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への愛、人への愛、イエスへの愛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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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2章34節~46節
34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イエスがサドカイ派の人々を言い込められたと聞いて、一緒に集まった。
35そのうちの一人、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試そうとして尋ねた。
36「先生、律法の中で、どの掟が最も重要でしょうか。」
37イエスは言われた。「『心を尽くし、精神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しなさい。』
38これが最も重要な第一の掟である。
39第二も、こ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ある。『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
40律法全体と預言者は、この二つの掟に基づいている。」
41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集まっていたとき、イエスはお尋ねになった。
42「あなたたちはメシアのことをどう思うか。だれの子だろうか。」彼らが、「ダビデの子です」と言うと、
43イエスは言われた。「では、どうしてダビデは、霊を受けて、メシアを主と呼んでいるのだろうか。
44『主は、わたしの主にお告げになった。「わたしの右の座に着き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もとに屈服させるときまで」と。』
45このようにダビデがメシアを主と呼んでいるのであれば、どうしてメシアがダビデの子なのか。」
46これにはだれ一人、ひと言も言い返すことができず、その日からは、もはやあえて質問する者はなかっ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2章34節~46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라
2019년 1월13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2장 34절~46절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먼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올바르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늘의 능력을, 성경으로 입증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모든 근거를 제공하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목적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주장하는 것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가 점점 다가오는 가운데 베드로의 고백까지, 우리의 믿음을 끌어올리시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의 입을 막아 완전히 패배시키자, 이번에는 율법사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러 왔습니다. 율법사라고 하니, 바리새파 중에서도 특히 율법 연구를 열심히 하는 선발된 인물들을 보낸 것입니다. 이번 질문도 역시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올무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율법사들의 시각에서 보면,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세의 율법을 훼손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습니다. 만약 모세의 가르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더 뛰어나고 완전한 것을 말한다면, 모세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지적해 주고, 나머지는 어리석은 민중들에게 판단을 맡기려는 속셈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가르침을 말해도 모세를 기준으로 삼아 제대로 흠을 잡고, 민중들에게 불쾌감을 사도록 이끄는 것이 이 율법사들의 사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36절의 질문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점은, 이 질문이, 결코 구원의 근원에 관한 것이거나, 의롭다 함을 받는 근원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의를 얻을 수 있는 행위에 대해,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요구되는 것에 대해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37-38절을 보십시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첫째 되는 중요한 계명으로 신명기 6:4-5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쉐마」말씀으로 매우 유명하며 유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신명기를 펴 보십시오.
신명기 6장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덧붙여 말씀드리면,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말이 「쉐마」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쉐마 말씀을 하루에 두 번 외웠습니다. 지금도 통곡의 벽에 가면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유대교 사람들은 신명기 6:8에 기록된 대로 이 「쉐마」 말씀을 작은 상자에 넣어 이마에 대고, 이른바 「패」를 이마에 대고 기도하거나, 혹은 「쉐마」 말씀이 적힌 끈을 손목에 매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613개(적극 248개, 소극 365개)의 계명이 기록되어 있다고 전해지는(바리새파 랍비가 조사한) 「모세의 율법」을, 사랑의 계명으로 간결하게 요약하셨는데, 특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최우선으로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신앙의 첫걸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율법사들이 기대했던 내용과는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의 경우, 율법은 저주에 불과하며 인간을 단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율법 앞에서, 우리는 매일 죄만을 더해갈 뿐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7:13을 보십시오.
로마서 7장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이는 율법 자체에 어떤 오류나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연약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사들은 예수님께서 평소 하시는 새로운 가르침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도 정통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계명입니다. 39-40절을 보십시오.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레위기 19:18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두 번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웃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이므로, 만약 그 사람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이웃에게 사랑이 향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렇지 않을 거야」라고 고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인간적인 사랑으로 서로 이익을 얻으려 교제할 때, 그것은 일종의 탐욕으로 변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지배하는 곳에서만, 그 후에 결과적으로 참된 형제애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참고로 39절 말씀의 해석으로 흔히 잘못되는 해석은,「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쨌든 자기 중심적인 자기 사랑에 집착하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거나, 「자신을 용서합시다」라는 가르침입니다.
듣기에는 매우 좋지만, 사실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미 충분히 이기주의자이며 자기 사랑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9:18에서 모세는 그 지나친 자기 사랑을 억제하고 타인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세로 사랑과 이웃에 대한 가로 사랑, 이 세로와 가로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사랑」이 율법과 예언자들이 말하는 계명의 요약이며,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내용이라고 예수님은 결론지으십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서에는 반드시 계명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약하신 「사랑의 계명」만이 율법과 선지자가 말하는 전부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구되는 「계명」과 구원에 관한 「약속」을 구분해야 합니다. 「약속」이란, 구원의 근원이 주어진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에게 무상으로 죄 사함과 의와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것으로는 결코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평소부터 가르쳐 오셨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즉 「구원의 근원」, 「의롭게 되는 근원」이 주어진다는 약속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실 메시아란 인간의 죄를 속량해 주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42-44절을 보십시오.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에게서 나올 것이라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상식이었슴니다. 그에 관한 많은 증거 성구를 들 수 있지만, 하나만 읽어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7:12-13입니다.
사무엘하 7장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시편 110편도 메시아에 대해 기록된 것입니다. 이 구절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내용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특히 다윗이 메시아를 향해 「주」라고 부르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시편 110:1을 펴 보십시오.
시편 110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는 구절에서 「주」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히브리어를 보면 사용된 단어가 다릅니다. 「내 주」를 뜻하는 단어는 아도나이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단어는 여호와입니다. 물론 발음할 때는 둘 다 아도나이로 되지만, 다윗이 자신의 자손에게 「나의 주」라고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유대인의 가족 내 기준에 따르면, 오히려 아들이 아버지를 「나의 주」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메시아에게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다윗 왕조차도 여호와의 오른편에 앉으라 하신 적이 없는 특별한 보좌라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110:4을 보면, 메시아에 대해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 메시아는 레위 지파 아론의 혈통을 잇는 제사장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팔로서의 왕이라는 근거에 기반한,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미루어 메시아로 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 여호와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높여지신 분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의사소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45-46절을 보십시오.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45절은 역설적 표현이므로, 이 뒤에 예상되는 말은 「다윗의 자손일 리가 없습니다」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다윗 후손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부정하시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며 인간의 왕에 불과하고 정치적인 왕이라는 점을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왕으로 오시지만,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영원히 다스리는 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력과 정치적 권력을 배경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지배로부터 죄인을 해방시키고, 값없이 구원을 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참된 이웃 사랑이 실천되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율법사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상은 완전히 뒤집혀져, 하나님의 영역까지 끌어올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여기까지 읽어오면서, 때때로 예수님께서 놀라운 주장을 하셨지만, 그 주장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0:32-33에서는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어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 12:6에서는 자신을 제물이 드려지는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셨고, 12:8에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자신이 안식일을 정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14:33에서는 배 안에서 두려워하며 소리 지르는 제자들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외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이번 질문을 마지막으로,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는 질문은 사라집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시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증거로 인해,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지탱하기 위해 확실한 증거를 제공해 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율법과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 즉 거저 의롭다 함을 받고 무상으로 구원받는다는 약속은, 우리는, 요구받는 율법을 지키고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며, 그 약속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イエス様の「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誰と言うのか」という質問に対する答えとして、ペトロが最初に「あなたはメシア、神の子です」と正しく告白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本日の箇所は、イエスさまご自身が神の子であるということ、キリストの神性と天の力を聖書から立証して、キリスト者がイエスさまに信頼するためのすべての根拠を提供しようとしておられます。ここにおいてイエスさまの目的とは、御自身を神の子として主張するということより、十字架によって死なれる時が刻一刻と迫っている中にあって、ペトロの告白へと私たちの信仰をも引き上げてくださることにあったと言うべきでしょう。
イエスさまはサドカイ派の人々の口を黙らせて、完敗させると、今度は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さまに質問をするためにやってきました。律法の専門家とありますので、ファリサイ派の中でも特に律法の研究を熱心にしている選りすぐりの、ある人物を送ってきました。今回の質問も、やはり今まで見て来たのと同じようにイエスさまを試み、罠にかけるための質問でした。
律法の専門家から見ると、これまでのイエスさまの教えは、モーセの律法を損傷させているというような節があるの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ました。もし、モーセの教えから少しでも離れて、さらに優れた、完全なことをしゃべるなら、モーセの教えからずれて、はみ出している点だけを逃さずに指摘してやって、後は愚かな群衆たちに判断を任せようという魂胆だったと思われます。どんなに優れた教えを語ってもモーセを基準として、きちんとダメ出しをして、群衆に不快感を買うように導くことが、この律法の専門家の使命であったと思われます。
「先生、律法の中で、どの掟が最も重要でしょうか。」
この36節の質問において、一つ私たちが押さえておくべき点は、この質問は決して救いの源ついて、ですとか、義とされる源についての質問ではなく、義を得ることができる行いについて、義とされるために要求されていることについて尋ね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これに対しイエスさまはどのように答えられたのでしょうか。37-38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言われた。「『心を尽くし、精神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最も重要な第一の掟である。
第一の重要な掟として申命記6:4-5の御言葉を引用されています。この御言葉は一般に「シェマ」の御言葉として大変有名であり、ユダヤ人に広く知られていました。申命記をお開きください。(旧p291)
聞け、イスラエルよ。我らの神、主は唯一の主である。あなたは心を尽くし、魂を尽くし、力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余談ですが、ヘブル語で「聞け」という言葉が「シェマ」です。当時、ユダヤ人はシェマのみ言葉を一日に二回唱えていました。現在でも、嘆きの壁に行けば見られる光景ですが、ユダヤ教の人々は、申命記6:8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このシェマのみ言葉を小箱に入れて、それを額に当てて、いわゆる「経札」を額に当てて祈ったり、或いはシェマのみ言葉の書かれた紐を腕に結んで祈ったりしています。
イエスさまは613(積極248、消極365)もの掟が書かれていると言われる(ファリサイ派のラビが調べた)「モーセの律法」を愛の掟によって短く要約しているのですが、特に神に対する愛を第一優先にしています。私たちの信仰生活において神に対する愛が信仰の第一歩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イエスさまのこの返事は律法の専門家が期待した内容とは異なっていました。例えば、パウロの場合、律法とは呪いに過ぎず、人間を断罪し死に定める教えだと言いきっています。そして律法を前にして、私たちは日々、罪だけをただ増し加えているだけだと言います。ローマ書7:13をご覧ください。(新p283)
それでは、善いものがわたしにとって死をもたらすものとなったのだろうか。決してそうではない。実は、罪がその正体を現すために、善いものを通してわたしに死をもたらしたのです。このようにして、罪は限りなく邪悪なものであることが、掟を通して示されたのでした。
これは、律法自体に何か誤りがあったり、欠陥があるからではなくて、私たちが弱さを持っているために、神に対する愛によって自分自身を完全に支配させることが不可能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律法学者はイエスさまが普段されているような新しい教えを期待していたのですが、イエスさまの返事はあまりにもオーソドックスな答えでした。続いて、第二の掟です。39-40節をご覧ください。
第二も、こ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ある。『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
律法全体と預言者は、この二つの掟に基づいている。」
これはレビ記19:18からの引用です。この第二の掟が第一の掟と同じように重要だと言われるのは、隣人愛というものが、神様を愛するところから生まれて、そこから流れ出るからです。人間は誰でも自己中心的ですから、もし神に対する愛がその人の中になければ、隣人に愛が向かうことは決してありません。
「そんなことはないでしょう」、と言い張って、神の愛を知らないこの世の人々が愛によって互いに利益を受けようと、交わる時に、それは一種の貪欲に変貌してしまうからです。神に対する愛が支配する場所においてのみ、後から結果的として真実の兄弟愛が伴ってくるのです。
因みに39節の御言葉の解釈として良く間違ってなされる解釈は、「自分を愛するように隣人を愛しなさい」と書いてあるので、とにかく自己中心的な自己愛に執着することをイエス様は教えていると解釈することです。「自分を愛せますか」とか、「自分を赦しましょう」という教えです。
耳ざわりは大変いいのですが、実際、私たちは気づいていませんが、既に十分エゴイストであり、自己愛に執着しすぎています。ですからレビ記19:18において、モーセは、その突出した自己愛を抑えて、他人を決して疎かにしないようにと警告しているのです。
神に対する縦の愛と隣人に対する横の愛、この縦と横の「十字架の愛」が、律法とそして預言者たちの語る掟の要約であり、旧約聖書が私たちに要求している内容であるとイエスさまは結論付けるのです。
確かにその通りですが、律法と預言書には必ずしも掟だけが書かれているのではなく、神の約束についても書かれています。ですからイエスさまが要約された「愛の掟」だけが、律法と預言者が語っている全てと言う風に理解すべきではありません。要求されている「掟」と、救いについての「約束」を区別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約束」とは、救いの源が与えられるという約束です。私たちに無償で、罪の赦しと義と救いを与えてくださるという約束です。
イエスさまは私たちに掟を守り行うことによっては、決して命に達することはないということを普段から教えてこられました。私たちの行いではなく、約束によって、つまり、「救いの源」、「義とされる源」が与えられるという約束によって救いを与えられるのです。
従って来るべきメシアとは、人間の罪を贖ってくださる方であり、神の子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42-44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たちはメシアのことをどう思うか。だれの子だろうか。」彼らが、「ダビデの子です」と言うと、
イエスは言われた。「では、どうしてダビデは、霊を受けて、メシアを主と呼んでいるのだろうか。
『主は、わたしの主にお告げになった。「わたしの右の座に着き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もとに屈服させるときまで」と。』
メシアがダビデの子孫から出ることは、当時のイスラエルの人々にとって常識でした。そのことについて沢山の証拠聖句を上げることが出来ますが、一つだけお読みいたします。サムエル記下7:12-13です。
あなたが生涯を終え、先祖と共に眠るとき、あなたの身から出る子孫に跡を継がせ、その王国を揺るぎないものとする。この者がわたしの名のために家を建て、わたしは彼の王国の王座をとこしえに堅く据える。
イエスさまが引用された詩編110編もメシア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この箇所を、ダビデが聖霊によって霊感された内容であると言われますが、特にダビデがメシアに対して「主」と呼んでいることを指摘しています。詩編110:1(旧p952)をお開きください。
【ダビデの詩。賛歌。】わが主に賜った主の御言葉。「わたしの右の座に就くがよい。わたしは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台としよう。」
「わたしの主に賜った主の御言葉」という箇所で、主という言葉が二回出てきますが、ヘブライ語を見ますと使われている単語が異なります。「私の主」の単語はアドナイです。主の御言葉の単語はヤハウェです。もちろん発音する際は両方ともアドナイになりますが、ダビデが自分の子孫に対して「私の主」というのは、驚くことです。ユダヤ人の家族間の基準によれば、むしろ息子が父親のことを「私の主」と呼ぶからです。
主は、メシアに対して、「私の右の座に着きなさい」と言われます。今まで誰一人、ダビデ王でさえ主の右に座りなさいとは言われなかった特別な御座だと考えられます。さらに110:4を見ると、メシアについて、「あなたはとこしえの祭司メルキゼデクと呼ばれます」と書かれています。つまり、このメシアは、レビ族のアロンの血統を引く祭司ではなく、父なる神の右腕としての王という根拠に基づいた、永遠の祭司であるというのです。以上のことからメシアとして来られる方は、神であり、特に三位一体の神ヤハウェの、第二位格の神であって、全ての名の上に優って高められたお方であるという点を察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ですからこの箇所は、父なる神と子なる神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であると言うこともできるでしょう。イエスさまはさらに続けます。マタイ22章45-46をご覧ください。
このようにダビデがメシアを主と呼んでいるのであれば、どうしてメシアがダビデの子なのか。」
これにはだれ一人、ひと言も言い返すことができず、その日からは、もはやあえて質問する者はなかった。
45節は反語の表現ですから、この後に予想される言葉は、「ダビデの子であるはずがありません」です。しかし、正確に言いますとイエスさまはなにも、ご自分のダビデの子孫であること、それ自体を否定され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ここで否定しているのはファリサイ人、律法学者たちが考えているように、メシアがダビデの子であり、人間の王に過ぎず、政治的な王であることを否定しておられるのです。キリストは王として来られますが、この世の王として来られるのではなく、全宇宙を永遠に治める王として神の子として来られるのです。ですからキリストの王国は、ローマ帝国からイスラエルを解放するために、武力と政治的な力を背景として来るのではなく、むしろ罪の支配から罪びとを解放し、無償の救いを与え、神の国を通して真実の隣人愛が実践されるために来るのです。
律法学者たちが考えていたメシア像は、完全に覆され、神の領域にまで引き上げられたのです。
私たちはマタイによる福音書をここまで読み進めて来まして、時々イエスさまが驚くべき主張をなされましたが、それらの主張に対して正当性を与えることになるのです。
例えば、マタイ10:32-33では、神をご自分の父と言われています。
「だから、だれでも人々の前で自分をわたしの仲間であると言い表す者は、わたしも天の父の前で、その人をわたしの仲間であると言い表す。
しかし、人々の前で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う者は、わたしも天の父の前で、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う。」
マタイ12:6では、ご自分を生贄がささげられる神殿より偉大な者と言われていますし、12:8では、ご自分が安息日の主であると言われ、安息日を規定した神であると言われています。
言っておくが、神殿よりも偉大なものがここにある。
人の子は安息日の主なのである。
14:33では舟の中で恐れ叫ぶ弟子たちの、「確かにあなたは神の子です」という叫び声をそのまま受け入れられました。
舟の中にいた人たちは、「本当に、あなたは神の子です」と言ってイエスを拝んだ。
今回の質問を最後にして、もうイエスさまを陥れようとするような質問はなくなります。逆に言えば、彼らはようやくイエスさまの言葉尻を捉えたと言うことができるのです。それは、イエスさまは明確にご自身が神の子であると告白されたことです。この証拠をもってイエスさまは神を冒涜した罪により十字架に付けられることになります。しかし、イエスさまは私たちキリスト者の信仰を支えるために確かな証拠を提供してくださったということを忘れてはなりません。聖書の中には掟と約束がありますが、その約束つまり、無償で義とされ、無償で救われるという約束は、私たちが要求されている掟を守り行うことができないから与えられるのであり、その約束とは一方的に神の恵みとして与えられることをお示しくださった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