皆主イエスを見捨てる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4章43節~52節
14:43さて、イエスがまだ話しておられると、十二人の一人であるユダが進み寄って来た。祭司長、律法学者、長老たちの遣わした群衆も、剣や棒を持って一緒に来た。
14:44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ユダは、「わたしが接吻するのが、その人だ。捕まえて、逃がさないように連れて行け」と、前もって合図を決めていた。
14:45ユダはやって来るとすぐに、イエスに近寄り、「先生」と言って接吻した。
14:46人々は、イエスに手をかけて捕らえた。
14:47居合わせた人々のうちのある者が、剣を抜いて大祭司の手下に打ってかかり、片方の耳を切り落とした。
14:48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るで強盗にでも向かうように、剣や棒を持って捕らえに来たのか。
14:49わたしは毎日、神殿の境内で一緒にいて教えていたのに、あなたたちはわたしを捕らえなかった。しかし、これは聖書の言葉が実現するためである。」
14:50弟子たちは皆、イエスを見捨てて逃げてしまった。
15:51一人の若者が、素肌に亜麻布をまとってイエスについて来ていた。人々が捕らえようとすると、
15:52亜麻布を捨てて裸で逃げてしまっ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4章43節~52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2024년 8월11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마가복음 14장 43~52절
서론
예수님이 졸고 있는 제자들을 깨우고「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을 적의 손에 넘겨주기 위해서입니다. 왜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 버렸을가요? 그리고 왜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을까요? 오늘은 제자들이 모두 실족해 버린 것의 배경을 생각 하면서 마가복음 14장의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얻고 싶습니다.
(1) 망상 속에 걸려 넘어진 유다
43절의 「열둘 중의 하나」라는 수식어는, 14장 10절과 14장 20절에도 나왔습니다. 이 수식어는 예수님이 몇 시간 전, 유월절 식사 중 말씀하신 것이 지금 바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붙여 졌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 중에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앞 페이지를 한 장 넘겨서, 마가복음 14장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즉, 가장 신뢰했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에 의해, 예수님은 발길질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한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지금, 이스카리옷 유다를 통해 실현된 것입니다. 유다와 함께 온 무리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들이 도대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주해서에서 의견이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축제 기간 중에 배치된 로마 병사라는 의견입니다. 또 하나는 상시 고용되었던 유대인에 의한 성전 경비원이라는 의견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2절에 따르면, 유다가 이끌던 무리는 예수님을 사로잡아, 처음에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 데려갔다고 쓰여 있으니, 만약 이 「무리」가 로마 병사라면, 예수님을 사로잡은 뒤 로마 군대가 스스로 퇴위시켰을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데려갈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유대인(레위인)에 의한 성전 경비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역사가 요셉푸스에 따르면, 대제사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고용된 「불량자」같은 무리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유다는 이 유대인들로 구성된 성전 경비원들을 이끌고 검과 몽치를 들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라고 그들과 군호를 짜놓고 가장 먼저 예수님께 다가가 「랍비여」라고 말하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때는 심야입니다. 주위를 비추는 빛은 달빛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달빛조차 올리브 나무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특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 경비원은 「입맞춤」이라는 군호에 따라 쉽게 예수님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입맞춤」이라는 것은 동서고금 어느 나라에서나 친애의 정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유다의 입맞춤은 스승에 대한 친근감과 존경과 애정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 「입맞춤」을 예수님을 넘겨주는 군호로 삼다니 바로 유다의 비열함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이렇게까지 비열한 짓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한 유다의 동기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 나라의 수립을 누구보다 열심히 기다리던 유다에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수난 고지는 유다를 누구보다 크게 실망시켰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무슨 거짓말을 하신 것은 아니지만, 유다가 멋대로 착각을 하고 망상을 키워 나갔을 것입니다. 그 망상이란 “예수님을 메시아로, 정치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수립한다”, “먼저 이 일의 첫 시작으로 예루살렘의 성전 당국자들과 손잡고, 예수님이 메시암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 왕국이 로마의 지배로부터 독립한다” 이런 것이 아닐까요? 유다가 그린 이런 시나리오는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실망으로 인해 유다는 예수님의 생명을 비열한 방식으로 넘겼습니다. 결국, 유다는 제멋대로 마음에 그린 자신의 망상에 사로잡혔고, 그 망상이 무너져가는 가운데 자신도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린 메시아상 안에서 걸려 넘어진 것은, 결코 유다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걸려 넘어집니다. 14장 46,4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자신이 그린 메시아상 속에서 넘어지는 제자들
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요한 복음의 병행 기사를 보면, 있던 사람들 중 어떤 자가 검을 뽑아 대제사장의 하수인에게 덤벼든 것은 시몬・베드로라고 적혀 있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반박했습니다. 방금 전에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기 때문일까요, 베드로는 용감하게도 대제사장의 수하에 맞섰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몸싸움을 제압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상황에서, 몇명의 사망자가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시고 의연한 태도로 그들의 손아귀로 나아가셨습니다. 48,4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강도」라는 헬라어에는 「혁명가」라든가 「반란을 부추기는 자」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로마의 지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반란의 불씨가 곳곳에서 피어올랐습니다. 그러던 중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혁명가가 나타나, 백성을 선동하고 반란을 기도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혁명가나 반란을 부추기는 자들처럼 은밀히 반란을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 성전 경내에서, 당국자들이 보는 앞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반란을 선동하셨다면 「왜 대낮에 당당하게 잡는 일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힐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모든 백성이 예수님에 대한 반란 선동죄 혐의를 부정하는 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강제로 잡으려 한다면 백성들 속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런 어둠 속에서 비밀리에 나를 잡으려는 것은 너희에게 죄와 비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라고 예수님은 나무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걸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이 실현되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이 없게도 예수님이 사로잡히자, 당황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50절의 헬라어를 보면 「다(판테스παντες)」라는 말이 마지막에 와서 강조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예수를 버리고 제자들은 도망쳤다. 그들이 다」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이 품고 있던 환상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가운데 제자들은 모두, 유다와 마찬가지로 넘어졌습니다. ‘이럴리가 없는데..’라는 생각이 제자들의 솔직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며,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육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비록 기도하고 평안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보증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서 55장 8,9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우리가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결코 비관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더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백성을 항상 돌보아 주시고, 목자로서, 선하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최선의 인도를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진심으로 말씀에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순종한다면, 우리가 과거를 돌아봤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움, 하나님의 진실함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한 사람이 이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라고 생각됩니다. 51,52절을 보시겠습니다.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배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한 청년」은 이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라고 전통적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마가는 열두 제자 중 한 명이 아니지만,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예수님 일행이 유월절 식사를 한 집의 주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청년의 정체에 대해 복음서는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기사는 마가복음에만 실린 기사이며, 마가보다 늦은 연대에 쓰인 것으로 알려진 마태복음에도, 누가복음에도 그리고 요한복음에게도 이 우스운 기사는 삭제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기사가 익명으로 등장시킨 저자의 자서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저자 마가가 자신의 부끄러운 실패담을 굳이 여기에 삽입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베를 걸치고 있었다는 것에서 그가 비교적 부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옷을 벗은 모습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벌거벗고 도망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그만큼 그는 허둥지둥 하면서 도망쳤다는 것이 전해집니다. 제자들은 모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전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예고하신 것의 성취였습니다.
자, 초대교회 제자들은 복음서 내용을 읽고 듣고 “사도 선생님들은 그때 도망쳤군요”라고 소감을 밝혔을 것입니다. 그에 대해 사도들은 입을 모아 “그래. 나는 그때 도망갔다”라고 대답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벗은 몸으로 도망간 마가에게도 같은 것이 질문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때 벗은 몸으로 도망갔군요” “부끄럽지만 맞습니다”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대교회를 이끈 사도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면서 교회를 세워나갔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이스카리옷 유다의 비열하고 가장 신뢰받던 열두 제자 중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발길질하고 주님을 업신여겼지만, 자신들도 주님에게 똑같은 일을 해버렸습니다. “나는 메시아를 버리고 도망친 자이다! 나는 메시아를 버리고 도망쳤을 뿐만 아니라 벗은 몸으로 도망친 자이다!”이 실패와 부끄러움은 그들의 흑역사로서 잊으려 해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때 도망쳐버린 나를, 그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던 나를 갈릴리에서 부활의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역사로 근본적으로 죄를 속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교회 지도자가 되어 있습니다.”이게 무슨 은혜일까요? 그 일이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 기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과거에 있어서의 수치와 실패의 체험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용서와 속죄의 역사를 찬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
성경 말씀이 하나하나 성취되는 것과 반비례하여, 제자들의 육의 생각과 제자들이 품고 있던 환상은, 하나 하나 무너져 갔습니다. 제자들의 열성에서 나온 말은, 말씀의 성취와 현실 앞에 모두 논파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부끄러움과 실패는, 잊으려 해도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를 온전히 속죄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그 사실을 굳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강하게 체험하고, 죽음과 죄의 힘으로 승리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역사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수치와 실패는, 주님을 찬양하는 연료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기초가 되어 초대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도 날마다 묵상하면서, 우리도 주님의 구원의 역사에 감사하면서 걷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序】
イエス様が居眠りしている弟子たちを起こし、「時が来た。人の子は罪人たちの手に引き渡される。立て、行こう。」と語った時に、十二人の一人であるユダがイエス様に進み寄ってきました。イエス様を敵の手に引き渡すためです。なぜユダはイエス様を引き渡し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か。そしてなぜ、他の弟子たちは皆イエス様を見捨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か。本日は弟子たちが全員つまずいてしまったことの背景に思いを寄せながら、マルコ14章の御言葉を通して、共に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1】. 妄想の中でつまずいたユダ
43節の「十二人の一人が」という枕詞は、14:10と14:20にも出てきました。この枕詞はイエス様が、数時間前、過ぎ越しの食事の中で、言われていたことが今、まさに成就したという事を示すためにつけられていると思われます。イエス様は過ぎ越しの食事の中で「わたしと一緒に食事をしている者が、私を引き渡すだろう」と予告されました。前のページを1枚めくっていただいて、マルコ14:20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言われた。「十二人のうちの一人で、わたしと一緒に鉢に食べ物を浸している者がそれだ。”
つまり、最も信頼していた十二弟子の中の一人によって、イエス様は足蹴にされ、ないがしろにされると言われたのですが、その御言葉が今、イスカリオテのユダを通して実現されたのです。ユダと一緒になってやって来た群衆は、「祭司長、律法学者、長老たちから遣わされた者たち」と書かれています。彼らが一体何者かについては、注解書で意見が二つに分かれていました。一つは、祭りの期間中に配置されたローマ兵であるという意見です。もう一つは、常時雇われていたユダヤ人による神殿警備員であるという意見です。ヨハネ福音書18:12によると、ユダに率いられた群衆はイエス様を捕らえ、最初に元大祭司であるアンナスの所に連れて行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から、もし、この「群衆」が、ローマ兵だとすると、イエス様を捕らえた後、ローマ軍が自分たちで退位させたはずの、元大祭司、アンナスの所に連れて行くはず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恐らくユダヤ人(レビ人)による神殿警備員であったと考えられます。歴史家のヨセフスによれば、大祭司から賄賂を受けて雇われている「ならず者」のような連中だ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ユダは、このユダヤ人によって構成された神殿警備員を引き連れ、剣と棒を持って現れたのです。そして「わたしが接吻するのが、その人だ」と、合図を決めておき、真っ先にイエス様に近寄り、「先生」と言って接吻しました。時は深夜であります。あたりを照らす光は、月の光しかなかったはずです。その月明かりでさえ、オリーブの木々の間では何の役にも立たなかったことでしょう。従って、闇の中でイエス様を特定するのは困難なことだ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しかし、神殿警備員は「接吻」という合図によって、簡単にイエス様を捕らえることが出来たのです。「接吻」というのは、古今東西どこの国でも親愛の情を表す行為です。ユダの接吻は、先生に対する親しさと、尊敬と、愛情を示すものでありますが、この接吻を、イエスを引き渡す合図にするとは、まさにユダの卑劣さが浮き彫りにされています。一体なぜ、十二人の一人であるユダが、ここまで卑劣なことをすることが出来たのでしょうか。そのようにしたユダの動機については、推測することしかできませんが、神の国の樹立を、誰よりも熱心に待ち望んでいたユダにおいて、イエス様の口から出てきた受難告知は、ユダを誰よりも深く失望させたからだと、私は思います。イエス様はユダに対して何か嘘を言った訳ではありませんが、ユダが勝手に思い違いをし、妄想を膨らませていったのでしょう。その妄想とは「イエス様をメシアとして、政治的な神の国を樹立する。」「まず手始めにエルサレムの神殿当局者たちと手を組んで、イエス様がメシアであることを受け入れていただく。」「そして、最終的にイスラエル王国がローマの支配から独立する」といったも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ユダが描いたこのようなシナリオは、失望に変わりました。その仕返しとして、ユダはイエス様の命を卑劣な仕方で引き渡したのであります。結局、ユダは、勝手に思い描いた自分の妄想に捕らわれ、その妄想が崩れていく中で自分もつまずい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です。自分の描いたメシア像の中でつまずいたのは、決してユダだ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他の弟子たちも同じような仕方でつまずいていきます。14:46~47節をご覧ください。
【2】.自分の描いたメシア像の中でつまずいた弟子たち
“人々は、イエスに手をかけて捕らえた。居合わせた人々のうちのある者が、剣を抜いて大祭司の手下に打ってかかり、片方の耳を切り落とした。”
ヨハネの福音書の並行記事を見ますと、居合わせた人々のうちのある者が、剣を抜いて大祭司の手下に打ってかかったのは、シモン・ペトロ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あなたがたは皆つまずく、旧約聖書にそう書いてある」とイエス様から言われたペトロは「たとえ、みんながつまずいても、わたしはつまずきません」と反論しました。ついさっき、そのように豪語したためでしょうか、ペトロは勇敢にも、大祭司の手下に打ちかかっていきました。もし、イエス様がこの小競り合いを制圧しなければ、この状況において、何人かの死者が出ていたことでしょう。イエス様は何の抵抗もせず、毅然とした態度で、彼らの手の中に進んで行かれました。48~49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るで強盗にでも向かうように、剣や棒を持って捕らえに来たのか。わたしは毎日、神殿の境内で一緒にいて教えていたのに、あなたたちはわたしを捕らえなかった。しかし、これは聖書の言葉が実現するためである。」”
「強盗」というギリシア語には、「革命家」とか、「反乱を煽る者」という意味も含まれています。当時、イスラエルでは、ローマの支配が気に入らず、反乱の火種が至る所でくすぶっていました。そんな中、自らをメシアと名乗る革命家が現れ、民を煽動し、反乱を企てるということが、しばしば起こりました。イエス様は、その革命家や反乱を煽る者たちのように、密かに反乱を企てた訳ではありません。毎日、神殿の境内で、当局者たちの目の前で、御言葉を教えていました。もし、イエス様が民に反乱を煽動していたなら、「なぜ、白昼堂々と捕まえることをしなかったのか」と、問い詰めているのです。彼らはとてもそうすることは出来ませんでした。なぜなら、イエス様の教えを聞いていた全ての民が、イエス様に対する反乱扇動罪の容疑を否定する証人となるに違いないからです。もし、イエス様を強引に捉えようとすれば、民の中で暴動が起こったことでしょう。「このような闇の中で、秘密裏に私を捕えようとするのは、あなたがたにこそ、罪と不正があるからではないか」と、イエス様は咎めているのです。しかし、イエス様は抵抗することもなく、御自身のいのちを捧げる歩みへと進まれました。それは、聖書の御言葉が実現するためであり、神のご計画が成就するためです。
あっけなく、イエス様が捕らえられると、狼狽した弟子たちは皆、イエス様を捨てて逃げてしまいました。50節のギリシア語を見ますと、皆(パンテスπαντες)という言葉が最後に来て、強調されています。直訳しますと、「イエス(彼)を捨てて、弟子たちは逃げた。彼ら皆が。」というふうになっています。自分たちの抱いていた幻想が徐々に崩れていく中で、弟子たちは皆、ユダと同じようにつまずいていきました。「こんなはずではなかったのに」という思いが、弟子たちの率直な気持ちだったでしょう。しかし、これが旧約聖書の預言の成就であり、神様の御心であったのです。このことから、私たちが適用できることは、私たちの肉の思いと、神の御心に、どれほど大きな隔たりがあるの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が神の御心を知ることは、大変難しいことです。たとえ、祈って平安が与えられたとしても、それが本当に神様の御心なのか、お墨付きを与えることは出来ません。イザヤ書55章8~9節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あります。
“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たちの思いと異なり/わたしの道はあなたたちの道と異なると/主は言われる。天が地を高く超えているように/わたしの道は、あなたたちの道を/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たちの思いを、高く超えている。”
私たちがどんなに祈ったとしても、私たちがどんなに誠実に歩んだとしても、神の御心を完全には知ることが出来ないということに対して、決して悲観的になる必要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たとえ、神の御心が私たちには隠されていても、神様は全てのことをご存じであり、ご自身の民をいつも顧みてくださり、羊飼いとして、良いお方として、私たちに最善の導きを与えてくださるからです。もし、イエス様を私たちの王として迎え入れ、心から御言葉に従順するなら、神は、私たちの営みの全てを祝福してくださることでしょう。私たちがイエス様に従順するなら、私たちが過去を振り返った時に、神様の恵み深さ、神様の真実さを、深く悟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そのように過去を振り返り、神の恵みを悟った一人が、この福音書の著者であるマルコであると思われます。51~52節をご覧ください。
“一人の若者が、素肌に亜麻布をまとってイエスについて来ていた。人々が捕らえようとすると、亜麻布を捨てて裸で逃げてしまった。”
一人の若者とは、この福音書の著者であるマルコであると伝統的に解釈されています。マルコは十二弟子の一人ではありませんが、恐らくエルサレムにおいてイエス様一行が過ぎ越しの食事を取った家の主人であったのだろうと考えられています。この若者の正体について、福音書は何の手がかりも与えてくれません。そして、この記事は、マルコによる福音書にしか載っていない記事であり、マルコより遅い年代に書かれたとされているマタイにも、ルカにも、そしてヨハネにも、このおかしな記事は削除されてしまいました。その理由は、この記事が匿名で登場させた著者の自叙伝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たからであると推測されます。著者マルコが自分の恥ずかしい失敗談をあえて、ここに挿入させているのです。亜麻布をまとっていたということから、彼が比較的裕福であったことが分かります。また、ユダヤ人にとって服を脱いだ姿は、人々に嫌悪感を与えました。従って裸になって逃げるというのは、ユダヤ人にとって大変不名誉なことであります。それほど、彼は狼狽して逃げたという事が伝わってきます。弟子たちは皆、一人の例外もなく、メシアであるイエス様を捨てて逃げてしまったのです。それは、イエス様が事前に、「あなたがたは皆つまずく」と予告されていたことの成就でありました。
さて、初代教会の弟子たちは、福音書の内容を読み聞きし、「使徒の先生方は、あの時、逃げたんですね。」と感想を漏らしたことでしょう。それに対して使徒たちは口をそろえて「そうだ、私はあの時、逃げたんだ。」と答えたに違いありません。裸で走っていったマルコにも同じことが質問されたでしょう。「あなた、あの時、裸で逃げたのね。」「恥ずかしいけど、その通りです。」そう答える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初代教会を導いた使徒たちは、自分たちの恥をさらしながら、教会を建て上げていったということです。確かにイスカリオテのユダは卑劣であり、最も信頼されていた十二弟子の一人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主を足蹴にし、主をないがしろにしましたが、自分たちも主に対し、同じようなことをしてしまった。「自分は、メシアを捨てて逃げた者だ!」「自分は、メシアを捨てて逃げただけでなく、裸で逃げた者だ!」この、失敗と恥は、彼らの黒歴史として、忘れようとしても決して忘れ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同時に、あの時、逃げてしまった私のことを、あの時、取り返しのつかない罪を犯してしまった私のことを、ガリラヤで復活の主が、赦してくださった。十字架の御業によって罪を根本から贖ってくださった。そして、今、このように教会の指導者にされている。これは何という恵みだろうか。そのことがあまりにも感謝で、あまりにも嬉しいので、神を褒めたたえずにはいられないのだと思います。自分たちの過去における、恥と失敗の体験をさらしてでも、主の赦しと贖いの御業を讃美しないではいられないのです。
【結論】
聖書の御言葉が一つ一つ成就されるのと反比例し、弟子たちの肉の思いと、弟子たちが抱いていた幻想は、一つ一つ崩れていきました。弟子たちの熱心さから出た言葉は、御言葉の成就と現実の前に、全て論破されました。弟子たちの恥と失敗は、忘れようとしても忘れられるものではなく、むしろ、年を重ねるごとに鮮明に思い起こされます。しかし、主イエスは、ガリラヤで弟子たちの罪を赦してくださいました。十字架を通して罪を完全に贖ってくださいました。弟子たちは今、そのことを堅く信じ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今や、弟子たちは神の赦しを強く体験し、死と罪の力に勝利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の素晴らしい御業を、讃美しないではいられない者へと変えられたのです。忘れることのできない過去の恥と失敗は、主を讃美する燃料に変えられました。そのようにして初代教会の指導者たちが土台として据えられ、初代教会が建て上げられていったのであります。この恵みを私たちも日々黙想しつつ、私たちも主の御業に感謝しつつ、歩むもの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