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遠の命に至る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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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ヨハネによる福音書 4章1節~15節
4:1さて、イエスがヨハネよりも多くの弟子をつくり、洗礼を授け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が、ファリサイ派の人々の耳に入った。イエスはそれを知ると、
4:2――洗礼を授けていたのは、イエス御自身ではなく、弟子たちである――
4:3ユダヤを去り、再びガリラヤへ行かれた。
4:4しかし、サマリアを通らねばならなかった。
4:5それで、ヤコブがその子ヨセフに与えた土地の近くにある、シカルというサマリアの町に来られた。
4:6そこにはヤコブの井戸があった。イエスは旅に疲れて、そのまま井戸のそばに座っておられた。正午ごろのことである。
4:7サマリアの女が水をくみに来た。イエスは、「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われた。
4:8弟子たちは食べ物を買うために町に行っていた。
4:9すると、サマリアの女は、「ユダヤ人のあなたがサマリアの女のわたしに、どうして水を飲ませてほしいと頼むのですか」と言った。ユダヤ人はサマリア人とは交際しないからである。
4:10イエスは答えて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神の賜物を知っており、また、『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ったのがだれであるか知っていたならば、あなたの方からその人に頼み、その人はあなたに生きた水を与えたことであろう。」
4:11女は言った。「主よ、あなたはくむ物をお持ちでないし、井戸は深いのです。どこからその生きた水を手にお入れになるのですか。
4:12あなたは、わたしたちの父ヤコブよりも偉いのですか。ヤコブがこの井戸をわたしたちに与え、彼自身も、その子供や家畜も、この井戸から水を飲んだのです。」
4:13あなたは、わたしたちの父ヤコブよりも偉いのですか。ヤコブがこの井戸をわたしたちに与え、彼自身も、その子供や家畜も、この井戸から水を飲んだのです。」
4:14しかし、わたしが与える水を飲む者は決して渇かない。わたしが与える水はその人の内で泉となり、永遠の命に至る水がわき出る。」
4:15女は言った。「主よ、渇くことがないように、また、ここにくみに来なくてもいいように、その水をください。」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ヨハネによる福音書 4章1節~15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
2025년 8월 24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요한복음 3장 22~30절
서론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증언하십니다. 그 증언은 하늘에 속한 것이므로 사람은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낯추신 채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도 요한복음을 통해 함께 말씀의 은혜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제자를 만들고, 세례를 베훌고 계신다는 소식이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지자,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정탐꾼을 보냈듯이, 머지않아 이쪽에도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가르침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도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곳에 조금 더 머무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기에 그곳을 떠나기로 하셨습니다. 급히 가셔야 했기에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역사적인 지역 감정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북상할 때, 특별한 일이 없는한, 그 사이에 있는 사마리아 지방을 피해 우회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관례였습니다.
원래 사마리아인은, 옛날 북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른 민족들 사이의 혼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되었을 때, 북이스라엘 주민들은 아시리아로 끌려갔고, 다른 민족들이 사마리아로 이주했습니다. 혼혈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성서로 받아들이면서도 우상 숭배를 거듭했으며, 그리심 산이야말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산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 그리심 산이 축복의 산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지도를 보십시오. 사마리아 지방에 수가라는 마을과 그리심 산, 에발 산이 확인되시나요? 수가라는 마을도 그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옛날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 모세의 명령에 따라서 가나안 중앙에 마주보고 있는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서 언약 체결 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남서쪽에 있는 그리심 산에는 6지파가, 북동쪽에 있는 에발 산에는 남은 6지파가 배정되었는데, 그리심 산에서는 백성을 축복하기 위해, 에발 산에서는 백성을 저주하기 위해 배정되었습니다. 여호수아서 8:33~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 8장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찬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여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리심 산이란, 축복의 산이었고, 에발 산은 저주의 산이었기 때문에 에발 산에는 속죄를 위한 제단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후대에, 선지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던 중간시대에 사마리아인들은, 축복의 산 그리심 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건설하였습니다(기원전 324년, 알렉산더 대왕의 허락아래에). 그런데 기원전 128년, 하스몬 왕조의 유다 왕 요한 힐카누스는, 그 그리심 산의 성전을 파괴해버렸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종교적우위성을 확립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매우 뿌리 깊은 대립과 증오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2) 두 종류의 물
4:3~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야곱의 우물이라고 하는데, 야곱은 족장 야곱을 가리킵니다. 이 우물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수가라는 마을은, 세겜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고로 세겜이라고 하는 장소는, 바로 아까 언급한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중앙에 위치한 곳으로, 그곳은 족장 야곱이 구입하여 요셉에게 준 땅이며, 요셉의 유골도 매장되었습니다 (여호수아 24:32). 따라서 오늘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야곱과 매우 깊은 인연이 있는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야곱의 마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 야곱의 우물에 여행에 지치신 예수님께서 정오쯤에 오셔서 쉬기로 하셨습니다. 햇살이 약해질 때까지 거기 앉아 계시려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제자들은 음식을 사려고 마을에 나가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마리아 여자가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과 그 여자 사이의 접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물을 길어오는 일은, 여자들의 일이었습니다. 현대의 수도가 있는 생활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물을 길어 집까지 지고 가는 것은 매우 힘든 중노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운 한낮에는,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시원해지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우물가 수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물에서 자연스럽게 커뮤니케이션이 확대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여자는, 이런 시간에 물을 길으로 왔을까요? 즉, 이 여자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피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여자는 뭔가 「사연이 있는 여자」였던 것입니다.
교제를 피해 왔기 때문에, 갑자기 예수님께서 말을 걸어 오셔서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아무리 보아도 이 사람은 유대인인데, 그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인 자신에게 말을 걸어 왔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 후반에는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영어 번역 성경(NRS)으로 보면,「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그릇을 함께 쓰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 만지는 것은, 모두 부정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물건을 함께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정도로 사마리아인을 비롯한 이방인들과 접촉하여 부정해지는 것을 꺼려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10~12절을 보십시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은「생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수」란 강물이나 개울물처럼 흐르는 물을 가리킵니다. 비록 샘물이라 할지라도 달리 흘러갈 곳이 없다면 그 물은 「생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즉, 예수님은 우물물이 아니라, 분명히 다른 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비유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경멸했던 것처럼,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의 그 어리석은 행동 양식을 경멸했기 때문에, 여자는 예수님을 비웃듯이「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주여」라는 말은, 여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선생님」이라는 뉘앙스입니다. 상대를 높여 부르는 것입니다. 여자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당신은 아버지 야곱보다 자신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이 우물에서 대대로 많은 가족과 많은 가축이 양육되어 왔습니다. 이 우물물을 단순한 우물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우물물은 바로 다른 의미에서 생수입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공통 조상이자 모두가 존경하고 숭배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야곱을 제쳐두고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냐며 예수님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종류의 물에 대해 끈기 있게 설명을 덧붙이십니다. 13~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생수」란 대체 무엇일까요? 적어도 이것은, 영적인 것을 말하고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물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물물을 길어 집까지 나르더라도, 결국 물은 다 떨어질 것입니다. 여인들은 이 힘든 일을 수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우물물만이 아닙니다. 음료뿐 아니라 음식이든, 돈이든, 물질적인 것은, 모두 그렇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안전, 안심, 평안, 쾌락 같은 정신적인 것들도, 그것으로 일시적으로 채워질 수는 있어도 영원히 계속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생수」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 몇몇 주석서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후에 보내주시는 「성령」을 가리킨다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7:37~39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시죠.
요한복음 7장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릉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종교개혁자 칼빈은「생수」를 일차적으로 「성령」이라 하면서도, 동시에 「메시아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거룩함, 의, 구원, 영광, 자녀 됨, 영생 등이, 근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 혹은 「메시아에 의해 주어지는 위로부터의 선물」어느 쪽이든, 이 생수의 예수님의 메시지는 니고데모에게 하신 3:1절 이후의 메시지와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받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수는 모든 갈증을 해소하는 물입니다. 이 「생수」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기쁨으로 마음이 채워지게 됩니다. 건강하든 그렇지 않든, 공부를 잘하든 그렇지 않든, 돈이 있든 없든, 그런 외부 상황과 관계없이, 내면에서 솟아나와 우리의 갈증을 해소하고 우리 삶에 기쁨과 풍요를 주십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약속에 전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마치 “만약 그런 물이 정말로 있다면, 실제로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밀어내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후 이 사연있는 여자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과 진지하게 마주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16절 이후에 기록되어 있으니,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오늘의 내용에서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아무리 깊어도, 구세주 메시아께서 주시는 하늘의 선물로, 화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정 불가능해 보이는 과거의 흑역사가 있어도, 혹은 하찮은 자존심에 집착하는 나머지, 양측의 타협이 불가능해 보여도, 우리의 복음 전도는, 그런 불가능한 벽을 넘어 화해를 이루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수」이며, 그것은 내면에서 솟아나와, 우리의 갈증을 해소하고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며, 지극한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을까요? 과거에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가족이나 지인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사연 있는 여자와 접점을 가지셨듯이, 우리도 복음을 지니고 그처럼 사람들에게 겸손히 다가가 말하며, 간구하며 기도하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序】
イエス様は、御自身について証しされます。その証しは天に属するものなので人は理解することが出来ませんが、イエス様は私たちに近づいてこられ、そして私たちに理解できるように遜りながら話しかけてくださいます。本日もヨハネの福音書を通して共に御言葉の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洗礼者ヨハネよりも多くの弟子をつくり、洗礼を授け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が、ファリサイ派の人々に知れ渡ると、イエス様はガリラヤに戻ることに決意しました。彼らがヨハネの下に偵察を送ったように、やがてこちら側にもやって来るに違いないからです。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教えに関心を持っている訳ではありません。自分たちも洗礼者ヨハネやイエス様の弟子になりたいと思っていた訳でもありません。もしそうなら、イエス様はもうしばらくその場所に滞在されたことでしょう。イエス様は、何が彼らの心の中にあるのかをよく知っておられたので、その場所から移動することにしたのです。急いでいたため、サマリアを通らねばなりませんでした。
【1】. ユダヤ人とサマリア人の確執
さて、ユダヤ人とサマリア人の間には、歴史的な地域感情が渦巻いていました。従いましてユダヤからガリラヤへ北上する際、よほどのことがなければ、その間にあるサマリア地方を避けて遠回りするのが、ユダヤ人の常でありました。
そもそもサマリア人というのは、昔、北イスラエルの人々と他民族との雑婚によって生まれてきた人々です。アッシリア帝国によって、北イスラエルの首都サマリアが陥落した時、北イスラエルの指導者はアッシリアに連れ去られ、そして他の民族がサマリアに連れて来られました。混血のサマリア人はモーセ五書のみを聖典として受け入れながらも、偶像崇拝を重ね、そしてゲリジム山こそ神の臨在する聖なる山と考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その理由は、かつてゲリジム山が祝福の山であったことに由来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図をご覧ください。サマリア地方にシカルという村と、ゲリジム山とエバル山が確認できますでしょうか。シカルという町もその間に挟まれています。かつて、ヨシュアがカナンの地に攻め上った時、モーセから命じられていたことに従って、カナンの中央に向かい合っているゲリジム山とエバル山の間で、契約締結の儀式が持たれました。南西にあるゲリジム山には6部族が、北東にあるエバル山には残りの6部族が振り分けられたのですが、ゲリジム山からは民を祝福するため、エバル山からは民を呪うために振り分けられました。ヨシュア記8:33~34をご覧ください。
“全イスラエルは、長老、役人、裁判人をはじめ、寄留者もその土地に生まれた者も、主の契約の箱を担ぐレビ人である祭司たちの前で、箱のこちら側とあちら側に、半分はゲリジム山の前に、他の半分はエバル山の前に立った。それは主の僕モーセがかつて命じたように、イスラエルの民を祝福するためであった。その後ヨシュアは、律法の言葉すなわち祝福と呪いをことごとく、すべて律法の書に記されているとおりに読み上げた。”
ここに書かれていますように、ゲリジム山とは祝福の山であり、エバル山は呪いの山であったためエバル山には贖いのための祭壇が設けられました。そして後の時代、預言者たちが現れなかった中間時代の頃ですが、サマリア人は祝福の山ゲリジム山において自分たちの神殿を建設したのであります(紀元前324年、アレクサンダー大王の許可の下)。ところが、紀元前128年、ハスモン朝のユダの王であるヨハネ・ヒルカノスは、そのゲリジム山の神殿を破壊してしまいました。これはエルサレム神殿における宗教的優位性を確立しようとする思惑があったからだと考えられます。このような訳で、サマリア人とユダヤ人の間には大変根深い対立と憎悪があったのであります。
【2】. 二種類の水
4:3~6節をご覧ください。
“ユダヤを去り、再びガリラヤへ行かれた。しかし、サマリアを通らねばならなかった。それで、ヤコブがその子ヨセフに与えた土地の近くにある、シカルというサマリアの町に来られた。そこにはヤコブの井戸があった。イエスは旅に疲れて、そのまま井戸のそばに座っておられた。正午ごろのことである。サマリアの女が水をくみに来た。イエスは、「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われた。”
ヤコブの井戸とありますが、ヤコブとは族長ヤコブのことです。この井戸はそれほど長い年月に渡って使用されてきました。シカルという町は、シケムの近くであっただろうと考えられています。因みにシケムという場所は、まさに先ほどのゲリジム山とエバル山の中央に位置する場所であり、そこは族長のヤコブが購入し、ヨセフに与えた土地であり、ヨセフの遺骨も埋葬されました(ヨシュ24:32)。従いまして、本日の設定場所は、ヤコブと大変、縁のある土地であるということが言えるのです。「ヤコブの町」と言ってもいいくらいです。そのヤコブの井戸に、旅に疲れたイエス様は正午ごろ来られ、休むことにしました。日差しが弱まるまでそこで座っていようとされたのかもしれません。他の弟子たちは食べ物を買うために町に出かけていました。そこへ一人のサマリア人の女がやって来ました。イエス様は女に「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われます。この言葉がイエス様と女との接点になりました。
当時、水を汲むという仕事は、女たちの仕事でありました。現代、水道のある生活に慣れている私たちには想像もつかないことですが、水を汲んで家まで担いで行くというのは大変な重労働でありました。ですから暑い昼間には、水を汲みに来ることはありません。夕方になって涼しくなってから水を汲みに来るのです。そこで女たちは、「井戸端会議」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ように、自然とコミュニケーションが広がっていったのであります。それでは、なぜこの女は、こんな時間に水を汲みに来たのでしょうか。つまり、この女は人々との交わりを避けていたと考えられます。この女は何か「訳アリの女」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
交わりを避けていたため、突然イエス様に話しかけられて驚いたと思います。しかし、それ以上に驚かされたのは、どうやらこの人はユダヤ人でありますが、そのユダヤ人がサマリア人の自分に声を掛けて来たということです。「ユダヤ人のあなたがサマリアの女のわたしに、どうして水を飲ませてほしいと頼むのですか」と答えています。そして9節の後半には「ユダヤ人とサマリア人とは交際しないから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この個所は、英語のある翻訳聖書(NRS)を見ますと、「ユダヤ人はサマリア人と容器を共有しないから」と訳されています。つまり、ユダヤ人は、サマリア人が触れるものは全て汚れるというふうに考えていたために、物を共有することをし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ユダヤ人はそれほどまでにサマリア人を初め異邦人と接触して汚れることを嫌がっていたのでありました。続いて10~12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答えて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神の賜物を知っており、また、『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ったのがだれであるか知っていたならば、あなたの方からその人に頼み、その人はあなたに生きた水を与えたことであろう。」女は言った。「主よ、あなたはくむ物をお持ちでないし、井戸は深いのです。どこからその生きた水を手にお入れになるのですか。あなたは、わたしたちの父ヤコブよりも偉いのですか。ヤコブがこの井戸をわたしたちに与え、彼自身も、その子供や家畜も、この井戸から水を飲んだのです。」”
イエス様は「生きた水」とおっしゃいました。「生きた水」とは、川の水や小川の水など、流れのある水を指します。たとえ湧き水であっても他に流れて行くところがなければ、その水は「生きた水」とは言いませんでした。つまり、イエス様は井戸水ではなく、明らかに他の水のことを語っているのです。何かの譬えなの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ユダヤ人がサマリア人を軽蔑していたのと同じように、サマリア人もユダヤ人のその愚かな行動様式を軽蔑していたために、女はイエス様を嘲るように言いました。「主よ、あなたはくむ物をお持ちでないし、井戸は深いのです。どこからその生きた水を手にお入れになるのですか。あなたは、わたしたちの父ヤコブよりも偉いのですか。ヤコブがこの井戸をわたしたちに与え、彼自身も、その子供や家畜も、この井戸から水を飲んだのです。」
「主よ」という言葉は、女がイエス様のことを神様と認めているということではなく、「先生」といったニュアンスです。相手を持ち上げているのです。女は、イエス様がたとえで話されていることを十分に理解していたはずです。なぜなら「あなたは、父ヤコブよりも自分の方が偉いと主張するのですか?ヤコブがこの井戸を私たちに与え、この井戸から先祖代々、多くの家族と、多くの家畜が養われてきたのです。この井戸の水をただの井戸水と考えてはなりません。この井戸水は、それこそ、別の意味で生きた水なのです」と言っているからです。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とは、ユダヤ人とサマリア人の共通の祖先であり、誰もが尊敬し、崇めている人物でありました。そのヤコブを差し置いてあなたは何を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かと、イエス様をたしなめているのです。しかしイエス様は、二種類の水について根気強く説明を加えます。13~14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答えて言われた。「この水を飲む者はだれでもまた渇く。しかし、わたしが与える水を飲む者は決して渇かない。わたしが与える水はその人の内で泉となり、永遠の命に至る水がわき出る。」”
この「生きた水」とは一体何なのでしょうか。少なくとも、これは霊的なものを語っているのであって、目に見えない水のことを言っているのは明らかです。なぜなら、イエス様の言われる水を飲む者は、決して渇かないと言われるからです。もっと言えば、イエス様の与える水は、その人の内で泉となり、永遠の命に至る水が湧き出ると言われるからです。たとえ井戸の水を汲んで家まで担いでも、やがて水はなくなるでしょう。何度もこの重労働を女たちは繰り返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井戸の水だけに限りません。飲み物だけではなく、食べ物であれ、お金であれ、物質的なものは皆そうですし、物質的なものでなくても、安全、安心、平安、快楽などの精神的なものであっても、それによって一時、満たされたとしても、永遠に満たされる続けることはないのであります。それでは、この「生きた水」とは何なのか、ということですが、幾つかの注解書は、イエス様が十字架と復活の後に送ってくださる「聖霊」のことを指していると書かれていました。私もその通りだと思います。なぜなら、ヨハネ福音書7:37~39に次のような御言葉があるからです。ご覧ください。
“祭りが最も盛大に祝われる終わりの日に、イエスは立ち上がって大声で言われた。「渇いている人はだれでも、わたしのところに来て飲みなさい。わたしを信じる者は、聖書に書いてあるとおり、その人の内から生きた水が川となって流れ出るようになる。」イエスは、御自分を信じる人々が受けようとしている“霊”について言われたのである。イエスはまだ栄光を受けておられなかったので、“霊”がまだ降って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
霊とは、聖霊のことです。宗教改革者カルヴァンは「生きた水」を一義的に「聖霊」であるとしながら、同時に「メシアによって与えられる神の全ての賜物を含ませている」と語っています。すなわち聖さ、義、救い、栄光、子とされること、永遠の命などが、源であるイエス様から尽きることなく流れ出るようになると言うことです。「聖霊」、或いは「メシアによって与えられる上からの賜物」、いずれにしましても、この生きた水のイエス様のメッセージはニコデモ語られた3章1節以降のメッセージと類似しているように思います。イエス様は、ニコデモに「人は新たに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ができない」と言われました。「神の国を見る」ということは、即ちイエス様の与えてくださる「生きた水」を授かる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イエス様が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る生きた水とは、全ての渇きをいやす水であります。この「生きた水」のゆえに、キリスト者は状況に左右されることのない喜びで心が満たさ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健康であろうとなかろうと。勉強がうまくできようとなかろうと。お金があろうとなかろうと。そのような外部の状況とは関係なく、内側から滾々と湧き出て、私たちの渇きを癒し、私たちの人生に喜びと潤いを与えてくださるのです。しかしサマリアの女は、イエス様の言われることをよく理解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15節をご覧ください。
“女は言った。「主よ、渇くことがないように、また、ここにくみに来なくてもいいように、その水をください。」”
女はイエス様の言われることに全く相手にしていないように見えます。イエス様によって語られている素晴らしい約束に一切耳を傾けようとせず、あたかも「もし、そんな水が本当にあるのなら、実際にやってごらんなさい」と突き放しているように見えるのです。この後、この訳アリの女がどのようにしてイエス様の御言葉と真剣に向き合う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のか、それについては16節以降に書かれていますので、次回見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適用】
本日の内容から、私たちが適用できる点は何でしょうか。それは、ユダヤ人とサマリア人の確執がどんなに深くても、救い主メシアの与えてくださる天からの賜物によって、和解す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です。どんなに修正不可能と思われる過去の黒歴史があっても、或いはつまらないプライドに固執するあまり、どんなに両者の歩み寄りが不可能と思われても、私たちの福音宣教は、そのような不可能な壁を乗り越えることができ、和解をもたらし、平和をもたらすことが出来るのです。なぜなら福音とは、何にも代えがたい「生きた水」であり、それは内側から滾々と湧き出て、私たちの渇きを癒し、私たちの人生に潤いを与えてくださり、至福の喜びを与えてくださるからであります。私たちは感情的に苦手の人がいるでしょうか。過去に受けた傷のゆえに中々心を開くことの出来ない家族や知人はいるでしょうか。イエス様がへりくだり、訳アリの女と接点を持ってくださったように、私たちも福音を携えてそのように人々に遜って話しかけ、そしてとりなして祈っていく者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