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年02月04日「神の国はこのような者たちのもの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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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の国はこのような者たちのもの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0章13節~16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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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イエスに触れていただくために、人々が子供たちを連れて来た。弟子たちはこの人々を叱った。
10:14しかし、イエスはこれを見て憤り、弟子たちに言われた。「子供たちをわたしのところに来させなさい。妨げてはならない。神の国はこのような者たちのものである。
10:15はっきり言っておく。子供のように神の国を受け入れる人でなければ、決してそこ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
10:16そして、子供たちを抱き上げ、手を置いて祝福され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0章13節~16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ユダヤの社会では、ユダヤ教の教師であるラビや、長老の所に子供たちを連れていき、神の祝福を祈ってもらうことは、よく行われていました。旧約聖書を見ると、ノアもイサクもそしてヤコブも子供の頭に手を置いて祝福したという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手を置くときに、特別な神の祝福が注がれると、ユダヤでは信じられていたのでしょう。本日の箇所にもイエス様に触れていただくために、子供たちが連れて来られました。するとイエス様は、「神の国はこのような者たちのものである」と言われ、連れて来られた子供たちを抱き上げ、手を置いて祝福されました。今朝は受動的な子供たちの姿を通して御言葉から恵みに与っ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1】. 子供のように神の国を受け入れる人

13節にある「子供たち」という言葉は、12歳以下の男の子や女の子を指すと考えられますが、ルカによる福音書の並行記事(18:15)を見ますと、「乳飲み子」と書かれていますので、ここに書かれている「子供たち」とは、まだ小学校にも入学していないような幼児であ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現在の私たちの感覚では、幼児と言えば、かわいらしい天使のような存在で、その無垢なところ、純真で、無邪気で、天真爛漫な姿は、見習うべき美徳の一つであると考えてしまいますが、当時のユダヤの社会において、そのような価値観は一切ありませんでした。そして、そのような価値観は事実とは異なっていると思います。彼らに罪や汚れがないというのは、私たち大人の願望に過ぎないからです。いずれにしても当時のユダヤでは、現代と異なり幼児の死亡率は高く、律法を本格的に学び始める年齢に至るまで、子供たちは価値のない者、取るに足らない者、まだ律法をよくわきまえない罪深い存在であり、小さき者と考えられていました。10章13、14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に触れていただくために、人々が子供たちを連れて来た。弟子たちはこの人々を叱った。しかし、イエスはこれを見て憤り、弟子たちに言われた。「子供たちをわたしのところに来させなさい。妨げてはならない。神の国はこのような者たちのものである。”

弟子たちは、子供たちを連れてきた人々を叱りつけました。なぜ叱ったのでしょうか。その理由について色々想像することができますが、第一に、弟子たちは家に戻って来て、結婚の話しをイエス様から改めて聞いている時に、人々が勝手に子供たちを連れて来たため、弟子たちとしては、イエス様との会話が途切れてしまったことに対し、腹を立てたということです。第二に、イエス様に対する配慮ということがあ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この時、イエス様一行は、エルサレムに向かっていました。もしかしたら、このところ理由は分かりませんが、イエス様は緊張の連続であるということを、弟子たちに察知されて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或いは、イエス様のお顔に疲れが現れて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この大切な時期に、できるだけ余計な負担を先生にかけないようにしなければ」と配慮したということです。第三に、子供の祝福を求めてやって来るとはなんと身勝手な、と批判する思いがあったのかも知れません。弟子たちは、これまで自分の生活や自分の財産を投げ打って、主イエスに従って来ました。主イエスと共に旅をしながら、数々の苦しみや困難を、一緒に背負いながら歩んで来ました。それなのに、突然現れた子供たちが、いきなり主イエスの御許に来て、祝福を求めるというのは、あまりにも身勝手過ぎる。序列というか、秩序をわきまえるべきだということで、弟子たちが叱ったということも十分に考えられると思います。その理由が何であれ、イエス様はそれを見て、かえって弟子たちに憤られ、「妨げてはならない」と言われました。この「妨げてはならない」という言葉は、以前にも出てきました。イエス様のお名前を使って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者を弟子たちがやめさせようとした時です。その時もイエス様は、9:39で「やめさせてはならない、禁じてはならない」と同じ言葉を用いています。「やめさせてはならない」という言葉が連呼されることによって、弟子たちの無理解、弟子たちとイエス様との感覚のズレが暴露されているのです。また、14節に出てくる「憤り」という言葉は、「怒り」よりもっと強い言葉です。福音書の中でイエス様の怒りについて書かれている箇所がいくつかありますが、「憤り」と書かれているのは、唯一、本日の箇所だけであります。なぜイエス様は、それほど激しく怒られたのでしょうか。おそらく、このように無視されている子供たちが、神の国に入れられることにおいて、福音の大切なエッセンスがそこに隠されているからだと思います。このように取るに足らず、無価値で、小さな子供たちが、神の国に入れられることにおいて、まさに福音の大切なエッセンスがそこに隠されているに違いないのであります。

13節の、「人々が子供たちを連れて来た」という言葉に注目しますと、実は、主語が省略されていて、一体どのような人々が子供たちを連れて来たのか、はっきりとは分かりません。両親なのか、親族なのか、知人なのか、お兄ちゃんなのか、お姉ちゃんなのかはっきりとは分かりません。とにかく子供たちは自主的にイエス様の御許にやって来たのではなく、「連れてこ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受動態なのです。幼い子供たちにとっては、なすがまま任せる以外に方法はありませんでした。目の前の人に依り頼むだけであります。しかし、このような子供たちの「受け入れ」の姿にこそ、福音のエッセンスが隠されていると言えるのです。イエス様は続いて次のように語って、子供たちを祝福されました。15、16節をご覧ください。

“はっきり言っておく。子供のように神の国を受け入れる人でなければ、決してそこ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そして、子供たちを抱き上げ、手を置いて祝福された。”

福音とは一方的な神の召しを信じ、一方的に与えられる神の国をただ受け入れることです。私たちがイエス様を選んだのではなく、イエス様が私たちを選ばれました。それでは私たちキリスト者が入れられている神の国とは何かと言いますと、それは、永遠の命であり、罪の完全な赦しであり、悲しみも涙もない、聖霊による義と平和と喜びの国であります。この神の国は、私たちが何にも勝って第一に求め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でありますが、同時に、ある人が望んでその価値を支払えば、その国に入れられ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その価値があまりにも大きいために、人がどれだけ巨額の金額を積んでも、どれだけ功労を立てても、どれだけ善行を積んでも、そこに入る資格を得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神の国とは、その価値が莫大なため、それは専ら天からの贈り物であって、神の招きに対し、子供のように受け入れる者だけに入ることが赦されるのです。マタイ16:26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ございます。ご覧ください。

“人は、たとえ全世界を手に入れても、自分の命を失ったら、何の得があろうか。自分の命を買い戻すのに、どんな代価を支払えようか。”

永遠の命を買い戻そうと、いかなる代価を支払ってもそれはかなわないということです。神の国を人間の側で何かをして、その報いとして得ようとすることは不可能であります。イエス様は、そのように莫大な価値のある神の国が、このような者たちのものだと言われ、子供たちを抱き上げました。それだけでなく、手をおいて祝福することさえしました。旧約聖書によれば、祝福するという言葉は大変重たい言葉です。一度、神の名においてなされた祝福は、取り消すことのできないものでありました。主イエスが、価値がなく、取るに足らないと見なされていた子供たちに手を置かれ、祝福されたこと、このことを私たちは重く受け止めたいと思います。

【2】. 幼児洗礼

私たち改革派教会では、子供に幼児洗礼を授けていますが、その幼児洗礼の一つの根拠となるのが、今朝の御言葉でございます。もしかしたら幼児洗礼について、次のように言うのを聞いたこと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なぜ、自分の口で信仰を言い表すことのできない幼児にも洗礼を授けるのか?」どうでしょうか。聞いたことがありますでしょうか。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救われて、神の国に入れられます。そのことが大前提としてあります。「それでは、まだ右も左も分からない子供に、なぜ洗礼を授けるのか?」という質問です。この質問は究極的には、信仰とは、人間の意思から始まるのか、それとも神の恵みから始まるのかという問題に行き着くことでありましょう。もし信仰が、人間の意思から始まるのであるなら、救いは、究極的に人間の意思に依存することになります。救いは、人間の意思にかかっていると言えます。反対に、もし信仰が神の恵みから始まるのであるなら、救いは、究極的には神の恵みに依存し、そこに人間の功労の入る余地はなくなることでしょう。この問題をめぐって、5世紀初頭、ペラギウスという人物と、アウグスティヌスという人物が論争をいたしました。因みにこのペラギウスという人物は人間の原罪を否定し、後に異端宣告された人物です。ペラギウス陣営は、最初に神の招きがありますが、その招きとは決定的なものではなく、人間がその招きに応じて信仰と悔い改めによって応じることができるかどうかに救いがかかっていると主張しました。つまり、信仰と悔い改めは、そしてその先にある救いは、全面的に人間の自由意志にかかっていると主張しました。したがって、まだ分別のない子供に洗礼を授ける幼児洗礼には反対する訳です。洗礼は自分の口によって告白することができる成人洗礼しか認めませんでした。一方、私たち改革派教会が支持するアウグスティヌス陣営は、ある人が信仰と悔い改めに至る前に、実は内在的で強力な神の恵みがあり、神の恵みが信仰と悔い改めに先行していると主張しました。つまり、ある人が信仰と悔い改めに導かれるのは、その時点に至るまでにおいて、神の導きがあって、信仰と悔い改めはその人の自由意志から出ているように見えるけど、実際は全面的に神の恵みにかかっていると主張しました。一見すると、どちらの主張も甲乙つけがたく、どちらとも尤もだと感じるかもしれませんが、この問題は、突き詰めて言えば、「すべての相互作用の末に、最後の決定権は誰に置かれているのか」、という問題であります。「結局のところ、何が救いを決定するのか」という問題です。すべての相互作用の末に、最後の決定権が、もし人間の意思、人間の決定に置かれているなら、ペラギウスの主張が正しいことになるでしょう。そして、人間の意思人間の決定、人間の信仰告白は、最も重要なものとなるでしょう。しかし、もし神と、神の力、神の摂理に決定権が置かれているなら、人間の信仰告白に先行する神の恵みを受動的に受け入れている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す。つまり、私たちが、今現在あるのは、このように教会で神を賛美し、神に礼拝を捧げているのは、私たちの信仰告白に先行する神の恵みがあったればこそと、告白することになり、私たちがこのように信仰と悔い改めに導かれたのは、専ら神の恵みによるものだと、告白することになるのです。そして、私たちキリスト者の子供たちが、すでに神の恵みの中に入れられていると見なすのは、何ら不自然な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キリスト者の子供において、はっきりと背教的な態度が現れない限り、つまり、イスラム教徒や仏教徒に回心した等ということが起こらない限り、彼らが恵みの契約の中に既に入れられていると見なされ、幼児洗礼を授けることは、何ら問題にならないという考え方です。このような訳で、改革派教会では、キリスト者の子供たちに幼児洗礼を授け、子供たちを「契約の子」として教会全体で育み、そして主の日の礼拝において、親と子が一緒に礼拝をささげることが推奨されてきたのであります。

神の国とは、何か人間の側のアクションによって、人間の側の選択や、人間の側の告白や、人間の側の功労によって得ら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の国は永遠の命であり、罪の完全な赦しであり、聖霊による義と平和と喜びの国であり、あまりにも莫大な価値があるため、専ら天からの贈り物として受け取る以外に方法はありません。福音のエッセンスとは、誰も自分を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ただで受け入れることな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天国の門となってくださり、私たちに救いの招きを語ってくださいます。神の国に入ろうとする者は誰でも、自分を誇るのではなく、子供の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にある神の国をただで受け入れる者とさ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

【結論】

私たちの会員の家族の中には、まだ洗礼を受けていない配偶者や、子供たち、或いは幼児洗礼を受けながらも、週の初めの日に礼拝に出席しない方が幾人かいらっしゃいます。私たちには神の摂理は隠されていますが、しかし、そのような方々のために粘り強くとりなしの祈りを捧げつつ、いつの日か必ず共に礼拝をささげる喜ばしい日が来ることを待ち望みたいと思います。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2024년 2월 4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마가복음 10장 13~16절

서론

유대 사회에서는 유대교 교사인 랍니나 장로에게 아이들을 데려가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기도를 받는 일이 자주 행해졌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노아도 이삭도 그리고 야곱도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했다는 것이 적혀 있습니다. 손을 얹을 때 특별한 하나님의 복이 부어질 것이라고 유대인은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부분에도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며 데려온 어린 아이들을 안아 올리고 손을 얹고 축복하셨습니다. 오늘은 수동적인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말씀에서 은혜를 얻고자 합니다.

(1)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

13절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라는 말은 12세 이하의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누가복음의 병행기사(18장 15절)을 보면 「어린 아기」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적혀 있는 「어린 아이들」이란 아직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은 듯한 유아였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는 유아라고 하면 귀여운 천사와 같은 존재이고, 그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은 본받아야 할 미덕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그런 가치관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치관은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죄나 더러움이 없다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소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당시 유대에서는 오늘날과 달리 유아의 사망률은 높았고 율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가치 없는 자, 하찮은 자, 아직 율법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죄 많은 존재이자 작은 자로 여겨졌습니다. 10장 13,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사람들이 예수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왜 혼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는데, 첫째 제자들은 집에 돌아와서 결혼 이야기를 예수님께 다시 듣고 있을 때 사람들이 마음대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제자들로서는 예수님과의 대화가 끊어져 버린 것에 대해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때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요즘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긴장의 연속임을 제자들은 감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예수님의 얼굴에 피로가 나타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가능한 한 불필요한 부담을 선생님께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배려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아이의 축복을 부탁하러 오다니 얼마나 이기적인가 하는 비판하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자신의 생활과 자신의 재산을 내던지고 주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주 예수님과 함께 여행하면서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짊어지며 걸어왔습니다. 그런데도 갑자기 나타난 어린 아이들이 갑자기 주 예수님의 앞으로 와서 축복을 청한다는 것은 너무 염치가 없다. 서열이라고 할까, 질서를 잘 잡아야 한다는 것으로 제자들이 꾸짖었다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오히려 제자들에게 노하여 「금하지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금하지말라」는 말은 이전에도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더러운 귀신을 몰아내고 있는 자를 제자들이 그만두게 하려 할 때입니다. 그때도 예수님은 9장 39절에서

「금하지말라」라는 말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금하지말라」라는 말이 계속해서 사용되면서 제자들의 몰이해,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감각의 어긋남이 폭로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14절에 나오는 「노하시어」라는 말은 「분노」라는 말보다 더 강한 말입니다. 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의 분노에 대해 쓰여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노하시어」라고 쓰여 있는 곳은 유일하게 오늘의 구절뿐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심하게 노하셨을까요? 아마도 이렇게 무시당하는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있는데 있어서 복음의 소중한 에센스가 거기에 숨겨져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하찮은 무가치하고 작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에 있어서 바로 복음의 소중한 에센스가 거기에 숨겨져 있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13절의 「사람들이 예수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라는 말에 주목하면 사실 주어가 생략되어 있어서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부모인지, 친족인지, 지인인지, 오빠인지, 언니인지 확실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어린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온 것이 아니라 「데려옴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수동태인 것이죠. 어린 아이들에게는 흘러가는대로 맡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눈 앞의 사람에게 의존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린 아이들의 「수용」하는 모습이야말로 복음의 에센스가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15,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복음이란 일방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고, 일방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직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속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죄의 완전한 용서이며 슬픔도 눈물도 없는 성령에 의한 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이 원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거액의 금액을 쌓아도, 아무리 공로를 세워도, 아무리 선행을 쌓아도 거기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가치가 막대하기 때문에 오로지 하늘이 주신 선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이처럼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들어가는 것이 허락됩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보세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영원한 생명을 되 사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편에서 무언가를 해서 그 보답으로 얻으려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엄청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아이들은 안아 올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손을 얹고 축복하시기까지 했습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축복한다는 말은 매우 무거운 말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축복은 취소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이 가치없고 하찮게 여겨지는 어린 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신 것, 이 일을 우리들은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유아세례

우리 개혁파교회에서는 자녀에게 유아세례를 주고 있는데, 그 유아세례의 한 근거가 되는 것이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혹시 유아세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자기 입술로 믿음을 표현할 수 없는 유아에게도 세례를 주는 것일까요?”어떠세요?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믿음에 의해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전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아직 좌우분별도 못하는 어린 아이에게 왜 세례를 주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믿음이란 인간의 의지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믿음이 인간의 의지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면 구원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만약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다면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거기에 인간의 공로가 들어갈 여지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5세기 초 펠라기우스라는 인물과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이 논쟁을 벌였습니다. 참고로 이 펠라기우스라는 인물은 인간의 원죄를 부정하고 나중에 이단 선고를 받은 인물입니다. 펠라기우스 진영은 처음에 하나님의 초대가 있는데, 그 초대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초대에 응하고 믿음과 회개로 응할 수 있느냐에 구원이 달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믿음과 회개는,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구원은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아직 철없는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유아세례는 반대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자신의 입으로 고백할 수 있는 성인 세례밖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우리 개혁파 교회가 지지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진영은 어떤 사람이 믿음과 회개에 이르기 전에 사실 내재적이고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과 회개에 선행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믿음과 회개에 이끌리는 것은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인도가 있고 믿음과 회개는 그 사람의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얼핏 본다면, 갑을을 정하기가 어렵고 어느쪽도 지당하다라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이 문제는 따져 말하면 “모든 상호작용 끝에, 최후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놓여 있는가”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무엇이 구원을 결정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모든 상호작용 끝에 마지막 결정권이 만약 인간의 의사, 인간의 결정에 놓여 있다면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사, 인간의 결정, 인간의 믿음 고백은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에 결정권이 놓여 있다면, 인간의 믿음 고백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현재 믿음 안에 있는 것은, 이처럼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믿음고백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이처럼 믿음과 회개로 인도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자녀에게 뚜렷한 배교적인 태도가 나타나지 않는 한, 즉 이슬람교도나 불교도로 회심했다는 등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이 은혜의 언약 속에 이미 들어가 있다고 간주되어 유아세례를 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개혁파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하여 자녀들을 「언약의 자녀」로 교회 전체에서 양육하고, 그리고 주의 날 예배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권장되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인가 인간측의 액션에 의해, 인간측의 선택이나, 인간측의 고백이나, 인간측의 공로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생명이요, 죄의 완전한 용서요, 성령에 의한 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요, 너무나 막대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오로지 하늘의 선물로 받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복음의 에센스란 아무도 자신을 자랑하는 일이 없도록 공짜로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의 문이 되어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초대를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려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하나님 나라를 거저 받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결론

우리 성도들의 가족 중에는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배우자나 자녀들, 혹은 유아세례를 받고도 주의 날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는 숨겨져 있지만, 그러나 그런 분들을 위해 끈질기게 기도를 드리면서 언젠가 꼭 함께 예배 드리는 기쁜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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