メシアの本質 메시아의 본질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2章35節~37節
12:35イエスは神殿の境内で教えていたとき、こう言われた。「どうして律法学者たちは、『メシアはダビデの子だ』と言うのか。
12:36ダビデ自身が聖霊を受けて言っている。『主は、わたしの主にお告げになった。「わたしの右の座に着き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もとに屈服させるときまで」と。』
12:37このようにダビデ自身がメシアを主と呼んでいるのに、どうしてメシアがダビデの子なのか。」大勢の群衆は、イエスの教えに喜んで耳を傾け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2章35節~37節
메시아의 본질
2024년 5월12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마가복음 12장 35~37절
서론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다. 이것은 서기관들이 인정하는 것이며, 당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부분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며 문제를 제기해,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통해, 오늘도 마가복음에서 함께 은혜를 받고 싶습니다.
(1)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
나중에 성구를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예를 들면 사무엘하 7장 12,13절, 이사야 11장 1~10절, 에스겔 34장 23,24절 등).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가계에서 다윗 왕에 필적하는 왕이 이스라엘에 다시 나타나서, 자신들을 로마의 지배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어찌하여..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하셨을까요.
불트만이라는 신약성경 신학자가 있습니다. 불트만은 35~37절에 적혀 있는 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정말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마가복음서를 작성하면서, 만들어낸 성구가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문맥에서,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인가」라는 그 질문의 답은, 일절 도출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초대교회가 이 부분을 창작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 일로 인해 초대교회는 도대체 무엇을 얻었을까요?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적혀 있고,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이 밝혀져 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혼란을 초래하는 일을, 굳이 초대교회가 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35~37절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실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읽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수수께끼 같은 질문에 대해, 우리의 답을 내놓기 전에, 먼저 「메시아」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그리스도」가 됩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에 의해 왕이나 제사장의 직무에 임명되는 것의 표시로,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이란,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한 의식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 무장되는 것의 상징이었습니다. 임직시,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기 자신을 바칠 수 있는 것, 하나님의 영에 의해 무장하는 것, 그 일의 상징으로서 기름 부음 의식이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서나 사도행전을 보면, 실제로 예수님이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는 것이 적혀 있으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4장 17~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주의 성령이 내게 .. 기름을 부으시고」라고 하시며,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사도행전 10장 38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여기에도, 역시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언제 기름 부음심을 받으셨을까요? 예수님이 올리브유 등의 기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기사는 복음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이 성령님에 의해 마리아에게 성육신 하신 것,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왔다는 것 등이 적혀 있습니다. 예수께 성령이 임하신 것, 이 일이야말로 예수님에 대한 기름 부으심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름 부으심이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이고, 본질적인 의미의 기름 부으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름 부으심은, 그때까지의 예표나 양식이 아니라, 실재였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이고, 본질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바쳐지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 무장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구약시대 다윗의 왕직도 하나의 예표이자, 양식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왕직에서, 그 실재가 드러났고, 예수님의 왕직에서, 메시아의 본질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본래, 메시아는 로마의 지배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정치적인 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는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의 영으로 무장된 자로서, 죄와 죽음의 힘에 억압받고 있는 죄인을 속죄해 주시는 분입니다.
(2) 시편 110편의 메시아
그러면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12장 35,3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인용하고 있는 성구는, 시편 110편의 다윗의 시이며, 이 대목은 메시아 예언의 말씀으로, 유대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시편 110편의 일본어 번역에서 「주」라고 번역된 부분의 히브리어를 보면, 「야훼」라고 쓰여져 있는 부분과 「아도나이」라고 쓰여져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서는, 잘 번역되어 있지만, 신공동역 성경의 경우, 둘 다 「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의 「주」는 야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내 주께 이르시되」라는 부분의 여기서 「내」는 다윗입니다. 「내 주께」의 「주」는 아도나이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는 것은, 그 다윗 왕이, 어떤 인물에게 「내 주(아도나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어떤 인물이란, 이윽고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로 생각할 수 있는데, 다윗 왕이 이윽고 오실 왕에게 「내 주」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들이나 자손들이 아버지나 조상에게 「내 주」「나의 주인」라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식에게, 혹은 자신의 자손에게 「내 주」라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인간의 지배자로서의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즉, 다윗과 같은 메시아이자, 로마의 지배를 쳐부수는 구원자입니다. 그 이상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점에 있어서 문제를 제기하시는 것입니다. 13장 36절을 더 읽어나가면,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내가」는 하나님입니다.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라고 쓰여 있는데, 「네 원수」란 죄와 죽음의 힘, 죄와 죽음의 권세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내 우편」은 무엇일까요? 「내 우편」이란 이 세상의 어떤 지위나 어떤 권력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이 앉는 자리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부활하시고, 그 후 하늘로 올라가, 앉게 되는 「하늘의 보좌」로 여겨집니다. 마가복음 14장 61,62절을 보시죠. 여기서는 예수님이 성전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어, 대제사장 앞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인데, 여기서도 「권능자의 우편」이 나옵니다.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 마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 자신이 고백하신「권능자의 우편」과 시편 110편의 「내 오른쪽 자리」를 합쳐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보좌에 앉으시고 죄와 죽음의 힘이 완전히 예수님의 발밑에 굴복할 때, 즉, 종말의 완성이 드디어 성취될 때,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며, 그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게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오늘의 성구에서는, 결론적인 단언은 아무것도 없고, 또 시편 110편에 이야기되고 있는 메시아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고는 이야기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는 질문이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에게 계속 묻는 식으로 문단이 닫혀 있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수수께끼의 물음을,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메시아의 본질을 조금씩 이해해 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인간의 지배로서의 메시아상이, 조금씩 고쳐져 갔습니다.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그 태아를 인지했습니다. 그로인해, 예수님은 요셉을 따라, 다윗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에게 종속되거나, 다윗보다 못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셉을 통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 아닙니다. 더 말하면, 예수님의 아버지는, 선조는, 아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아버지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왔을 때, 그 존재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영원 가운데 아버지와 함께, 이미 존재하셨고, 천지창조의 역사에 함께 참여하신 분이기도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는 예수님은 성육신 전에도, 이미 존재하셨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는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그렇다면, 아담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왜 성육신하여 사람이 되셨을까요? 그것은 자녀가 영원 가운데 새로운 언약의 당사자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영원 가운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것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대표로서, 언약의 당사자가 되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영원 가운데 자신의 백성으로 정해졌고,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적혀 있는 사람들을 속죄하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이행하지 못한 생명의 언약을, 즉, 행위 언약을 자녀가 온전히 이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인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밖에서 인류에게 다가와 인류 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메시아의 본질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임금을, 메시아상에 투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게 주어지는 메시아는, 다윗에게 종속된, 인간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닙니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정치적인 왕도 아닙니다. 오실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성육신하셔서 사람이 되신 중보자로서의 메시아이며, 새로운 언약의 당사자로서, 자신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을 속죄해 주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머릿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구원자를, 메시아상에 투영해 버리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무슨 나쁜 일이 생기거나,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면 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고, 복을 받기 위해, 액운을 막기 위해, 열심히 교회에 가야 한다거나, 봉사를 적극적으로 해서 덕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순탄할 때나 역경에 있을 때나,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우리의 행보를 통해, 우리 구원자에 대한 믿음을, 성경 말씀으로 정립해 주시는 것입니다. 올바른 메시아상을, 성경 말씀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격려와 인내 속에,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자임을 고백하며, 이 분을 더욱 섬겨가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序】
「メシアはダビデの子」である。これは律法学者たちが認めていることであり、当時のユダヤ人であれば、誰でも知っている常識でありました。ところが本日の箇所でイエス様は、「どうして律法学者たちは、『メシアはダビデの子だ』と言うのか」と、問題を提起され、謎めいた言葉を残されました。この謎めいた言葉を通して、本日もマルコによる福音書から、共に恵みに与りたいと願います。
【1】. 油注がれた者メシア
後で聖句をご確認くださればと思いますが、メシアがダビデの子であるということは、旧約聖書のいくつかの聖句から読み取ることが出来ます(例えば2サムエル7:12~13、イザヤ11:1~10、エゼキエル34:23~24など)。ですから、当時のユダヤの人々は、ダビデの家系からダビデ王に匹敵する王がイスラエルに再び現れて、自分たちをローマの支配から救い出してくれるだろうと期待し、信じていた訳です。それでは、なぜ、イエス様は「どうしてメシアがダビデの子なのか」と問題を提起されたのでしょうか。
ブルトマンという新約聖書神学者がいます。ブルトマンは、35~37節に書かれている主イエスの言葉について、本当にこのようなことを語ったのかと疑いの目を持っています。そして、この言葉はイエス様ご自身の口から出た言葉ではなく、初代教会がマルコ福音書を作成する際に、生み出した言葉ではないかと主張します。今朝、お読みした文脈において、「どうしてメシアがダビデの子なのか」という、その質問の答えは、一切導き出されていません。仮に初代教会がこの部分を創作したと仮定する場合、そのことによって初代教会は一体何を得るのでしょうか。マタイによる福音書にはイエス様の系図が書かれており、イエス様がダビデの子孫であることが明らかにされています。従って、メシアがダビデの子であることに疑問を提起し、混乱を招くようなことを、あえて初代教会がするということは考えにくいのであり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35~37節の謎の言葉を、実際イエス様が語られた言葉として読み進め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イエス様の謎めいた質問に対して、私たちの答えを出す前に、まず「メシア」という言葉について考えてみたいと思います。既にご存じのように、メシアというヘブライ語は「油注がれた者」という意味です。ギリシア語ではキリストとなります。旧約聖書には、神様によって王や祭司の務めに任命されることのしるしとして、油注がれたことが記述されています。ですから、油注ぎとは、神によって用いられる、神の僕となるための儀式であり、神の霊によって武装することの象徴でありました。任職の際、神の僕として自分自身が献げられること、神の霊によって武装すること、そのことの象徴として、油注ぎの儀式が行われたということです。ルカによる福音書や使徒言行録を見ますと、実際、イエス様が油注がれたという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ので、調べてみましょう。最初にルカによる福音書4:17~21をご覧ください。
“預言者イザヤの巻物が渡され、お開きになると、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個所が目に留まった。「主の霊がわたしの上におられる。貧しい人に福音を告げ知らせるために、/主がわたしに油を注がれたからである。主がわたしを遣わされたのは、/捕らわれている人に解放を、/目の見えない人に視力の回復を告げ、/圧迫されている人を自由にし、主の恵みの年を告げるためである。」イエスは巻物を巻き、係の者に返して席に座られた。会堂にいるすべての人の目がイエスに注がれていた。そこでイエスは、「この聖書の言葉は、今日、あなたがたが耳にしたとき、実現した」と話し始められた。”
ここには、イエス様が、イザヤ書を引用し「主がわたしに油注がれた」と言われ、この聖書の言葉は、今日、実現した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続いて使徒10:38をご覧ください。
“つまり、ナザレのイエスのことです。神は、聖霊と力によってこの方を油注がれた者となさいました。イエスは、方々を巡り歩いて人々を助け、悪魔に苦しめられている人たちをすべていやされたのですが、それは、神が御一緒だったからです。”
ここにも、やはり、イエス様が「油注が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それでは、イエス様は具体的にいつ油注がれたのでしょうか。イエス様がオリーブ油などの油を頭に注がれたという記事は福音書に出てきません。その代わり、イエス様が聖霊によってマリアに受肉したこと、そして洗礼者ヨハネにから洗礼を受けた時、天から鳩のような聖霊が下ってきたことなどが書かれています。イエス様に聖霊を限りなく与えられたこと、このことこそ、イエス様の油注ぎであったと考えられるのです。従って、イエス様の油注ぎとは、象徴的な意味ではなく、霊的で、本質的な意味における油注ぎ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様の油注ぎは、それまでの予表や模型ではなく、実在でありました。イエス様は霊的で、本質的な意味において、神の僕として献げられ、神の霊によって武装されたのです。そのように考えるなら、旧約時代のダビデの王職も一つの予表であり、模型に過ぎなかったと言えるでしょう。イエス様の王職において、その実在が明らかにされ、イエス様の王職において、メシアの本質が明らかにされたのです。本来、メシアとはローマの支配から、イスラエルを解放する政治的な王を指すのではなく、メシアとは神の僕であり、神の霊によって武装された者であって、罪と死の力に抑圧されている罪人を、贖い出してくださるお方なのであります。
【2】. 詩編110編のメシア
それでは、本日の箇所に戻りまして、イエス様が語られた言葉に耳を傾け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12:35~36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神殿の境内で教えていたとき、こう言われた。「どうして律法学者たちは、『メシアはダビデの子だ』と言うのか。ダビデ自身が聖霊を受けて言っている。『主は、わたしの主にお告げになった。「わたしの右の座に着き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もとに屈服させるときまで」と。』”
ここでイエス様が引用している聖句は、詩編110編のダビデの詩であり、この箇所はメシア預言の御言葉として、ユダヤの人々に知られていました。詩編110編の日本語訳で「主」と訳されている箇所のヘブライ語を見てみますと、「ヤハウェ」と書かれている箇所と、「アドナイ」と書かれている箇所があります。韓国語の聖書では、きちんと訳し分けられていますが、新共同訳聖書の場合、両方とも「主」と訳されているため、注意して読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主は、お告げになった」の「主」はヤハウェを指しています。「わたしの主にお告げになった」とありますが、わたしとはダビデです。わたしの主の「主」はアドナイです。ですから、ここで、イエス様が指摘しているのは、あのダビデ王が、ある人物に対し、「わが主人(アドナイ)」と語っているという点です。この、ある人物とは、やがて来られるイスラルの王、メシアとして考えられますが、ダビデ王がやがて来られる王に対して「わが主人」と語るのは、考えられないことです。息子や、子孫たちが、父親や先祖に対し「わたしの主」「わたしの主人」と言うのはあり得ます。しかし、自分の子に対し、或いは自分の子孫に対し、「わたしの主」というのはあり得ないのです。当時ユダヤの人々は、人間の支配者としてのメシアを待ち望んでいました。すなわち、ダビデのようなメシアであり、ローマの支配を打ち破る救い主です。それ以上のメシアを待ち望んではいなかったのです。イエス様はまさに、その点において問題を提起されているのです。12:36節をさらに読み進めますと、
“「わたしの右の座に着き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もとに屈服させるときまで」”
と。あります。わたしとは、神様の事です。「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もとに屈服させる時まで」と書かれていますが、「あなたの敵」とは、罪と死の力、罪と死の権勢であると解釈す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それでは「神の右の座」とは何でしょうか。神の右の座とは、この世の、いかなる地位や、いかなる権力でもありません。神の代理人が座る場所であり、イエス様が十字架に架かられ、復活し、その後、天に昇り、着座することになる「天の御座」であると考えられます。マルコ14:61-62をご覧ください。ここではイエス様が神殿当局者たちに逮捕され、大祭司の前で語ったイエス様の言葉でありますが、ここにおいても「神の右の座」が出てきます。
“しかし、イエスは黙り続け何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そこで、重ねて大祭司は尋ね、「お前はほむべき方の子、メシアなのか」と言った。イエスは言われた。「そうです。あなたたちは、人の子が全能の神の右に座り、/天の雲に囲まれて来るのを見る。」”
このマルコ14章でイエス様ご自身が告白された「神の右の座」と、詩編110編の「神の右の座」を合わせて考えるなら、イエス・キリストは、天の御座に着座され、罪と死の力が完全に足もとに屈服させられる時、つまり、終末の完成がいよいよ成就される時に、雲に乗って再臨され、その時、天と地のすべての権勢が、イエス・キリストにひざまずくことになると言っているようであります。ただ、本日の箇所において、結論的な断言は何もなく、また、詩編110編に語られているメシアが、イエス様ご自身のことを指しているのだとは語られていません。「どうしてメシアがダビデの子なのか」という質問が、マルコによる福音書を読む読者に、引き続き問いかけるような形で、段落が閉められています。この質問は、今日の私たちにも同じように問いかけられ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初代教会のキリスト者たちは、この謎の問いかけを、繰り返し考える中で、メシアの本質を少しずつ理解して行ったのだと思います。これ迄、思い抱いていた人間の支配者としてのメシア像が、少しずつ改めさせられていったのです。ヨセフは、聖霊によって身ごもったマリアを妻として受け入れ、その胎の子を認知しました。それにより、イエス様はヨセフに従って、ダビデの子とされました。しかし、決してイエス様はダビデの子孫として、ダビデに従属したり、ダビデより劣った位置にあるの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様はヨセフを通して生まれて来たのではなく、聖霊を通して生まれてきたからです。イエス様の父はヨセフではありません。もっと言えば、イエス様の父は、先祖は、アダム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様の父は、御父なる神様であります。イエス様は肉を取られ、この世に来た時に、その存在が始ま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永遠において御父と共に、既に存在しておられ、天地創造の御業に共に参与された方でもありました。コロサイ書1:15には、イエス様は受肉の前にも、既に存在しておられたという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コロサイ1:15をご覧ください。
“御子は、見えない神の姿であり、すべてのものが造られる前に生まれた方です。”
それでは、アダムから生まれて来たのではない、神の御子がなぜ、肉を取り、人となられ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御子が永遠において新しい契約の頭として選ばれていたために、肉を取られ人となられたのです。永遠において神と人との仲保者になることが定められていたために、神の子でありながら、同時に人類の代表として、契約の頭となるために、人となられたのです。永遠においてご自身の民として定められ、その名が天の書物に記されている人々を贖うために、人となられたのです。それはアダムが人類の代表として神に対し履行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命の契約を、即ち、行いの契約を御子が完全に履行するためでありました。このようにして、イエス様は人類から出てきたのではなく、外から人類に近づき、人類の中に入られたのです。初代教会は、そのことに気づき始め、メシアの本質について、正しく理解するようにされたのです。
【結論】
メシアはダビデの子であるという、旧約聖書の御言葉を通して、イスラエルの人々は自分たちの望む王様を、メシア像に投影していました。しかしイスラエルに、そしてイスラエルだけでなく、全世界に与えられるメシアとは、ダビデに従属する、人間としてのメシアではありません。ローマの支配から解放させる政治的な王でもありません。来るべきメシアとは、神の子でありながら、肉を取られ、人となられた仲保者としてのメシアであり、新しい契約の頭として、ご自身に結び合わされている人々を贖ってくださるメシアなのです。私たちもイスラエルの民と同じように、頭の中で自分が望む救い主を、メシア像に投影してしまいがちです。例えば、日々の生活の中で何か悪いことが起こったり、突然、健康を崩してしまったりすると、罰が当たっ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て、幸いを受けるために、厄除けのために熱心に教会に行かなければとか、奉仕を積極的にして徳を積まなければと考えてしまいがちです。しかし、神様は私たちの全ての罪をイエス・キリストのゆえに赦してくださり、私たちが順境にある時も逆境にある時も、変わらずに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ています。そして私たちの地上での歩みを通して、私たちの救い主に対する信仰を、聖書の御言葉によって建て上げてくださるのであります。正しいメシア像を、聖書の御言葉によって、そして神の励ましと忍耐の中で、建て上げてくださるのです。私たち教会は、神であり、人であるイエス様こそ、真の救い主であることを告白し、このお方にさらに仕えていく者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