ナルドの香油 나르드 향유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4章1節~9節
14:1さて、過越祭と除酵祭の二日前になった。祭司長たちや律法学者たちは、なんとか計略を用いてイエスを捕らえて殺そうと考えていた。
14:2彼らは、「民衆が騒ぎだすといけないから、祭りの間はやめておこう」と言っていた。
14:3イエスがベタニアで重い皮膚病の人シモンの家にいて、食事の席に着いておられたとき、一人の女が、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の入った石膏の壺を持って来て、それを壊し、香油をイエスの頭に注ぎかけた。
14:4そこにいた人の何人かが、憤慨して互いに言った。「なぜ、こんなに香油を無駄遣いしたのか。
14:5この香油は三百デナリオン以上に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すことができたのに。」そして、彼女を厳しくとがめた。
14:6イエスは言われた。「するままにさせておきなさい。なぜ、この人を困らせるのか。わたし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14:7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るから、したいときに良いことをしてやれる。しかし、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ない。
14:8この人はできるかぎりのことをした。つまり、前もってわたしの体に香油を注ぎ、埋葬の準備をしてくれた。
14:9はっきり言っておく。世界中どこでも、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所では、この人のしたことも記念として語り伝えられるだろう。」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4章1節~9節
나르드 향유
2024년 7월7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마가복음 14장 1~9절
서론
마가복음은 14장부터 15장 끝 부분까지가 십자가 수난 이야기에 들어갑니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로서의 매듭 기사가 16장에 이어집니다. 14장 1,2절 그리고 다음 번에 보게 될 14장 10,11절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묘사가 샌드위치처럼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오늘 나르드 향유의 기사는, 에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나타내는 묘사로 빛을 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 14장 1~9절 말씀에서 은혜를 얻고자 합니다.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친밀한 식사 시간에 일어난 일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일요일로, 이른바 「종려주일」이라고 불리우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부터 나흘이 지나고, 드디어 이틀 뒤에는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디아스포라라고 불리는 외국에 흩어진 유대인들도 순례차 왔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이 유월절이라는 것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축제입니다. 정확히는 축제 첫날이 유월절이고, 그 뒤에 이어지는 일주일간의 기간이 무교절, 즉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떡의 축제」로 되어 있었습니다. 유월절도 무교절도 출애굽의 사건과 관련된 축제로, 이 시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속죄해 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지냈습니다. 동시에 이 시기는 로마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기운이 고조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도래하여 현재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축제 기간 중에는 로마 병사들에 의한 경비가 삼엄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했지만,「명절에는 하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는 군중들이 감정적이 되고, 폭동이 일어나 그것이 민란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날,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km정도 떨어진 교외의 베다니라는 마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나병에 걸린 환자는 보통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야 합니다. 레위기 13장 45,46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시몬이 현재,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나병이 과거의 일이고, 이미 치유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병을 치유하셨다는 기사가 여러 번 나오기 때문에, 어쩌면 시몬은 예수님에 의해 치유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유대인은 식사를, 천천히 시간을 들여 합니다. 그리고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호의와 친밀감의 표현이며,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3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전에 나병환자로서 깊은 절망 속에 있던 시몬과 그의 가족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윤택함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식사 시간은 시몬과 그의 가족에게 더할나위 없는 행복의 시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3절의 「식사하실 때에」라는 단어입니다만, 조금 자세한 것을 말하자면 이 부분의 헬라어는 「누워 있을 때」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식사 풍습을 나타내는데, 현대와 같은 의자와 테이블이라는 식탁 스타일이 아니라, 침상처럼 생긴 넓은 좌석에 기대어, 식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한 여자가 순수하고 매우 값비싼 나르드 향유가 담긴 석고 항아리를 가지고 와서, 그 향유를, 누워 계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나르드 향유는, 인도산 수입품으로, 식물의 뿌리에서 추출한 매우 비싼 향유였습니다. 저는 그 향기를 맡아본 적은 없지만, 아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향기였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값비싼 향유가 한꺼번에 부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4,5절을 보시겠습니다.
(2) 허비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어떤 사람들이」란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후 6~9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분명히 제자들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개하고,「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하며 그 여자를 엄하게 책망했습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란, 하루 노동의 임금이라고 하니, 삼백 데나리온 이상이란, 안식일을 제외하고 일한 한 해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런 값비싼 나르드 향유를 아낌없이 모두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그 아무 생각도 없는 듯한 허비에 대해 제자들은 분개한 것입니다. 또 유월절시기라고 하는 것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베품이 강조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전에, 재산이 많은 청년에게 소유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10장 21절). 그러므로 제자들이 그와 같이 여자를 엄하게 책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여자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구약성서에는 「기름부음」은 왕, 제사장, 선지자가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 거행된 의식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 외에는 축제 때 「기름부음」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관례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여자는 축제 때의 관례적인 「기름부음」으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 심상치 않은 「기름부음」에, 예수님을 향한 형언할 수 없는 감사와 헌신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책망하는 제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6~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방금 읽은 곳에서 「좋은 일 (7절의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다른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뒤쪽에 나오는 7절의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라는 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라는 말은 「유」라는 헬라어이며, 「좋은」이라는 뜻 외에 「훌륭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는, 즉 제자들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베품(좋은 일)을 말합니다. 한편, 앞에 나오는 6절의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의 「좋은」이라는 말은 「칼로스」라는 헬라어이고, 이 말은 「좋다」라는 뜻 외에도「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말씀에 의해 창조된 피조세계를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좋은 일」이라는 말에 「칼로스」라는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피조물은 모두 「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전도서 3장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는 말에 「칼로스」라는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즉 여자의 행동은, 제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허비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결코 훌륭한 행위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가 힘을 다하여 한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와 마가복음 12장에서 렙돈 동전 두 닢을 바친 그 가난한 과부의 모습에서 공통점을 찾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위를 자신의 매장 준비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아마도 이때, 예수님의 머릿속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이루는 일에만 집중하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십자가의 죽음」, 즉 죄인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물로서의 죽음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불안과 고독과 긴장 속에서 홀로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로 머리가 벅찼던 예수님께 여자의 행동은 바로 자신의 매장을 위한 준비로 보였을 것입니다. 물론 여자는, 예수님이 설마 이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올바르게 예상하고 그에 대비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조차 축제 기간 동안은 그만두자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녀의 행위는 결코 예수님의 괴로운 마음속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가 한 일은 「좋은 일」로 「때를 따라 한 아름다운 일」로 예수님께 큰 위로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허비하는 것과 같은 「기름부음」은, 메시아로서의, 왕으로서의 은밀한 「기름부음」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다윗이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은밀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것처럼, 혹은 솔로몬이 제사장 사독에 의해 은밀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것처럼, 한 여자에 의해 은밀하게 예수님께 기름부워진 것입니다. 여자가 행한 일은, 고독과 긴장과 불안에 계시던 예수님께 얼마나 용기를 북돋아주었을까요? 9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며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여자가 한 일은, 제자들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낭비이고 허비였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한 것보다 더 큰 낭비, 더 큰 허비, 더 큰 희생을 치러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이 멸망 당하기 마땅한 자이며, 우리들 죄인이 구원받아야 할 아무런 공로가 없는 자인데도,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헌신하여 주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여자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인 부분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이렇게 사랑해주신 예수님께, 나는 내가 가진 최고의 것으로 응답하고 싶다!”라고 바랐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여자의 헌신은, 더 큰 예수님의 헌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서 특별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사랑과 헌신의 행위는 예수님이 목숨을 바쳐주신 십자가 복음에 비하면 작은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헌신의 행위가 예수님의 복음과 함께, 기념으로 영원히 구전 되도록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우츠노미야 교회의 목사셨고, 지금은 소천하여 하늘에 계신 카네타 토모아키 목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코베의 신학교에 편입했을 때 마침 동급생이 되었습니다. 카네다 목사님은 중학교 교사로 일하셨고, 교회에서는 집사로 봉사하셨습니다. 50대 후반에 이르러 교사를 사직하고 신학교에 헌신하신 것입니다. 보통 신학생에게는 학비와 기숙사비가 무료였지만, 카네다 목사님은 사모님이 불신자였기 때문에 교사 후보자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학비와 기숙사비를 자비로 충당하셨습니다. 또한 신학교 재적 기간 동안 많은 책을 구입했기 때문에, 그 여러 가지로 들어간 비용이 천만 엥이나 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하고나서도 바로 목사가 되지 못하고 한동안, 킹스가든이라는 요양시설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얼마 후 동부 노회에서 비록 배우자가 불신자일지라도 목사 후보자가 되는 것이 인정되었고, 비로서 카네다 목사님은 목사 후보자로 인정되었고, 그리고 바로 우츠노미야 교회로 부임하셨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시작한지 5년 만에 소천을 하신 것입니다. 목사님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만, 카네다 목사님의 헌신은, 하나님의 눈에, 매우 아름다운 것으로 보였을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적용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무엇을 가지고 응답할까요? 우리들도 이 여자가 했던 것처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헌신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과「은사」와「돈」을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간을 부여받고 있지만, 이 시간을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따로 떼어, 주말에는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거나 형제자매와 교제를 하거나, 함께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둘째 「은사」입니다. 은사는 개개인마다 다르지만, 각각 아름답게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기 자신의 은사를 적극적으로 바치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수입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그 수입의 10분의 1을 은혜의 응답으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표시로, 바치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사랑과 헌신을,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받아주시고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사용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序】
マルコによる福音書は14章から15章の終わりまで十字架の受難物語に入ります。最後にエピローグとしての結びの記事が16章に続きます。14章1、2節、そして、次回見ることになる14章10、11節には、イエス様の死を匂わせる不吉な描写が、サンドイッチのように記述されています。その中にあって、本日のナルドの香油の記事は、イエス様への愛と献身を表す描写として光を放っていることがわかります。本日は、マルコによる福音書14章1~9節の御言葉から恵みにあずかりたいと思います。1~2節をご覧ください。
【1】. 親密な食事の中で起こった出来事
“さて、過越祭と除酵祭の二日前になった。祭司長たちや律法学者たちは、なんとか計略を用いてイエスを捕らえて殺そうと考えていた。彼らは、「民衆が騒ぎだすといけないから、祭りの間はやめておこう」と言っていた。”
主イエスがエルサレムに入城されたのは日曜日であり、所謂、「棕櫚の主日」と呼ばれている日でありました。その日から四日が経過し、いよいよ二日後には過ぎ越し祭が迫っています。エルサレムには過ぎ越し祭を守るために、ディアスポラと呼ばれる外国に散らされたユダヤ人たちも巡礼で来ていたため、エルサレムは多くの人々でごった返していました。この過ぎ越し祭というのは、一週間続く祭りであります。正確には、祭りの初日が過越祭であり、その後に続く一週間の期間が除酵祭、つまり、「種を入れないパンの祭り」とされていました。過越祭も除酵祭も、出エジプトの出来事と関連している祭りであり、この時期、神様がイスラエルをエジプトの奴隷状態から贖ってくださったことを覚え、感謝しながら過ごしていました。また、同時にこの時期は、ローマの支配からの解放を求める気運が高まる時期でもありました。イスラエルの人々はメシアが到来し、現状のローマの支配から解放してくださることを願っていたのです。ですから祭りの期間中は、ローマ兵による警備が厳戒態勢となりました。従って祭司長たちと律法学者たちは、計略を用いて何とかイエス様を殺そうと考えてはいましたが、「祭りの期間はやめておこう」と言ったのです。イエス様をメシアだと信じている群衆が感情的になり、暴動が起きて、それが大きなうねりとなることを恐れていたからでありました。
さて、イエス様はこの日、エルサレムから東に3キロほどの郊外の、ベタニアという町において、重い皮膚病の人シモンの家に食事に招かれていました。重い皮膚病にかかっている患者は、通常、イスラエルの共同体から隔離される必要があります。レビ記13:45-46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
“重い皮膚病にかかっている患者は、衣服を裂き、髪をほどき、口ひげを覆い、「わたしは汚れた者です。汚れた者です」と呼ばわらねばならない。この症状があるかぎり、その人は汚れている。その人は独りで宿営の外に住まねばならない。”
シモンが現在、自分の家に戻ってきて、イエス様と一緒に食事をしているということは、その皮膚病が過去のことであり、既に癒されたということが推測されます。マルコによる福音書には、イエス様が病を癒されたという記事が何度か出てきますので、もしかしたらシモンはイエス様によって癒されたのかもしれません。ユダヤ人は食事を、ゆっくりと時間をかけて取ります。そして食事を一緒にするというのは、好意と親密感の現れであり、家族として受け入れられていることを意味しました。従いまして3節から読み取れることは、以前、重い皮膚病患者として、深い絶望の中にあったシモンと、彼の家族に、イエス様によって喜びと潤いのある営みが回復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この食事の時間は、シモンと、彼の家族にとって、この上ない至福の時間であ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ところで、3節の「食事の席に着いておられる時」という言葉ですが、少し細かいことを申しますと、ここのギリシア語は、「横になっている時」と書かれています。これは、当時の食事の風習を表しておりまして、現代のような椅子とテーブルという食卓スタイルではなく、台座に横になりながら、食事をと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そこへ、一人の女が純粋で非常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の入った石膏の壺を持って来て、その香油を、横になっているイエス様の頭に注ぎかけたのであります。ナルドの香油とは、インド産の輸入品であり、植物の根から抽出した大変高価な香油でありました。私自身、その香りをかいだことはありませんが、恐らく心を落ち着かせるような、大変良い香りであ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そこに居合わせた人々は、そのような高価な香油が一気に注がれたのを見てびっくりしたことでしょう。4~5節をご覧ください。
【2】. 無駄使い
“そこにいた人の何人かが、憤慨して互いに言った。「なぜ、こんなに香油を無駄遣いしたのか。この香油は三百デナリオン以上に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すことができたのに。」そして、彼女を厳しくとがめた。”
「そこにいた人の何人かが」とは、弟子たちを指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なぜなら、この後、6~9節でイエス様が教え諭している内容は、明らかに弟子たちに対して語られているからです。イエス様の弟子たちは憤慨し、女を厳しく咎めました。「なぜ、こんなに香油を無駄遣いしたのか。この香油は三百デナリオン以上に売って、貧しい人々に施すことができたのに」。当時1デナリオンとは、一日の労働の賃金と言われていますから、三百デナリオン以上とは、安息日を除いて働いた一年間の年収に相当する金額です。そのような高価なナルドの香油を惜しげもなく全てイエス様の頭に注いだのです。その、何の考えもないような無駄遣いに対し、弟子たちは憤慨したのです。また、過ぎ越し祭の時期というのは、特に貧しい人々を覚え、施しが強調される時期でもありました。イエス様も以前、財産家の富める青年に対し、所有物を全て売り払い、貧しい人々に施した上で私に従いなさいと言われたことがあります(10:21)。ですから、弟子たちがそのように女を強く咎めるのも無理はないのであります。
女はなぜ、そのような行為をとったのでしょうか。旧約聖書には、油注ぎは、王、祭司、預言者が公的な任務に就く際に執り行われた儀式として書かれています。それ以外には、祭りの時に「油注ぎ」がユダヤ人の間で慣例的になされていたようです。従って、女は祭りの時の慣例的な油注ぎとして、イエス様の頭に香油を注いだと考えられます。しかし、その注がれた方が尋常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その尋常でない油注ぎに、イエス様への言い尽くせない感謝と献身の思いが表現されていたのだと思います。イエス様は、女を咎める弟子たちに向かって、次のようにおっしゃいました。6~8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言われた。「するままにさせておきなさい。なぜ、この人を困らせるのか。わたし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貧しい人々はいつも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るから、したいときに良いことをしてやれる。しかし、わたしはいつも一緒にいるわけではない。この人はできるかぎりのことをした。つまり、前もってわたしの体に香油を注ぎ、埋葬の準備をしてくれた。”
今お読みした個所で「良いこと」という言葉が二回出てきますが、異なるギリシア語が使用されています。後ろ方に出て来る7節の「したいときに良いことをしてやれる」という言葉に注目してください。この「良い」という言葉はユーというギリシア語であり、「良い」という意味の他に「素晴らしい」という意味があります。「したいときに素晴らしいことをしてやれる」つまり、弟子たちの貧しい人々に対する施し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一方で、前の方に出て来る6節の「私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た」の「良い」という言葉は、カロスというギリシア語であり、この言葉は「良い」という意味の他にも、「倫理的な善」、或いは「美しさ」という意味があります。例えば、創世記1:25をご覧ください。
“神はそれぞれの地の獣、それぞれの家畜、それぞれの土を這うものを造られた。神はこれを見て、良しとされた。”
創造の際、神様は、御言葉によって創造された被造世界を見て「良しとされた」とありますが、「良し」という言葉に、「カロス」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ます。アダムとエバが堕落する前、神の御業による被造物はすべて「善」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続いてコヘレトの言葉3:11(聖書協会共同訳)をご覧ください。
“神はすべてを時に適って麗しく造り、永遠を人の心に与えた。だが、神の行った業を人は初めから終わりまで見極めることはできない。”
「時に適って麗しく」とありますが、「麗しい」という言葉に、「カロス」が使われています。美しいという意味です。つまり女の行為は、弟子たちが言うように、無駄遣いであり、貧しい人々のことを考えるなら、決して素晴らしい行いではなか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イエス様は彼女のできるかぎりの行いは、神様の時の中で、善いことであり、美しいことであると言われたのです。イエス様は、この女と、マルコ12章でレプトン銅貨二枚を捧げたあの貧しいやもめの姿に共通のものを見出したのだと、私は思います。そしてさらに、イエス様は、この女のこの行為を、ご自身の埋葬の準備として受け止められました。これは一体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恐らくこの時、イエス様の頭の中には、父なる神のご計画に従って、ご自身が十字架の死を遂げる事だけに集中しておられ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十字架の死」、すなわち、罪人の罪を贖うための生贄としての死です。イエス様だけが、父の御心を知り、それを成し遂げるために、不安と孤独と緊張の中で、一人で戦っていたのです。そのことで頭が一杯だったイエス様にとって、女のこの行いは、まさに自分の埋葬のための準備として見えたのでしょう。もちろん女は、イエス様がまさかこの後、十字架に掛けられて死ぬなどとは、思いもよらなかったはずです。イエス様の十字架の死を、正しく予想し、それに備えた人物は誰一人いませんでした。祭司長たちや律法学者たちでさえ、祭りの間はやめておこうと考えていたくらいです。彼女の行為は、決して、イエス様の苦しい心の内を全て理解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彼女のしたことは、「善いこと」として、「時にかなった美しいこと」として、イエス様に大きな慰めを与えたのであります。そして、同時に、その浪費するような油注ぎは、メシアとしての、王としての、隠密な油注ぎでもありました。それはまるで、ダビデが預言者サムエルによって隠密に油注がれたように、或いは、ソロモンが祭司ツァドクによって隠密に油注がれたように、一人の女によって隠密にイエス様に油が注がれたのです。女の行いは、孤独と緊張と不安に中にあったイエス様をどれほど勇気づけたことでしょうか。9節でイエス様は次のように言っておられます。ご覧ください。
“はっきり言っておく。世界中どこでも、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所では、この人のしたことも記念として語り伝えられるだろう。」”
この女のしたことは、弟子たちに言わせれば、無駄遣いであり、浪費でありました。果たしてそこまでする必要があるのだろうか?むしろ、貧しい人々に施しとして用いる方が正し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疑問を呈しました。しかし、彼女がしたことより、もっと大きな無駄使い、もっと大きな浪費、もっと大きな犠牲を払ってくださった方がおられます。それは言うまでもなく、イエス様です。イエス様は、私たち罪人が滅びて当然の者でありながら、私たち罪びとが救われるべき何の功もない者でありながら、私たちのためにご自身の全てを献げて、献身してくださり、十字架の死を遂げてくださったのです。女はその全てを知っていた訳ではありませんが、本質的な部分は分かって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私たちのことをこれほど愛してくださったイエス様に、私は自分の持てる最高のものをもって応答したい!」と願ったのであります。このようにしてこの女の献身は、さらに大きなイエス様の献身を浮かび上がらせるものとして、特別な光を放っているのです。彼女の愛と献身の行為は、イエス様が命を献げてくださった十字架の福音に比べれば小さいものでありますが、イエス様はそれを喜んで受け入れられました。そして、その愛と献身の行為がイエス様の福音と共に、記念として永遠に語り継がれるものと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以前、宇都宮教会の牧師をしておられ、天に召された金田知郎先生という方がおられました。私は韓国から戻ってきて、神戸の神学校に編入した時にちょうど同級生となりました。金田先生は中学校の教員をしておられ、教会では執事として奉仕しておられました。50代後半になり教員を辞職し、神学校に献身されたのです。普通、神学生には学費と寮費が無料になるところでしたが、金田先生は奥様が未信者だったため、教師候補者としては認められず、学費と寮費を自費で払っておられました。また、神学校在籍期間中にたくさんの本を購入したため、その色々とかかった費用が一千万円もかかった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先生は神学校を卒業してもすぐに牧師にはなれず、しばらくの間、キングスガーデンという介護施設で仕事をしておられました。しばらくして、東部中会で、たとえ配偶者が未信者であっても教師候補者になることが認められることになり、ようやく金田先生は教師候補者として認められ、そして晴れて宇都宮教会に赴任されました。しかし、牧会を始められて五年後に天に召されてしまいました。先生に対する評価は色々あるかと思いますけれども、金田先生の献身は、神様の目に、大変美しいものに見えたに違いありません。
【適用】
私たちは、神様の愛に何を持って応答するでしょうか。私たちも女がしたように、できる限りのものを持って、イエス様に応答すべきあります。私たちがイエス様に献身するということは、具体的に言えば、イエス様のために自分に与えられている「時間」と「賜物」と「お金」を捧げることであります。「時間」というのは、私たちは神様から時間を与えられていますが、この時間をすべて自分自身のために使うのではなく、神様のために、取り分けて、主日には礼拝を捧げること、或いは奉仕したり、兄弟姉妹と交わりを持ったり、共に祈るために時間を捧げ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第二に、「賜物」です。賜物は一人ひとりそれぞれ異なりますが、それぞれ美しく神様がお用いになられます。教会を建て上げるために、自分自身の賜物を積極的に捧げるようにいたしましょう。最後に「お金」です。私たちは神の恵みによって収入が与えられています。どのような形であれ、その収入の十分の一を、恵みの応答として、そして、神様への献身のしるしとして、献げるようにいたしましょう。私たちのできる限りの愛と献身を、イエス様は喜んで受け入れてくださり、十字架の福音を飾るものとしてくださ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