荒れ野で叫ぶ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ヨハネによる福音書 1章19節~28節
1:19さて、ヨハネの証しはこうである。エルサレムのユダヤ人たちが、祭司やレビ人たちをヨハネのもとへ遣わして、「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質問させたとき、
1:20彼は公言して隠さず、「わたしはメシアではない」と言い表した。
1:21彼らがまた、「では何ですか。あなたはエリヤですか」と尋ねると、ヨハネは、「違う」と言った。更に、「あなたは、あの預言者なのですか」と尋ねると、「そうではない」と答えた。
1:22そこで、彼らは言った。「それではいったい、だれなのです。わたしたちを遣わした人々に返事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あなたは自分を何だと言うのですか。」
1:23ヨハネは、預言者イザヤの言葉を用いて言った。「わたしは荒れ野で叫ぶ声である。『主の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
1:24遣わされた人たちはファリサイ派に属していた。
1:25彼らがヨハネに尋ねて、「あなたはメシアでも、エリヤでも、またあの預言者でもないのに、なぜ、洗礼を授けるのですか」と言うと、
1:26ヨハネは答えた。「わたしは水で洗礼を授けるが、あなたがたの中には、あなたがたの知らない方がおられる。
1:27その人はわたしの後から来られる方で、わたしはその履物のひもを解く資格もない。」
1:28これは、ヨハネが洗礼を授けていたヨルダン川の向こう側、ベタニアでの出来事であっ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ヨハネによる福音書 1章19節~28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2025년6월 1일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요한복음 1장 19~28절
서론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무목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 세례 요한은 빛에 대해 증거하는 자로 예수님보다 먼저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실했던 세례 요한을 통해 오늘도 요한복음으로부터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1) 세례 요한의 부정적 답변
요한복음은 1:19절부터 첫 번째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첫 번쩨 본론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실 메시아라는 표징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인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에 이르기까지의 일주일간의 행적이 오늘 1:19부터 2:12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 요한은 첫째 날 세례요한의 증언을 다루고 있는데, 1:19~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19절 첫머리에「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참고로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왜인지 유독 세배대의 아들 사도 야고보와 사도 요한의 이름만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통 다른 복음서에서는 12제자 사도 요한과 세례 요한을 구분하기 위해 「세례 요한」이라는 식으로 서두를 붙여서 소개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세례」라는 서두가 없이 그냥 「요한」이라고만 나옵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이라고 할 때는 무저건 세례 요한을 지칭하는 것임을 유의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를 활동 무대로 삼았습니다. 그의 밑으로 예루살렘과 유대 전역, 그리고 요단강 연안 지방 일대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세례는 유대교를 믿지 않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받는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방인 아닌 선민 이스라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 요단강에서 일어난 사회현상은 하나의 큰 움직임이 되어 “어쩌면 그야말로 유대에서 오랫동안 끊겨 있던 선지자가 아닐까?”, “혹시 그야말로 올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소문을 불러일으킨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 소문은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조사단으로 세례 요한에게로 보내「네가 누구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권위로 그런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너는 도대체 누구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하는 일은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 자신들의 질서와 권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비친 것입니다. 그들은 위기의식을 갖고 요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메시아는 헬라어로 「그리스도」가 되는데, 직역하면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종말에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심지어는 당시, 자신을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자들도 종종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메시아를 기다리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질문합니다.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라고 묻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로 엘리사 선지자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엘리야가 죽지 않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말라기 4:5절에는 엘리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언이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라기의 예언대로 종말에 여호와의 날이 오기전에 엘리야가 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네가 엘리야냐」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요한이 「아니라」라고 대답하자, 이번에는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선지자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말합니다. 신명기 18:15절에 나오는 모세의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엘리야가 아니라면 혹시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요한은「아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조사단은 요한의 부정적인 답변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라고 또 재차 물었습니다.
(2) 세례 요한의 긍정적인 답변
이제 요한은 조사단의 질문 공세에 대해, 처음으로 긍정적인 답변을 합니다. 요한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2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다른 복음서를 보면 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소 거친 이미지일 수 있지만, 요한은 자신을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광야에서「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외치는 소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사단의 질문에 대답이 조금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지점에서 요한의 충실함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유대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아래로 모여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결코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사명은 빛에 대해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여기서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 즉 빛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와 예루살렘 유대인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즉 어둠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제사장과 레위인과의 대결 구도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의 보냄을 받은 자에게 권위가 있는지는 말할 펼요도 없겠지요. 이미 승패는 정해져 있습니다. 물론 빛의 진영인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편에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다」, 「내가 베푸는 세례에 하늘의 권위가 있다」라고 굳이 공표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옛날에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사자를 보냈습니다. “우리 주인님께서 적에게 승리하셨습니다”라는 전령입니다. 당연히 사자는 자신이 아니라 전령의 전하는 메시지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령자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뿐, “나는 어느 지방에서 온 누구누구인데, 먼저 차부터 한 잔 주지 않겠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자에게 “그러면 주인님은 언제 오시나요?, 주인님의 승리의 개선은 언제쯤이 될까요?”라고 더 물을지 모릅니다. 사자는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곧 다음 전령이 알려 줄 것입니다. 나는 첫 번째 보고로 주님께서 적에게 승리하셨다는 소식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도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임을 확신했지만, 감히 자신의 신분을 밝히거나 자신의 몫을 넘어서는 보고를 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온 조사단은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1:25~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도대체 무슨 권위로 세례를 베풀고 있는지, 누가 그 권위를 주었는지 집요하게 질문합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이 요한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공개하지 않은 것은 앞서 말했듯이 요한은 자신이 복된 소식을 전하는 목소리에 불과하다는 자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증거하기 위함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는 말로 메시아가 이미 도래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메시아는 이미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자신이 베푸는 세례는 나중에 오실 메시아가 은사로 주실 세례에 비하면 아무 가치도 없다고 말합니다. 왜하면 그 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자신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신발끈을 풀어주는 일은 종의 일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종은 주인의 가방을 들어주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은 종종 「주의 종」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서 자신은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는 종 이하의 존재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면서 어디까지나, 오실 메시아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그런 모습을 세례자 요한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성례인 「물 세례」는 그 의식 자체에 어떤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례란 의식 자체에 신비한 힘이나 정결케 하는 힘 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그 자체로 인해 위로부터의 은사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위로부터의 은사와 정결케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례는 예수님의 사역을 가리키는 표적과 징표에 불과합니다. 나중에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일 때 비로서 이 성례라는 것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한은 왜 세례를 베푸냐는 질문에 대해 성례의 세례에 대한 옳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그런 대답을 한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 자체로 어떤 효력이나 정켤케 하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례(마21:25)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을 키우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적용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이 나보다 뛰어나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은사와 존재를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세례 요한도 인간이기 때문에 비슷한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을 높게 평가해도 “내가 혹시 그 선지자가 아닐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자각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고, 자신이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해 증거하는 자라는 것에 철저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마음을 쏟아야 하는 부분이 바로 그런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사람 위에 세워져 있는 사람,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이 점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높아지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본분을 잊고 사명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은사를 가지고 있고, 아무리 멋진 사역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행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종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외치는 목소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때, 자신이 얼마나 죄 많은 사람인지,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사람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시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돌아갈 수 있고, 기쁨 가운데 끝까지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게 나아가는 자로 여겨질것입니다.
【序】
私たちは神によって創造されました。神の永遠のご計画の中で神に無目的に創造されたのではなく、目的を持って創造されました。ですから、神の器として私たちは用いられたいと、敬虔なキリスト者なら誰でも願うものです。洗礼者ヨハネは光について証しする者としてイエス様より先にこの世に遣わされました。神から与えられた使命に忠実であった洗礼者ヨハネを通して、本日もヨハネの福音書から共に御言葉の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1】. 洗礼者ヨハネの否定的な回答
ヨハネの福音書は、1:19から、本論1に入ります。本論1では何が語られているのかと言いますと、イエス様が来るべきメシアであることのしるしが繰り返し語られていきます。本日の個所ではイエス様がまだ現れていませんが、イエス様の第一のしるしであるカナの婚礼の奇跡に至るまでの一週間の営みが、本日の1:19から2:12にかけて記述されています。著者であるヨハネは、第一日目に洗礼者ヨハネの証言を取り上げているのです。1:19~20節をご覧ください。
“さて、ヨハネの証しはこうである。エルサレムのユダヤ人たちが、祭司やレビ人たちをヨハネのもとへ遣わして、「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質問させたとき、彼は公言して隠さず、「わたしはメシアではない」と言い表した。”
19節冒頭に「さて、ヨハネの証しはこうである」とあります。因みにヨハネの福音書の中には、弟子たちの名前が多数出てくるのに、なぜかゼベダイの子であるヤコブとヨハネの名前だけは一度も出てきません。ですから普通、他の福音書では、12弟子のヨハネと、洗礼者ヨハネを区別するために「洗礼者ヨハネ」というふうに前置きを入れて紹介していますが、ヨハネの福音書においては「洗礼者」という前置きがなく、単に「ヨハネ」と出てきます。ヨハネの福音書で「ヨハネ」と言うときは、無条件で洗礼者ヨハネを指しているということにご注意ください。
洗礼者ヨハネは、ユダの荒れ野を活動の舞台としていました。彼の下に、エルサレムとユダヤ全土から、さらにはヨルダン川沿いの地方一帯から、洗礼を受けるために人々が大勢やってきたとマタイ、マルコ、ルカ福音書には書かれています。そもそも洗礼とは、ユダヤ教を信じていない異邦人がユダヤ教に改宗する際に授けられていました。ところが洗礼者ヨハネは、異邦人ではなく、選民イスラエルに対して洗礼を授けていました。「悔い改めよ、神の国は近づいた」と宣言しながら多くの人々に悔い改めの洗礼を授けていたのです。このヨルダン川で起こった社会現象は、一大ムーブメントとなり「ひょっとしたら彼こそ、ユダヤで長い間途絶えていた預言者ではないのか?」「ひょっとしたら彼こそ来るべきメシアではないのか?」という噂を引き起こしたに違いありません。その噂は、エルサレムにいる宗教指導者たちの耳にも届いたことでしょう。エルサレムのユダヤ人たちは、祭司やレビ人たちを調査団として洗礼者ヨハネの下に遣わし、「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質問させています。これは単に名前を聞い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何の権威によってそのような大それたことをしているのか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お前はいったい何者だ?」と問い詰めているのです。ヨハネのしていることは、宗教指導者たちの目に自分たちの秩序と権威を脅かすものとして映っていた訳です。彼らは危機意識を抱きながら、ヨハネに問いただしました。それに対し、ヨハネは、自分がメシアではないことをはっきりさせます。メシアとはギリシア語ではキリストとなり、直訳すると「油注がれた者」という意味です。ユダヤ人であれば、誰でも、終末に神から油注がれた者、メシアが来られ、神の民イスラエルを救い出してくれるということを信じていました。甚だしくは、当時、自分をメシアと自称する者たちもしばしば現れるほどでした。メシア待望の機運が、それほど高ま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そのような背景の中で、洗礼者ヨハネは自分がメシアではないことを明確に伝えました。すると彼らはさらに突っ込んで質問します。「では何ですか。あなたはエリヤですか」と尋ねています。エリヤとは、旧約聖書に出てくる預言者でありまして、預言者エリシャの師匠でもありました。旧約聖書にはエリヤが生きたまま天に挙げら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またマラキ書3:23(4:5)にはエリヤについて次のような預言があります。調べてみましょう。
“見よ、わたしは/大いなる恐るべき主の日が来る前に/預言者エリヤをあなたたちに遣わす。”
イスラエルの人々は、このマラキの預言通り、終末に、主の日が来る前に、エリヤがやって来るということを信じていました。従いまして「あなたはエリヤですか」と質問をしているのです。これに対しヨハネは「違う」と言うと、今度は「あなたは、あの預言者なのですか」と尋ねました。あの預言者とは、モーセのような預言者のことです。申命記18:15のモーセの言葉を調べてみましょう。
“あなたの神、主はあなたの中から、あなたの同胞の中から、わたしのような預言者を立てられる。あなたたちは彼に聞き従わねばならない。”
エリヤではないのなら、ひょっとしたら、モーセのような、あの預言者ではないのかと質問しているのです。しかし、これに対してもヨハネは「そうではない」と答えました。エルサレムから来た調査団は、ヨハネの否定的な回答だけでは満足できません。「それではいったい、だれなのです。わたしたちを遣わした人々に返事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あなたは自分を何だと言うのですか。」と問い詰めました。
【2】. 洗礼者ヨハネの肯定的な回答
さてヨハネは、調査団の質問攻めに対し、初めて肯定的な回答をいたします。預言者イザヤの言葉を用いてヨハネは語りました。23節です。
“わたしは荒れ野で叫ぶ声である。『主の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
他の福音書を読みますと、ヨハネは、荒れ野において、らくだの毛衣を着、腰に革の帯を締め、いなごと野蜜を食べていたと書かれています。少しワイルドなイメージを持たれるかもしれませんが、ヨハネは自分自身のことを、預言者イザヤの言葉にあるように、荒れ野で『主の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叫ぶ声であると認識していました。調査団の質問と答えが少し噛み合っていないように見えますが、実はこの点に、ヨハネの忠実さが現れ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ユダヤ全土から大勢の人々が、ヨハネの下に集まっているのにも拘わらず、ヨハネは決してうぬぼれることなく、神様から与えられた自分の使命をよくわきまえていました。ヨハネの使命とは光について証しすることであります。ヨハネ1:6~8をご覧ください。
“神から遣わされた一人の人がいた。その名はヨハネである。彼は証しをするために来た。光について証しをするため、また、すべての人が彼によって信じるようになるためである。彼は光ではなく、光について証しをするために来た。”
ここで、ヨハネが神から遣わされたとはっきり書かれていますが、本日の個所は、神から遣わされた者、つまり光から遣わされた者と、一方でエルサレムのユダヤ人から遣わされた者たち、つまり暗闇から遣わされた祭司やレビ人とのマッチアップという構図として捉えることもできるのです。どちら側の遣わされた者に権威があるのかは、言うまでもありません。既に勝負はついていますね。もちろん光の陣営である、万物を創造された神の側に権威があります。しかし、ヨハネは、「自分は神から遣わされた者だ。」「自分の授けている洗礼には天からの権威がある」とは、あえて公にしませんでした。一体なぜでしょうか。
昔、戦争で勝利すると、その良き知らせを人々に伝えるために遣いの者が送られました。「私たちの主が敵に勝利した!」という伝令です。当然でありますが、遣いの者は、自分自身ではなく、伝令のメッセージそのものが重要であることを認識しています。ですから遣いの者は人々に対してただメッセージを伝えるだけであり、「我は、どこどこの地方からやってきた、何某と言うものだが、いったんお茶でも一杯飲ませてもらおうか。」などとは言わないのであります。人々は遣いの者にさらに質問するかもしれません。「それでは主はいつ来られるのですか?主の勝利の凱旋はいつ頃になりますでしょうか?」と。遣いの者は、「私にはわかりません。でもきっとすぐに次の伝令が教えてくれることでしょう。私は第一報として、主が敵に勝利したことだけを伝えるよう仰せつかりました。」このように報告するに違いありません。洗礼者ヨハネもこれと同じように、自分が神から遣わされた者であることを確信していましたが、あえて、自分の素性を明らかにしたり、自分の分を超えた報告をしたりすることがないように、わきまえていたのです。
しかしそれでも、エルサレムから来た調査団は納得できませんでした。1:25~27節をご覧ください。
“彼らがヨハネに尋ねて、「あなたはメシアでも、エリヤでも、またあの預言者でもないのに、なぜ、洗礼を授けるのですか」と言うと、ヨハネは答えた。「わたしは水で洗礼を授けるが、あなたがたの中には、あなたがたの知らない方がおられる。その人はわたしの後から来られる方で、わたしはその履物のひもを解く資格もない。」”
祭司やレビ人たちは、一体、何の権威によって洗礼を授けているのか、誰がその権威を与えたのかと、しつこく質問しています。ヨルダン川で洗礼を授けることは、神がヨハネに与えた使命でありました。しかしそのことをあえて公にしなかったのは、さきほども言いましたように、ヨハネは、良き知らせを告げる声に過ぎないという自覚をはっきり持っていたこと、そのこともありますが、さらに言えば、やがて来られるメシアがどれほど偉大な方であるのかを証しするためでもあったとも考えられます。ヨハネはメシアが既に到来していることを「あなたがたの中には、あなたがたの知らない方がおられる」という言葉によって明らかにしました。メシアは既にこの世に来ておられます。そして、ヨハネ自身が授けている洗礼とは、後から来られるメシアが賜物として与えてくださるものに比較して、何の価値もないと言っています。なぜなら、その方の履物のひもを解く資格も自分にはないからです。履物のひもを解く仕事は、僕の仕事でありました。それ以外にも僕は、主人の鞄持ちをしたりします。そのような意味合いで旧約聖書に出てくる預言者は、しばしば「主の僕」として呼ばれました。ところが、ヨハネはここで、自分は、履物のひもを解く資格もない、僕以下のものであると断言しているのです。自分に人々の関心が集まることを避けながら、どこまでも来るべきメシアに、栄光を帰そうとするそのような姿を、洗礼者ヨハネを通して見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神学的に考えますと礼典である、「水の洗礼」には、その儀式自体には何か効力があるのではありません。礼典とは、儀式それ自体に神秘的な力や、清めの力などがある訳ではないのです。或いはそれ自体によって、上からの賜物が与えられるのでもありません。上からの賜物と清めは、あくまで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与えられるのであります。従って礼典とは、イエス様の御業を指し示すしるしや印に過ぎないのです。後から来られるメシアであられるイエス様を信じ、受け入れることによって、初めてこの礼典というものは意味が出てくるのであります。そのことを洗礼者ヨハネが知ってか知らでか定かではありませんが、ヨハネは、なぜ洗礼を授けているのかという質問に対し、礼典に対する正しい理解が得られるような、そんな答え方をしたのでありました。ヨハネの洗礼とは、それ自体において、何か効力や、清めの力があるのではありませんが、それはまさに神によって定められた礼典であり(マタ21:25)、神の民の信仰を育み、イエス様とのつながりをより強くするためのものであったのです。
【適用】
人は誰でも自分のことが大好きで、自分を認めてほしいという欲望を持っています。他人が自分より優れているという考え方より、むしろ自分の賜物と自分の存在をリスペクトしてほしいと考えてしまうのです。洗礼者ヨハネも、人間ですから同じような誘惑があったことでしょう。しかし、彼は人々がどんなに自分自身を持ち上げても、「私はもしかしたらあの預言者なのかもしれない」などとは考えず、謙遜に、自分は荒れ野で叫ぶ声に過ぎないという自覚をはっきり持っていました。彼は自分に与えられている使命に忠実になり、自分は光ではなく、光について証しする者であるということに徹底していたのです。今日、私たちがイエス様を信じ、イエス様に心を配らなければならない部分はまさにそのような点だと思わされました。特に、人の上に立つ者、指導的な立場に立つ者ほど、この点についてきちんと整理され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人は他人から持ち上げられると、自分でも知らないうちに、身の丈を超えて、自分の本分を忘れ、使命から離れてしまうことがあるからです。私たちがどんなに素晴らしい賜物を持っていても、どんなに良い働きをしても、それは神様が私たちを通してなしてくださった業であります。私たちは取るに足りない僕に過ぎません。私たちは『主の道をまっすぐにせよ』と叫ぶ声に過ぎないのです。私たちは、日々御言葉を通してイエス様を知り、イエス様の恵みの中に生かされる時、自分がいかに罪深い者なのか、自分がいかに高慢で、心無い者なのかを思い知らされることでしょう。そのような時、再び私たちは主に支えられて、神から与えられた使命に立ち返ることが出来、喜びの中で最後まで与えられた使命に忠実に歩み続ける者とされ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