祈りの応答を待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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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ネヘミヤ記 2章1節~10節
2:1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の第二十年、ニサンの月のことであった。王はぶどう酒を前にし、わたしがぶどう酒を取って、王に差し上げていた。わたしは王の前で暗い表情をすることはなかったが、
2:2王はわたしに尋ねた。「暗い表情をしているが、どうかしたのか。病気ではあるまい。何か心に悩みがあるにちがいない。」わたしは非常に恐縮して、
2:3王に答えた。「王がとこしえに生き長らえられますように。わたしがどうして暗い表情をせずにおれましょう。先祖の墓のある町が荒廃し、城門は火で焼かれたままなのです。」
2:4すると王は、「何を望んでいるのか」と言った。わたしは天にいます神に祈って、
2:5王に答えた。「もしも僕がお心に適い、王にお差し支えがなければ、わたしをユダに、先祖の墓のある町にお遣わしください。町を再建したいのでございます。」
2:6王は傍らに座っている王妃と共に、「旅にはどれほどの時を要するのか。いつ帰れるのか」と尋ねた。わたしの派遣について王が好意的であったので、どれほどの期間が必要なのかを説明し、
2:7更に、わたしは王に言った。「もしもお心に適いますなら、わたしがユダに行き着くまで、わたしを通過させるようにと、ユーフラテス西方の長官たちにあてた書状をいただきとうございます。
2:8また、神殿のある都の城門に梁を置くために、町を取り巻く城壁のためとわたしが入る家のために木材をわたしに与えるように、と王の森林管理者アサフにあてた書状もいただきとうございます。」神の御手がわたしを守ってくださったので、王はわたしの願いをかなえてくれた。
2:9こうして、わたしはユーフラテス西方の長官のもとに到着する度に、王の書状を差し出すことができた。王はまた将校と騎兵をわたしと共に派遣してくれた。
2:10ホロニ人サンバラトとアンモン人の僕トビヤは、イスラエルの人々のためになることをしようとする人が遣わされて来たと聞いて、非常に機嫌を損ね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ネヘミヤ記 2章1節~10節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며
2025년 1월19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느헤미야 2장 1~10절
서론
느헤미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신 곳,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오늘 살펴 볼 본문에서 그 기도의 응답을 드디어 받게 됩니다. 오늘도 느헤미야서를 통해 말씀의 은혜를 함께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은 선하신 분
2장 1절의 첫머리에「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달입니다. 1장에서 느헤미야가 형제 하나니로부터 보고를 받은 것이 아홉째 달이었으니,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났습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느헤미야는 4개월 달 동안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어느 날, 느헤미야가 평소처럼 술 관원으로 왕을 섬기고 있을 때, 왕이 느헤미야에게 물었습니다.「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평소 느헤미야는 왕 앞에서 어두운 표정을 짓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의 예법으로 왕을 섬기는 자들은 왕 앞에서 불쾌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고, 항상 밝은 표정으로 왕을 섬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왕비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침울해도 기쁨으로 섬겨야 했습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라는 왕의 질문에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하면서도 왕이 이해할 수 있도록「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라고 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인들은 조상의 유골을 잘 보존하는데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예를 들면 족장 시대의 요셉은 후손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때 자신의 유골을 반드시 가나안으로 가져가라고 지시합니다. 이런 맥락에서「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라는 상황은 안색이 좋지 않은 이유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제가 느헤미야의 입장이었다면, 기뻐하며「왕이시여, 제가 원하는 것은.. 음..」이라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하늘의 하나님께 순간적으로 기도하고 나서 왕에게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피하면서 대답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2장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사실, 예루살렘 재건 사업은 왕의 칙령으로 중단된 적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제안은 경우에 따라서는 왕이 내린 「중단 명령」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왕의 칙령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위험부담이 따르는 소원을 지금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신중을 기하면서 굳이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유다에 있는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도시를 재건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죄를 짓기 쉬운 자들입니다. 저도 자신도 모르게 실수해서 엉뚱한 말을 해버린 쓰라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상사라든지, 상사보다 더 윗사람, 특히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앞에서, 입을 열 때는 더욱 그러하지만, 느헤미야처럼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날마다 듭니다.
5절에서 느헤미야는「만일 좋게 여기시고」라고 잘라 말하는데, 이 구절은 히브리어의 토브 「좋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만일 왕이 선하다면」으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즉, 느헤미야는 아직 이 시점에서는 기도가 다 응답되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조심스럽게 하나님께 기도 응답의 「징조」를 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6~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므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7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 강 서쪽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느헤미야는 왕에게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지를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성벽 재건 사업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해 공사를 시작한 지 52일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즉 아닥사스다 왕 제20년으로 추정되는 BC.445년, 그 해 안에 완공되었다는 뜻입니다. 느헤미야 6장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 6장
15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엘룰월, 즉 여섯 번째 달인 25일에 성벽이 완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역산하면 공사를 시작한 것이 다섯째 달 초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부터 추측이지만, 느헤미야는 이때부터 12년간 쭉 유다에 머무른 후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성벽 재건 공사를 마치고는 일단, 아닥사스다 왕에게 돌아갔을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다시 유다 지방에 총독으로 파견되어, 느헤미야서의 이야기처럼 12년 동안 총독으로 유다 지방을 다스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느헤미야는 자신의 설명에 대해 왕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더 확인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왕에게 조심스럽게 요구하고 있는데, 7절의「만일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이라는 말도 5절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토브가 사용되어 「왕의 마음에 합당하다면」으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구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 총독들에게 보내는 통행 허가증이고, 다른 하나는 왕의 삼림 감독에게 보내는 목재 공급을 위한 서한이었습니다. 왕은 이 두 가지 요구를 받아들였고, 여기에 더해 호위를 위해 군대 장관과 마병까지 보내 주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말입니다. 느헤미야는 토브라는 히브리어로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거든」이라고 두 번이나 표징을 구했습니다. 왕은 호의적으로 받아주고 군대 장관과 마병까지 보내 주었는데, 8절 마지막에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라고 했는데, 히브리어를 보면 역시 여기에도 토브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내 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선하신」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에게 항상 선하신 분이십니다.
(2)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며
느헤미야는 4개월 동안 막연하게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특히 놀라는 것은 페르시아의 삼림 감독이 누구인지 그 이름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를 통해 예루살렘 회복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예루살렘 귀환이 이루어지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공사를 위해 최소 며칠이 걸릴 것 같은가? 공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목재가 필요하며, 누가 삼림 감독인가? 기도 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구체적인 필요를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한결같이 기다리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손을 움직이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겠다는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매일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계속 기도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을 먼저 기억하고 싶습니다. 요한일서 5장 14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그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받은 기도의 응답이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75세 대 불임이었던 아내 사라를 통해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한 번도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이가 생기지 않다가, 25년을 기다려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가 되어서야 기적적으로 이삭을 얻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과 사라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왕자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을 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인에게 억압받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했고, 40세가 되자 모세는 동족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자로서의 비전을 품었지만, 실제로 모세의 비전이 실현된 것은 80세가 되어 시내 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서였습니다. 주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그 전까지 40년 동안은 광야에서 목자로서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40년 동안 모세는 온유와 겸손을 배웠습니다. 다윗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사울 왕의 유능한 부하이면서도 사울 왕의 집요한 핍박을 받았고,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한지 7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다윗도 역시 하나님의 때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기도의 응답을 내 마음대로 조작하고, 사전 교섭이나 뒷거래를 통해 내 뜻대로 하려고 앞만 보고 달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 해도 하나님의 손길이 계속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기도의 응답을 기다릴 줄 아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겨도, 반드시 때가 되면 하나님의 때에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가족의 전도와 자녀들에게 신앙을 계승하는 것은 특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 기도제목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려운 과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믿음의 자세가 아닐까요?
결론
오늘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왕의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는 아무리 왕과 친밀한 관계라 할지라도 왕에게 어떤 공작을 하거나 사전 교섭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길이 왕을 통해 일하시는지 조심스럽게 살피려고 했습니다. 기도란 이런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때가 늦었다고 해서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님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 방식이 더 낫지 않느냐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발걸음을 우리는 거듭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소원을 모두 들어주십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가장 좋은 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손길을 움직이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것, 이 얼마나 고귀한 태도입니까? 우리의 믿음의 태도는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序】
ネヘミヤは祈りを捧げました。イスラエルの回復のために、そして主がその名を置かれる場所エルサレムの復興のために祈りを捧げました。その祈りの答えを、本日の箇所でいよいよいただくことになります。本日もネヘミヤ記を通して共に御言葉の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1】. 神様は良いお方
2:1の冒頭に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の第二十年、ニサンの月とあります。第一の月であります。1章において兄弟ハナニからネヘミヤが報告を受けたのが、第九の月でしたので、あれから四か月が経過しました。1~3節をご覧ください。
“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の第二十年、ニサンの月のことであった。王はぶどう酒を前にし、わたしがぶどう酒を取って、王に差し上げていた。わたしは王の前で暗い表情をすることはなかったが、王はわたしに尋ねた。「暗い表情をしているが、どうかしたのか。病気ではあるまい。何か心に悩みがあるにちがいない。」わたしは非常に恐縮して、王に答えた。「王がとこしえに生き長らえられますように。わたしがどうして暗い表情をせずにおれましょう。先祖の墓のある町が荒廃し、城門は火で焼かれたままなのです。」”
ネヘミヤは四か月の間、祈り続けました。ある日のこと、ネヘミヤがいつものように献酌官として王に仕えていると、王がネヘミヤに尋ねました。「暗い表情をしているが、どうかしたのか。」この時、ネヘミヤは非常に恐れたと供述しています。ネヘミヤは普段、王の前で暗い表情を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ペルシアの礼儀作法として、王に仕える者たちは、王の前で不快な印象を与えてはならず、常に明るい表情で仕え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です。それはたとえ王妃であっても、例外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どんなに心が沈んでいても、喜びながら仕えることが求められたのです。エステル記を見ますとそのような雰囲気を読み取ることができます。「どうかしたのか。」という王の質問に対し、ネヘミヤは非常に恐れつつも、王に理解してもらえるよう、賢明な答え方をしました。
「王がとこしえに生き長らえられますように。わたしがどうして暗い表情をせずにおれましょう。先祖の墓のある町が荒廃し、城門は火で焼かれたままなのです。」
現代でもそうですが、古代の人々はなお一層、先祖の遺骨をきちんと保存することに細心の注意を払いました。例えば族長時代のヨセフは、自分の子孫がもしエジプトを離れて、カナンの地に戻ることになれば、その時、自分の骨を必ずカナンへ持っていくよう指示しています。このような脈絡から「墓のある町が荒廃し、城門が火で焼かれたまま」になっている事態は、顔色が優れない理由として十分に考えられるものでありました。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が「何を望んでいるのか」と言った時、もし私がネヘミヤの立場だったら、喜びながら「王様、私の望みはですね…えーと、」と目を輝かせながら話したと思います。ところが、ネヘミヤは違いました。なお慎重な態度を崩す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ネヘミヤは、まず天の神様に瞬間的に祈ってから、王に答えています。そしてその答えは、「エルサレム」という言葉を注意深く避けながら答えていることに注目してください。2:5をお読みします。
“王に答えた。「もしも僕がお心に適い、王にお差し支えがなければ、わたしをユダに、先祖の墓のある町にお遣わしください。町を再建したいのでございます。」”
実は、エルサレムの再建事業は、かつて王自らの勅令によって中断されていました。ネヘミヤの申し出は、場合によっては、王が下した「中断命令」を、あからさまに非難するようにもなりかねません。王の勅令を真っ向から否定するようなリスクの伴う願いを、今申し出ているのです。従って、ネヘミヤは慎重には慎重を期しながら、あえてエルサレムという言葉を使わずに、ユダにある先祖の墓のある町の再建について願い出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は口で罪を犯しやすい者であります。つい口が滑って、とんでもないことを言ってしまったという苦い経験を、私もよくしてきました。上司であったり、上司のさらにその上の上司であったり、特に恐れ多い人の前で、口を開く時にはそうですが、ネヘミヤのようにまず神様に祈ってから、自分の考えを述べたいと日々思わされています。
5節でネヘミヤは「もしもお心に敵うならば」と、切り出していますが、ここの箇所はヘブライ語のトーブ「良い」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て「もし、王様が良しとされるなら」と直訳されます。つまり、ネヘミヤは、まだこの時点では、祈りが聞き遂げられた訳ではないと自分に言い聞かせながら、慎重に祈りの答えの「しるし」を神様に求め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6~8節をご覧ください。
“王は傍らに座っている王妃と共に、「旅にはどれほどの時を要するのか。いつ帰れるのか」と尋ねた。わたしの派遣について王が好意的であったので、どれほどの期間が必要なのかを説明し、更に、わたしは王に言った。「もしもお心に適いますなら、わたしがユダに行き着くまで、わたしを通過させるようにと、ユーフラテス西方の長官たちにあてた書状をいただきとうございます。また、神殿のある都の城門に梁を置くために、町を取り巻く城壁のためとわたしが入る家のために木材をわたしに与えるように、と王の森林管理者アサフにあてた書状もいただきとうございます。」神の御手がわたしを守ってくださったので、王はわたしの願いをかなえてくれた。”
ネヘミヤはどれくらいで戻って来られるのか王に説明しました。実際、城壁の再建事業は、ネヘミヤがエルサレムに到着し、工事を着工してから52日目で完成しました。つまり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の第二十年とされているBC.445年、その年の内に完成したということです。ネヘミヤ記6:15を見るとそのことが分かります。6:15をご覧ください。
“城壁は五十二日かかって、エルルの月の二十五日に完成した。”
エルルの月、即ち第六の月の、25日に城壁が完成したと書かれています。そこから逆算すれば工事を着工したのが、第五の月の初旬であった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つまりエルサレムに到着してしばらくして工事が着工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ここからは推測ですけれども、ネヘミヤはこの時から12年後に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のもとに戻ったのではなく、城壁の再建工事を終えて、一端、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のもとに戻ってきたのでしょう。その後、再度、ユダ州に総督として派遣されることになり、ネヘミヤ記のストーリーにあるように12年間、総督としてユダ州を治めたのだと思います。いずれにせよ、ネヘミヤは自分の説明に対し、王が好意的であったのを見て、自分の祈りが神様に聞き入れられたと感じたのかもしれません。そのことをさらに確かめるため、エルサレムへ帰還するに当たって必要とされるものを王に注意深く要求しています。7節の、もしも「お心に敵いますなら」と言う言葉も、5節と同じように、ヘブライ語のトーブ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て「王様が良しとされるなら」と直訳されます。そして要求の中身は二つのことです。一つはユーフラテス西方の長官たちにあてた通行許可証であり、もう一つは王の森林管理者にあてた木材供給のための書状でありました。王はこの二つの要求を受け入れ、さらにそれに加えて、護衛のため将校と騎兵さえも与えてくださいました。この時ネヘミヤは、はっきりと悟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これは良い神様のお働きである、ということをです。ネヘミヤはトーブというヘブライ語を使い「王様が良しとされるなら」と、「もし王様が良しとされるなら」と二度もしるしを求めました。王は好意的に受け入れてくださり、将校と騎兵さえも与えてくださったのです。8節の終わりに「神の恵みの御手がわたしをまもってくださった」とありますが、ヘブライ語を見ますとやはりここでもトーブ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ます。直訳しますと「神の良い御手が私の上に置かれていたので」ということです。ネヘミヤは自分の祈りに答えてくださった「良きお方」神様に感謝と栄光を捧げたのです。このように神様はご自身に信頼する者たちに常に良いお方であられるのです。
【2】. 祈りの応答を待つ
ネヘミヤは四か月の間、ただ漠然として祈っていただ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私たちが特に驚かされるのは、ペルシアの森林管理者の官僚が誰であるのか、その名前までネヘミヤは正確に認識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祈りを通して、エルサレム復興のビジョンを具体的に描いていたという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エルサレム帰還がかなえられれば、まず自分が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何か?そして、工事のための日数は最低どのくらいかかりそうなのか?工事のために木材がどのくらい必要で、誰が森林管理者なのか?祈りの中でシュミレーションをしながら、具体的な必要を把握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神の時をひたすら待ちながら、神ご自身が御手を動かされるまで、じっと待ち続けるという姿勢を崩しませんでした。
私たちも、日々祈りを捧げていますね。継続して祈ることの難しさについては、皆様も十分承知の事と思います。しかし、そもそも祈りとは、神様との交わりであり、神様は必ず私たちの祈りを聞いていてくださっているという事を第一に覚えたいと思います。ヨハネの手紙一5:14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あります。ご覧ください。
“何事でも神の御心に適うことをわたしたちが願うなら、神は聞き入れてくださる。これが神に対するわたしたちの確信です。”
神様は良い神様であり、私たちの祈りを待ち望んでおられます。そして、誰よりもその祈りを叶えてやりたいと神様ご自身が願っておられるのです。神様から祈りの答えを得るために、多くの時間が掛かったり、神様から頂いた祈りの答えが、当初自分が考えていたものではなかったということは、しばしばあるかもしれませんが、神様は私たちに最もふさわしい時に、最もふさわしい仕方で、御手を動かされ私たちを導いてくださるのです。例えばアブラハムは、不妊の女であった妻サラを通して子供が与えられるという約束を75歳の時に神様から頂きました。しかしその後、一向に子どもは与えられませんでした。25年待ってアブラハムが100歳になり、サラが90歳になって、ついに奇跡的にイサクが与えられたのです。この出来事を通してアブラハムとサラは不可能を可能とする神への信仰をもつようにされました。モーセは、エジプトで王子として育てられました。しかし成人した時に、自分の同胞であるイスラエル人がエジプト人から抑圧されていることに心を痛めました。40歳になりモーセは同胞イスラエルを解放する者としてのビジョンを抱きましたが、実際にモーセのビジョンが実現したのは、80歳になってシナイ山で燃える柴の木を通して主なる神様から召命を受けた時でありました。それまで40年の間は、荒れ野で羊飼いとしての生活を送り、神の時をひたすら待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その40年を通してモーセは柔和と謙遜を学んだのです。ダビデは預言者サムエルからまだ少年に過ぎない時に油注ぎを受けました。しかし実際にダビデがイスラエルの王になるまでには多くの紆余曲折を経ました。サウルの王の有能な部下でありながら、サウル王から執拗な迫害を受け、そしてサウル王がペリシテ人との闘いで戦死してから七年後に、ようやく全イスラエルの王として認められることになります。ダビデもやはり神の時を、忍耐強く待た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す。
時に私たちは、神の時を忍耐強く待つことを放棄し、自分勝手に動いてしまう事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或いは、祈りの答えを自分で操りながら、根回しや、裏工作をして、自分の思う通りにしようと先走ってしまうこと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もしそのようにして自分の願った結果を得たとしても、神の御手が引き続き私たちを守ってくださるという保証はどこにもないのです。全能の神の御手にすべてをお委ねしたいと真剣に考えるなら、私たちはネヘミヤのように、祈りの答えをひたすら待つという姿勢を貫き通す必要があります。或いは聖書の中に出て来た登場人物のように、全面的に神の御手に信頼し、必ず時にかなって、神様の時に、祈りの答えが得られることを信じて待た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私たちの家族の伝道や、子どもたちへの信仰の継承については、特に時間のかかる祈祷課題であり、ある意味で困難な課題なの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神様は良いお方です。神の御手を待ちながら、あきらめずに祈り続けること、それこそ私たちが取るべき信仰の姿勢ではないでしょうか。
【結論】
本日の内容をまとめます。王の献酌官であったネヘミヤは王とどんなに親しい間柄であっても、王に対し何か工作したり、根回しすることをせず、ひたすら神の時を待ちつつ祈り続けました。そして、神の御手が王を通して働いているのか、慎重に見極めようとしました。祈りとはこのようなものです。たとえ神様の時が遅いからと言って、私たちは短気を起こすのではなく、また、神様の方法が気に入らないと考えて、こっちの方がいいではないかと自分のやり方を頑なに主張するのでもなく、良き神様に全面的に委ねる歩みを私たちは重ねていきましょう。神様は私たちの祈りと願いをすべて聞いていてくださいます。良いお方である神様が全てを支配され、私たちの祈りに対し、最善の道を示してくださるのです。祈りによって、神ご自身が御手を動かされるまで、じっと待ち続けること、このことはどれほど尊い態度でありましょうか。私たちもの信仰の態度とは、祈って待つことであります。そのことを覚え日々の歩みを重ねていく者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