ピラトと王 빌라도와 왕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5章1節~15節
15:1夜が明けるとすぐ、祭司長たちは、長老や律法学者たちと共に、つまり最高法院全体で相談した後、イエスを縛って引いて行き、ピラトに渡した。
15:2ピラトがイエスに、「お前がユダヤ人の王なのか」と尋問すると、イエスは、「それは、あなたが言っていることです」と答えられた。
15:3そこで祭司長たちが、いろいろとイエスを訴えた。
15:4ピラトが再び尋問した。「何も答えないのか。彼らがあのようにお前を訴えているのに。」
15:5しかし、イエスがもはや何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ので、ピラトは不思議に思った。
15:6ところで、祭りの度ごとに、ピラトは人々が願い出る囚人を一人釈放していた。
15:7さて、暴動のとき人殺しをして投獄されていた暴徒たちの中に、バラバという男がいた。
15:8群衆が押しかけて来て、いつものようにしてほしいと要求し始めた。
15:9そこで、ピラトは、「あのユダヤ人の王を釈放してほしいのか」と言った。
15:10祭司長たちがイエスを引き渡したのは、ねたみのためだと分かっていたからである。
15:11祭司長たちは、バラバの方を釈放してもらうように群衆を扇動した。
15:12そこで、ピラトは改めて、「それでは、ユダヤ人の王とお前たちが言っているあの者は、どうしてほしいのか」と言った。
15:13群衆はまた叫んだ。「十字架につけろ。」
15:14ピラトは言った。「いったいどんな悪事を働いたというのか。」群衆はますます激しく、「十字架につけろ」と叫び立てた。
15:15ピラトは群衆を満足させようと思って、バラバを釈放した。そして、イエスを鞭打ってから、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引き渡し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5章1節~15節
빌라도와 왕
2024년 9월8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마가복음 15장 1~15절
서론
오늘의 본문은, 빌라도 앞으로 예수님이 넘겨져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빌라도는 재판관으로서 이 자리를 관장하고 있습니다만, 이 재판은 법에 비추어 정당한 판결이 내려진 것이 아니라, 얼마나 부패한 재판이었는가 하는 것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재판관으로서의 빌라도가 얼마나 기회주의적이고 무책임했는지가 보고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 15장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을 얻고자 합니다.
(1) 빌라도와 왕과의 대면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에는, 정치적인 자치권이나 죄인을 처형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18장 31절). 그래서 유대의 최고 법원, 산헤드린 의회에서, 예수님의 사형이 선고되고 날이 밝자마자 예수님을 구속해서 본디오・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빌라도가 당시, 이 지역의 「총독」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총독이라는 것은, 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로마 황제가 파견한 인물입니다. 예전에 유대인의 대표로 헤롯・아켈라오가 영주로서 이 지역을 다스렸는데 헤롯・아켈라오의 통치가 너무 엉망이고 잔인했기 때문에 로마에서 파면되고 로마의 직할령이 되어 빌라도가 총독으로 다스리고 있엇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평소 가이사랴에 살았지만 축제 동안에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루살렘에 주재했습니다.
제사장들,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예수라는 남자를 로마의 법에 비추어 사형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고발하기로 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고, 그때는 신성모독죄로 여겨졌지만 로마 재판에서는 그런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고발해 정치적인 문제로 바꿔치기 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만 「유대의 왕」은 로마에 의해 임명되어야 합니다. 일찍이 헤롯 대왕도, 그리고 그 자녀들인 유대 사마리아의 영주 헤롯・아켈라오도, 갈릴리의 영주 헤롯・안디바도 드라곤 지방의 영주 빌립도 모두 로마에 의해 임명되었습니다. 지금 예수라는 남자가 로마의 임명도 없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칭하고 있다, 이것은 로마에 대한 반역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판의 모습이 지금 읽은 본문에 적혀 있습니다. 15장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처음에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심문하고 있는데, 이 말투는 지난번에 본 대제사장 가야바가 14장 61절에서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처럼 「네가!」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즉「너 같은 자가!」라는 말에 경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앞에 왕으로 보일만한 풍모의 남자가 끌려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기대가 배신당한 것이지요. “너 같은 자가 유대인의 왕이란 말이냐?”며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을 부정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동의하신 것도 아닙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당나귀 새끼를 타시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는 군중의 환호성을 그대로 받으셨음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 세상적인 권세를 가진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니, 즉 로마 황제에게 위협의 존재가 되는 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분명 진정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왕의 권력을 일절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섬기는 자로서, 고난의 종으로서 자기를 낮추셔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이 세상적이고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있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는 자에게만 그 나라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제자들 위에, 교회 위에, 하나님 나라의 지배와 권세가 차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한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이 주고 받는 가운데, 제사장들이 끼어들어와 여러가지로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남자는 우리 백성을 현혹시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또 자신이 왕인 메시아라고 우기고 있습니다(참고 누가복음 23장 2절)”등의 고발을 했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어젯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자신에 관한 많은 위증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듯이, 지금 빌라도 앞에서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라고 빌라도가 신문해도, 역시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빌라도와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의 대면은, 빌라도에게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이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 군중을 두려워하는 빌라도
그런데 유대에서는 일 년 중 가장 큰 축제절기인 유월절 때, 민중이 원하는 한 사람의 죄수를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사면」입니다. 이때도 관례대로 사면을 해달라고 군중이 물려들었습니다. 빌라도는 군중이 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이 예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이 예수를 넘긴것은, 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 빌라도로서도 무고한 자를 마음대로 사형시켜 로마의 법에 저촉되기보다 이 남자를 석방시켜 「큰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넘어가자」는 것이 본심이었을 것입니다. 9절을 보시겠습니다.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여기서, 기묘한 일이지만 재판관인 빌라도는 아직, 예수님의 죄를 일절 확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재판관은 유죄인지 무죄인지, 유죄라면 어느 정도의 죄인지 그것을 확정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것을 포기하고 군중에게 기대면서 군중에게 판결을 맡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군중에게 아부하는 걸까요? 빌라도는 유능한 총독으로서, 이 땅을 다스리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싶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축제 때는 특히 「로마로부터의 해방 운동」의 기운이 높아지기 때문에, 폭동을 두려워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매우 기묘합니다. 거기에 틈을 타 제사장들은 바라바라는 죄수 쪽을 석방하도록 군중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제사장들에게는, 군중을 선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라바는 로마의 지베에 저항하고 폭동을 일으킨 수령이었고, 바라바가 이끌던 폭도들은 살인도 저질렀습니다. 바라바의 폭동은 평소, 생활이 억압받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통쾌한 사건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바라바야말고 로마 황제를 거스르는 반역자였고, 빌라도가 가장 석방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상황이 빌라도의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때, 제사장들의 선동은“너희 모두가, 저 갈릴리 남자가 혹시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현혹되고 있는데, 적당히 눈을 떠라!” “이런 초라한 모습의 인간이 과연 우리의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면서 맞아서 얼굴이 변형되어 버린 예수님을 가리키며 설득했을 것입니다. 군중들도 “그렇지, 진짜 메시아가 저런 비참한 목수의 아들일리가 없지”라고 쉽게 설득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군중에게 묻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그러자 군중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다시 소리 질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빌라도는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하고 더 묻습니다. 군중은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더욱 소리 질렀습니다. 이때 요한복음 19장 12절을 보니 군중들로부터 결정적인 말이 들려 왔습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님을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넘겼습니다. 죄가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폭동이 두려워, 자기 보신을 위해,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희생하는 일을 눈감아주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부패한 재판입니까? 여기서 재판관인 빌라도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교활하고 의에 대해서는 기회주의자였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군중을 두려워하고 남의 시선만을 의식한다면 진정한 왕을 두려워하는 시각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신경은, 대략 그리스도교회라면 어느 교회에서나 고백하는 기본적인 신조 중 하나입니다. 그 사도신경 중에 본디오・빌라도의 이름이 나옵니다.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빌라도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형태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에 되어 버렸습니다. 우연히 당시 유대의 총독이었다는 점에서 운이 나빴다고 볼 수도 있지만, 빌라도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고 자기 보신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희생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친밀한 교제가 없었기 때문에 의와 평화와 기쁨이 없었고 두려움에 지배되어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군중을 두려워하는 심리는, 꼭 빌라도에게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제사장들, 유대 당국자들에게도 똑같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친밀한 교제가 없었기 때문에 의와 평화와 기쁨이 없었고, 군중 사이에서 예수님의 인기가 늘면 늘수록,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공개석상에서 사로잡으려 한다면,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군중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죽이는 계획을 좀처럼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좀더 말하자면, 군중들에게도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군중을 두려워하는 심리는 작용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과 닷새 전에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음에도, 예수님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친밀한 교제가 없었기 때문에 의와 평화와 기쁨이 마음에 없었기 때문에, 제사장들의 선동에 넘어가 태도를 돌변하여, 군중심리에 사로잡히거나 동조압력에 휩싸여,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소리질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왕을 두려워하는 시각은 없었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적용)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군중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큰 힘이며 전형적인 사탄의 공격 수단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여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두려워하고 있지 않을까요. 만약 사람들의 눈이나 여론의 목소리에 우리가 완전히 빠져든다면 그때, 우리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게 됩니다. 말씀을 우선시하기보다는, 항상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고,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하고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으려고 노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아니라 세상의 권세에 속한 자가 되고 맙니다. 세상의 권세에 속한 자는, 빌라도처럼 이 세상의 성공을 모두 그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빌라도처럼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고 진정한 왕을 두려워하는 시각을 잃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를 우러러보며 말씀을 한결같이 완수하신 이 예수님께 속한 자로서, 의와 평화와 기쁨 속에 걸어가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의 참된 왕을 두려워하는 우리로, 이번 주도 걷는 자가 됩시다.
【序】
本日の箇所は、ピラトのもとにイエス様が引き渡され、裁判を受ける場面です。ピラトは裁判長として、この場を取り仕切っていますが、この裁判は、法に照らして正当な判決が下されたのではなく、いかに腐敗した裁判であったのかということが報告されています。そして同時に裁判官としてのピラトが、いかに日和見主義であり、無責任であったのかが報告されています。本日はマルコによる福音書15章の御言葉を通して共に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1】. ピラトと王との対面
当時、ローマの支配下にあったユダヤには、政治的な自治権や、罪びとを処刑にする権利は与えられていませんでした(ヨハネ18:31)。ですから、ユダヤの最高法院、サンヘドリン議会においてイエス様の死刑が言い渡されると、夜があけてすぐ、イエス様を拘束し、ポンティオ・ピラトのもとに引いて行きました。マタイによる福音書とヨハネによる福音書にはピラトが当時、この地域の「総督」であ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総督とは、この地域を治めるために、ローマ皇帝から派遣された人物です。以前、ユダヤ人の代表として、ヘロデ・アケラオが領主としてこの地域を治めていましたが、ヘロデ・アケラオの統治があまりにも滅茶苦茶で残忍であったため、ローマから罷免され、ローマの直轄領になり、そしてピラトが総督として治めていたのです。ピラトは普段、カイザリヤに住んでいましたが、過越し祭の間は、暴動が起きないようエルサレムに駐在していました。
祭司長たち、長老や律法学者たちは、何としてもこのイエスという男をローマの法に照らして死刑にしてやろうと考えていました。そこで、彼らはイエス様をローマに対する「反逆罪」として告訴することにしたのです。「ユダヤ人の王」という罪状書きがまさにそれであります。イエス様は大祭司カイアファの前で、ご自分を「神の子」と告白し、その時は神聖冒涜罪とされましたが、ローマの裁判ではそのような宗教的な問題を取り扱ってくれないため、「ユダヤ人の王」という罪状書きで訴え、政治的な問題にすり替えたということです。当然ですが、「ユダヤの王」はローマによって任命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つてヘロデ大王も、そして、その子供たちである、ユダヤサマリアの領主ヘロデ・アケラオも、ガリラヤの領主ヘロデ・アンティパスも、トラコン地方の領主フィリポも皆、ローマによって任命されました。今、イエスという男がローマの任命なしに自分を「ユダヤ人の王」と名乗っている、これはローマに対する反逆罪に当た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その裁判の様子が、今朝、お読みした個所で書かれています。15:2~5節をご覧ください。
“ピラトがイエスに、「お前がユダヤ人の王なのか」と尋問すると、イエスは、「それは、あなたが言っていることです」と答えられた。そこで祭司長たちが、いろいろとイエスを訴えた。ピラトが再び尋問した。「何も答えないのか。彼らがあのようにお前を訴えているのに。」しかし、イエスがもはや何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ので、ピラトは不思議に思った。”
最初にピラトが「お前がユダヤ人の王なのか」と尋問していますが、この言い方は、前回見ました大祭司カイアファが14:61でイエス様に質問した時のように、「お前が!」という言葉が強調されています。つまり「お前が!」という言葉に軽蔑の念が込められています。ピラトは自分の前に王としてふさわしい風貌の男が連れて来られると思っていたのに、その期待が裏切られたのでしょう。「お前のような者が、ユダヤ人の王なのか」と、せせら笑っているのです。イエス様はピラトに答え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言っていることです」と。この答えは、一体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イエス様はピラトの質問を否定してはいませんが、だからと言って素直に同意している訳でもありません。確かにイエス様は、神の国の王としてこの世に来られました。そのことは、イエス様のエルサレム入城の際、ろばの子に乗られ、「ホサナ。主の名によって来られる方に、祝福があるように」という群衆の歓呼の声をそのままお受けになられたことに、はっきりと示されていました。しかし、イエス様はピラトが考えているようなこの世的な権勢を持った王様として来られたのではない、即ちローマ皇帝にとって脅威の存在となる者として来られたのではないという事を暗示し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ヨハネによる福音書18:36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ございます。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の国は、この世には属していない。もし、わたしの国がこの世に属していれば、わたしがユダヤ人に引き渡されないように、部下が戦ったことだろう。しかし、実際、わたしの国はこの世には属していない。”
イエス様は確かに真の王としてこの世に来られました。しかし実際、イエス様の国は、この世には属しているのではなく、天に属しています。従いましてイエス様は、この世において王様の権力を一切主張されなかったのです。むしろ仕える者として、苦難の僕として、低くへりくだって来られました。イエス様の持っておられる神の国の権勢は、この世的で地上的なものではなく、現在は目には見えない霊的なものなのであります。そしてイエス様にある神の国は、イエス様をメシアと信じる人にのみ、その国の扉が開かれています。イエス様を王として迎える弟子たちの上に、教会の上に、神の国の支配と権勢が満ちるのであります。それは、聖霊による義と平和と喜びであります。
ピラトとイエス様がやり取りしている中、祭司長たちが脇から入り込み、いろいろと訴え始めました。「この男はわが民を惑わし、皇帝に税を納めるのを禁じました。また、自分が王たるメシアだと言い張っています!(参ルカ23:2)」などと訴えたのでしょう。これに対しイエス様はどうされたでしょうか。昨夜、大祭司カイアファの家で裁判を受けている時に、御自身に関するたくさんの偽証に、何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ように、今、ピラトの前でも何もお答えになりませんでした。「何も答えないのか。彼らがあのようにお前を訴えているのに。」とピラトが尋問しても、やはりイエス様は沈黙を守られました。ピラトと真の王であるイエス様との対面は、ピラトに理解することのできない不思議な感情をもたらしたのであります。
【2】. 群衆を恐れるピラト
さて、ユダヤでは一年で最大の祭りである過越し祭の時に、民衆が願い出る一人の囚人を解放する慣習がありました。いわゆる「恩赦」です。この時も慣例通り恩赦をしてほしいということで、群衆が押しかけていました。ピラトは、群衆が釈放を求めているのは当然、このイエスだろうと思いました。なぜなら、祭司長たちがイエスを引き渡したのは、妬みのためだと分かっていたからです。また、ピラトとしても、罪のない者を勝手に死刑にして、ローマの法に抵触するよりも、この男を釈放させ「事なきを得たい」というのが、本音のところだったでしょう。9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こで、ピラトは、「あのユダヤ人の王を釈放してほしいのか」と言った。”
ここで、奇妙なことですが、裁判官であるピラトはまだ、イエス様の罪を一切確定してはいません。本来、裁判官は有罪なのか無罪なのか、有罪であるなら、どれほどの罪なのか、それを確定させる義務があります。しかしピラトはそれを放棄し、群衆におもねりながら、群衆に判決を委ねようとしています。なぜそこまで群衆におもねるのでしょうか。ピラトは有能な総督として、この地を治めているという評価を得たかったということが考えられます。或いは、祭りの時は特に「ローマからの解放運動」の気運が高まるため、暴動を恐れたということも考えられます。いずれにしても大変奇妙であります。そこに付け込んで祭司長たちはバラバという囚人の方を釈放するように群衆を扇動し始めました。恐らく祭司長たちには、群衆を扇動できる自信があったのでしょう。なぜなら、バラバは、ローマの支配に抵抗し、暴動を起こした首領であり、バラバに率いられた暴徒たちは殺人も犯しました。バラバの暴動は普段、生活が抑圧されているユダヤ人にとって、痛快な事件であったに違いないのです。このバラバこそローマ皇帝に逆らう反逆者であり、ピラトが最も釈放したくない人物であったはずです。状況がピラトの意図しない方向に進んで行きました。恐らくこの時、祭司長たちの煽動は、「皆の者、あのガリラヤの男がもしかしたらメシアではないのかと、惑わされているが、いい加減に目を覚ましなさい!」「このようなみすぼらしい姿の者が、果たして我々のメシアであり得ようか」などと言いながら、殴られて顔が変形してしまっているイエス様を指さして、説得したのでしょう。群衆も「そうだよな、本当のメシアがあんな惨めな大工の息子であるはずがないよな」と簡単に説得されてしまったのです。ピラトは改めて、群衆に問いかけます。12節です。「それでは、ユダヤ人の王とお前たちが言っているあの者は、どうしてほしいのか」すると、群衆は「十字架につけろ」と呼応しました。ピラトはさらに問いかけます。14節です。「いったいどんな悪事を働いたというのか。」群衆はますます激しく「十字架につけろ」と叫び立てました。この時、ヨハネ福音書19:12を見ると、群衆から決定的な言葉が聞こえてまいりました。ご覧ください。
“そこで、ピラトはイエスを釈放しようと努めた。しかし、ユダヤ人たちは叫んだ。「もし、この男を釈放するなら、あなたは皇帝の友ではない。王と自称する者は皆、皇帝に背いています。」”
この言葉を聞いて、ピラトはドキッとしたに違いありません。結局、ピラトは群衆を満足させるためバラバを釈放し、イエス様を鞭打って、十字架に引き渡したのであります。罪が何も確定されていないのに拘わらず、正しくないことを知りながら、暴動を恐れ、自己保身のために、一人の罪なき人を犠牲にすることに目をつぶることにしました。これは何と腐敗した裁判でしょうか。ここにおいて裁判官であるピラトがいかに政治的に狡猾で、義に対しては日和見主義であったのかを、私たちは見て取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このように群衆を恐れ、人の目ばかりを気にするなら、真の王を恐れる視点を見失ってしまうのです。
私たちは礼拝の中で使徒信条を告白しています。この使徒信条は、およそ、キリスト教会であればどの教会でも告白する基本的な信条の一つです。その使徒信条の中にポンティオ・ピラトの名前が出てきます。「ポンティオ・ピラトのもとに苦しみを受け、十字架につけられ」と。ピラトは大変不名誉な形で歴史にその名を残すこと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たまたま当時、ユダヤの総督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運が悪かったと見ることもできますが、ピラトは、人々の目を気にし、群衆の圧力に屈服し、自己保身のため、罪なき人を犠牲にしたと見ることもできます。ピラトは、イエス様にある神の国の親密な交わりがなかったため、義と平和と喜びがなく、恐れに支配され「救い主を十字架に付けてしまった」と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この、人々の目を気にし、群衆を恐れるという心理は、何もピラトだけに働いた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実は祭司長たち、ユダヤの当局者たちにも、同じように働いていました。彼らもやはり、イエス様にある神の国の親密な交わりがなかったため、義と平和と喜びがなく、群衆の間でイエス様の人気が増せば増すほど、イエス様を妬み、憎むようになりました。しかし、もし公の場で捕らえようとするなら、イエス様を守るために群衆が暴動を起こしかねません。彼らは群衆を恐れ、イエス様を殺す計画をなかなか実行できずにいたというのが事実であります。さらに言えば、群衆たちの上にも、人の目を気にし、群衆を恐れるという心理は働いていたと言えます。彼らはわずか五日前には「ホサナ。主の名によって来られる方に、祝福があるように」と叫んでいたのに、イエス様にある神の国の親密な交わりがなかったため、義と平和と喜びが心になかったために、祭司長たちの煽動に乗ってしまい、態度を急変させ、群衆心理に駆られ、或いは同調圧力に取り込まれ、「十字架に付けろ」「十字架に付けろ」と叫んだのです。そのようにして、真の王を恐れる視点はなく、神の子を十字架で殺すことに何の躊躇もなかったのであります。
【適用】
人々の目を気にし、群衆を恐れさせること、これは今も昔も大変大きな力であり、典型的なサタンの攻撃の手段であります。私たちもこの世を生きる中で、常に人々の目を気にし、世論の声に耳を傾け、恐れ怯え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もし、人々の目や、世論の声に私たちが完全に取り込まれるなら、その時、私たちはイエス様との親密な交わりを失うことになります。御言葉を優先するよりも、常に人を喜ばせようとし、人に気に入られたい、人から評価されたいと努力することになるからです。その時、私たちは神の国の権勢ではなく、世の権勢に属する者となってしまいます。世の権勢に属する者は、ピラトのようにこの世の成功を全て、その手に収めることがひょっとしたらできるかもしれませんが、ピラトのようにイエス様との親密な交わりを失い、真の王を恐れる視点を失い、しまいには全てを失ってしまうのです。私たちは、人から来る恐れではなく、天の父を仰ぎつつ、御言葉をひたすら全うしたこのイエス様に属する者として、義と平和と喜びの中、歩んで行く者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人の目を恐れず、群衆の声を恐れず、神の国の真の王を恐れる私たちとして今週も歩む者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