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じること祈ること赦すこと 믿는 것, 기도하는 것, 용서하는 것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1章20節~25節
11:20翌朝早く、一行は通りがかりに、あのいちじくの木が根元から枯れているのを見た。
11:21そこで、ペトロは思い出してイエスに言った。「先生、御覧ください。あなたが呪われたいちじくの木が、枯れています。」
11:22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神を信じなさい。
11:23はっきり言っておく。だれでもこの山に向かい、『立ち上がって、海に飛び込め』と言い、少しも疑わず、自分の言うとおりになると信じるならば、そのとおりになる。
11:24だから、言っておく。祈り求めるものはすべて既に得られ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る。
11:25また、立って祈るとき、だれかに対して何か恨みに思うことがあれば、赦してあげ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の天の父も、あなたがたの過ちを赦してくださ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1章20節~25節
믿는 것, 기도하는 것, 용서하는 것
2024년 3월24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마가복음 11장 20~25절
서론
우리들은 지난주부터 수난주를 맞이했습니다. 주 예수님은 주 초하루에,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마가복음서에 따르면, 성전정화의 소동이 월요일이고, 오늘 부분은 화요일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목요일에 유월절 축제의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셨고, 금요일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리고 일요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수난주에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부활절 기념 예배를 기쁨 가운데 올려 드립시다.
성전정화 소동의 다음날,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마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전날 잎사귀는 멋드러지게 무성했었지만,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입니다. 지나가면서 문득 보니, 어제의 모습과는 달리 확 시들어 있었습니다. 하루 만에 잎이 시든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지만, 하루 만에 뿌리부터 시든다는 것은 자연계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어쩐지 기분 나쁜 모습에 제자들은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는 성전의 붕괴를 예표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성전 당국자들에 대한 심판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놀라움을 보시고, 교회가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교회가 맺어야 할 열매란, 오늘 설교제목인 「믿는 것, 기도하는 것,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열매는, 성전 당국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열매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마가복음 11장 말씀을 통해 은혜를 얻고자 합니다. 20~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믿는 것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이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성구는, 직역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가 됩니다. 일본어로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은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라는 문체로는 유일하게 마가복음서 이곳에서만 나옵니다(비슷한 형태로 로마서 3장 3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뜻인데, 아마도 무화과나무를 상징하는 성전 당국자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을 문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누구에 대한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성전 당국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의 신앙이란 명색뿐이었습니다.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하나님의 성자이신 주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아버지의 집이자 자신의 집인 성전 경내에 들어가셨을 때, 그들은 주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의를 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성전에서,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의 잘못된 믿음은, 자신이 얼마나 신앙이 독실한 사람인가를 대내외에 선전하는, 그 표면적인 율법 준수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범을 따르는지, 아니면 모르게 물들었는지, 순례자들이 1년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에 참배하는 것 역시 형식에 얽매여 있었던 행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관습이나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으로 대체해 보자면, 어쩌면 일본인이 새해를 맞이할 때의 모습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새해가 밝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참배하러 갑니다. 이상하게도 하츠모데(정월의 첫 참배) 행선지는 신사나 절이거나 합니다. 신사와 절은 종교가 전혀 다르지만, 그런 것은 상관 없습니다. 어쨌든 참배하고, 새전을 던지고 일방적으로 빕니다. 이른바 기복신앙입니다. 만약 유대 순례자들도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도대체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는지 모르고, 형식적인 제의를 올리고 자기만족을 했다면, 그것은 매우 허무한 일입니다. 이어서 23,24절을 보시겠습니다. 기도하는 것에 대해 쓰여져 있습니다.
(2) 기도하는 것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산을 움직인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과장스러운 표현입니다. 주해서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풀어낼 수 있는 랍비를 「산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의미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기도로 해결한다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시련이나 어려움을 만날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를 떠안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완전히 포기했던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로 구했을 때, 마치 장애물이었던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길이 열리고, 서광이 비치는 것입니다. 혹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슬픔이나 괴로움을 웬일인지 극복할 수 있게 되어, 마음에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희안한 체험을 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요?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손길이 뻗치기 때문입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게 걷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화과나무의 저주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면 문맥상 산은 예루살렘 성전에 위치한 성전의 언덕을 가리키고, 바다는 예루살렘 바로 근처에 있던 사해를 가리키는 것처럼도 들려옵니다. 즉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동시에 기도의 결실을 맺지 못한 성전 당국자들을 향한 심판의 말로도 들립니다. 지난 주에 보았던 마가복음 11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성전 당국자들을 향하여 성전을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서 7장 11절의 인용인데, 예레미야가 말한 예언인 그 부분을 살펴봅시다. 7장 2b~11절까지 그대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2 ..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여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라는 사람은, 바벨론 포수 직전에 남유다에 세워진 선지자로, 눈물의 선지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수라는 매우 부정적인 예언을 해야 했기 때문에, 동포들로부터는 거북한 존재로 환영받지 못했는데, 결국 포수가 될 것이라는 그 괴로운 예언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기 직전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치 성전 그 자체로 인해, 자신들의 평화가 보장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곧 바벨론 포수를 통한 주님의 심판이 내려집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하나님과의 교제 장소가 아니라, 성전 자체가 우상화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물의 피가 쏟아지는 제단의 모서리는, 어떠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는 안전지대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성전에 들어가 제단의 네 모서리를 만진다면, 처벌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렇게 성전에 의해 경건한 믿음 생활이 촉진된 것이 아니라, 성전에 의해 죄가 감춰지고, 옳지 못한 생활이 조장되어 갔습니다. 성전이 역으로 기능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히려 이방인보다 더 불경건해져 버린 것입니다. 오히려 성전이 없는 편이, 양심의 가책에 의해 자주적으로 죄를 억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입니다. 이는 그들이 성전을 자신들의 목적이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복을 자기 마음대로 성전에 투영해 버린 데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당국자들은, 제의를 형식화하고 예배를 형식화하며, 이익을 얻고자 자신들이 원하는 신을 마음대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수 직전에 바라보던 것과 같은 모습을, 예수님도 바라보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가복음 11장 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용서하는 것에 대해 쓰여 있습니다.
(3) 용서하는 것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서서 기도할 때에」라고 했는데,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 스타일은, 반드시 서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기도하는 사람에게, 무슨 죄나 꺼림직함, 일부러 숨기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의 교제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 대해서 뭔가 원망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용서를 해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25절의 뒷부분은, 우리가 사람을 용서해 준 대가로, 우리의 죄나 잘못이 용서된다는 식으로 읽힙니다. 마가복음에는 「주기문」이 나오지 않지만, 날마다 우리가 예배에서 소리내어 읽는 「주기문」도 그렇게 해석될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애초에 우리 죄인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용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하나님의 용서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입고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죄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거듭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죄도,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교회란 죄 없는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의 모임이며, 연약한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서로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연약함이 있음에도, 죄가 있음에도 하나님께 죄사함 받은 자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교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예루살렘에게 기대한 것은 그런 용서의 공동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당국자들의 형식뿐인 예배는, 서로를 심판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게하여, 그 은혜에 대해 백성을 맹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결론
믿는 것, 기도하는 것, 용서하는 것은 교회의 자연스러운 영위이며,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강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에서 은혜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믿음은, 살아있는 풍성한 믿음이 되고, 끈기있게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고, 그리고 사랑과 용서가 가득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통해 예수님은 임재해 주시고, 교회를 통해 자신의 구원의 사역을 계속 진행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믿음 안에서 믿고, 용서하고, 기도하며 걷는 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序】
私たちは今週から受難週を迎えます。主イエスは週の初めの日に、ろばの子に乗ってエルサレムに入城されました。マルコによる福音書によると、宮きよめの騒動が月曜日で、本日の箇所は火曜日に当たります。そして木曜日に過ぎ越しの祭りの食事を弟子たちと共にされ、金曜日には十字架にかけられ、そして日曜日に復活されました。私たちは、この受難週もイエス様のご受難に思いをはせ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そして次週はイースター記念礼拝を喜びの中でお捧げいたしましょう。
宮きよめの騒動の翌朝、一行は通りがかりに「あのいちじくの木が根元から枯れているのを見た」と書かれています。「あのいちじくの木」というのは、前日、葉っぱだけは景気よく茂らせていたけれど、実がなかったためにイエス様が呪われた、あのいちじくの木です。通りがかりにふと見ると、昨日の姿とは打って代わって見事に枯れていました。一日で葉がしおれるということは考えられますが、一日で根元から枯れるということは自然界では、ほぼありえないことです。その不気味な姿に弟子たちは大変驚かされたことでしょう。枯れたいちじくの木は、神殿の崩壊を予表するものであり、そして神殿当局者たちへの裁きを予表するものでありました。イエス様は、弟子たちの驚きを受けて、教会が結ぶべき実について、弟子たちに教えられます。教会が結ぶべき実とは、本日の説教題につけさせていただいた「信じること、祈ること、赦すこと」です。そして同時にその実は、神殿当局者たちには見られなかった実でもありました。本日もマルコ福音書11章の御言葉を通して恵みに与りたいと思います。20~22節をご覧ください。
【1】. 信じること
“翌朝早く、一行は通りがかりに、あのいちじくの木が根元から枯れているのを見た。そこで、ペトロは思い出してイエスに言った。「先生、御覧ください。あなたが呪われたいちじくの木が、枯れています。」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神を信じなさい。”
この「神を信じなさい」という語句は、直訳すると「神に対する信仰を持ちなさい」となります。日本語で「神を信じる」という言葉は、聖書に中にたくさん出てきますが、「神に対する信仰を持ちなさい」という文体では、唯一マルコ福音書のここだけにしか出てきません(似た形としてロマ3:3)。言わんとしていることは、「神に信頼しなさい」「神を信じなさい」という意味ですが、おそらく、いちじくの木を象徴する神殿当局者たちが持っていた「信仰」を問題にしていたのだと思われます。彼らの信仰が誰に対する信仰なのかということです。真の神ではなく、自分たちがこしらえた神に対する信仰ではないのかということです。神殿当局者たち、特にファリサイ派の人々の信仰とは、形ばかりのものでした。群衆の歓呼を受けながら、神の御子である主イエスが、ろばの子に乗ってエルサレムに入城され、父の家であり、そしてご自身の家でもある、神殿の境内に入られた時、彼らは主イエスをメシアとして受け入れることをしませんでした。かえって、殺意を抱いたのであります。一体彼らは神殿で、誰に対して礼拝を献げていたのでしょうか。彼らの間違った信仰は、自分がいかに信仰に篤い者かということを内外に宣伝する、その表面的な律法の順守において、特徴的に現れています。そして、彼らの模範に従ってなのか、あるいは知らないうちに伝染されたのか、巡礼者たちが年に三度エルサレム神殿に詣でるのも、やはり形にとらわれていた行為であったと言えます。言葉を変えるなら、慣習やしきたりのようになっ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このことは、私たちの日常に置き換えますと、ひょっとしたら、日本人が新年を迎える時の様子に似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年が明けると、誰彼構わず、初詣に行きます。奇妙なことに、初詣の行く先は神社であったり、お寺であったりいたします。神社とお寺とは宗教が全く異なりますが、そんなことお構いなしです。とにかくお参りして、賽銭を投げ、一方的なお願いをする。所謂、御利益信仰ですね。もし、ユダヤの巡礼者たちもエルサレム神殿に来て、一体誰に対して礼拝を捧げているのか分からず、形式的な祭儀を献げ、自己満足していただけならば、それは大変むなしいことであります。続いて23~24節をご覧ください。祈ること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
【2】. 祈ること
“はっきり言っておく。だれでもこの山に向かい、『立ち上がって、海に飛び込め』と言い、少しも疑わず、自分の言うとおりになると信じるならば、そのとおりになる。だから、言っておく。祈り求めるものはすべて既に得られ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る。”
「山を動かす」という言葉は、ユダヤの人々がしばしば使っていた誇張表現です。注解書によりますと、ユダヤ人は聖書の難しい箇所を解き明かすことができるラビについて「山を動かす人」と呼んでいたそうです。ですから、ここでの意味は非常に困難な問題を、祈りによって解決する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私たちの人生の中においても、試練や困難に遭遇することがあるでしょう。自分の力では、もうどうにもならない問題を抱え込もこともあるかもしれません。諦めるしかなかったことが、完全に放棄していたことが、神に信頼し、祈り求めたときに、まるで障害物であった山が動いたかのように、道が開かれ、光がさしてくるのです。或いはとても乗り越えることができないと思われた悲しみや苦しみをなぜか乗り越えることができ、心に希望が湧いてくるのです。そのような不思議な体験を、おそらく皆様も経験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祈ることによって、神様の御手が伸ばされるからです。祈ることによって、神様が私たちと共に歩んでくださっていることを知り、神様が私たちの重荷を共に担ってくださっていることを知るからです。
ただ、いちじくの木の呪いの奇跡をなされた後に、「山に向かい、海に飛び込め」とイエス様がおっしゃったとなると、文脈的に「山」とは、エルサレム神殿が位置している「神殿の丘」のことを指し、「海」とは、エルサレムのすぐ近くにあった「死海」のことを指しているようにも聞こえてきます。つまり、祈りの大切さを教えていることには変わりありませんが、同時に、祈りの実を結ぶことがなかった神殿当局者たちへの裁きの言葉としても聞こえてくるのです。先週見ましたマルコ11:17においてイエス様は、神殿当局者たちに向かって「あなたたちは神殿を『強盗の巣にしてしまった』」と言われました。これは、エレミヤ書7:11の引用ですが、エレミヤが語った預言であるその箇所を調べてみましょう。7:2b~11までご覧ください。
“主を礼拝するために、神殿の門を入って行くユダの人々よ、皆、主の言葉を聞け。イスラエルの神、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お前たちの道と行いを正せ。そうすれば、わたしはお前たちをこの所に住まわせる。主の神殿、主の神殿、主の神殿という、むなしい言葉に依り頼んではならない。この所で、お前たちの道と行いを正し、お互いの間に正義を行い、寄留の外国人、孤児、寡婦を虐げず、無実の人の血を流さず、異教の神々に従うことなく、自ら災いを招いてはならない。そうすれば、わたしはお前たちを先祖に与えたこの地、この所に、とこしえからとこしえまで住まわせる。しかし見よ、お前たちはこのむなしい言葉に依り頼んでいるが、それは救う力を持たない。盗み、殺し、姦淫し、偽って誓い、バアルに香をたき、知ることのなかった異教の神々に従いながら、わたしの名によって呼ばれるこの神殿に来てわたしの前に立ち、『救われた』と言うのか。お前たちはあらゆる忌むべきことをしているではないか。わたしの名によって呼ばれるこの神殿は、お前たちの目に強盗の巣窟と見えるのか。そのとおり。わたしにもそう見える、と主は言われる。”
エレミヤという人は、バビロン捕囚の直前に南ユダに立てられた預言者で、涙の預言者と呼ばれたりもします。それは民にエルサレムの滅亡とバビロン捕囚という大変否定的な預言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ため、同胞からは煙たがられ、歓迎されなかったです。そして最終的に捕囚というその憂き目を、預言の成就として目の当たりにしたからです。エレミヤはこう訴えかけています。「主の神殿、主の神殿、主の神殿という、むなしい言葉に依り頼んではならない。」バビロンに攻撃される直前だったイスラエルの人々は、まるで神殿それ自体によって、自分たちの平和が保証されていると考えていました。しかし間もなく、バビロン捕囚によって主の裁きが下されるのです。当時のイスラエルの人々にとって、神殿は神との交わりの場ではなく、神殿そのものが偶像化していました。例えば、生贄の血が注がれる祭壇の角は、どのような罪も赦される安全地帯だと考えられていましたから、様々な悪事を働いても、神殿に入り祭壇の四隅の角に触れるなら、罰せられることはないと考えられていたのです。こうして神殿によって敬虔な信仰生活が促進されたのではなく、神殿によって罪が包み隠され、汚れた生活が助長されていきました。神殿が逆に機能し、神の民がかえって異邦人よりも不敬虔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むしろ神殿がない方が、良心の呵責によって、自主的に罪を抑制することができたのではないかと思えるほどです。これは、彼らが神殿を自分たちの目的や利益のために利用し、自分たちの願う神の救いと祝福を、自分勝手に神殿に投影してしまったことに起因しています。イエス様の時代にも同じようなことが起こりました。神殿当局者たちは、祭儀を形式化し、礼拝を形式化し、御利益を与えてくださる自分たちの神様を勝手にこしらえ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様が、あなたたちは神殿を「強盗の巣にしてしまった」と言った時、エレミヤがバビロン捕囚直前に見つめていたのと同じ姿を、イエス様も見つめていたと思われるのです。マルコの福音書にもどりまして、11:25節をご覧ください。ここでは赦すこと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
【3】. 赦すこと
“また、立って祈るとき、だれかに対して何か恨みに思うことがあれば、赦してあげ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の天の父も、あなたがたの過ちを赦してくださる。”
「立って祈るとき」とありますが、当時のユダヤ人の祈りのスタイルは、必ず立って祈りを捧げました。祈りとは神様との交わりです。ですから、もし祈る側に何か罪や、やましさ、隠し立てがあるなら、神様との交わりの妨げになることでしょう。ですから、誰かに対して何か恨みに思うようなことがあるなら、赦してあげなければなりません。イエス様が私たちのすべての罪を赦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ただ、25節の後半部分は、私たちが人を赦してあげた代価として、私たちの罪や過ちが赦されるというように読み取れます。マルコ福音書には「主の祈り」は出てきませんが、日々私たちが礼拝で唱えている「主の祈り」も、そのように解釈されるおそれがあります。しかし、そういった意味ではありません。そもそも私たち罪人が神様に祈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自体、神の赦しを前提にしています。罪人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神様と交わりができること、それ自体、神の赦しを前提にしているのです。神の赦しを信じ、神の豊かな恵みを受け取るなら、「わたしはあの人の罪を絶対に赦すことはできない」などと言うことは出来ないはずです。私たちは日々、罪を重ね、他人を傷つけてしまう弱い者たちだからです。私たちが自分では気づいていない罪も、神様の目でみるなら、あぶりだされてくるのです。教会とは罪のない聖なるものたちの集まりではなく、罪びとの集まり、弱いものの集まりでありますから、互いに赦し合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そして、むしろ弱さがあるにも関わらず、罪があるにもかかわらず、神に罪赦された者が、互いに愛し合い、互いに尊重し合うこと、そのことこそ教会の特徴だと言えるでしょう。本来、神様がエルサレムに期待したのはそのような赦しの共同体の姿でありました。ところが神殿当局者たちの形ばかりの礼拝は、互いに人を裁き合い、神の赦しと神の恵みに覆いが被せられ、恵みに対して民を盲目にしてしまったのです。
【結論】
信じること、祈ること、赦すこと、これは、教会の自然な営みであり、今日、私たち教会にも強く求められています。日々御言葉によって恵みをいただくことにより、私たちの信仰は、生きた瑞々しい信仰となり、粘り強く祈りを捧げる共同体となり、そして愛と赦しに満ちた共同体となるのです。そのような教会を通して、イエス様はご臨在してくださり、教会を通してご自身の救済の働きを、なお進めてくだることでしょう。私たちは今日も信仰の中で、信じて、赦して、祈りながら歩む者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