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年12月03日「弟子の道の教え 제자도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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弟子の道の教え 제자도의 가르침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8章34節~9章1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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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8:34それから、群衆を弟子たちと共に呼び寄せて言われた。「わたしの後に従いたい者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
8:35自分の命を救いたいと思う者は、それを失うが、わたしのため、また福音のために命を失う者は、それを救うのである。
8:36人は、たとえ全世界を手に入れても、自分の命を失ったら、何の得があろうか。
8:37自分の命を買い戻すのに、どんな代価を支払えようか。
8:38神に背いたこの罪深い時代に、わたしとわたしの言葉を恥じる者は、人の子もまた、父の栄光に輝いて聖なる天使たちと共に来るときに、その者を恥じる。」
9:1また、イエスは言われ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ここに一緒にいる人々の中には、神の国が力にあふれて現れるのを見るまでは、決して死なない者がい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8章34節~9章1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主イエスはこれからメシアとしてお受けになる苦難と復活を弟子たちに語られてから、群衆を呼び寄せて「わたしの後に従いたい者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言われました。この言葉は大変厳しいお言葉であり、否定的に聞こえ、聞く人を陰鬱にさせます。聖書を読む私たちは、思わずたじろいでしまい、できれば聞きたくなく、聞いても、そのままやり過ごしてしまいたいと思ってしまうかもしれません。イエス様は「私の軛を負いなさい」ではなく、「自分の十字架を負いなさい」と語っています。当時、ラビが弟子たちに「私の軛を負いなさい」と教えることは、しばしばあったようですが、「自分の十字架を負いなさい」という教えは、あまり聞かなかったはずです。ローマが支配するパレスティナ地方において、十字架刑は残虐な極刑として知られていました。ですから「自分の十字架を背負う」というのは、死刑宣告を受けた死刑囚が、十字架の横木を背負って刑場まで見せ物として行進するよう強要された姿を思い浮かべたことでしょう。この道には、往路はあっても復路はありません。一方通行の道です。この道を人々から嘲られ、辱められながら進んで行き、最後に待っているのは死であります。このような歩みは、私たちにはとてもできないし、したくもないと思ってしまいます。しかし、イエス様はこの御言葉を弟子たちだけでなく、群衆を共に呼び寄せてお語り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から、現代に生きる私たち対し、そして全ての人々に対し、語られている御言葉として受け止めていきたいと思わされるのです。

【1】. 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

「わたしの後に従いたい者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まず何より大切なことは、従う事だと思います。イエス様の前に出て、イエス様を引率するのではなく、イエス様が先を行かれるので、それに従ってついて行くという事です。また、「自分を捨てる」とありますが、これは「自分を否定する」という意味です。人は誰でも自分のことが大好きで、自分第一で考えてしまうものですが、自分を否定するとは、そういった考えを放棄し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本日の箇所で、ギリシア語の構造に目を向けますと、この34節の「わたしの後に従いたい者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いう言葉がポイントとなり、命題部分になっているのが分かります。そして35節以下は、34節の命題を補足説明している構造になっていますから、順に補足説明を見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35節をご覧ください。

“自分の命を救いたいと思う者は、それを失うが、わたしのため、また福音のために命を失う者は、それを救うのである。”

ここでは、「命を救う」とか、「命を失う」という言葉が出て来ます。この後にも何度も出て来ますが、「命」という言葉は、プシュケーというギリシア語です。この言葉の意味は大変幅広く、一般に私たちが考える「生命の命」だけに限りません。プシュケーには命の他にも、霊魂、精神、心・自我、人間という意味まで含まれています(参照ルカ12:19、1ペトロ2:25、黙示録18:14)。ですから、34節で「命を失う」といった時に、単純に生命を失うということを言っているのではないという事です。キリスト者は「殉教の死を遂げなければならない」、或いは「自殺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風に極端に解釈してはなりません。そうではなく、「自我に死ぬ」とか、「自分のことより、神様のことを優先する」という意味です。従いまして「福音のために命を失う」とは、自分のことより神様のことを優先する時に受けることになる、苦難を甘んじなさいという意味になるのだと思います。皆様も経験があるかと思いますが、自分がキリスト者であることを公けにした時に、或いは、日曜日は礼拝を献げるため、仕事に出ることが出来ないなどと言った時に、周りから白い目で見られたり、理不尽な扱いを受けたことはないでしょうか。キリスト者として生きようとする時に、どうしても周囲との摩擦を感じたり、周囲との軋轢を感じるものです。しかし、イエス様のゆえに、それらの苦難に甘んじるなら、そのことこそ、まさに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た弟子の歩みであり、そのことこそ、まさに命を救う道なのであります。ですから、「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キリストに従う」とは、実は、信仰者としての日々の営みであるということが分かるのです。続いて8:36-37節をご覧ください。

“人は、たとえ全世界を手に入れても、自分の命を失ったら、何の得があろうか。自分の命を買い戻すのに、どんな代価を支払えようか。”

ここでは、全世界と、自分の魂を天秤にかけています。全世界と自分の魂を天秤にかけるなら、自分の魂の方が大切でしょと言っています。誰でも自分の命が最も大切だと考えるでしょう。当然だと思うかもしれません。それは、自分が今、生きている前提で、自分が今、自由であるということを前提で、そのように考え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このままで大丈夫だと思っているのです。ところが聖書は自分が生きている前提ではなく、自分が自由である前提ではなく、むしろ、死んでいる状態、罪と滅びの奴隷の状態であることを前提としています。もし買い戻されず、このまま行くなら、命を失うだろうという警告がなされているのです。「それは大変だ!何とかしなければ!」と緊急事態が発生してしまいますが、その上で聖書は、命の代価があまりにも大きい故に、何をもってしても買い戻すことは出来ない。堕落して、神から離れ、罪と滅びの奴隷になってしまった命・霊魂は、どんなにお金を積んでも、全世界を引き換えにしても、買い戻すことは出来な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唯一、罪のないお方、イエス・キリストの命によってのみ買い戻しがなされるのです。旧約聖書の詩編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あります。詩編49:8-9節と16節をご覧ください。

“神に対して、人は兄弟をも贖いえない。神に身代金を払うことはできない。魂を贖う値は高く/とこしえに、払い終えることはない。”

“しかし、神はわたしの魂を贖い/陰府の手から取り上げてくださる。”

罪と滅びの奴隷状態になっている命・霊魂を贖ってくださるのは、主イエス以外にはありません。従って、十字架を背負って、キリストに従うことは、実は、救いの招き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贖う事が出来る方に、全てを委ね、従って来なさいと、主イエスは救いの招きを語っ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続いて、8:38節をご覧ください。

“神に背いたこの罪深い時代に、わたしとわたしの言葉を恥じる者は、人の子もまた、父の栄光に輝いて聖なる天使たちと共に来るときに、その者を恥じる。」”

ここでは、救われる者たちが天で受けることになる報いと栄光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人の子であるイエス様は、やがて父の栄光に輝いて聖なる天使たちと共に来る時がやって来ます。それは、イエス様の再臨の時です。そのことは旧約のダニエル書7章にも預言されていますし、また、イエス様ご自身も語られました。ダニエル書7:13-14をご覧ください。

“夜の幻をなお見ていると、/見よ、「人の子」のような者が天の雲に乗り/「日の老いたる者」の前に来て、そのもとに進み権威、威光、王権を受けた。諸国、諸族、諸言語の民は皆、彼に仕え/彼の支配はとこしえに続き/その統治は滅びることがない。”

イエス様ご自身が語った御言葉も見てみましょう。マルコ13:26-27です。

“そのとき、人の子が大いなる力と栄光を帯びて雲に乗って来るのを、人々は見る。そのとき、人の子は天使たちを遣わし、地の果てから天の果てまで、彼によって選ばれた人たちを四方から呼び集める。」”

最後の審判の日、キリストは雲に乗って再臨されますが、ご自身に属する民とご自身に属さない民を区別し、神の国を完成させるためであります。ご自身に属さない民とは、「イエス様とイエス様の言葉を恥じる」人々です。つまり、十字架上の惨めなイエス様に躓いてしまい、決してイエス様を誇ることが出来ません。むしろこの世のもの、例えば、例えば、自分の姿・容姿、自分の能力、自分の財産、自分の功績、自分の学歴、自分の資格などを誇ろうとします。ところが、神の国が力と栄光を帯びてやって来るその日、イエス様はそのような者たちを恥じ、ご自身に属さない者として見做されるのです。一方で、ご自身に属する民を四方から呼び集め、神の御国を相続させます。ここで、ご自身に属する民というの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う者たち」、言い換えれば「主イエスと主イエスの言葉を誇り、そのことによって生じる苦難に甘んじてきた聖徒たち」のことであります。

【2】. 苦難を通しての恵み

さて、34節の「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というこの命題は、その本当の意味を、まだ弟子たちには理解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が、後にパウロはこのイエス様の教えを積極的、肯定的に捉えながら、次のように告白しています。ガラテヤ書2:19~20途中までご覧ください。P.345

“わたしは神に対して生きるために、律法に対しては律法によって死んだのです。わたしは、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つけられています。生きているのは、もはやわたし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がわたしの内に生きておられるのです。…”

苦難に満ちた伝道の中で、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キリストに従ってきた、パウロは、主イエスとの結びつきの深さをその苦難の中で自覚させられたという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のために、この世において降りかかってくる苦難に甘んじた時に、かえってキリストがパウロをご支配してくださり、キリストがパウロ自身の中に生き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を悟るようになったと言うのです。私たちも、イエス様に従い行く時に生じる、様々の苦難に甘んじる時に、キリストと結合されているという信仰、キリストと一つであるという信仰を深い所で悟るのだと思います。

宗教改革者、カルヴァンも、やはり「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主イエスに従う事」こそ、まさにキリスト者の信仰の営みの本質であるとして、キリスト教綱要(Ⅲ-7-1)の中で次のように論じています。抜粋のプリントをご覧ください。

「われわれはわれわれ自身のものではない。それゆえに、われわれの理性や意志が、われわれの思いと行いを支配してはならない。

われわれはわれわれ自身のものではない。それゆえにわれわれは、肉によれば自分に好都合であるかもしれないものを求めることを、われわれの目的としてはならない。

われわれはわれわれ自身のものではない。それゆえに、できる限り、自分自身と自分の持っているすべてのものを忘れよう。

その逆に、われわれは神のものである。それゆえに、神のために生き、神のために死のう。

われわれは神のものである。それゆえに、われわれのあらゆる行為が、神の知恵と意志とによって支配されるようにせよ。

われわれは神のものである。それゆえに、われわれの生のあらゆる部分がわれわれの唯一の正しい目標である神に向けられるようにせよ。」

キリストの歩まれた御足に従う時に、それによって生じる苦難の中で、パウロやカルヴァンは、キリストが共におられ、キリストと結ばれていることを深く理解するに至ったのであります。キリストの歩まれた御足に従う時に、自分自身の信仰が精錬され、純金のような信仰に変えられることを体験したのです。キリストの歩まれた御足に従う時に、私たちは知らないうちに神の働きに共に参与させていただき、そして「主よ、いつ私たちはそのような善い働きをしたでしょうか。」と言いながら、天においてその豊かな報いに与る者とされるのです。

【結論】

弟子の道と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キリストに従う道であります。嘲りと辱めを甘んじながら、主に従っていく道であります。これは到底、人間の力で成し遂げられ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誰もが、十字架を負いたくない、自分だけ損をするのは嫌だと拒絶するものです。ところが、この道は、実は救いの招きであり、神様の恵みの中で支えられる道なのであります。主が共にいてくださり、主が私たちをして、成し遂げてくださる道なのです。逆説的に聞こえますが、真の意味で自己実現の道と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い、主イエスの歩まれた道に従っていくこと」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十字架の先には栄光があります。神の国が力と栄光を帯びてやって来るその日、イエス様はご自身の民を四方から呼び集め、神の御国を相続させるのです。そして栄光の輝きの中で主と共に私たちは永遠に生きるようにされるのです。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제자도의 가르침

2023년 12월 3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마가복음 8장 34~9장 1절

서론

주 예수님께서는 이제 메시아로 받으실 고난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엄격한 말씀이며 부정적으로 들리고 듣는 사람을 음울하게 합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는 무심코 주춤해 버리고, 가능하면 듣고 싶지 않고 들어도 그냥 넘어가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매라」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랍비가 제자들에게 「내 멍에를 매라」고 가르치는 일은 종종 있었던 것 같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가르침은 잘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십자가형은 잔악한 극형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겠다」라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가 십자가 가로목을 메고 형장까지 구경거리로 행진하도록 강요받는 모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 길에는 가는 길은 있어도 돌아오는 길은 없습니다. 일방통행길입니다. 사람들이 이 길을 비웃음을 받고 욕 먹으며 나아가 마지막으로 기다리는 것은 죽음입니다. 이런 행보는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을 제자들뿐만 아니라 무리를 함께 불러서 말씀하셨다고 하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1)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서서 예수님을 인솔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앞서 가시기 때문에 그를 따라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을 부정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좋아하고 자기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데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그런 생각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헬라어 구조에 눈을 돌리면 이 34절의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이 포인트가 되어 명제 부분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35절이하는 34절의 명제를 보충 설명하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순서대로 보충 설명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서는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이거나 「목숨을 잃으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뒤에서도 몇 번이나 나옵니다만 「목숨」이라고 하는 단어는 푸쉬케라고 하는 헬라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푸쉬케는 생명 외에도 영혼, 정신, 마음·자아, 인간이라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참조 누가복음 12장 19절, 베드로전서 2장 25절, 요한계시록 18장 14절). 그러므로 34절에서 「목숨을 잃으면」이라고 했을 때 단순히 생명을 잃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의 죽음을 겪어야 한다」거나 「자살해야 한다」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아니라 「자아를 죽인다」거나 「자신보다 하나님을 우선시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이라는 뜻은 자신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 할 때 받게 되는 고난을 감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밝혔을 때, 또는 일요일에는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출근 할 수가 없다고 했을 때 주위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은 없으셨나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할 때 아무래도 주위와의 마찰을 느끼거나 주위로 부터의 알력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그 고난을 감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제자의 걸음이요, 그것이야말로 바로 목숨을 구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사실 믿음을 가진 자의 날마다의 삶의 걸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8장 36,37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여기서는 온 천하와 자기 목숨을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온 천하와 자기 목숨을 저울질한다면 자기 목숨이 더 소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것은 자신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전제이고 자신이 지금 자유롭다는 것을 전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대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성경은 자기가 살아있다는 전제가 아니라 자신이 자유롭다는 전제가 아니라 오히려 죽은 상태, 죄와 멸망의 노예 상태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만약 속량되지 않고 그대로 간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경고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 큰일났다! 뭔가 해야지!”라는 긴급사태가 발생해버리고 말지만 성경은 목숨의 대가가 너무 커서 어떤 것으로도 속량될 수 없다,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 죄와 멸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생명・영혼은 아무리 돈을 쌓아도 온 천하를 지불하고서도 되 사올 수없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에 의해서만 속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시편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49편 7,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죄와 멸망의 노예 상태에 있는 목숨, 영혼을 속죄해 주시는 것은 주 예수 이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사실 구원에의 초대라는 것입니다. 속량 해 주실 수 있는 주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따라오라고 주 예수님께서는 구원으로의 초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8장 3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여기서는 구원받는 자들이 하늘에서 받게 될 보답과 영광에 대해 쓰여져 있습니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곧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가 옵니다. 바로 예수님의 재림의 때입니다. 그 사실은 구약성경 다니엘서 7장에도 예언되어 있고 또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서 7장 13,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도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3장 26,27절을 보시겠습니다.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지막 심판의 날 그리스도는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는데 자기가 택하신 자와 자기가 택하지 않은 백성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 자기가 택하시지 않은 자들이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이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십자가 위의 비참한 예수님에게

실족해 버려 결코 예수님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것들, 예를 들면, 자신의 모습, 외모, 자신의 능력, 자신의 재산, 자신의 업적, 자신의 학력, 자신이 획득한 자격증 등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그날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부끄러워하시고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자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자신에게 속한 백성들을 사방에서 불러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시킵니다. 여기서 자신에게 속한 백성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른 자들」, 다시 말해 「주 예수와 주 예수의 말씀을 자랑하며 그로 인해 생기는 고난을 감내 해 온 성도들」을 말합니다.

(2) 고난을 통한 은혜

그런데 34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이 명제는 그 참뜻을 아직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후에 바울은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9,20절 중간까지 보시겠습니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고난이 가득한 전도의 여정 가운데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온 바울은 주 예수와의 연합의 깊이를 그 고난 가운데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에 닥치는 고난을 감내했을 때 오히려 그리스도가 바울을 지배해 주셨고 그리스도가 바울 자신 안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갈 때 생기는 여러 고난을 감수할 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믿음,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믿음을 깊게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영위의 본질이라고 기독교 강요(Ⅲ-7-1)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습니다. 발체한 프린트를 봐 주세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따라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자기 자신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잊자.

그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죽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지혜와 뜻에 의해 지배되도록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우리의 유일한 올바른 목표이신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라. 」

그리스도께서 걸어오신 걸음을 따를 때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고난 속에서 바울과 칼빈은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을 깊이 이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걸음을 따를 때 자기 자신의 믿음이 정련되고 순금 같은 믿음으로 바뀔 수 있음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어오신 걸음을 따를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의 일에 함께 참여하게 되고 그리고 “주여, 언제 제가 그런 선한 일을 했습니까?”라고 말하면서 하늘에서 그 풍요로운 보답을 받을 자로 여겨집니다.

결론

제자의 길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조롱과 모욕을 감수하면서 주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다, 나만 손해 보는 것은 싫다고 거절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사실 구원의 초대이자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지탱되는 길입니다. 주께서 함께 해 주시고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루어 주시는 길인 것 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자아실현의 길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 끝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찾아오는 그날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을 사방에서 불러 모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빛 속에서 주님과 함께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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