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めの愛を忘れない 첫 사랑을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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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聖書 エズラ記 6章13節~22節
6:13そこで、ユーフラテス西方の長官タテナイとシェタル・ボゼナイ、およびその仲間たちは、ダレイオス王が書き送ったことに従い、命令どおり実行した。
6:14ユダの長老たちは、預言者ハガイとイドの子ゼカリヤの預言に促されて順調に建築を進めていたが、イスラエルの神の命令と、ペルシアの王キュロス、ダレイオス、アルタクセルクセスの命令によって建築を完了した。
6:15この神殿は、ダレイオス王の治世第六年のアダルの月の二十三日に完成した。
6:16イスラエルの人々、祭司、レビ人、残りの捕囚の子らは、喜び祝いつつその神殿の奉献を行った。
6:17この神殿の奉献のために雄牛百頭、雄羊二百匹、小羊四百匹をささげ、また全イスラエルのために贖罪の献げ物としてイスラエルの部族の数に従って雄山羊十二匹をささげた。
6:18そしてモーセの書に書き記されているとおり、エルサレムにおける神への奉仕のために、祭司たちをその担当の務めによって、レビ人をその組分けによって任務に就かせた。
6:19捕囚の子らは、第一の月の十四日に過越祭を行った。
6:20祭司とレビ人は共に身を清めていたので皆清く、捕囚の子ら皆のため、仲間の祭司のため、また彼ら自身のために、過越のいけにえを屠った。
6:21捕囚の地から帰って来たイスラエルの人々も、イスラエルの神なる主を尋ね求めて、その地の諸民族の汚れを離れて来た人々も皆、過越のいけにえにあずかった。
6:22そして七日間にわたって、喜び祝いつつ除酵祭を行った。主がアッシリアの王の心を彼らに向け、イスラエルの神の神殿を再建する工事を支援させて、彼らに喜びを与えられたからであ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エズラ記 6章13節~22節
첫 사랑을 회복하라
2024년 12월1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에스라 6장 13~22절
서론
오늘 본문은 성전이 재건된 기쁨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리오 제 이년에 시작된 재건 공사는 다리오 육년 아달월 삼일에 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아달월」이란, 열두 번째 달이라는 뜻으로, 다리오 제6년 12월 3일, 연말이 다가오는 시기에 성전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다리오 제6년, 기원전 516년으로, 바벨론 포로로 인해 성전이 무너진 기원전 586년부터 계산하면 정확히 70년 후의 일입니다. 마치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성전이 무너진 지 70년 만에 성전 재건 공사가 완료되어,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된 것입니다. 오늘도 에스라서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얻고자 합니다.
(1) 성전 봉헌식
6장 14,15절에 짧게나마 재건 공사의 완공에 대한 보고가 있습니다. 보시겠습니다.
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래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여 일을 끝내되
15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방금 읽은 부분에서「아닥사스다」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아닥사스다는 다리오의 다음 왕이기 때문에 미래의 왕의 이름이 갑자기 여기에 나오는 것이 당황스럽지만, 이 에스라・ 느헤미야가 역사서이고, 이 후 성곽 공사가 완성된 후에 이 역사서가 쓰여졌기 때문에 저자는 미래에서 과거를 바라보면서 여기에 아닥사스다의 이름도 함께 기록했을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저자는 성전 재건과 성곽 공사의 명령이 표면적으로는 고래스 왕이나 다리오 왕, 혹은 아닥사스다 왕에게서 비롯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배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즉 본질적으로 고레스나 다리오나 아닥사스다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성전 재건 공사가 완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귀환한 백성들은 성전 봉헌식을 거행합니다. 16,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6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
17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할 때에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드리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열 두 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봉헌식에서는 산 제물로,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가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이 숫자는 얼핏 보면 엄청난 비용을 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솔로몬 시대의 봉헌식 규모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봉헌식에서 드려진 가축의 수는 열왕기상 8장 63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소가 이만 이천 마리, 양이 십이만 마리가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제 1 성전에 비하면 제 2 성전 봉헌식은 대수롭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봉헌식에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봉헌식 산 제물과 함께,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귀환한 백성들이「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열 두 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70년 동안, 속죄 제물은 드려지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죄는 속죄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귀환한 백성들에 의해 속죄 제물이 드려졌습니다. 속죄 제물에 대해서는 레위기 4장 22~26절에 기록되어 있으니 읽어 보겠습니다.
22 만일 족장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23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숫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24 그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지니 이는 속죄제라
25 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26 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이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의 열두 공동체의 각 대표를 위해, 열 두 마리의 숫염소가 드려졌습니다. 이 때의 속죄 제물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죄가 속죄되고 공동체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2) 첫 사랑을 회복하라
어느 덧 해가 바뀌고, 기원전 515년 전의 첫 번째 달인「니산월」이 되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니산월에는 유월절을 지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은 칠칠절, 초막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로, 지금도 유대교 순례자들은 니산월에 해당하는 3~4월 경에 예루살렘에 모여 유월절을 지냈습니다. 귀환한 백성들도, 이때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참고로 19절부터 에스라의 문체는 다시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는데, 4장 8~6장 18절까지 아람어로 쓰여졌던 것이 다시 히브리어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는 공식적인 언어로 기록된 역사적 공적인 문서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에 의해 기록된 문서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6장 19~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9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2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서「유월절」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유월절은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살이에서 속량된 것,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구속받은 백성은 약속의 땅을 상속받기 위해 말씀에 따라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의 유월절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에게 부어지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자신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사건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신뢰하기 위해 유월절을 지켜온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첫 사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유월절 사건은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는 3~4월경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며 부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또한 매주 한 주의 첫 날을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주의 날로 예배를 드리고, 오늘도 그렇고, 매월 첫째 주에 성찬식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며 부활절을 축하하거나, 혹은 주의 날에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구주 예수・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시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첫 사랑으로 돌아가면서, 그리고 천국의 기업을 향해, 구원의 완성을 향해, 믿음의 걸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3) 바벨론 포로의 의미
6장 21절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유다 민족과 베냐민 민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된「귀환 백성」을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귀환한 백성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대표하여 「이스라엘」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21절 후반부에는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라고 유월절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이방인이었지만,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여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에 합류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혈통이 진정한 이스라엘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혈통과 상관없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 되는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에 여리고의 창녀 라합이 회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처럼, 혹은 모압 사람 룻이 회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처럼,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가 된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감안한다면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서 일어난 바벨론 포로라는 사건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즉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의 심판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불순물을 불태우기 위한 불이며, 믿음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정결케 하시는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금세공인이 금을 불 속에 넣는데, 금에 붙어 있는 철이나 기타 불순물이 모두 타버릴 때까지 불 속에 넣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금세공인은 순금을 제련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라는 시련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순금과 같은 믿음으로 연단해 주십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율법으로 돌아가는 믿음이, 얼마나 귀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믿음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6장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여기서「앗수르 왕」이라는 말이 갑자기 나오는데, 페르시아 제국이 앗수르 제국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귀환한 백성은 기원전 515년 니산월 14일에 유월절을 지내고, 그 후 일주일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인 「마짜」를 먹으며 무교절을 지켰다고 합니다. 출애굽하던 그날 밤, 서둘러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었던 것을 떠올렸을 것입니다(출애굽기 12장 39절). 무교절을 지내며 첫 사랑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의 마음에 넘쳐흐르는 감정은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산 제물을 드리고 예배를 드렸을 때, 왜 그렇게 마음속에서 격렬한 감정이 솟구쳤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셨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과 시편 9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 8장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너희 힘의 원천이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시편 9장 2절을 보시겠습니다.
시편 9장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첫 사랑을 잊지 않고, 출애굽 사건을 마음에 새기며, 그 이름을 경배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기쁨과 힘을 주신다고 성경에 쓰여져 있습니다. 우리도 한 주를 시작하는 날에,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진심으로 주님을 찬양할 때, 신기하게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기쁨의 감정이 넘쳐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배를 통해 첫 사랑으로 돌아가 기쁨과 힘을 얻고, 말씀을 붙잡고,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자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인생의 여러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신 첫 사랑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름과 함께, 그 기억, 그 기쁨이 희미해져, 말씀을 읽어도 가슴이 뛰지 않고, 감동이 없고, 예배가 형식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런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를 불타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적어도 70년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제를 드린 적도 유월절을 지킨 적도 없었습니다. 유월절은 요시야 시대에 드린 이후(역대하 35장 18절), 성경에 기록되지 있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100년, 한 세기에 걸쳐서 드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2의 출애굽을 경험하고, 신기하게도 성전 재건 공사를 완료하여, 이제 유월절을 지킬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판을 받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회복의 약속은 그들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들의 어떤 행위와 상관없이 예언대로 70년이 지났을 때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불타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진심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序】
本日の箇所では、神殿が再建された喜び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ダレイオスの第二年に始まった神殿の再建工事は、ダレイオスの第六年のアダルの月の23日に工事が完成いたしました。「アダルの月」とは、十二番目の月ということですから、ダレイオスの第六年の12月23日、年末の押し迫っている時期に神殿が完成したという事です。このダレイオスの第六年とは、紀元前516年であり、バビロン捕囚によって神殿が崩壊した紀元前586年から数えますと、ちょうど70年後に当たります。まさにエレミヤの預言が成就するかのように、神殿が崩壊してから70年後に神殿の再建工事が完成し、エルサレムに神の民が回復されたのであります。本日もエズラ記の御言葉を通して恵みに与りましょう。
【1】. 神殿奉献式
再建工事の完成について、6:14~15に短い言葉でありますが報告されています。ご覧ください。
“ユダの長老たちは、預言者ハガイとイドの子ゼカリヤの預言に促されて順調に建築を進めていたが、イスラエルの神の命令と、ペルシアの王キュロス、ダレイオス、アルタクセルクセスの命令によって建築を完了した。この神殿は、ダレイオス王の治世第六年のアダルの月の二十三日に完成した。”
今、お読みした個所で「アルタクセルクセス」の名前が出て来ます。アルタクセルクセスとはダレイオスの次の次の王ですから、未来の王の名が突然ここで出て来ることに当惑いたしますが、このエズラ・ネヘミヤ記が歴史書であって、この後、城壁の工事が完成した後にこの歴史書が執筆されたため、著者は未来から過去を眺めつつ、ここでアルタクセルクセスの名前も一緒に入れたのだろうと理解されます。そして、著者は、神殿再建や城壁工事の命令が、表面的にはキュロス王や、ダレイオス王や、或いはアルタクセルクセス王に由来していても、本質的にはその背後におられるイスラエルの神に由来しているのだということを言わんとし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つまり本質的にはキュロスやダレイオスやアルタクセルクセスの命令ではなく、神様の命令によって、神殿の再建工事が完了したという事です。この時、帰還の民は、神殿の奉献式を行いました。16~17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スラエルの人々、祭司、レビ人、残りの捕囚の子らは、喜び祝いつつその神殿の奉献を行った。この神殿の奉献のために雄牛百頭、雄羊二百匹、小羊四百匹をささげ、また全イスラエルのために贖罪の献げ物としてイスラエルの部族の数に従って雄山羊十二匹をささげた。”
奉献式において、生贄として、雄牛100頭、雄羊200匹、子羊400匹が捧げられました。この数字は、一見すると大変な費用をかけたように見えますが、ソロモンの時代の奉献式の規模には到底及びませんでした。何しろ、ソロモンの奉献式において献げられた家畜の数は、1列王記8:63に書かれていますが、牛が2万2千頭、羊が12万匹献げられているからです。このように、ソロモンの第一神殿に比べるなら、第二神殿の奉献式は取るに足らない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しかし、それにも拘わらず、この奉献式には喜びが満ちていました。そして、奉献式の生贄と並んで、もう一点、重要なことは、帰還した民が「全イスラエルのために贖罪の献げ物としてイスラエルの部族の数に従って雄山羊十二匹をささげた」ということです。少なくとも70年の間、贖罪の献げ物は献げられたことがなく、イスラエルの罪は贖われないままにありました。罪が清められず、そのまま残っていたのです。しかし、今、帰還の民によって贖罪の献げ物が捧げられました。贖罪の献げ物については、レビ記4:22~26に書かれていますのでレビ記を調べてみましょう。
“共同体の代表者が罪を犯し、過って、禁じられている主なる神の戒めを一つでも破って責めを負い、犯した罪に気づいたときは、献げ物として無傷の雄山羊を引いて行き、その頭に手を置き、主の御前にある焼き尽くす献げ物を屠る場所でそれを屠る。これが贖罪の献げ物である。祭司は献げ物とする雄山羊の血を指につけて、焼き尽くす献げ物の祭壇の四隅の角に塗り、残りの血はその祭壇の基に流す。脂肪はすべて和解の献げ物の脂肪の場合と同じように、祭壇で燃やして煙にする。祭司がこうして彼のために罪を贖う儀式を行うと、彼の罪は赦される。”
この御言葉に従いまして、イスラエルの12の共同体のそれぞれの代表のため、十二匹の雄山羊が献げられました。この時の贖罪の献げ物は、イスラエル12部族の罪が贖われ、共同体に神様との交わりが回復されたことを象徴しているのであります。
【2】. 初めの愛を忘れない
さて、年が明けて、紀元前515年の第一の月「ニサンの月」になりました。律法によるとニサンの月に、過ぎ越しの祭りを捧げる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過ぎ越しの祭りとは、七週の祭り、仮庵の祭りと並んで、イスラエルの三大祝祭の一つであり、現在においても、ユダヤ教の巡礼者たちは、ニサンの月に相当する3月~4月頃にエルサレムに集まり、過ぎ越しの祭りを捧げています。帰還の民も、この時、過ぎ越しの祭りを捧げました。因みに19節からエズラ記の文体は、再びヘブライ語で書かれています。4:8~6:18節までアラム語で書かれていたのが、ヘブライ語に戻ったということです。これは、公用語で記述された歴史上の公けの文書と、一方でイスラエルの民の信仰によって記述された文書とを区別するためであると思われます。6:19~21節をご覧ください。
“捕囚の子らは、第一の月の十四日に過越祭を行った。祭司とレビ人は共に身を清めていたので皆清く、捕囚の子ら皆のため、仲間の祭司のため、また彼ら自身のために、過越のいけにえを屠った。捕囚の地から帰って来たイスラエルの人々も、イスラエルの神なる主を尋ね求めて、その地の諸民族の汚れを離れて来た人々も皆、過越のいけにえにあずかった。”
イスラエルの民の信仰において「過ぎ越しの祭り」とはどのような意味を持っていたでしょうか。過ぎ越しの祭りとは、かつてモーセに率いられたイスラエルの民が、エジプトの奴隷生活から贖われたこと、解放されたことを、記念する祭りでありました。贖われた民は、約束の地を相続するために、御言葉に従って新たにスタートする訳です。言い換えるなら、出エジプトにおける過ぎ越しの出来事とは、神様の愛が自分たちに注がれていることを初めて知った出来事であったと言えます。自分たちを愛してくださり、自分たちに幸いと喜びを与えてくださるのは、まさに主ヤハウェであるということを確信させられた出来事でありました。そのことを忘れないため、そして神の御言葉に常に信頼するようにと、過ぎ越しの祭りを捧げてきたのであります。ですから、過ぎ越しの祭りを祝うということは、彼らにとって、初めの愛に立ち返るという事を意味していたのです。この過ぎ越しの出来事は、新約時代に生きる私たちキリスト者にとっては、イエス様の十字架と復活の出来事を意味しています。私たち教会は3月~4月頃、イエス様の十字架と復活を覚えてイースターを捧げていますね。また、毎週、週の初めの日をイエス様の復活を覚え、主の日として礼拝を捧げ、本日もそうですが、月の第一週には聖餐式に与っています。イスラエルの民が、過ぎ越しの祭りを祝うことは、現代のキリスト者が、イエス様の十字架と復活を覚えて、イースターをお祝いしたり、或いは主の日に礼拝を捧げること、聖餐式に与ることなどと同じことを意味しているのです。それは、十字架の愛に立ち返るためであり、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こそ、私たちの罪を贖い、私たちを自由にし、私たちに幸いと喜びを与えてくださる方であると告白するためであります。私たちは礼拝を捧げる度に、初めの愛に立ち返りながら、そして天の嗣業を目指し、救いの完成に向けて、信仰の歩みを新たにさせていただくのです。
【3】. バビロン捕囚の意味
6:21節において、特に興味深い点は、ユダ民族とベニヤミン民族によって主に構成されている「帰還の民」が、イスラエルの民として呼ばれていることです。つまり、帰還の民がイスラエル十二部族を代表し「イスラエル」と呼ばれているのです。もっと言えば、21節の後半では、「その地の諸民族の汚れを離れて来た人々も皆、過越のいけにえにあずか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もともと異邦人でありましたけど、汚れを離れ、共にエルサレムに帰還し、イスラエルの民に加えられたというのです。これらのことが主張していることは、イスラエル十二部族の血統が、真のイスラエルとして見なされてい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す。血統とは関係なく、悔い改めて信仰を一つにする者が、真のイスラエルとして見な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昔、エリコの町の遊女ラハブが回心してイスラエルの民とされたように、或いはモアブ人ルツが回心してイスラエルの民とされたように、たとえ異邦人であっても、悔い改めて信仰を一つにした者が、真のイスラエルの民とされるのであります。そのことを踏まえるなら、イスラエルの救済史の中で起こったバビロン捕囚という出来事は、次のように総括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すなわちバビロン捕囚とは、神の裁きには違いありませんが、それは焼き尽くすための火であり、信仰の不純物を取り除くための神のきよめの業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金細工人が金を火の中に入れますが、金の周りについている鉄や、その他の不純物が全て燃やされるまで、火の中に入れます。このようなプロセスを通して金細工人は純金を精練するのです。これと同じように、神様はバビロン捕囚という試練を通して、彼らの信仰を純金のような信仰に精錬してくださるのです。ですから、悔い改めて律法に立ち返る信仰が、いかに尊く、神様が望んでおられるのかを、私たちは改めて悟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そして、神様はイスラエルの血統ではなく、イスラエルの信仰に、関心を持っ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が分かるのであります。最後に6:22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して七日間にわたって、喜び祝いつつ除酵祭を行った。主がアッシリアの王の心を彼らに向け、イスラエルの神の神殿を再建する工事を支援させて、彼らに喜びを与えられたからである。”
ここに「アッシリアの王」という言葉が突然出てきますが、ペルシア帝国がアッシリア帝国の継承者でありますので「ペルシアの王」のことを指していると理解してください。帰還の民は、紀元前515年ニサンの月の14日に過ぎ越しの祭りを祝い、その後一週間、マッツァと呼ばれる酵母を入れないパンを食べて除酵祭を祝いました。出エジプトをしたあの夜、酵母を入れないパンを急いで食べたことが思い起こされたことでしょう(出12:39)。除酵祭を祝いながら、初めの愛に立ち返った時に、彼らの心の中からあふれ出た感情は、「喜び」でありました。モーセの律法に従って生贄を献げ、礼拝を献げた時に、なぜか心の中から激しい感情が沸き起こったのだと思います。その理由は、神様が彼らの心に喜びを与えてくださったからに違いありません。ネヘミヤ記8:10と、それから詩編9:3(2)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ございます。ご覧ください。
ネヘミヤ8:10
“彼らは更に言った。「行って良い肉を食べ、甘い飲み物を飲みなさい。その備えのない者には、それを分け与えてやりなさい。今日は、我らの主にささげられた聖なる日だ。悲しんではならない。主を喜び祝うことこそ、あなたたちの力の源である。”
主を喜び祝うことこそ、あなたたちの力の源であるというふうに書かれています。続いて詩編9:3(2)をご覧ください。
“いと高き神よ、わたしは喜び、誇り/御名をほめ歌おう。”
初めの愛を忘れず、出エジプトの出来事を心に刻み、御名を崇め讃美する時に、神様は私たちの内側に喜びと力を与えてくださると聖書には書かれています。私たちも週の初めの日に、主なる神様に礼拝を献げ、心から主を賛美する時に、不思議に心の内側から喜びの感情があふれ出ることを経験いたします。それは神様が私たちに喜びと力を与えてくださっているからです。私たちも、礼拝を通して、初めの愛に立ち返り、喜びと力を与えられ、御言葉を握りしめて、新しい一週間を歩み出す者とされるのです。
【結論】
本日の内容をまとめます。人生の様々な問題の中で、私たちは、神様によって救われた初めの愛を少しずつ忘れていきます。歳月が流れ、それと共にその記憶、その喜びは霞んでいき、御言葉を読んでも胸が躍ることなく、感動もなく、礼拝が形式的になってしまうこと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しかし、そんな私たちとは異なり、神様は今も変わらずに私たちのことを燃える心で愛してくださっています。考えてみてください。少なくとも70年以上、イスラエルの民は、贖罪の献げ物を捧げたことも、過ぎ越しの祭りを捧げることがなかったのであります。過ぎ越しの祭りはヨシヤの時代に捧げて以降(歴代下35:18)、聖書には記述されていませんから、もしかしたら100年、一世紀に渡って捧げられなか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神様の恵みにより、イスラエルの民は第二の出エジプトを体験し、不思議に神殿の再建工事を完了し、今、過ぎ越しの祭りを献げることが出来ました。裁きを受けて捕虜として連行されたイスラエルの民に与えられた回復の約束は、彼らの状態とは関係なく、彼らのいかなる行いとも関係なく、預言通りに70年を過ぎた時、一方的な神の恵みによって成就されたのです。そして、不思議に心の内側から喜びが沸き上がって来ることを体験いたしました。神様は私たちに対しても、同じように導いてくださることでしょう。このような燃える愛によって私たちを顧み、私たちの人生を導いてくださる神様を、褒めたたえ、心から礼拝する者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