耳が聞こえず口のきけない人が癒される 귀먹고 말 더듬는 자가 치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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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7章31節~37節
31それからまた、イエスはティルスの地方を去り、シドンを経てデカポリス地方を通り抜け、ガリラヤ湖へやって来られた。
32人々は耳が聞こえず舌の回らない人を連れて来て、その上に手を置いてくださるようにと願った。
33そこで、イエスはこの人だけを群衆の中から連れ出し、指をその両耳に差し入れ、それから唾をつけてその舌に触れられた。
34そして、天を仰いで深く息をつき、その人に向かって、「エッファタ」と言われた。これは、「開け」という意味である。
35すると、たちまち耳が開き、舌のもつれが解け、はっきり話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
36イエスは人々に、だれにもこのことを話してはいけない、と口止めをされた。しかし、イエスが口止めをされればされるほど、人々はかえってますます言い広めた。
37そして、すっかり驚いて言った。「この方のなさったことはすべて、すばらしい。耳の聞こえない人を聞こえるようにし、口の利けない人を話せるようにしてくださ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7章31節~37節
귀먹고 말 더듬는 자가 치유되다
2023년 10월 29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마가복음 7장 31~37절
서론
예수님은 선교하시기 위해 이방인의 땅으로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양육을 위해, 그리고 유대 당국자들을 피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방인의 땅에 오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할까요?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이방인 지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성경 뒤쪽의 지도 6을 보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두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더러운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그 후 다시 북쪽으로 30km정도 가서 시돈을 경유한 다음 남쪽으로 전회해서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서 갈릴리 호수 남동쪽으로 나아가 데가볼리 지방을 지나 갈릴리 호수로 왔습니다. 데가볼리에 접해 있는 갈릴리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서안이나 북안과는 달리 이방인이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데가볼리란 원래 「열개의 도시」,「열개의 도시 연합」이라는 뜻으로 유대인들도 다소 살기는 했지만 헬라화된 마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걸으신 길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변방 땅, 이방인이 사는 땅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 길은 실제로 걸어가기에는 힘든 먼 길이었기에 일부의 주해서에서는 이를 문제 삼아 저자 마가가 팔레스타인의 지리감각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 복음서를 편집할 때 지명의 오류를 범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교제하시기 위해 그리고 유대 당국자들의 질투와 적의로부터 피하시려고 변방의 땅을 아주 먼 거리이지만 크게 돌면서 갈릴리 호수 남동쪽 기슭에 도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읽을 때 문맥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열쇠가 되는 중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은「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는 마가복음 6장 52절의 말씀입니다. 그 떡 떼시던 일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둔해져 있는 제자들을 주 예수께서 양육하고 계시다는 것이 오늘의 일의 배경입니다. 그래서 오늘 부분과 다다음주에 배우게 되는 8장 22절의 벳새다에서 맹인을 치유하는 기적, 이 두 가지는 짝을 이루어 제자 양육을 배경으로 한 이러한 기적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마가복음을 읽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돌아가서 데가볼리 지방 갈릴리 호수에 접한 이곳은 예수님이 예전에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무덤에 살던 거라사의 광인을 더러운 귀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신 곳과 겹칩니다. 마가복음 5장에 적혀 있듯이 이 마을 사람들은 돼지를 가축으로 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더러워진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남자는 주 예수님이 자신에게 해주신 일을 전부 이 지역 사람들에게 퍼뜨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후 이 지역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것을 시찰하기 위해 오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1) 에바다
7장 31~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5장을 상기해 주시면 좋겠는데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기슭에 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시면 무리가 몰려오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예수님께 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자리에서는 예수님이 이르시자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이 마을의 분위기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수로보니게 여자 때와 마찬가지로 장애를 가진 사람, 그 사람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왔을까요? 아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우리가 형제자매의 나약함을 서로 감싸려 할 때 예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믿음은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려는 연대감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다가가는 「연대감」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주 주보 안에 기도제목을 올려 놓고 있는데 서로 연대감을 가지면서 함께 주님 앞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32절의 「말 더듬는」다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는 아주 드문 그리스어입니다. 그 의미는 말 더듬이 심한 사람, 심한 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기적이 일종의 계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리로부터 단절된 곳에서 듣는 귀가 있는 자, 보는 눈이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계시는 밝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환부인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침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게 자신이 지금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예수님은 만져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말씀에 의해, 그리고 기도에 의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4,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탄식하다」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신음하다」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8장 22,23절에도 같은 말이 사용되고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신음하다」라는 말인데, 이 말은 마음속으로 신음하고 괴로워하면서 그곳에서 해방되기를 고대한다는 뜻입니다. 신음한다는 것은 기도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람어로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밝혀지기를」 바라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덮개의 커튼이 열리고 하나님을 아는 빛이 비치기를」바라는 바람입니다. 「에바다」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 이 기적은 단순한 치유의 기적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그리고 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요소가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금세 그의 귀가 열리고 혀 꼬임이 풀려 또렷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을 더듬는 중증의 언어장애가 없어지고 그 입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까 32절의 「말을 더듬는」다는 단어가 아주 희귀한 그리스어라고 말씀드렸는데 구약성경에 한 군데만 같은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바로 이사야서 35장 4~6절입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35장 6절의 「말 못하는 자」라고 하는 단어가 마가복음 7장의 「말 더듬는 자」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사야는 대망의 메시아가 올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오늘 읽은 기적에서 바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마가복음은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이어서 7장 36,37절을 만나보시죠.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여기를 보면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 치유와 믿음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의 치유로 사람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되고 희망과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기적 자체, 치유의 역사 자체가 선행되어 주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는 자로 오해하게 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유대 사회에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종종 출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예수님은 경고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널리 전파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결코 멈출 수 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놀라면서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라고 전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 쪽 증언인데, 이 증언이 유대인에게서가 아니라 이방인에게서 나온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이 증언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모든 것이 선하셨다는 저 창세기의 1장 31절 말씀과 서로 호응하는 것처럼 들려옵니다. 창세기 1장 3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대로 들으셔도 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피조물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도 심히 좋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타락했기 때문에 만물도 죄 속에 갇혀 버렸지만, 그 좋은 세계가 지금 메시아에 의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 이방인에 의해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더럽다고 배척했던 이방인에 의해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더럽다고 여겨진 이방인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여겨지는 이방인 의해 이런 찬양이 나왔습니다. 그 거라사인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고 그것을 믿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에 의해서 정결하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을 읽는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로서 생생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시는 「이방인 지역에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이방인 지역에까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개입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주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역사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 치유된다는 기적은 떡의 기적을 보고도 좀처럼 깨닫지 못한 제자들에대해 행하신 역사이며 동시에 오늘 아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루어진 계시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이방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우리의 입을 통해 여러 죄와 책망이 가득한 말들이 나옵니다. 우리의 어두워진 마음에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와 우리의 입을 예수님이 직접 만져주시고 「에바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가득 차 구원의 증거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아무런 꺼리낌 없이 대답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이 치유되는 기적과 그리고 다다음 주에 살펴 보게 될 8장 22~26절의 벳새다의 맹인을 치유하는 기적, 이 두 기적은 최종적으로 8장 27절 이하에 쓰여져 있듯이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유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으로 인도하기 위해 예수님은 그동안 정말 오랜 기간 인내심을 가지고 제자 양율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메시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더러움과 비참에서 속죄하여 주시고 우리를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실을 오늘 아침에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우리의 입을 통해서 이 분을 진심으로 찬양합시다.
【序】
イエス様は宣教するために異邦人の地を廻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弟子たちの養育のため、そしてユダヤの当局者たちを避けて、休息を取るために異邦人の地に来られたと考えられます。しかし、偶然にと言いましょうか、神の導きの中でと言いましょうか、神の国の到来が、異邦人地域にまで知らされることになりました。
巻末の地図6を見ながら、イエス様の足跡をたどってみたいと思います。まず、ティルスにおいて、シリア・フェニキアの女の娘から悪霊を追い出されました。その後、さらに北に30キロほど進みシドンを経由して、それから南に転回し、ガリラヤ湖の北東から、ガリラヤ湖の南東へと進んで行き、デカポリス地方を通り抜けてガリラヤ湖にやってきました。デカポリスに接しているガリラヤ湖は、ガリラヤ湖の西岸や北岸とは異なり、異邦人の住む町でありました。デカポリスとは元来「十の都市」、「十の都市連合」という意味で、ユダヤ人も多少、住んではいたものの、ギリシャ化された町であります。従って、イエス様の道のりは、イスラエルの地ではなく、イスラエルの辺境の地、異邦人が住む地を練り歩いたことになります。この道のりは、実際に歩くには大変な距離があるため、一部の注解書では、そのことを問題視し、著者マルコにパレスティナの地理感覚が乏しかったため、この福音書を編集する際、地名のミスを犯してしまったと見立てています。しかし、私には、どうもそのようには思えません。イエス様は弟子たちと交わりを持つために、そしてユダヤの当局者たちの妬みと敵意から避けるようにして、辺境の地を、大変長い距離でありますが、大廻りしながら、ガリラヤ湖の南東の岸辺に到着し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ています。
私たちがこの箇所を読む時、文脈の中で抑えるべきキーセンテンスがあります。それは、「パンの出来事を理解せず、心が鈍くなっていたからである。」というマルコ6:52の御言葉です。パンの出来事をなかなか理解できず、心が鈍くなっている弟子たちを、主イエスが養育しているということが本日の出来事の背景にあります。ですから、本日の箇所と、再来週に学ぶことになりますが、8:22のベトサイダで盲人を癒す奇跡、この二つは対になっており、弟子養育を背景としてこれらの奇跡がな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を念頭に置きながら、マルコの福音書を読み進め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さて、話は戻りますが、デカポリスのガリラヤ湖に面したこの場所は、イエス様が以前、汚れた霊に取りつかれ、墓場を住まいとしていた、ゲラサ人の男を、汚れた霊から解放してあげた場所と重なります。マルコ福音書5章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この町の人々は豚を家畜として飼っていました。イエス様によって汚れた霊から解放された男は、主イエスが自分にしてくれたことをことごとくこの地域の人々に言い広めたとあります。ですから、イエス様は、その後、この地域がどのようになったのか、それを視察するために来られたのかもしれません。
【1】. エッファタ
7:31-33節をご覧ください。
“それからまた、イエスはティルスの地方を去り、シドンを経てデカポリス地方を通り抜け、ガリラヤ湖へやって来られた。人々は耳が聞こえず舌の回らない人を連れて来て、その上に手を置いてくださるようにと願った。そこで、イエスはこの人だけを群衆の中から連れ出し、指をその両耳に差し入れ、それから唾をつけてその舌に触れられた。”
5章を思い起こしていただきたいのですが、イエス様がガリラヤ湖の岸辺に来た時、人々の反応はどうだったでしょうか。イエス様が舟から降りられると、群衆が押し寄せてくるのではなく、汚れた霊に取りつかれた人がイエス様のもとにやって来たと書かれています。しかし、本日の箇所では、イエス様が来られると、「人々は耳が聞こえず舌の回らない人を連れて来て、その上に手を置いてくださるように」と願っています。この町の雰囲気は以前とは随分変わっ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す。そして、ここでも、フェニキアの女の時と同じように、障がいを持った人、その人自身の信仰ではなく、彼を取り巻く、周囲の人々の信仰にスポットが当てられています。周囲の人々は、どのような気持ちで、この人をイエス様の前に連れて来たのでしょうか。恐らく、かわいそうに思う気持ちがあったはずです。私たちが兄弟姉妹の弱さを互いに包み込もうとする時、イエス様は喜ばれることでしょう。信仰とは、悲しむ者と共に悲しもうとする、その連帯感を生み出すものであります。弱さを持っている者に、寄り添うような「連帯感」です。私たちの教会では毎週、週報の中で祈祷課題を挙げて祈っていますが、お互いに連帯感を持ちながら、共に主の御前に進み出ていかれることを願っています。
32節の「舌の回らない」という言葉は、新約聖書ではここにしか出て来ない、大変珍しいギリシア語です。その意味は、どもりがひどい人、重度の言語障害を持っている人という意味です。イエス様は、耳が聞こえず舌の回らない人を群衆の中から連れ出されました。それは、これから起こる奇跡が一種の啓示の出来事と関連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神の啓示、神の顕現というものは、誰にでも明らかにさ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群衆から断絶されたところで、聞く耳のある者、見る目がある者にだけ、神の啓示は明らかにされるのです。
イエス様は、患部である両耳に指を差し入れ、それから唾をつけて患部であるその舌に触れてくださいました。当時の人々にとって、唾には治癒力が宿っていると考えられていたようです。耳が聞こえず舌の回らない人にとって、自分が今、治療を受けているとはっきり分かるように、イエス様は触れてくださ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最終的には御言葉によって、そして祈りによって癒しの奇跡を行われました。34-35節をご覧句ください。
“そして、天を仰いで深く息をつき、その人に向かって、「エッファタ」と言われた。これは、「開け」という意味である。すると、たちまち耳が開き、舌のもつれが解け、はっきり話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
イエス様は天を仰いで、深く息をつかれました。「深く息をつく」と訳されている言葉は、「呻く」という意味です。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8:22~23にも、同じ言葉が使われていますので、ご覧ください。
“被造物がすべて今日まで、共にうめき、共に産みの苦しみを味わっていることを、わたしたちは知っています。被造物だけでなく、“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わたしたちも、神の子とされること、つまり、体の贖われることを、心の中でうめきながら待ち望んでいます。”
「呻く」という言葉ですが、この言葉は、心の中で呻き苦しみつつ、そこから解放されることを待ち望んでいるという意味です。「呻く」とは、祈りそのものであると言っていいでしょう。イエス様も、天を仰ぎながら言いようもない呻きをもって、「祈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エッファタ」と言われました。アラム語で「開かれよ」という意味です。受動態になっています。「この奇跡によって神の啓示が明らかにされるように」という願いが込められているように思えます。「覆いのカーテンが開かれ、神を知る光が差し込むように」という願いです。「エッファタ」という言葉によって、この奇跡は単なる癒しの奇跡ではなく、弟子たちに対して、そして、この福音書を読む読者に対して、神の啓示としての要素が浮き彫りにされるのです。すると、たちまち彼の耳が開き、舌のもつれが解け、はっきり話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した。どもり・重度の言語障がいがなくなり、その口を通して神を賛美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先ほど、32節の「舌の回らない」という言葉が、大変珍しいギリシア語であると申しましたが、旧約聖書に一か所だけ、同じ言葉が用いられています。それはイザヤ書35章4~6節です。ご覧ください。
“心おののく人々に言え。「雄々しくあれ、恐れるな。見よ、あなたたちの神を。敵を打ち、悪に報いる神が来られる。神は来て、あなたたちを救われる。」そのとき、見えない人の目が開き/聞こえない人の耳が開く。そのとき/歩けなかった人が鹿のように躍り上がる。口の利けなかった人が喜び歌う。荒れ野に水が湧きいで/荒れ地に川が流れる。”
35:6の「口のきけなかった人」という言葉が、マルコ7章の「舌の回らない人」と同じ言葉になっています。イザヤは、待望のメシアが来る時、素晴らしいことが起こると預言しているのです。「見えない人の目が開き/聞こえない人の耳が開く。そのとき/歩けなかった人が鹿のように躍り上がる。口の利けなかった人が喜び歌う。荒れ野に水が湧きいで/荒れ地に川が流れる。」と言うのです。本日、お読みした奇跡において、まさにイザヤの預言が成就されたと、マルコの福音書は語っているようです。
【2】. この方のなさったことはすべてすばらしい
続いて7:36~37節を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人々に、だれにもこのことを話してはいけない、と口止めをされた。しかし、イエスが口止めをされればされるほど、人々はかえってますます言い広めた。そして、すっかり驚いて言った。「この方のなさったことはすべて、すばらしい。耳の聞こえない人を聞こえるようにし、口の利けない人を話せるようにしてくださる。」”
ここを見ますと、イエス様は、誰にもこのことを話してはならないと口止めされています。これは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イエス様にとって癒しと信仰は、直結されています。主イエスの癒しによって、人は、神との正常な関係が回復され、希望と喜びが与えられるのです。しかし、ともすれば奇跡そのものが、癒しの業、そのものが、先行してしまい、主イエスを、奇跡を行う者と誤解させてしまう危険性を孕んでいました。特に当時ユダヤの社会には、自分をメシアと自称する人が、しばしば出現していたようです。そのように誤解されることを避けるために、イエス様は口止めをされたと考えられます。しかし、口止めをされればされるほど、人々はかえって言い広めるようになりました。神の福音は決してとどめておくことは出来ません。人々は驚きながら、「この方のなさったことはすべて、すばらしい」と言い広めたのです。この言葉は神の啓示に対する人間の側の証言でありますが、この証言がユダヤ人からではなく、異邦人から出て来た点が大変興味深い(皮肉)です。そして、この証言は、神が万物を創造された際、すべてのものが善かったという、あの創世記の1:31の御言葉と互いに呼応し合っているように聞こえてきます。創世記1:31をお読みします。そのままお聞きください。
“神はお造りになったすべてのものを御覧になった。見よ、それは極めて良かった。夕べがあり、朝があった。第六の日である。”
神様が万物を創造された時、被造物は神様の目から見ても、極めて良い世界でありました。アダムとエバが罪を犯し、堕落してしまったため、万物も罪の中に閉じ込められてしまいましたが、その素晴らしい世界が、今メシアによって回復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が、異邦人によって証言されているのです。汚れているとされている異邦人によって、神から断絶されているとされている異邦人によって、このような讃美が出て来ました。あのゲラサ人によって福音が語られ、それを信じた人々の心が、イエス様によってきよく造りかえられたからであります。この出来事は、マルコによる福音書を読む初代の教会の人々に、神の啓示の出来事として鮮やかに迫ってきたに違いありません。そして、この啓示は「異邦人地域にまで神の国が到来したという事実」を、「異邦人地域にまで神の主権的統治が介入し始めたという事実」を、明らかにしているのです。2,000年前、主イエスが人の体をお取りになり、この世に来てくださったことにより、神の国が到来しました。神の主権的統治が歴史に介入し始めました。耳が聞こえず口のきけない人が癒されるという奇跡は、パンの奇跡を見ても、中々悟ることのできなかった弟子たちに対してなされた御業であり、同時に今朝、私たち自身になされた啓示でもあります。私たちは罪人であり、神の御言葉を聞くことができず、私たちの口を通して、様々な罪と咎にまみれた言葉が出て来ます。私たちの暗くなった心に、神の光が差し込み、神様との交わりが回復されるのです。私たちの耳と、私たちの口にイエス様が直接触れてくださり、「エッファタ」と語ってくださるのです。私たちは、聖霊に満たされて、救いの証しを、神の御国の到来の証しを何の憚りもなく、大胆に告白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のです。
【結論】
耳が聞こえず口のきけない人が癒される奇跡と、そして再来週みることになります8章22~26のベトサイダの盲人を癒す奇跡、この二つの奇跡は、最終的に8章27節以下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弟子たちを代表したペトロの信仰告白へと結びついて行きます。「あなたは、メシアです」という有名な信仰告白です。この告白へ導くために、イエス様はこれまで本当に長い期間、忍耐を持って弟子養育をされてきたのであります。イエス・キリストは、私たちのメシア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私たちを罪と汚れと悲惨から贖い、私たちを本来の神の姿に回復してくださるお方。そのことを、今朝もう一度覚えつつ、私たちの口を通して、この方を心から讃美してまいり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