クリスチャンの実践と奉仕 기독교인의 실천과 섬김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3章1節~12節
1それから、イエスは群衆と弟子たちにお話しになった。
2「律法学者たちや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モーセの座に着いている。
3だから、彼らが言うことは、すべて行い、また守りなさい。しかし、彼らの行いは、見倣ってはならない。言うだけで、実行しないからである。
4彼らは背負いきれない重荷をまとめ、人の肩に載せるが、自分ではそれを動かすために、指一本貸そうともしない。
5そのすること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ある。聖句の入った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服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
6宴会では上座、会堂では上席に座ることを好み、
7また、広場で挨拶されたり、『先生』と呼ばれたりすることを好む。
8だが、あなたがたは『先生』と呼ばれてはならない。あなたがたの師は一人だけで、あとは皆兄弟なのだ。
9また、地上の者を『父』と呼んではならない。あなたがたの父は天の父おひとりだけだ。
10『教師』と呼ばれてもいけない。あなたがたの教師はキリスト一人だけである。
11あなたがたのうちでいちばん偉い人は、仕える者になりなさい。
12だれでも高ぶる者は低くされ、へりくだる者は高められ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3章1節~12節
기독교인의 실천과 섬김
2019년 1월20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3장 1절~12절
성전에서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여러 논쟁 사건 이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특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실패를 지적하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실패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했던 데 있었습니다. 그 이해 방식은, 하나님을 보고 율법을 이해하지 않고, 사람을 보고 율법을 이해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율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큰 교훈이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1-3을 보십시오.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모세의 자리에 대해 설명하자면, 회당 앞쪽에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르치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이 강단에도 의자가 있듯이, 그런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이 관습의 시작은 바빌론 포로기, 선지자 에스라가 그 자리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느헤미야기 8:4-5을 보십시오.
느헤미야 8장
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어는 아람어의 한 방언과 같았지만, 히브리어로 기록된 율법을, 학자 에스라가 아람어로 번역해 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느헤미야8:8절을 보면「그 뜻을 해석하여」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 에스라가 가르친 자리가, 모세의 자리라 불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모세의 자리에 앉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에 대해 가르쳐야 했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설명이나 자신의 해석을 펼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교회의 공적인 교사로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의 가르침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율법의 순수한 가르침을 할 때에만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한 것을 가르치려 한다면, 그에 귀 기울여 따르거나 실천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서 무엇을 가르쳤는가 하면,「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하듯이, 율법을 어기지 않도록 쓸데없는 규정과 의식을 많이 도입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에는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지만, 이 「일」을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규정함으로써,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고파서 보리 밭에서 이삭을 따 먹은 일에 대해, 그들이 「수확」과 「타작」이라는 두 가지 노동을 했다고 고발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 이해에 있는 근본적인 오류를 한마디로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라고 요약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마의 맨, 성구가 적힌 작은 상자를 크게 하거나, 옷자락의 술을 길게 했습니다. 본래, 말씀이 자신의 이마에도, 손목에도, 집 현관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어떤 때에도 그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하나님의 권면이었습니다.
또한 옷단 귀의 술의 청색을 보며 주님의 명령을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민수기 15:38-39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5장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이 율법의 의미는, 어떤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경건함을 과시하기 위해 이마에 두는 상자의 크기를 크게 하거나 청색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여, 술의 길이를 길게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들의 취향에서도「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동기가 엿보입니다. 즉, 잔치에서는 상석에 앉고, 회당에서는 상석에 앉으며, 광장에서는 인사받거나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랍비」는 선생님으로 번역되지만, 히브리어로 「나의 선생님, 또는 나의 주인님」이라는 뜻으로 교사에게 붙이는 칭호입니다. 즉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싶어 하는 욕망에 따라 그들의 모든 행동이 규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하나하나에 대해 지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맺히는 열매 하나하나에 대해 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열매를 맺는 데 있어 나무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이란 「사람을 보며」, 「사람 앞에서」 실천하는 규례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본래 사람을 보며 실천하는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을 보며」, 「홀로 계신 분의 면전에 서서」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작점에서 이 점을 잘못 이해하면, 전혀 다른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율법은 원래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의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우리가 얼마나 죄와 더러움으로 오염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 앞에서 자신이 완전히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렇게 부정적으로 기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율법 앞에서 왜 자랑하는 마음이 들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자신의 힘으로 지키고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며 율법을 이해하고, 율법의 본래 거룩한 기준을 타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두 가지 길이 생각됩니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자랑하는 것과, 믿음으로 율법을 지켜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요? 믿음의 본질, 그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란 내가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에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축복과 우리의 의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으로는 할 수 없지만, 외부로부터 은혜로 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받아 어떤 때에도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반면 자랑은, 은혜의 반대말이며 감사의 반대말입니다. 자랑이 나오는 이유는, 자신이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받고 축복받는 것이 자신의 공로이며,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것이라고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자신이 가진 믿음이 자신의 내면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 이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지적하시며, 그렇지 않고「하나님 앞에 서서」 율법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율법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랍비」라고 불려도, 「아버지」라고 불려도, 「지도자」라고 불려도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실제로 저도 집에서는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오늘부터는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도 자신을 영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빌립보서 2:22).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께 돌려야 할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 같은 곳에서는 아직 어린 아이들이 독재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원수님」이라고 칭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답게 밖에서 뛰어 놀면 되는 것인데, 이는 분명히 이상한 일입니다. 혹은 마피아의 세계를 보면, 「대부」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마피아 보스가「아버지」라 불리며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랍비나 아버지, 지도자라는 말 속에 담긴 궁극적인 부분은 거룩하고 위대한 가치를 지니며, 본래 그 부분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영광을 빼앗아서는 안 되며, 결코 그것을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란, 그 전과는 다른 신령한 성품이 우리 안에 심겨지거나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드래곤볼의 슈퍼 사이어인이 되거나 건담의 뉴타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죄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7:15-24를 보십시오.
로마서 7장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의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이 여기서「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할 때, 이것이 예수님에 의해 구원받기 전의 말인지, 구원받은 후의 말인지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분분하지만, 저는 구원받기 전과 후 양쪽 상태 모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25절을 보면,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을 받아들인 후의 상황이지만, 다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라고, 이전 상태와 비슷한 표현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항상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깨끗한 마음과 육신의 연약함 사이의 갈등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순간마다 옛 사람이 되살아나 긴장 속에 놓이며,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영적 싸움을 치르며 걸어가게 하십니다. 율법을 하나님의 면전에서 실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 앞에서는 전혀 무력하지만,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매일 기도하게 하시고, 그 가운데서 외부로부터 은혜로 의의 옷을 입혀 주시며, 외부로부터 신비롭게 성령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고, 외부로부터 선한 행실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거지가 갑자기 왕복이 입혀져 왕의 연회에 초대되어도,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자로, 부끄러울 따름이라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겸손이나 사람을 섬기는 일은, 본질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이며, 결코 이것은 도덕적 목표나 미덕 중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표현이며, 섬김은, 도덕적 목표라기보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표현입니다. 사람들에게 퍼포먼스를 보여 자랑하거나 압박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神殿においてユダヤ教の指導者たちとの諸々の論争の事件の後、イエスさまは本日の箇所で特に、律法学者とファリサイ人の失敗について指摘していきます。律法学者とファリサイ人たちの失敗とは、神の律法について根本的に誤って理解していたことでした。その理解の仕方とは、神を見て律法を理解せず、人を見て律法を理解していたことです。この律法に対する誤った理解は、今日の私たちにもとっても、大変、教訓となります。彼らがどのように間違ってしまったのか見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マタイ23:1-3をご覧ください。
それから、イエスは群衆と弟子たちにお話しになった。
「律法学者たちや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モーセの座に着いている。
だから、彼らが言うことは、すべて行い、また守りなさい。しかし、彼らの行いは、見倣ってはならない。言うだけで、実行しないからである。
ここで、モーセの座というのは何かといいますと、シナゴーグ(会堂)の前の方に、律法学者やファリサイ人たちによって、律法が教えられるための席が設けられていました。ちょうど、この講壇にも椅子がありますが、こんな感じだったと思います。この習慣の始まりは、バビロン捕囚記、預言者エズラがその席上から律法を朗読して解説したことに由来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言われています。ネヘミヤ記8:4-5(p749)をご覧ください。
書記官エズラは、このために用意された木の壇の上に立ち、その右にマティトヤ、シェマ、アナヤ、ウリヤ、ヒルキヤ、マアセヤが、左にペダヤ、ミシャエル、マルキヤ、ハシュム、ハシュバダナ、ゼカルヤ、メシュラムが立った。
エズラは人々より高い所にいたので、皆が見守る中でその書を開いた。彼が書を開くと民は皆、立ち上がった。
当時、イスラエルの民はバビロンで生活していましたので、アラム語を話していました。ヘブライ語はアラム語の一つの方言のようなものですが、ヘブライ語で書かれている律法を学者であるエズラによってアラム語に翻訳してもらわないと理解できませんでした。8節を見ると「翻訳して」とある通りです。このエズラが教えた席がモーセの座と呼ばれるようになります。誰でもモーセの座に座る者は、神の御言葉と権威について教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当然ですが、自分の説明や自分の解釈を展開することは許されませんでした。イエスさまが弟子たちに「彼らが言うことは、すべて守りなさい。」と言われるのは、当時、律法学者とファリサイ人たちが、教会の公的な教師として認められていたからです。ただし、彼らの教えを無分別に受け入れなさいということではなくて、彼らが律法の純粋な教えをするときに限るということです。もし、彼らが、モーセの席から、自分たちの勝手な解釈を教えようとするなら、それに聴き従うことも実践することも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律法学者とファリサイ人たちがモーセの座から何を教えていたのかというと、「彼らは背負いきれない重荷をまとめ、人の肩に載せるが、自分ではそれを動かすために、指一本貸そうともしなかった」とありますように、律法を犯さないように、つまらない規定や儀式をたくさん導入しました。たとえば十戒には、安息日にはどんな仕事をしてもならないとありますが、この「仕事」を具体的に細かく規定することによって、ある安息日の日、イエスさまの弟子たちが空腹だったので、麦畑の穂を摘んで食べたことに対して、弟子たちが、「刈り入れ」と「脱穀」の二つの労働をしたと訴えてき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彼らの律法理解における根本的な誤りを一言で、「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ある」と要約されました。
彼らは、聖句の入った、額の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服の房を長くしたりしました。本来、御言葉が自分の額にも、腕にも、家の玄関にも書かれていて、どんな時にも、それを忘れずに覚えなさいという神さまの勧めでした。
また、服の房の青色を見ることによって、主の命令を思い起こさせました。民数記15:38-39にそのことが書いてあります。(p239)
イスラエルの人々に告げてこう言いなさい。代々にわたって、衣服の四隅に房を縫い付け、その房に青いひもを付けさせなさい。
それはあなたたちの房となり、あなたたちがそれを見るとき、主のすべての命令を思い起こして守り、あなたたちが自分の心と目の欲に従って、みだらな行いをしないためである。
これらの律法の意味は、どんな時であっても神さまの御言葉を大切にして、み言葉を心に刻んで、生活しなさいという意味です。ところが、彼らは人々に自分たちの敬虔さをアピールするために、額の箱の大きさを大きくしたり、青い房の長さを長くしました。これは単なる人に見せるためのパフォーマンスに過ぎません。何の意味もないことです。
彼らの好みについても「人目を気にする」という動機が伺えます。つまり、宴会では上席に座り、会堂では上席に座り、広場では挨拶されたり、「ラビ」と呼ばれることを好みました。「ラビ」とは先生と訳されていますが、ヘブライ語で「私の大いなるお方」という意味で、教師に対する称号です。つまり人々から認められたい、人々から一目置かれたいという欲望に従って、彼らの一切の行動が規定されてい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彼らに対して、表面的な「行い」の一つ一つについて文句を言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彼らの律法について根本的に誤解していることを指摘しているのです。彼らから結ばれてくる一つ一つの実について文句を言っているのではなくて、そもそも実が結ぶにあたって、木それ自体が悪いのではないかと指摘しているのです。
律法学者、ファリサイ人にとって律法とは、「人を見て」、「人前で」実践する掟でした。それは、自分の義しさを自慢するためのものだったのです。しかし、律法とは本来、人を見て、実践する掟ではなく、「神を見て」、「お一人であられるお方の御前に立って」理解するときに、初めてその価値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スタート地点において、このところをはき違えると、全く異なる実が結ばれて来ます。
律法とは、そもそも、それを実践することによって自らの義を達成できるものではなく、私たちが、罪人であるということを悟らせるものであって、私たちがいかに罪と汚れによって汚染されているのかを示すものでした。律法を前にして、自分が完全に無力な存在であることを気づかされるのです。律法とは、このように否定的に機能するものです。それでは、律法学者、ファリサイ人が律法を前にして、なぜ、自慢する思いになっ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彼らが律法を自分の力で守っていると勘違いしたからです。神を見ないで、人を見て律法を理解し、律法の本来の聖なる基準を転落させてしまったのです。
律法を前にして、二つの道が考えられます。ファリサイ人のように自分の力で律法を守って自慢することと、信仰によって律法を守って感謝することです。
私たちの信仰の本質とは何だったでしょうか。信仰の本質、それは恵みです。恵みというのは、私が自分の問題を自ら解決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外から助けを頂くという意味です。ですから私たちがイエス様を信じるというのは、私たちの救いと、私たちの祝福と、私たちの義が、私たちの内側からではなく、外側から、即ち、イエス・キリストからいただくという意味です。自分にはできませんが、外から、恵みによって義を頂くのです。ですからキリスト者は恵みを受けて、どんなときにも、感謝で満たされているのです。一方、自慢というのは、恵みの反意語であり、感謝の反意語です。なぜ自慢が出てくるのかというと、自分が義とされるのは、自分が救われて、祝福されるのは、自分の功績であって、自分の内側から出てきたものとして誇るからです。或は、自分が持っている信仰は、自分の内側から発生したと考えるからです。これがまさにファリサイ人と律法学者たちの律法の理解でした。
イエスさまはこの点を指摘しつつ、そうではなく、「神の前に立って」律法を理解し、信仰によって律法を実践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教えられます。8-10節をご覧ください。
だが、あなたがたは『先生』と呼ばれてはならない。あなたがたの師は一人だけで、あとは皆兄弟なのだ。
また、地上の者を『父』と呼んではならない。あなたがたの父は天の父おひとりだけだ。
『教師』と呼ばれてもいけない。あなたがたの教師はキリスト一人だけである。
ここで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に「ラビ」と呼ばれても、「父」と呼ばれても、「教師(つまり案内人とか指導者)」と呼ばれてもならないと教えました。これは、実際、私も家ではお父さんと呼ばれていますが、今日からはお父さんと呼んではダメだ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例えば使徒パウロも自分のことを霊の父であると語っています(ピリピ2:22)。それでは、このイエスさまの御言葉はどういう意味なのかといいますと、「父親に帰すべき栄誉が、神の栄光を曇らせるのなら、それは誤り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例えば、北朝鮮などまだ小さな幼い子供たちが、将軍様のために、涙を流しながら「お父さま」と、とりなしの祈りを捧げています。子供は外で遊んでいればいいわけですから、これは明らかにおかしいのです。或いは、マフィアの世界を見ますと、ゴッドファーザーという映画がありましたが、マフィアのボスがファーザーと呼ばれ、信仰の対象になっていました。このように、ラビとか、父とか、教師という言葉の内に、それらが持っている究極的な部分において、聖なるものであり、偉大な価値があり、本来、その部分に関しては、神、お一人から来るものです。この栄光を奪ってはならない、決して、それを人から出るものとして考えたり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私たちは、イエスさまを信じて恵みによって救われました。しかしその救いとは、それまでとは異なる神霊な性質が私たちの内に植えられたり、与え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ドラゴンボールのスーパーサイヤ人になったり、ガンダムのニュータイプのようになるのではなく、イエスさまを信じて、再生した後においても、やはり私たちは依然として罪人に過ぎないのです。ローマ書7:15-24(p283)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は、自分のし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せん。自分が望むことは実行せず、かえって憎んでいることをするからです。
もし、望まないことを行っているとすれば、律法を善いものとして認めているわけになります。
そして、そういうことを行っているのは、もはやわたしではなく、わたしの中に住んでいる罪なのです。
わたしは、自分の内には、つまりわたしの肉には、善が住んでいないことを知っています。善をなそうという意志はありますが、それを実行できないからです。
わたしは自分の望む善は行わず、望まない悪を行っている。
もし、わたしが望まないことをしているとすれば、それをしているのは、もはやわたしではなく、わたしの中に住んでいる罪なのです。
それで、善をなそうと思う自分には、いつも悪が付きまとっているという法則に気づきます。
「内なる人」としては神の律法を喜んでいますが、
わたしの五体にはもう一つの法則があって心の法則と戦い、わたしを、五体の内にある罪の法則のとりこにしているのが分かります。
わたしはなんと惨めな人間なのでしょう。死に定められたこの体から、だれがわたしを救ってくれるでしょうか。
パウロがここで、「わたしはなんと惨めな人間なのでしょう」と言うとき、これがイエスさまによって救われる前の言葉なのか、救われた後の言葉なのか、学者によって議論が分かれるところですが、私は、救われる前も後も両方の状態であると思います。というのは、25節を見ると、これは明らかにイエスさまを受け入れた後ですが、再び「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神に感謝いたします。このように、わたし自身は心では神の律法に仕えていますが、肉では罪の法則に仕えているのです。」
と、前の状態と同じような言い方をするからです。つまり、私たちが神の御前で信仰によって歩むということは、常に私たちのキリストに従おうとする清い思いと、肉の弱さの葛藤の中に置か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瞬間ごとに、古い自分がよみがえり緊張の中に置かれ、霊の戦いを聖霊により頼みながら歩ませていただいているのです。律法を神の御前で実践することも同じことです。律法の前に全く無力ではありますが、神様助けてくださいと、日々祈らされ、その中で外側から恵みによって義の衣を着せてくださり、外側から不思議に聖霊によって私たちの人生を導いてくださり、外側から善い行いという聖霊の結実を結ぶようにしてくださるのです。
乞食がいきなり王服を着せられて、王の宴会に招待されても、自分を自慢できる人なんていませんね。自分は、このような席に相応しくない者で、恥ずかしい限りですと、謙遜にならざるを得ません。ですからキリスト者にとって、謙遜とか、人に仕えることは本質的な自然な現れであり、決してこれは、道徳的目標とか、美徳の一つにはなり得ないのです。11節に「あなたがたのうちでいちばん偉い人は、仕える者になりなさい。」とありますが、恵みによって救われたなら、人に仕えるようになるのは極めて自然な現れであり、仕えることは道徳的な目標というより、キリスト者の本質的な現れなのです。人々に対しパフォーマンスをして自慢したり、威嚇するなど考えられない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