに神の畑であり、神の建物です。この目的のためにアポロとパウロが用いられているに過ぎないのです。神の目にはやがて豊作になるであろう畑がみえているのであり、立派にそびえ立つであろう神の神殿、神の建物が見えているのです。同じようにイエスさまが、エルサレムに入城されて、最終局面に差し掛かった時、その目的とは、神の民であり、罪びとの救いの成就でした。神さまと断絶してしまったご自身の民が、和解されて、神様と結び合わされることが目的なのです。そのためにイエス・キリストは接着剤のような道具として私たちに与えられたのです。罪びとに役立つ道具として与えられたのです。それはあたかも、一粒の麦が地に落とされたようなものです。イエスさまは僕としてご自身の命を進んで捨てられました。地に落ちた一粒の麦が、結実し、一粒の麦を通して多くの実が結ばれたのです。私たちこそ、その結ばれた実なのです。ですから、今、もし、私たちが苦難の中に置かれているのなら、いつでも「主よ、助けてください」「主よ、私たち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盲人のようにイエスさまに叫び祈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その祈りの声がどんなに小さくても、耳を傾けてくださり「何をしてほしいのか」と言われるでしょう。再びマタイに戻りますが、20:33節をご覧ください。

“二人は、「主よ、目を開けていただきたいのです」と言った。”

盲人の物乞いたちは、イエスさまに「お金が欲しいのです」とは願いませんでした。目が開かれてイエスさまを見たいと願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を知りたい、イエスさまを通して神に出会いたいと願ったのです。彼らが「ダビデの子」に願ったのは、まさに「救い」そのものでした。彼らが告白した内容は「私の目を開いてくださり真理を見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という信仰告白だったのです。救いとは、聖書を通して、私たちの霊の目が開かれ、イエスさまと出会うことだからです。群衆のように、イエスさまを見ているようで、実は自分たちの妄想や野望をイエスさまに投影することは、イエスさまに出会っていないのです。ですから、群衆の状態にとどまってはなりません。イエスさまに最後まで従い行き、私たちはイエスさまに霊の目を開いて頂き、イエスさまと個人的に出会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その時に、イエスさまが来られた目的は、罪びとに仕えるためであって、まさに多くの人に役立つ道具として来られ、全てを、御自身の命をも、与えるために低くなられて来られたこと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34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が深く憐れんで、その目に触れられると、盲人たちはすぐ見えるようになり、イエスに従った。”

イエスさまは盲人たちを深く憐れました。「深く憐れまれた」という言葉は、聖書の中でイエスさまの憐れみの御性格を表すときによく使われる単語で、スプラングニゾマイというギリシャ語です。直訳すると内臓の腸がちぎれる思いがするという意味で、英語ではcompassionと訳されています。つまり「パッション、受難」を共にするという意味です。イエスさまは盲人たちの声に耳を傾けてくださり、彼らの置かれている苦難のその現場に降りて来てくださり、一緒に苦しんでくださるということです。もし、私たちの心の叫びを聞かれ、イエスさまがまさに私たちの苦難の、その現場に共にいてくださっていることをはっきり悟るなら、私たちはどれほど励まされ、どれほど勇気づけられることでしょうか。イエスさまはそのように私たちに低く仕えてくださり、ご自身を私たちに与えられたのです。

“神は、その独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独り子を信じる者が一人も滅びないで、永遠の命を得るためである。(ヨハネ3:16)”

ですから、私たちには神さまの贈り物として、イエスさまが与えられていることを覚えましょう。そして、私たちがやがて天に引き上げられる時には、イエスさまが獲得し相続された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も共に相続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私たちは、このイエスさまに日々祈りつつ歩ま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무엇을 하여 주기 원하느냐

2018년 9월 30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0장 29절~34절

예수님은 마침내 공생애의 마지막 단계인 십자가에 가까워지셨습니다. 21장부터는 종려주일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약 25km의 거리이지만, 예수님 일행은 북쪽 갈릴리를 남하하여 베뢰아 지방을 지나, 요단강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고, 여리고 마을을 지나, 목적지인 예루살렘이 코앞에 다다랐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기다리던 왕이신 메시아가, 마침내 예루살렘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의 흥분도 점점 고조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가, 그 세기의 순간을 보려고 예수님을 환영하며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 때에, 길가에 앉아 있던 두 맹인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병행 기록인 누가복음 18:35을 보면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많은 무리와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곧 올 것」이라며 지금 바로 왕국이 세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인류를 위해서도 국가 설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와중에 자신들의 메시아가, 걸인의 요구와 같은, 너무 일상적이고 사소한 문제에 시달리는 것은 피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러싼 무리는「쉿, 시끄럽다, 저리 가라!」하며 꾸짖어 침묵시키려 했습니다. 걸인이라는 것은, 적은 돈이라도 베풀어 주면 조용해지는 법이지만,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걸인은 더욱 소리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리가 예수님의 귀에 들렸던 것일까요? 20:32절을 보십시오.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께서 멈춰 서서, 두 사람을 부르시며「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말씀하시고, 두 맹인의 외침에 귀를 기울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시금 깊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무리의 기대와는 달리, 거지들에게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히 그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시며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섬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목적은, 죄인들을 섬기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까지 달리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맹인들야말로 사실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에 저녁 다섯 시에 고용된, 바로 그 「나중에 온 일꾼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은혜를 베풀려 하셨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이런 상황을 봐도 불쾌해하기만 했습니다.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애초에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그때까지 걸어오신 3년 몇 개월 동안, 이른바 공생애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시행착오를 겪으며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셨지만 결국 실패하여, 예상치 못한 결과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태를 초래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을, 하나님의 희생양으로서, 죄를 속죄하는 대속물로, 십자가 위에서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것도, 기도를 가르치시고 훈련하신 것도, 모든 것은 이 십자가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무리의 기대와는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에서 최고조, 클라이맥스로 나아가고 계셨으며, 지금 바로, 가장 중요한 국면에 다다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 있어서 십자가는, 절정은 절정이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무리가 오해했던 절정과는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왕으로서 독재자로서 사람들 위에 높이 군림하기 위한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종으로서 낮아지고 섬기는 사역의 클라이맥스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무리의 높아진 기대는,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전히 배신당하게 되었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 순간 모든 일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한편, 우리는「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을 때, 이 오해하고 있던 무리가 크게 불쾌해했던 것도,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오해하고 있던 무리가, 크게 실망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를 원수에게서 구원해 주시는 왕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할 만큼 경외스러운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전통적으로 지키고 있는 유월절 날에 맞춰, 즉 출애굽으로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그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에 들어가, 절정을 맞이하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목적은 예수님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군림하시고 널리 인정받으며, 여러 나라 가운데 높이 들려 숭배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타이타닉호를 생각해 보십시오. 승객과 배와 선장이 있지만,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배를 조종하는 선장이나 승무원이 중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승객입니다. 승객을 목적지까지 운송하는 것이 배와 선장·승무원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배나 선장은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또한 우리는 아이의 공부를 지도 하기 위해 아이에게 가정교사를 고용하기도 합니다. 그때 아이들은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용돈으로 매달 천 엔밖에 안 주는데 가정교사에게는 매달 5만 엔이나 지불하고 있어. 아, 아빠는 아이보다 가정교사를 더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나도 장차 아빠에게 소중히 여겨지는 가정교사가 되자」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도구일 뿐인 가정교사에게 5만 엔을 지불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의 공부의 향상을 이끌기 위함이며, 아이를 위해 가정교사를 고용하고 활용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를 세우시고 다윗을 세우시고 엘리야를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종으로 삼아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기 위함, 곧 승객을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일반 사람보다 뛰어나고, 다윗이, 엘리야가 얼마나 일반 사람보다 뛰어나고 탁월했는지는 (그것도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도구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 하시는가, 그 점이 바로 중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양육하고 인도하시기 위해 모세나 다윗이나 엘리야나 바울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4-9을 보십시오.

고린도전서3장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라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지금 읽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히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아볼로와 바울이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곧 풍년이 될 밭이 보이고, 위엄 있게 우뚝 설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최종 국면에 이르렀을 때, 그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자 죄인의 구원의 성취였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버린 자신의 백성이 화해케되어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접착제 같은 도구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죄인에게 유익한 도구로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종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으셨습니다.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열매를 맺어, 한 알의 밀알을 통해 많은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우리야말로 그 맺힌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고난 속에 놓여 있다면, 언제든지「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도와주소서」하고 맹인처럼 예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기도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귀 기울여 주시고 「무엇을 하여 주기 원하느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으로 돌아가 20장 33절을 보십시오.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맹인 거지들은 예수님께 「돈을 원합니다」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눈이 뜨여져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싶어 했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께 구한 것은 바로 「구원」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이 고백한 내용은 「제 눈을 뜨게 하셔서 진리를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구원이란, 성경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리처럼, 예수님을 보고 있는 듯하면서도 실은 자신들의 망상이나 야망을 예수님께 투영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리의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영의 눈을 열어 주셔서,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죄인들을 섬기기 위함이며, 바로 많은 사람에게 유익한 도구로 오셔서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시기 위해 낮아지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은 맹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성품을 나타낼 때 자주 쓰이는 단어인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헬라어입니다. 직역하면 내장의 창자가 뒤틀릴 듯한 깊은 아픔을 느낀다는 뜻으로, 영어로는 「compassion」으로 번역됩니다. 즉 「고통, 수난」을 함께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맹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고, 그들이 처한 고통의 현장에 내려오셔서 함께 고통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의 외침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고통의 현장에 함께 계심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낮추어 섬겨주시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독생자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선물로 예수님이 주어졌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머지않아 하늘로 들려올라갈 때에는, 예수님께서 얻으시고 상속하신 모든 것을, 우리도 함께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 매일 기도하며 그분과 함께 걸어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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