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もなお働かれる神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ヨハネによる福音書 5章9節b~18節
5:9bその日は安息日であった。
5:10そこで、ユダヤ人たちは病気をいやしていただいた人に言った。「今日は安息日だ。だから床を担ぐことは、律法で許されていない。」
5:11しかし、その人は、「わたしをいやしてくださった方が、『床を担いで歩きなさい』と言われたのです」と答えた。
5:12彼らは、「お前に『床を担いで歩きなさい』と言ったのはだれだ」と尋ねた。
5:13しかし、病気をいやしていただいた人は、それがだれであるか知らなかった。イエスは、群衆がそこにいる間に、立ち去られたからである。
5:14その後、イエスは、神殿の境内でこの人に出会って言われた。「あなたは良くなったのだ。もう、罪を犯してはいけない。さもないと、もっと悪いことが起こるかもしれない。」
5:15この人は立ち去って、自分をいやしたのはイエスだと、ユダヤ人たちに知らせた。
5:16そのために、ユダヤ人たちはイエスを迫害し始めた。イエスが、安息日にこのようなことをしておられたからである。
5:17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わたしの父は今もなお働いておられる。だから、わたしも働くのだ。」
5:18このために、ユダヤ人たちは、ますますイエスを殺そうとねらうようになった。イエスが安息日を破るだけでなく、神を御自分の父と呼んで、御自身を神と等しい者とされたからであ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ヨハネによる福音書 5章9節b~18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2025년 10월 12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요한복음 5장 9b~18절
서론
베데스다 연못에서 안식일에 행한 기적은, 예루살렘 성전 당국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심각한 안식일 위반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이 기적이 방아쇠가 되어, 5장 10절부터 이어지는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의, 오랜 논쟁으로 발전해 갑니다. 그리고 그 논쟁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안식일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 가십니다. 오늘도 요한복음을 통해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율법주의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통 속에 살아온 이 남자가 마침내 치유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누워 있던 자리에서도 해방되어 자신의 발로 서서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유대인들은 “건강해져서 다행이네.” “아이고, 정말 다행이야” 같은 배려와 위로의 말은 없이 “자리를 옮기는 것은 노동이다. 너는 안식일을 더럽히고 있다”라고 비난했습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특히 안식일 준수는 핵심이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분명히 좋지 않은 일로 여겨졌지만,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실이 아니라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 다니게 하신 점입니다. 바로 이 행위가 「운반 노동」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이 남자를 비난한 것입니다. 보통, 병 치료 등과 관련된 일이나 특히 생명의 위험을 동반하는 급박한 상황이라면 안식일이라도 예외적으로 노동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치유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안식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날, 그녀의 열병이 나을 것을 바랐고, 예수님은 그에 응답하여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때, 아무도 “안식일 율법 위반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4:5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4장
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사니
누구도 즉시 도와주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경우에도 우선 이 남자가 치유된 것을 기뻐하고 안도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평생 병 속에서 고통받아 온 남자의 치유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다는 점이, 우리 눈에는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기이하게 비춰집니다. 율법 가르침의 본질을 잃고 겉모습만 꾸미는, 이른바 율법주의에 빠진다면, 율법의 사랑애 대한 가르침은 이처럼 차갑고, 불합리하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해버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도 율법 가르침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마음가짐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남자는,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는 비판에 대해, 그는 11절에서「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겉보기에는 자신을 고쳐 주신 분께 영광을 돌리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의 비판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율법 위반의 책임을 자신을 고쳐 주신 분께 전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가 과연 예수님을 받아들였는지 여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태도를 보였는지 묻는다면,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다시 성전 뜰에서 그를 만나 주셨지만, 그는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움직임이 조금 신경 쓰여서, 잠깐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라며 예수님을 배려하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고, 그 대신 곧장 유대인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14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4절의 「더 심한 것」은 마지막 심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사후에 재판관이신 예수님 앞에 서서 죄로 정죄되어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동시에 초청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믿기 어려운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졌으니, 속히 죄를 회개해야 하며, 예수님 자신 안에 있는 생수를 받으라는 초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유대인들에게 고발했습니다. 이 사람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으며, 율법이 가르치는 사랑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자,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춰서, 왜 예수님께서 굳이 명절인 안식일에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으니, 율법에 관한 조상의 전승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임을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만한 말씀을 굳이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결코 즉흥적으로 기적을 행하시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신 것은 아니셨을 테니,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주시려 하셨고, 자신이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할 것을 감수하시면서 병든 사람에게 그렇게 명령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안식일이란, 메시아에 의해 오는 구속과 관련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관한 조상의 전승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 부르시고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기서 다시 한번 정리하고자 합니다. 안식일에 관한 조상의 전승이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900미터 이상 걸어서는 안 된다거나, 불이나 전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지만, 이것들은 랍비들이 마음대로 만든 것입니다. 안식일 계명이 성경에 기록된 부분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이 정해진 곳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이니, 각각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8~11을 보십시오.
출애굽기 20장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 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들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으로, 일곱째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당시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곱째 날인 토요일은 안식일로 주 안에서 안식하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구절인 신명기 5:13~15절을 보십시오.
신명기 5장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기서는, 종이었던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일곱째 날인 토요일은 안식일로 삼아 주 안에서 안식하라, 너희의 종들도 안식일에는 안식하게 하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조와 하나님의 구속, 이 두 가지를 기억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그 날, 자신들을 위한 노동을 일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죄의 노예였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안식일의 정신은, 오늘날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주의 날인 일요일을, 주 안에서 안식하는 날로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구속을 감사하며, 은혜의 언약 안에 있음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하나님이 피곤하셔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정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막2:27). 안식일은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창2;2절에는, 확실히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일곱쩨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쩨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께 있어서 「안식하셨다」라는 말은, 인간처럼 일을 멈추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단계를 마친 창조 사역을 기쁨으로 좋게 여기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안식일에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어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항상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법칙을 초월한 기적만을 하나님의 역사로 생각하기 쉽지만, 자연법칙 그 자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어서, 「자연적」이라든가, 「초자연적」이라는 말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창조와 섭리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어, 지구가 태양 주위를 자전하면서 공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자연법칙입니다. 이 자연법칙의 절묘한 균형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적적인 균형이라고 과학자들은 증언합니다. “지나친 생각이다. 그건 우연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말 그럴까요. 자연계가 보여주는 신비로운, 그 모습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 확실히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시며 (시편 19:1),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꺽으심이여 (시편 29:3-5), 빛은 하나님이 입으신 옷이며 (다니엘 7:9, 마17:2), 하늘은 하나님의 장막이며(시편 19:4, 고후 5:1), 구름은 하나님이 타시는 수레 (마24:30)이며, 하나님의 숨결은 피조물을 창조하고 새롭게 하십니다(시 33:6, 요20:22). 하나님은 의인에게도 악인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고 햇빛을 비춰 주셔서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을 불러오십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섭리를 가지고 자연법칙을 지배하시며 유지하시고,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일하심을 멈추신다면 지구의 공전 궤도는 탈선하고 자전 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나 전자의 결합은 절단되어 붕괴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이루신 것처럼, 날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법칙이나, 역사 자체도, 실은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생각한다면 38년 동안, 병 가운데에 있다가 치유된 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일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스스로를 회개하며 은혜에 응답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란, 바로,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날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구속의 역사를 기뻐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이란, 은혜의 언약 속에 우리를 넣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결론
오늘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절인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시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밝히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안식일이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를 지어 타락한 인간에게 손을 내밀어 주셔서, 다시 인간을 살리려 하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는 날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구원에 초대되었으니, 우리는 주님 앞에 회개하고, 지금도 여전히 일하시며, 은혜를 부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응답하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특히 주의 첫날인 주일 예배를 우리는 거룩히 구별하여, 이 날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날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序】
ベトザタの池で安息日に行った奇跡は、エルサレムの神殿当局に大きな波紋を投げかけました。ユダヤ人たちの目には甚だしい安息日違反として映ったのであります。この奇跡が引き金となって、5章10節から続くイエス様とユダヤ人たちとの間の、長時間に亘る議論に発展していくのであります。そしてその議論を通して、イエス様は御自身が誰であるのか、安息日の本来の意味とは何なのかについて説明されて行かれます。本日もヨハネによる福音書を通して、共に御言葉の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1】. 律法主義
10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こで、ユダヤ人たちは病気をいやしていただいた人に言った。「今日は安息日だ。だから床を担ぐことは、律法で許されていない。”
38年という長い間を苦しみぬいてきたこの男がついに癒されました。これまで横たわっていた床からも解放され、自らの足で立って歩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しかしそれを見ていたユダヤ人たちは、「元気になって良かったね。」「いやぁ、本当に良かった」というような配慮と労いの言葉はなく、「床を運ぶことは労働である。お前は安息日を汚している」と、非難いたしました。これは一体何なのでしょうか。
当時のユダヤ人にとって、神様の戒めを守ることは何よりも大切であり、特に安息日の遵守は重要とされていました。ですから、安息日を破るのは確かに良くないことと考えられますが、ここで問題となっているのは、イエス様が安息日に病人を癒されたということではなく、安息日に床を担がせて歩かせ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ことが「運搬の労働」に当たるという理由で、この男を非難しているのです。通常、病の治療などに関することとか、特に命の危険をともなうような一刻を争う事柄であれば、たとえ安息日であっても、例外的に労働することが赦されていました。聖書にはペトロの姑の熱病が癒される記事がありますが、安息日の出来事であります。人々はその日、彼女の熱病が癒されることを願い、イエス様はそれに応えて奇跡を起こされたのですが、その時、誰も「安息日の律法違反だ」などと言う人はいませんでした。また、ルカ14:5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イエス様のお言葉です。
“そして、言われた。「あなたたちの中に、自分の息子か牛が井戸に落ちたら、安息日だからといって、すぐに引き上げてやらない者がいるだろうか。」”
すぐに助けてあげない人なん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ね。当たり前のことです。ですから今回の場合でも、とりあえずこの男が癒されたことを喜び、安堵するのが、人の道ではないのかと思うのであります。それなのに、本日登場するユダヤたちはというと、一生涯に亘って病の中で苦しんで来た男の癒しについて、全く無関心であったということは、私たちの目に、いかにも滑稽で、奇妙に映るのであります。律法の教えの本質を見失い、表面だけを繕う言わば、律法主義に陥ってしまうならば、律法の愛の教えは、このように冷たく、理不尽で、滑稽な姿に変わってしまうということを示し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この点については、私たちも律法の教えの本質を見失うことがないように、心掛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わされます。
男は、自分の病気を癒してくださった方が誰であるかを知りませんでした。「安息日を違反している」という批判に対し、彼は11節で「わたしをいやしてくださった方が『床を担いで歩きなさい』と言われたのです」と答えています。この答えは一見しますと、自分を癒してくださったお方に名誉を与えようとしているように見えますが、穿った見方をしますと、彼らの批判から自己弁護するために、律法違反の責任を、自分を癒してくださった方になすりつけているというふうに見ることもできます。責任転嫁しているのです。彼が果たしてイエス様を受け入れたのかどうか、聖書には書かれていないため、はっきりとは分かりませんが、イエス様に少しでも感謝する態度を取っていたのかと問うならば、少なくとも本日の箇所からは、そのような態度は持ち合わせていなかった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イエス様は再び神殿の境内で彼と出会ってくださいましたが、しかし彼は「あの時は本当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ところで、ユダヤ人たちの動きで少し気になることがありましたので、ちょっとお伝えしたいことがあるのですが…」などとイエス様を配慮する素振りもなく、その代わりに、まっすぐにユダヤ人たちの方に向かって行ったのであります。14~15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の後、イエスは、神殿の境内でこの人に出会って言われた。「あなたは良くなったのだ。もう、罪を犯してはいけない。さもないと、もっと悪いことが起こるかもしれない。」この人は立ち去って、自分をいやしたのはイエスだと、ユダヤ人たちに知らせた。”
14節の「もっと悪いこと」とは、最後の審判のことを指していると考えられます。つまりイエス様を受け入れないために永遠の命を受け取ることなく、死後、裁判官であられるイエス様の前に立たされ、罪に定められ、永遠の滅びに至るかもしれない、と警告しているのです。この警告は、同時に招きの言葉でもありました。彼の人生において、信じられないような神の恵みが施された訳ですから、速やかに罪を悔い改めるべきである、イエス様御自身にある、命の水を受け取りなさいと招かれているのです。しかし彼は、イエス様の招きに応答することはなく、むしろイエス様のことをユダヤ人たちに通報しました。この男もエルサレムのユダヤ人たちと同じように、律法を形式的に捉えていて、律法の愛の教えから遠くかけ離れていたと言わざるを得ないのであります。
【2】. 今もなお働かれる神
さて、私たちはここで少し立ち止まり、なぜイエス様はわざわざ祭の日の、しかも安息日に「床を担ぎなさい」と命じられたのか考えてみたいと思います。イエス様だって、ユダヤ人ですから、律法に関する先祖の言い伝えをよく知っていたはずです。安息日に「床を担いで歩きなさい」と命じるなら、大変な問題になることは分かっていたことでしょう。なぜ、人々を困惑させるようなことをあえて言われたのでしょうか。イエス様は、決して、行き当たりばったりで、奇跡を施したら、想定外の問題を引き起こし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ではないはずですから、意図的に「何か」を示そうとして、あえて、自分が殺される危険に置かれることを承知の上で、病の男にそのように命じられたと考えられます。それではその、「何か」とは、何だっ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安息日というのは、メシアによってもたらされる贖いと関係があること、そして、神様は、そのために今もなお働かれていることを、お示しになるためであったと考えられます。17~18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わたしの父は今もなお働いておられる。だから、わたしも働くのだ。」このために、ユダヤ人たちは、ますますイエスを殺そうとねらうようになった。イエスが安息日を破るだけでなく、神を御自分の父と呼んで、御自身を神と等しい者とされたからである。”
イエス様はユダヤ人に対し、安息日に関する先祖の言い伝えを破るだけでなく、神をご自分の父とお呼びし、御自身を神と等しい者とされました。火に油を注ぐようなことを言われたわけです。
私たちはそもそも安息日を守るとは何なのかということを、もう一度ここで整理したいと思います。安息日に関する先祖の言い伝えとは、聖書の教えではありません。例えば900メートル以上歩いてはならないとか、火や電気を使ってはならないとかがありますが、これらはラビたちが勝手に作ったものです。安息日の戒めが聖書に書かれている箇所は、皆さまもご存じのように十戒の第四戒に記されています。十戒が定められているのは、出エジプト記と申命記ですから、それぞれ調べてみましょう。出エジプト記20:8~11をご覧ください。
“安息日を心に留め、これを聖別せよ。六日の間働いて、何であれあなたの仕事をし、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日であるから、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息子も、娘も、男女の奴隷も、家畜も、あなたの町の門の中に寄留する人々も同様である。六日の間に主は天と地と海とそこにあるすべてのものを造り、七日目に休まれたから、主は安息日を祝福して聖別されたのである。”
「神様が天と地と海とそこにあるすべてのものを造られたため、七日目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とあります。つまり、当時、安息日とは「神様が私たちの創造主であるということを覚え、感謝する日であった」、と言い換え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七日目の土曜日は安息日として主の中で憩いなさい。神様を礼拝し、神様の創造の御業を覚えなさい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もう一箇所、申命記5:13~15をご覧ください。
“六日の間働いて、何であれあなたの仕事をし、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日であるから、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息子も、娘も、男女の奴隷も、牛、ろばなどすべての家畜も、あなたの町の門の中に寄留する人々も同様である。そうすれば、あなたの男女の奴隷もあなたと同じように休むことができる。あなたはかつてエジプトの国で奴隷であったが、あなたの神、主が力ある御手と御腕を伸ばしてあなたを導き出されたことを思い起こさねばならない。そのために、あなたの神、主は安息日を守るよう命じられたのである。”
ここでは、奴隷であったイスラエルを贖ってくださった神様を覚えて、七日目の土曜日は安息日として主の中で憩いなさい、あなた方の奴隷も安息日には休ませなさい、と書かれています。創造と、神様の贖い、この二つのことを覚えて安息日を聖別しなさい。その日、自分たちのための労働を一切しないということは、創造主であり、贖い主である神様を褒めたたえること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安息日を守ることは、罪の奴隷であったユダヤ人にとって、神との契約のしるしであったと言えるでしょう。この二つの安息日の精神は今日、新約に生きる私たちも引き継がれています。私たち教会は、土曜日の安息日を守っている訳ではありませんが、週の初めの日曜日を主の中で憩う日として聖別し、神の創造と、神の贖いを感謝し、恵みの契約の中に入れられていることを喜んで、神様を礼拝するのであります。
そうであるなら、安息日とは神様が疲れたから定められたということではなく、人間のために定められた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マルコ2:27)。安息日は人間のために与えられたのです。創世記2章2節には、確かに神が「第七の日に、そのすべての業を終えて休ま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が、神にとって「休まれた」という言葉は、人間のように働きを止めるということを意味しているのではなく、一段落ついた創造の御業を、喜びをもって、善しとされたということを示しているのであります。つまり、神様は安息日に「喜ばれた」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様は「わたしの父は今もなお働いておられる」と言われました。神様は休むことなく、常に働いておられるのです。
ところで、私たちは自然法則を超越した奇跡だけを神の御業と考えがちですが、自然法則それ自体を創造された神様にとって、「自然的」ですとか、「超自然的」という言葉は全く意味を成しません。神様は天地万物を創造して以来、今日に至るまで、創造と摂理の御業によって働いておられます。つまりどういうことかと申しますと、例えば、地球が太陽の周りを自転しながら公転していますね。皆さまもよくご存じの自然法則です。この自然法則の絶妙なバランスは、地球上のあらゆる生命を保持するための、奇跡的なバランスであると科学者は証言します。「考えすぎだ。それは、偶然に過ぎない」と言う人もいますが、本当にそうでしょうか。自然界が見せる幽玄なその姿は、神御自身について確かに語っ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天は神の栄光を語り、大空はその御手の業を告げる(詩編19:1)。神の声は海の上にあり、その声は雷鳴を轟かせ、杉の木を打ち砕く(詩編29:3-5)。光は神がまとう衣であり(ダニエル7:9、マタイ17:2)、天は神の幕屋であり(詩編19:5、2コリント5:1)、雲は神が乗られる馬車(マタイ24:30)であり、神の息吹は、被造物を創造し、更新します(詩編33:6、ヨハネ20:22)。神様は義人にも悪人にも雨を降らせてくださり、太陽の光を照らしてくださり、雨と日照り、豊作と凶作をもたらされるのです。これらすべてのことは、私たちに偶然に起きるのではなく、父なる神の御手から来るのであります。神様は、今もなお摂理を持って自然法則を支配され、保持し、人類の歴史を導いておられます。もし、神様がその働きを止めるなら、地球の公転の軌道は脱線し、自転の速度が一定に保たれることもなくなるでしょう。物を構成している分子や電子の結合は切断され、崩壊するかもしれません。従いまして、ベトザタの池で超自然的な奇跡をなされたのと同じように、日々、私たちを取り巻いている自然の営みや、歴史そのものも、実は超自然的であり、奇跡的であり、神の御手の働きであると言うことが出来るのです。そのことを考えるなら、38年間、病の中にいて癒された者だけでなく、全ての人々に神様は今日も働いて、恵みを注いでいてくださっているということが分かってくるのです。今日、私たちは神様の恵みに感謝し、自らを悔い改め、恵みに応答するように招かれています。そして安息日とは、まさに私たちが今もなお働かれている神の中に憩う日であり、神の創造の御業と、贖いの御業を喜ぶ日なのであります。安息日とは、恵みの契約の中に私たちを入れてくださった事を感謝し、共々に集まって礼拝を捧げる日なのであります。
【結論】
本日の内容をまとめます。イエス様は祭りの日のしかも安息日に、奇跡を行い、床を担いで歩きなさいと命じられました。それは、安息日の本来の意味を明らかにするためであります。安息日とは、神の創造の御業、神の贖いの御業を喜ぶ日であります。言い換えれば、愛なる神様が、罪を犯し堕落した人間に御手を伸ばしてくださり、再び人間を生かそうとする、その神の御業を味わう日であります。全ての人がこの救いに招かれていますので、私たちは御前に悔い改め、今もなお働かれ、恵みを注いでくださっている神様に、感謝の応答をして行く者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特に週の初めの日の主日礼拝を私たちは聖別し、この日、主と共に喜ぶ日として礼拝を捧げる者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