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きている者の神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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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2章23節~33節
23その同じ日、復活はないと言っているサドカイ派の人々が、イエスに近寄って来て尋ねた。
24「先生、モーセは言っています。『ある人が子がなくて死んだ場合、その弟は兄嫁と結婚して、兄の跡継ぎをもうけねばならない』と。
25さて、わたしたちのところに、七人の兄弟がいました。長男は妻を迎えましたが死に、跡継ぎがなかったので、その妻を弟に残しました。
26次男も三男も、ついに七人とも同じようになりました。
27最後にその女も死にました。
28すると復活の時、その女は七人のうちのだれの妻になるのでしょうか。皆その女を妻にしたのです。」
29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あなたたちは聖書も神の力も知らないから、思い違いをしている。
30復活の時には、めとることも嫁ぐこともなく、天使のようになるのだ。
31死者の復活については、神があなたたちに言われた言葉を読んだことがないのか。
32『わたしはアブラハムの神、イサクの神、ヤコブの神である』とあるではないか。神は死んだ者の神ではなく、生きている者の神なのだ。」
33群衆はこれを聞いて、イエスの教えに驚い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2章23節~33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2019년 1월6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2장 23절~33절
예수님은 공생애의 마지막 고난의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고 계셨지만,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찾아온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과의 논쟁이 끝나고 그들이 도망치듯 떠나간 후에도 논쟁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사두개파는 제사장이었지만, 평범한 제사장이 아니라 돈을 가진 귀족 계급에 속한 제사장이었으며, 특히 정치적 권력을 가진 고위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이나 성전에서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종교 지도자이면서도 평소 종교적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나사렛 예수가 갈릴리에서 많은 백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도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현실주의자였고, 관심사는, 오로지 로마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세속적 권력을 지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도 큰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 연구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고작 믿는다고 하는 것은, 천사나 부활에 관한 기록이 없는 율법이라 불리는 모세 오경뿐이었고, 그 외의 선지서나 여러 책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선지서란 선지자들의 책입니다. 사무엘기나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등이죠. 여러 책이란 시편이나 잠언, 아가, 욥기 등의 시가입니다.
예를 들어, 부활에 관한 기록은 이사야서(26:19), 다니엘서(12:2), 시편 등에 나오지만, 사두개인들은 이를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끝이야!」라고, 지금으로 말하면, 유물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와 논쟁을 걸어온 것도, 예수님께 살의를 품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보다, 오히려 비뚤어진 질문으로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가르치던 성경 속, 모순점을 지적하고 그 가르침을 비웃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오늘 사두개인들의 공격을 통해, 사탄이 우리에게서 믿음을 빼앗는 전형적인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즉, 사탄은 그리스도인에게 이 세상에만 주의를 집중하게 하여,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죽음」을 마치 고양이나 개나 짐승의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방식을 매일 심어주는 것입니다.
내세에, 경건한 자에게 숨겨진 놀라운 상도 없고, 내세에 불경건한 자, 악인에게 내릴 무서운 형벌도 전혀 없다고 믿게 하며, 이 세상만이 전부다, 돈만이 전부라고 강요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을 읽어도 그들의 조상인 족장들이 하늘의 삶을 향해 하나님과 함께 걸어갔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 한 그들의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24-28절을 보십시오.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여기서는 신명기 25장 5~10절의 모세의 말씀이 인용되었는데, 이 율법의 규정은 이른바「형제 계승 혼인(레비라트 결혼)」에 관한 법입니다. 본래 이 법이 제정된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기업의 땅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약속된 상속지가 영원히 끊어지지 않음을 상징했습니다. 실제로 성경 속에서 이 법에 따라 자손을 얻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이 레비라트 결혼 법에 따라, 창녀를 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 아들을 얻은 다말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보아스와 결혼한 룻입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합니다. 그러한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듯, 사두개인들은 일곱 남편의 아내는, 부활 후에, 대체 누구와 결혼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부활이라는 어리석은 가르침을 믿기 때문에 이런 모순이 생긴다는 듯이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유대인의 전승(탈무드)」에는 맏아들과 결혼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설득력 있는 답변은 아니었고, 어떤 이들은 가장 부부 사이가 좋았던 남편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질문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인지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 같은 건 버리고, 정신 차려 현실을 보라는 듯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부활의 문제」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 지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부활이나 내세에 관한 일은, 인간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에,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경외하며 바라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부활이나 영생은, 이 세상의 질서나 이 세상의 사고방식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초월해 있는 것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활 때, 모든 면에서 천사들과 완전히 동일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인 존재인 천사에게는 결혼이나 출산, 사망과 같은 육체적 변화가 없듯이, 영과 몸을 함께 지닌 인간은, 부활 때 몸을 가지면서도 천사처럼 결혼, 출산, 사망이 없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자들의 수가 이미 정해져 있어, 단 한 사람도 더하거나 줄지 않는 부활 후의 천국에서는, 자손을 낳아 번식시키기 위한 결혼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도저히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비로운 몸이지만, 성경의 다른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2-44를 참조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5장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바울에 따르면 현세에서는, 자연의 생명으로 된 몸으로 심겨지지만, 내세에서는, 성령께 속한 몸으로 부활한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를 들어 식물의 씨앗과 꽃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땅에 심겨질 때는 작고, 싹 텃을 때의 모습을 알 수 없고, 하찮은 모습의 씨앗이지만, 결국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혹은 땅을 기어 다니던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어, 결국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몸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이 세상 사고방식이나 이 세상 질서를 연장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초월한 모습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조상들이 하늘의 삶을 향해 하나님과 함께 걸어갔던 것, 즉 영생과 부활에 대해 그들이 믿고 권위를 두었던 모세 오경으로 증명된다고 말씀하십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출애굽기 3:6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이 앞뒤 문맥을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 p96 성경(일본어 성경)을 보십시오.「모세의 소명」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호렙 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을 때,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라고 현재 시제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제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될지 모르지만, 계속 읽어 나가면 이 말씀의 깊이가 전해집니다. 모세는 이전에, 아직 40세였을 때, 자신이 이스라엘의 해방자가 되려다 큰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쉽게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3장 12-15절을 보십시오.
출애굽기 3장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게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하나님께서는 14절에서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 이름은「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입니다. 히브리어로 여호와는「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15절을 보면 「하나님 여호와」라고 되어 있는데, 이 구절은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가 됩니다.
어디에 있는 누구라도 자식이 없는데 아버지가 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신하가 없으면 왕이라 칭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족장들이 지금 살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여호와,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나는 함께 있다」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족장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그 언약 관계는, 족장들이 죽었다고 해서 언약이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을 자신께로 부르셔서 함께 계시며, 한때는 죽은 존재였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언약 안에 있어, 살아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때 죽었을 영혼이, 주님 앞에 살아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로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 함께 있다」는 이름이시기에,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죽은 후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살아간다는 생명의 소망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분은, 결코 죽은 후 무(無)가 된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무리는 이를 듣고 놀랐습니다. 사도개인들이 아니라 무리가 된 것은, 이 사도개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무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현대든 고대든, 현실주의자인 사도개인들의 하나님은 너무나 작고 무능하신 분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은 자의 하나님이라 불리기에 합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들을 고양이나 개 같은 짐승의 삶으로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의 사랑 안에 그 신앙의 기초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신약 시대에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함으로써 더욱 강력하게 보강되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성경에서 부활의 몸에 관해,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에 관해선, 숨겨져 비유로만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걸음이 하늘을 향한 인생이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영적인 것이며 영원한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상 생애가 끝난 후, 신속히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실 것입니다.
イエスさまは、最後の受難週をエルサレムで過ごしておられますが、イエスさまを罠に陥れようとやって来たファリサイ派の人々とヘロデ党との論争が終わり、彼らが逃げるように立ち去った後にも、論争は止むことがありませんでした。今度はサドカイ派の人々がイエスさまに近づいてきました。サドカイ派とは、祭司は祭司でありましたが、普通の祭司ではなく、お金を持った貴族階級に属する祭司であり、特に政治的権力を有したハイレベルな人々でした。彼らはイスラエルの最高議会であるサンヘドリンや、神殿においてのみ見かけることのできる人々です。サドカイの派の人々は、宗教指導者でありながら、普段から宗教的な事にはあまり関心を持っていませんでしたので、ナザレのイエスがガリラヤで多くの民衆を教えていることについても特に関心がありませんでした。
彼らは、いわば現実主義者であり、専らの関心事といえば、ローマとの関係において自分たちの世俗的な権力を守ることだけでした。ですから民衆からもあまり支持を得られませんでした。彼らにとって、聖書の研究は重要事項ではありません。せいぜい信じられるのは、天使や復活の記事がない律法と呼ばれるモーセ五書だけで、その他の預言書や諸書は信じていませんでした。預言書とは預言者の書です。サムエル記とかイザヤ書とかエレミヤ書です。諸書とは、詩編とか箴言、雅歌、ヨブ記などの詩歌です。
例えば、復活の記事は、イザヤ書(26:19)、ダニエル記(12:2)、詩編などに出てきますが、サドカイ派はそれらを一切信じません。「人間、誰でも死んだら終わりなんだよ!」と、今でいう、唯物論的な思想を持っていました。ですから、イエスさまに近づいてきて、論争を振りかけてきたのも、イエスさまに対し殺気立って罠に陥れるためというより、むしろひねくれた質問によってイエスさまが命がけで教えていた聖書の中の矛盾点を指摘し、その教えを鼻で笑うため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私たちは本日のサドカイ派の攻撃を通して、サタンが私たちから信仰を奪い去る典型的な方法を学ぶことが出来ます。つまり、サタンはキリスト者に、この世だけに注意を向けさせて、死んだらすべてが終わりであり、「神のかたちに造られたはずの人間の死」を、あたかも猫や犬や獣の死となんら変わることがないような、考え方を日々植え付けるのです。
来世における、敬虔な者に対する隠されている素晴らしい報いもなければ、来世における、不敬虔な者、悪人に対する恐ろしい罰なども、一切ないと信じ込ませませ、この世が全てだ、金が全てだと迫ります。サドカイ派の人々はモーセ五書を読んでも彼らの先祖である族長たちが、天の人生に向かって神と共に歩んでいたことを全く理解できませんでした。それではイエスさまにした彼らの質問を見てみましょう。24-28節をご覧ください。
「先生、モーセは言っています。『ある人が子がなくて死んだ場合、その弟は兄嫁と結婚して、兄の跡継ぎをもうけねばならない』と。
さて、わたしたちのところに、七人の兄弟がいました。長男は妻を迎えましたが死に、跡継ぎがなかったので、その妻を弟に残しました。
次男も三男も、ついに七人とも同じようになりました。
最後にその女も死にました。
すると復活の時、その女は七人のうちのだれの妻になるのでしょうか。皆その女を妻にしたのです。」
ここでは申命記25章5~10節のモーセの言葉が引用されていますが、この律法の規定は所謂、「義理の兄弟の結婚(レビラト婚)」に関する法律です。本来、この法律が定められた目的は、神の民の嗣業の土地が絶えないように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天における神の民の約束の相続地が、永遠に絶えることがないことを象徴していました。実際に聖書の中でこの規定に従って結婚をした人物が出てきます。一人はユダと結婚することになる、遊女を装ったタマルであり、もう一人は、ボアズと結婚したルツです。面白いことに二人ともイエスさまの家系図に出てきます。そのようなご自身の民に対する神さまの計らいを無視するように、サドカイ派の人々は7人の夫の妻は、復活した後一体誰と結婚するのかと質問しました。復活という愚かな教えを信じるから、このような矛盾がでてくるんだと言わんばかりです。この質問に、ユダヤ人の「言い伝え(タルムード)」には、長男と結婚するべきだと書かれています。…しかし、あまり説得力はなく、ある人は最も夫婦仲が良かった夫と結婚することになると考えていた人もいたかもしれません。いずれにしてもこの質問の背景には、神の御言葉を信じることがどれだけ愚かなことで、常識から考えてみても恥ずかしいことなのかということを悟らせようとしているのです。福音を信じているキリスト者に対し、信仰なんか捨てて、目を覚まして現実を見なさいと言っているかのようです。
それに対してイエスさまのお答えを見ると、「復活の問題」を、神の力と神の御言葉に関連付けています。なぜなら復活とか来世のことは、人間の理解をはるかに超える事柄なので、万物を統治しておられる神の無限の力を敬って、それを眺めなければ、決して信じることが出来ないからだと思われます。復活とか永遠の命とは、この世の秩序やこの世の考え方の延長上にあるのではなく、完全に超越しているのです。29-30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あなたたちは聖書も神の力も知らないから、思い違いをしている。
復活の時には、めとることも嫁ぐこともなく、天使のようになるのだ。
天使のようになると書かれていますが、これは、神の子供たちが復活の時、すべての面において天使たちと全く同じにな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霊的な存在である天使には結婚や出産や死亡といった肉的変化がないように、霊と体を併せ持つ人間は、復活の時、身体を持ちながらも、天使のように結婚、出産、死亡することのない存在に変え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救われる者たちの数が既に決められていて、だれ一人増えたり、減ったりすることのない復活後の、天国においては、子孫を産んで繁殖させるための結婚は不必要なのです。これは、到底今の私たちには想像もできないような神秘な体ですが、聖書の他の箇所見ると次のように説明されています。1コリント15:42-44 p322をご覧ください。
死者の復活もこれと同じです。蒔かれるときは朽ちるものでも、朽ちないものに復活し、
蒔かれるときは卑しいものでも、輝かしいものに復活し、蒔かれるときには弱いものでも、力強いものに復活するのです。
つまり、自然の命の体が蒔かれて、霊の体が復活するのです。自然の命の体があるのですから、霊の体もあるわけです。
パウロによると現世においては、自然の命の体でまかれますが、来世においては、御霊に属する体に復活するとあります。簡単に言うと、例えば植物の種と花の関係に譬えられます。地にまかれる時には、小さくて、薄暗く、醜い種ですけれど、やがて綺麗な花を咲かせます。或いは、地をはっていた毛虫が、サナギとなり、やがてきれいな蝶になるのです。ですから復活の体について考える時に、私たちのこの世の考え方やこの世の秩序を延長しても意味がないということです。完全に超越した姿に変えられるからです。そしてイエスさまは最後に、族長たちが、天の人生に向かって神と共に歩んでいたこと、つまり永遠の命と復活について、彼らが信じ権威を置いていたモーセ五書によって証明されます。31-32節をご覧ください。
死者の復活については、神があなたたちに言われた言葉を読んだことがないのか。
『わたしはアブラハムの神、イサクの神、ヤコブの神である』とあるではないか。神は死んだ者の神ではなく、生きている者の神なのだ。」
この御言葉は、出エジプト記3:6からの引用ですが、この前後の文脈を合わせて理解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旧約p96聖書をご覧ください。「モーセの召命」という小見出しがつけられています。ホレブ山において燃える柴を通して神はモーセに語り掛けられた時、もう既に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が死んで長い年月が経過していたにも関わらず、それでも神はご自身のことを、「彼らの神であった」と言わず、「彼らの神である」と現在形で言われました。この時制に一体どんな意味があるのかと思わるかもしれませんが、さらに読み進んでいくと、この言葉の深みが伝わってきます。モーセは以前、まだ40歳だったとき、自分がイスラエルの解放者になろうとして手痛い失敗をしていますから、神の召命に中々応答する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3章12-15節をご覧ください。
神は言われた。「わたしは必ずあなたと共にいる。このことこそ、わたしがあなたを遣わすしるしである。あなたが民をエジプトから導き出したとき、あなたたちはこの山で神に仕える。」
モーセは神に尋ねた。「わたしは、今、イスラエルの人々のところへ参ります。彼らに、『あなたたちの先祖の神が、わたしをここに遣わされたのです』と言えば、彼らは、『その名は一体何か』と問うにちがいありません。彼らに何と答えるべきでしょうか。」
神はモーセに、「わたしはある。わたしはあるという者だ」と言われ、また、「イスラエルの人々にこう言うがよい。『わたしはある』という方がわたしをあなたたちに遣わされたのだと。」
神は、更に続けてモーセに命じられた。「イスラエルの人々にこう言うがよい。あなたたちの先祖の神、アブラハムの神、イサクの神、ヤコブの神である主がわたしをあなたたちのもとに遣わされた。これこそ、とこしえにわたしの名/これこそ、世々にわたしの呼び名。
神さまは、14節でご自身の名前をモーセに啓示されました。その名とは「私はある」です。ヘブライ語で、ヤハウェとは、「私はある」という意味です。15節を見ますと「神である主が」とありますが、この箇所は「神であるヤハウェが」、つまり、アブラハムの神、イサクの神、ヤコブの神である「私はある」が…という意味になります。
どこの誰であっても、子どもがいないのに父にはなれませんね。同じように臣下がいなければ王と名乗ることは出来ません。それと同じように、族長たちが、もし、今生きていないならば、どのようにしてヤハウェ、つまり「私はある、私は共にいる」という名で呼ばれるのでしょうか。ヤハウェは族長たちと永遠の契約を結ばれて、彼らを御自身の民とされ、その契約関係は族長たちが死んだから契約が破棄されるのではなく、父祖たちをご自身のもとへ招き、共にいてくださり、一度は死んだ存在でありますが、神の永遠の愛の契約の中にあって、生かされていると言うことなのです。一度は死んだはずの魂が、御前にあって生きているならば、それは死んだのではありません。「主のみ許に召された」と言うべきです。神の名がヤハウェ、つまり「私はある、共におられる」という名であられるからこそ、キリスト者がこの世で死んだ後に、神と共に天において生きていくという、命の希望が残っているのです。「私はある」というお方は、決して死んだ後、無になった者の神ではなく、契約の中に生きている者たちの神なのです。
群衆はこれを聞いて驚きました。サドカイ派ではなく、群衆となっているのは、このサドカイ派との対話を通して群衆のための教えであったと思われます。
現代であれ、古代であれ、現実主義者であるサドカイ派の人々の神はあまりにも小さく、無能なお方です。それはまさに死んだ者の神と呼ばれるのにふさわしいのかもしれません。そして同時自分たちを猫や犬などの獣の人生に貶めているのです。しかし、死人の復活を信じるキリスト者の信仰は、神の無限の力に根拠があり、神の恵みと、契約の愛の中にその信仰の基礎が置かれています。そして、その信仰は、新約の時代、私たちの復活の初穂となられたイエスさまの復活を体験することによって、さらに力強く補強されることになりました。
確かに聖書において、復活の体について、天国での永遠の命については、隠されていて比喩によってでしか語られていません。しかし、だからと言って、私たちの歩みが天に向かった人生であり、私たちと神様との間に結ばれている契約は霊的なものであり、永遠なものであることに変わりありません。ヤハウェなる神さまは、私たちの地上の生涯が終わったのち、速やかに私たちをご自身のもとへ召してくださ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