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徒の交わりの疎外 성도의 교제가 소홀히 여겨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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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ネヘミヤ記 5章1節~19節
5:1民とその妻たちから、同胞のユダの人々に対して大きな訴えの叫びがあがった。
5:2ある者は言った。「わたしたちには多くの息子や娘がいる。食べて生き延びるために穀物がほしい。」
5:3またある者は言った。「この飢饉のときに穀物を得るには畑も、ぶどう園も、家も抵当に入れなければならない。」
5:4またある者は言った。「王が税をかけるので、畑もぶどう園も担保にして金を借りなければならない。
5:5同胞もわたしたちも同じ人間だ。彼らに子供があれば、わたしたちにも子供がある。だが、わたしたちは息子や娘を手放して奴隷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ある娘はもう奴隷になっている。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畑とぶどう園はもう他人のものだ。」
5:6この嘆きと訴えを聞いて、わたしは大いに憤りを覚え、
5:7居たたまれなくなって貴族と役人をこう非難した。「あなたたちは同胞に重荷を負わせているではないか。」わたしはまた大きな集会を召集して、
5:8言った。「わたしたちは異邦人に売られていた同胞のユダの人々を、できるかぎり買い戻した。それなのに、あなたたちはその同胞を売ろうというのか。彼らはわたしたち自身に売られることになるのに。」彼らは黙りこみ、何も言えなかった。
5:9わたしは言った。「あなたたちの行いはよくない。敵である異邦人に辱められないために、神を畏れて生きるはずではないのか。
5:10わたしも、わたしの兄弟も部下も金や穀物を貸している。わたしたちはその負債を帳消しにする。
5:11あなたたちも今日あなたたちに負債のある者に返しなさい。畑も、ぶどう園も、オリーブ園も、家も、利子も、穀物も、ぶどう酒も、油も。」
5:12彼らはそれに答えた。「返します。何も要求しません。お言葉どおりにします。」わたしはこの言葉どおり行うよう誓わせるために祭司たちを呼んだ。
5:13わたしはまた衣の折り重ねたところを振るいながら言った。「この約束を守らない者はだれでも、このように神によってその家と財産から離され、振るい落とされるように。このように振るい落とされて無一物となるように。」会衆は皆で、「アーメン」と答え、神を賛美した。民はその言葉どおり行った。
5:14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の第二十年に、わたしはユダの地の長官に任命されたが、その日から第三十二年までの十二年間、わたしも兄弟たちも長官の給与を一度も受け取らなかった。
5:15わたしの前任者は民に重荷を負わせ、パンとぶどう酒に加えて、銀四十シェケルを徴収した。彼らの配下の者も民を圧迫した。しかし、わたしは神を畏れ、そのようなことを決して行わなかった。
5:16わたしはこの城壁の工事にも力を注ぎ、土地を買収したりはしなかった。配下の者も皆、工事のためにここに集まっていた。
5:17ユダの人々と役人合わせて百五十人、それに周りの国々から来た人々も、わたしの食卓に着いた。
5:18毎日用意されたものは、牛一頭、特選の羊六匹、鳥で、わたしのために用意され、十日ごとにはあらゆる種類のぶどう酒が十分用意された。だが、このためにも長官の手当を要求しなかった。再建作業がこの民にとって重荷となっていたからである。
5:19神よ、わたしがこの民に尽くしたすべてのことを快く心に留めてください。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ネヘミヤ記 5章1節~19節
성도의 교제가 소홀히 여겨질 때
2025년 2월16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느헤미야 5장 1~19절
서론
유다 백성들이 성벽 재건 공사에 몰두하는 동안,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사를 돌보는 사람들로부터 비통한 부르짖음이 들려 왔습니다. 아마도 공사에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탓에 농사일을 소홀히 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곡식을 충분히 생산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빛을 지고 농지, 포도원 등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은 느헤미야는 자신의 총독의 월급을 포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스스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오늘도 느헤미야서를 통해 은혜를 받기를 소망합니다.
(1) 백성들의 부르짖음
1절에는「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르짖음」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를 보면 「자아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자아카」를 그냥 지나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부르짖음의 이유를 살펴보면, 같은 유대인인 부유한 자들이 동족을 괴롭히고 착쥐하는 구도가 보입니다.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3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4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5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위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이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호소하는 부르짖음이 점차 거세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곡식을 얻기 위해 농지와 포도원을 담보로 빚을 내어 식량을 구입했습니다. 또한 페르시아의 역대 왕들은 토지에서 산출된 곡물에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은 아닥사스다 왕에게도 세금 부담을 지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더욱 가난해져 결국 노예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에는 이스라엘 동포에게 돈을 빌려줄 때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2:25~27을 참고하십시오.
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26 네게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27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보시다시피 이웃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겉옷을 빚의 담보로 삼은 경우에는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겉옷은 이불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것을 돌려주지 않으면 그는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고리대금업은 어디까지나 자선 행위일 뿐, 걸코 사업으로 성립되는 상업적 행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보고 들은 내용은 이런 율법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부유층인 귀족과 관료들은 백성들로부터 담보를 받아 이를 운용하거나 이자를 요구하며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더욱 가난해져 부정적인 악순환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빈부격차 확대에 가담한 것은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동포인 부유층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느헤미야는 크게 분노하여 큰 집회를 소집하고, 그 자리에서 부유층인 귀족과 관료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 비난의 방식은 늘 그렇듯 일방적으로 그들을 단죄하는 방식이 아니라, 먼저 느헤미야 자신부터 회개의 고백과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9~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10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11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느헤미야는「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라며 곡식을 빌려준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느헤미야가 제안하는 것은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이자를 받거나 담보를 요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채무자로부터 이자 지불과 담보 제공이라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것이지, 빚 자체를 완전히 탕감해 주라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귀족과 관리들에게 담보로 받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과 집을 돌려주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운용 수익률과 수익금을 돌려주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족과 관리들은「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느헤미야의 권유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이권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의 동기로 움직이는 느헤미야의 권고를 따랐습니다.
애초에 느헤미야가 시작한 성벽 재건 사업은 단순한 공공사업도 아니고, 민족의 부흥운동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의 회복이었고, 하나님의 몸인 교회의 회복이었습니다. 이 대전제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 구속되었다는 소망을 가지고 시작한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구속받은 백성이 그들 스스로가 다시 동족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예로 팔려간 자들과 그 가족들은 그 당시 먹을 것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앞날이 보이지 않아 완전히 망연자실했을 것입니다. 성벽 재건의 희망 따위는 이미 무의미해졌을 것입니다. 귀족과 관리들이 성벽 재건에 열심일수록 가난한 자들은 구석에 쓸쓸히 소외되어 있었는데, 1절의 「자아카」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부르짖음이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5:7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מִשְׁפָּט 미쉬파트)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מִשְׂפָּ֔ח 미쉬파하)이요 그들에게 공의(צְדָקָה 체다카)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צְעָקָֽה 체아카)이었도다
괄호 안의 부분은 제가 보충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포도원이 나올 때는 대부분 이스라엘의 집, 즉 교회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구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집, 교회에서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사실 운율이 있고, 말장난처럼 되어 있습니다. 「미쉬파트」와 「미쉬파하」, 「체다카」와 「체아카」가 운율로 연결되어 있는데, 미쉬파트(정의)를 기다렸는데 미쉬파하(포학)가, 체다카(공의)를 기다렸는데 체아카(부르짖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실망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말한 이 말씀은 느헤미야 시대의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왜곡된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권면에 순종하여 제사장들 앞에서 맹세하고, 회중은 모두 「아벤」으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되찾은 것입니다.
(2) 성도의 교제
우리가 예배 중에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믿사옵나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성도의 교제, 라틴어로는 「콤뮤니오・상토롬 communio sanctorum」이라고 합니다. 교제(communio 콤뮤니오)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로 「교제」라는 의미외에 「나눔」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성도의 교제」, 교회란 「성도의 나눔」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 성도의 나눔, 여기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원래 교회라는 것은, 조합이나 단체를 의미하는 협회는 아닙니다. 교회와 조합, 단체를 의미하는 협회(쿄우카이)와 교회(쿄우카이)는 일본어로 발음은 같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협회가 자발적인 가입에 의해 발생하는 반면,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교회는 성령에 의해 새롭게 태어남으로써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자발적인 가입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백성입니다. 만약 그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 성도의 교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성도의 교제를 위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는 성도가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12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영적 은사를 간절히 구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는 결코 땅에 묻어두거나 경시해서는 안 되며, 다른 성도들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 은사는 교회 전체가 세워지는 데 사용되며, 가장 탁월한 사랑의 은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벽을 재건할 때 드러난 귀족과 관리들이 행한 일은 바로 성도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의 교제와 교회를 안으로 부터 위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깨달은 느헤미야는 스스로 회개하고 성도의 교제를 실천하며 사람들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14~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4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5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16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여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17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18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여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여기에는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에 총독으로 임명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임자는 백성들에게 짐을 지우고 양식과 포도주 외에 은 40세겔까지 징수했던 것 같은데,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70년 전에 유다 총독으로 스룹바벨이 임명된 것은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스룹바벨 이후 누가 유다 총독이 되었는지는 성경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방인이 총독이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으로서 월급을 받지 않았다는 점과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식사 대접을 했다는 점입니다. 매일 유다 사람들과 관리들을 합쳐 150명, 그리고 주변 나라에서 온 사람들까지 느헤미야의 식탁에 초대했습니다. 성대한 연회입니다. 그 식사는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월급의 일부였을지 모르지만, 그 식탁을 통해 하루의 노고를 달랬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넘쳐났을 것입니다. 이 큰 경제적 지출을 느헤히먀는 공비에서 지출하지 않고 자비로 부담했습니다. 느헤미야가 한 일이란, 식사 대접을 통해 성도들의 교제를, 성도들의 나눔을 촉진시켰다는 것이 아닐까요? 느헤미야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주님의 몸을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열려져 있는 자유로운 공동체를 구축한 것입니다.
결론
오늘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도의 교제를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보여주신다면, 느헤미야처럼 앞장서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용하고 헌신해 나가야 합니다. 성도 개개인에게 주신 은사는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우월감에 빠지기 위한 것도 아니고, 남을 통제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에 주어진 은사이며, 서로를 섬기고 주님의 몸을 세우기 위한 은사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영적인 은사가 주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은사는 가장 뛰어난 사랑의 은사에 순종하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성도의 교제를 위해 겸손히 섬기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序】
ユダの民が城壁再建工事に無我夢中に取り組んでいる中、家で農作業をしつつ、家事を守っている者たちから悲痛の叫び声が挙がってきました。恐らく工事に多くの人々が動員されたため、農作業がおろそかになり生計を維持するための穀物を、十分に生産することが出来なくなったのでしょう。貧しい人々は、食糧を購入するために借金をし、自分たちの農地、ぶどう園などを手放す状況に陥りました。民の叫びを聞いたネヘミヤは、自分の総督としての給与を放棄し、貧しい人々のために仕え、自ら模範を示しました。本日もネヘミヤ記を通して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1】. 民の叫び
1節には、民とその妻たちから、大きな訴えの叫びがあがったとあります。「叫び」という言葉はヘブライ語を見ますと、「ツェアカ」という言葉が用いられています。主なる神は、イスラエルの民の叫び声「ツェアカ」をそのまま見過ご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必ずその叫び声に応えてくださるお方です。しかし、叫び声があがったその理由について調べてみるなら、同じユダヤ人である富裕層の者たちが、同胞を苦しめ、搾取しているという構図が見えてきました。2~5節をご覧ください。
“ある者は言った。「わたしたちには多くの息子や娘がいる。食べて生き延びるために穀物がほしい。」またある者は言った。「この飢饉のときに穀物を得るには畑も、ぶどう園も、家も抵当に入れなければならない。」またある者は言った。「王が税をかけるので、畑もぶどう園も担保にして金を借りなければならない。同胞もわたしたちも同じ人間だ。彼らに子供があれば、わたしたちにも子供がある。だが、わたしたちは息子や娘を手放して奴隷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ある娘はもう奴隷になっている。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畑とぶどう園はもう他人のものだ。」”
「ある者は言った」という言葉が三回出てきます。訴えの叫びが徐々に強まる様相を見せています。貧しい者たちは、穀物を得るために、農地やぶどう園を担保に出して借金をし、食べ物を購入しました。また、ペルシアの歴代の王たちは、土地から算出された穀物に税金を徴収するようにしていたため、ユダの民は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に対しても、税の負担を負っていました。貧しい者はさらに貧しくなり、ついには奴隷になる以外に方法はありませんでした。ところで律法には、イスラエルの同胞にお金を貸す場合、次のように規定されていました。出エジプト記22:24~26をご覧ください。
“もし、あなたがわたしの民、あなたと共にいる貧しい者に金を貸す場合は、彼に対して高利貸しのようになってはならない。彼から利子を取ってはならない。もし、隣人の上着を質にとる場合には、日没までに返さねばならない。なぜなら、それは彼の唯一の衣服、肌を覆う着物だからである。彼は何にくるまって寝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もし、彼がわたしに向かって叫ぶならば、わたしは聞く。わたしは憐れみ深いからである。”
御覧の通り、同胞から利子を取っ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そして、上着を借金の担保として取った場合には、日没までにそれを返してやりなさいと書かれています。当時上着は布団の役割をしていましたので、それを返さないと、彼は風邪をひいてしまうからです。ですからイスラエルにおいて、金貸しというのは、あくまで慈善行為であって、決して事業として成り立つ商業行為では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分かってきます。ところが、ネヘミヤが見聞きした内容は、このような律法の教えとはかけ離れたものでありました。富裕層である貴族と役人は、民から担保を取ってそれを運用し、或いは利子を要求し、ビジネスを行っていたのです。貧しい者は、さらに貧しくなり、負のスパイラルにはまっていきました。イスラエルの貧富の格差の拡大に加担していたのは、実にイスラエルの同胞である富裕層であったのです。そのことが判明した時、ネヘミヤは大いに憤りを覚え、大きな集会を召集し、その集会の中で富裕層である、貴族と役人を非難しました。しかし、その非難の仕方は、いつものように、一方的に彼らを断罪する仕方ではなく、まずネヘミヤ自身から悔い改めの告白と模範を示しています。9~11節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は言った。「あなたたちの行いはよくない。敵である異邦人に辱められないために、神を畏れて生きるはずではないのか。わたしも、わたしの兄弟も部下も金や穀物を貸している。わたしたちはその負債を帳消しにする。あなたたちも今日あなたたちに負債のある者に返しなさい。畑も、ぶどう園も、オリーブ園も、家も、利子も、穀物も、ぶどう酒も、油も。」”
ネヘミヤは、わたしも、わたしの兄妹も部下も、金や穀物を貸していることを素直に認めました。この箇所でネヘミヤが提案していることは、お金を借りに来る人々に対し、利子を取り立てたり、担保を要求することを止めようということだと思われます。債務者から利子の支払いや担保の提供という重荷からの解放であって、借金そのものを完全に帳消しにしなさいということではなかったようです。ですから、貴族と役人に対し、担保として得た畑と、ぶどう畑と、オリーブ園と、家を返すように勧めているのです。そして、そこからの運用利回りや、収益を返すように勧めているのです。貴族と役人は、「返します。何も要求しません。お言葉どおりにします。」とネヘミヤの勧めに従順しました。これは驚くべきことです。彼らとしては自分たちの利権を手放すことは簡単ではなかったはずだからです。しかし、それにも拘わらず、ユダの民は神を恐れ、愛の動機によって動いているネヘミヤの勧めに従いました。
そもそも、ネヘミヤによって始められた城壁の再建事業とは、単なる公共事業でもなければ、民族の復興運動でもありません。それは礼拝の回復であり、神の体である教会の回復でありました。この大前提を私たちは忘れてはなりません。イスラエルの民が神によって贖われたという希望を持ってスタートした神ご自身の働きであったはずです。ところが、恵みによって贖われた民が、彼ら自身によって、再び同胞を奴隷として身売りさせるという由々しき事態が起こったのです。奴隷として身売りされた者とその家族においては、今日、食べる物もままならず、先が一切見えず、完全に打ちのめされていたことでしょう。城壁の再建の希望など、もうどうでもよくなっていたに違いありません。貴族や役人が城壁の再建に熱心になればなるほど、貧しい者たちは、隅に寂しく置いてけぼりにされていたのです。1節の「ツェアカ」とは、そんな人々の叫びであ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イザヤ書5:7をご覧ください。聖書協会共同訳でお読みいたします。抜粋のプリントをご覧ください。
“万軍の主のぶどう畑とは、イスラエルの家のこと。/ユダの人こそ、主が喜んで植えたもの。/主は公正(מִשְׁפָּטミシュパト)を待ち望んだのに/そこには、流血(ミスパハמִשְׂפָּ֔ח)。/正義(צְדָקָהツェダカ)を待ち望んだのに/そこには、叫び(ツェアカצְעָקָֽה)。”
括弧の部分は、私の方で補足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聖書の中でぶどう畑が出てくる時は、ほとんどの場合イスラエルの家、即ち教会を指しています。主は教会を贖われました。教会から、「公正を待ち望んだのに、そこには流血。正義を待ち望んだのに、そこには叫び」とあります。この箇所は、実は韻が踏まれていて、ダジャレのようになっています。「ミシュパト」と「ミスパハ」、「ツェダカ」と「ツェアカ」に韻が踏まれていて、ミシュパト(公正)を待ち望んだのに、ミスパハ(流血)が、ツェダカ(正義)を待ち望んだのに、ツェアカ(叫び)が、イスラエルの家から出て来たというのです。とんだ期待外れでした。このイザヤの語った御言葉は、ネヘミヤの時代の民にそのまま当てはまるのだと思います。恵みを受けたにも拘わらず、恵みの実を結ぶことができず、歪んだ教会の姿が露呈されているのです。しかし今、民はネヘミヤの勧めに従順し、祭司たちの前で誓い、会衆は皆で「アーメン」と答え、神を賛美しました。教会が、教会らしさを取り戻していったのです。
【2】. 聖徒の交わり
私たちが礼拝の中で告白している使徒信条には、「聖徒の交わり」を信じる、という箇所が出てまいります。聖徒の交わり、ラテン語では「コミュニオ・サンクトールムcommunio sanctorum」と言います。交わり(コミュニオ)は、ギリシア語では、コイノニアで、「交わり」の他に、「分かち合い」という意味が含まれています。ですから使徒信条の中で教会とは「聖徒の交わり」、教会とは「聖徒の分かち合い」であると告白されているのです。聖徒の交わり、聖徒の分かち合い、ここには大変深い意味が含蓄されていると私は思いました。皆様もご存知のように、元来教会というのは、組合や団体を意味する協会(アソシエーション)ではありませんね。教会と、組合や団体を意味する協会、日本語で発音は同じですがその意味は全く異なります。協会(アソシエーション)が自発的な加入によって発生するのに対し、教会(チャーチ)は神の召しによって発生するというところが根本的に異なると思います。もっと言えば、教会(チャーチ)は聖霊によって新しく生まれることによって発生するということです。教会とは、主なる神によって呼び集められた民ですから、自分たちの自発的な加入によって発生するものでは決してありません。主なる神によって召し集められた民、呼び集められた民であります。もし、そのことを本当に信じているならば、私たちは、その聖徒の交わりを疎外させてはならないのであります。聖霊は聖徒の交わりのために、聖徒お一人ひとりに、賜物を与えてくださいました。それらの賜物は、聖徒が自分自身のために用いるのではなく、教会のために、教会を立て上げるために用いるよう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1コリント14:12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ございます。
“あなたがたの場合も同じで、霊的な賜物を熱心に求めているのですから、教会を造り上げるために、それをますます豊かに受けるように求めなさい。”
教会を造り上げるために霊的な賜物を熱心に求めなさいとパウロは言います。この教会を建て上げる賜物は、決して土の中に埋めておいたり、軽視されてはならず、他の聖徒のための有益と救いのために用い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賜物は、教会全体が建て上げられるために用いられ、最も卓越した愛の賜物に従順するものであります。城壁の再建の際、露呈された貴族と役人の業とは、まさに聖徒の交わりを疎外させるものでありました。聖徒の交わり、教会を、内側から脅かしていたのです。そのことに気づいたネヘミヤは、自らそのことを悔い改め、聖徒の交わりを実践し、人々に模範を示したのです。14~18節をご覧ください。
“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の第二十年に、わたしはユダの地の長官に任命されたが、その日から第三十二年までの十二年間、わたしも兄弟たちも長官の給与を一度も受け取らなかった。わたしの前任者は民に重荷を負わせ、パンとぶどう酒に加えて、銀四十シェケルを徴収した。彼らの配下の者も民を圧迫した。しかし、わたしは神を畏れ、そのようなことを決して行わなかった。わたしはこの城壁の工事にも力を注ぎ、土地を買収したりはしなかった。配下の者も皆、工事のためにここに集まっていた。ユダの人々と役人合わせて百五十人、それに周りの国々から来た人々も、わたしの食卓に着いた。毎日用意されたものは、牛一頭、特選の羊六匹、鳥で、わたしのために用意され、十日ごとにはあらゆる種類のぶどう酒が十分用意された。だが、このためにも長官の手当を要求しなかった。再建作業がこの民にとって重荷となっていたからである。”
ここにはネヘミヤが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の第二十年に長官(即ち総督)に任命された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前任者は、民に重荷を負わせ、パンとぶどう酒に加え、銀40シェケルまで徴収していたようですが、ネヘミヤは神を恐れ、そのようなことはしませんでした。70年前にユダの総督として、ゼルバベルが任命されたということがエズラ記に記録されていましたが、ゼルバベル以降、誰がユダの総督になったのか、聖書には一切書かれていません。異邦人が総督になった可能性も十分に考えられるでしょう。ネヘミヤは、総督としての給与を受け取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と、もう一つ重要なこととして、食事のもてなしを行いました。毎日のようにユダの人々と役人を合わせて150人、さらに周りの国々から来た人々も、ネヘミヤの食卓に招かれました。盛大な宴会です。その食事は、労働者が受け取るべき給料の一部であったかもしれませんが、その食卓によって一日の労苦が癒されたに違いありません。人々の顔から満面の笑顔があふれていたことでしょう。この大きな経済的出費を、ネヘミヤは公費から出すことをせず、自腹で負担しました。ネヘミヤのしたことというのは、食事のもてなしを通して、聖徒の交わりを、聖徒の分かち合いを促進させたという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ネヘミヤは、聖徒の交わりを通して、皆で主の体を立て上げて行ったのです。一人ひとりが自ら進んで主にお仕え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風通しの良い、自由な共同体を構築したのであります。
【結論】
本日の内容をまとめます。私たちは自ら振り返って、聖徒の交わりを疎外していたということはないでしょうか。もし神様に示されるなら、ネヘミヤがしたように、率先して神の御前に悔い改め、神から与えられている賜物を、教会を立て上げるために用い、献げて行きましょう。聖徒一人ひとりに与えられた賜物は、他人より自分が優れているという優越感に浸るためのものでも、或いは人をコントロールするためのものでもありません。それは教会に与えられた賜物であり、互いに仕え、主の体を建て上げていくためのものであります。私たちは教会に霊的な賜物が与えられるよう、熱心に祈って行くべきであります。すべての賜物は、最も卓越した愛の賜物に従順するということを覚えつつ、私たちはネヘミヤがしたように聖徒の交わりにへりくだって仕えていく者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