ユダの礼拝の回復 유다의 예배 회복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ナホム書 1章9節~2章1節
1:9お前たちは主に対して何をたくらむのか。主は滅ぼし尽くし/敵を二度と立ち上がれなくされる。
1:10彼らは酒に酔いしれ/絡み合った茨のようになっているが/乾ききったわらのように焼き尽くされる。
1:11主に対して悪事をたくらみ/よこしまな事を謀る者が/あなたの中から出た。
1:12主はこう言われる。「彼らは力に満ち、数が多くても/必ず、切り倒され、消えうせる。わたしはお前を苦しめたが/二度と苦しめはしない。
1:13今、わたしは彼の軛を砕いてお前から除き/お前をつないでいた鎖を断ち切る。」
1:14主はお前について定められた。「お前の名を継ぐ子孫は、もはや与えられない。わたしは、お前の神の宮から/彫像と鋳像を断ち/辱められたお前のために墓を掘る。」
2:1見よ、良い知らせを伝え/平和を告げる者の足は山の上を行く。ユダよ、お前の祭りを祝い、誓願を果たせ。二度と、よこしまな者が/お前の土地を侵すことはない。彼らはすべて滅ぼされ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ナホム書 1章9節~2章1節
유다의 예배 회복
2023년 9월 24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나훔 1장 9~15절까지
서론
나훔서가 쓰여진 것은 앗수르 제국이 번영하고 가장 절대적인 세력을 자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훔서의 내용 가운데 상이집트의 테베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 예언은 기원전 663년 테베의 함락부터 기원전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될 때까지의 사이에 쓰여진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늘은 나훔서의 예언을 통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1) 므낫세의 타협
선지자 나훔이 살았던 시대는 앗수르의 왕이 산헤립, 에살핫돈, 아슈르바니팔로 이어져 간 가운데 있었습니다. 한편 남유다의 왕은 이 시대에 주로 므낫세와 요시야가 통치했습니다. 발췌한 프린트를 보시기 바랍니다. 각 왕의 치세가 그래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시야의 치세기간은 31년, 아몬의 치세기간은 불과 2년인 것에 비해 므낫세왕은 뭐니뭐니해도 그 치세기간이 긴 것이 특징입니다. 55년 (열왕기하 21장 1절) 이라고도 하고 45년이라고도 합니다. 그래프에서는 그 기간을 45년으로 하고 있는데 45년이든 55년이든 어느 경우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중에서 가장 오래 통치한 사람이 바로 이 므낫세왕이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므낫에에 의한 통치방식은 인간적으로 본다면 안정적으로 남유다를 다스렸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통치는 최악이었습니다. 아래 21장 1~6절을 읽어보세요.
1 므낫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오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2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서
3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4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성전에 제단들을 쌓고
5 또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6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
이 기록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므낫세 왕의 통치가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통치와 대비된다는 점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기원전 722년에 망했는데 그 멸망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이 아합에 의해 이교의 신들이 반입되어 백성들을 타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6장 30~33절에 그 단서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여기에 나와 있듯이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같은 통치를 한 므낫세 왕이야말로 남유다 백성을 타락시켰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멸망의 아픔을 안겨준 왕이 북쪽은 아합이라면 남쪽은 므낫세라고 열왕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므낫세는 믿음이 두터운 히스기야 왕을 아버지로 두면서 아버지의 정책을 어기고 앗수르의 신들을 받아들였는지가 의문으로 떠오릅니다. 그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앗수르의 수호신인 아슈르나 여신 이슈타르,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의 위협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앗수르의 왕들은 정복한 나라들에게 수호신 아슈르나 여신 이슈타르, 그리고 바알과 동등시되는 니스록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통상 앗수르가 전쟁을 시작하는 구실은 “아슈르의 명령에 따라”라는 그들의 신의 신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국가들은 수호신 아슈르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18장 32b~35절에는 산헤립의 부하인 장군 랍사게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의 상황이 담겨 있는데, 이때도 앗수르의 수호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32b~35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32b …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33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34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35 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장군 랍사게는 「여호와」라고 부르고 있지만「יהוה」라고하는 히브리어 四文字가 사용되어 있습니다.즉 여호와를 지목하여 의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반 앗수르의 태도를 분명히 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앗수르군의 공격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켜주셨지만 히스기야의 치세 동안 성벽을 가진 46개 유다 성읍들을 빼앗기고 2만여 명의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앗수르에 붙잡혀 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강력한 앗수르군을 알고 있던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주 여호와께 도움을 청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앗수르의 신들을 받아들이고 앗수르의 멍에를 메는 것을 기뻐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의 멸망과 남유다 예배의 회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2) 앗수르에 대한 신탁과 유다에 대한 신탁
오늘의 본문 1장 9~11절을 참고해 주세요. 먼저 앗수르에 대한 신탁입니다.
9 너희는 여호와에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9절의 「너희는」이라는 단어는 앗수르의 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훔서에는 앗수르를 나타내는 대명사가 여성형이 되거나 남성형이 되기 때문에 가끔 그 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게 되는데 남성형으로 사용되고 있을 때는 앗수르 왕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편 10절의 「그들은」이라는 말은 여성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역시 앗수르를 나타내고 있는데, 여성형의 경우는 수도 니느웨를 가리키고 있고, 그것이 복수형의 경우는 니느웨와 니느웨를 지키는 여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11절에는 주목할 만한 말이 나옵니다. 「사악한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בְּלִיָּֽעַל 벨리알」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벨리알이란 사악한 것, 헛된 것, 악마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너희 중에서 악마적인 것을 꾀하는 자가 나왔다」즉 「앗수르 왕 중에서 악마적인 일을 꾀하는 자가 나왔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당시 니느웨가 (바빌론도 그렇지만) 왜 악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적혀 있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 중에서 악마적인 일을 꾀하는 자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아무리 성공적으로 보이더라도, 그것이 아무리 부유함을 약속해 주더라도 사악한 방법으로 삶의 성공이나 경제적인 부유함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등지는 일이며 동시에 악마의 앞잡이로 전락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앗수르 왕이 한 일, 그리고 남유다의 므낫세 왕이 한 일이란 바로 자신의 눈앞의 성공이나 눈앞의 풍요로움, 눈앞의 평안을 바라면서 주 하나님을 등지고 말았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12,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유다에 대한 신탁입니다.
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아무리 앗수르 왕들의 힘이 강하고 군사가 많아도 반드시 멸절을 당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유다를 괴롭혔지만 다시는 괴롭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앗수르의 멍에를 유대로부터 부수고 제거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가 멸망한 이후 남유다는 앗수르에게 100년 넘게 조공을 강요받았습니다. 한때 히스기야의 치세에서 조공이 정지 되었으나 므낫세의 치세가 시작되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앗수르의 굴레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14,15절을 보시죠. 앗수르 왕에 대한 신탁과 유다에 대한 신탁이 차례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14절의 「네 이름이 .. 」라는 대명사가 히브리어에서는 남성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14절의 「너」란 앗수르 왕에 대해 이야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앗수르 왕의 자손은 더 이상 주어지지 않고 앗수르 왕의 무덤이 준비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니느웨는 바빌론에 의해서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렸습니다. 현재 니느웨의 위치는 이라크 바그다드 북쪽에 위치한 모술이라는 마을 근처인데 19세기에 발견된 니느웨 유적을 통해 당시 건물이 얼마나 밀집되어 있고 도로가 정비되고 발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도읍지가 무덤에 묻혀버리는 것입니다.
1장 15절에는 「악인 (벨리알) 」이라는 말이 다시 나옵니다. 앗수르 왕의 자손은 끊어지고 악마의 앞잡이 밸리알이 다시는 유다는 침입하지 않을 것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는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선지자 이사야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 있기 때문에 이사야의 52장 7절을 살펴보겠습니다.
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 이사야의 예언에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란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전하고 구원을 공포하며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하는 자라고 적혀 있습니다. 즉 복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란 주님의 복음을 맡은 유다 백성이며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 나훔이 예언어하고 있는 유다의 회복이란 유다 백성들이 주 하나님께 돌아가 그들이 본래의 사명에 사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세상으로 나가 「악의 힘은 멸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다」고 그 복음을 알리고 전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사명이요 그들의 회복된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해진 복음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백성이야말로 바로 주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후의 역사는 나훔의 예언대로 움직여 갔습니다. 앗수르에서는 아슈르바니팔 사후 내분이 일어나 대제국 앗수르가 어이없게 메대 바빌론 연합군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맙니다. 또한 남유다에서는 요시야가 왕이 되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신전의 중수공사 중 신전 안에서 율법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아마도 선대의 므낫세와 아몬의 치세에서 많은 꺼림직한 것과 우상들이 신전 안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그것들 속에 묻혀 있던 율법서를 우연히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시야는 율법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펼쳤을 때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왔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율법서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성대한 유월절 축제를 재개했습니다. 요시야에 의해 예배가 회복되고 유다 백성들에게 바른 복음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을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나훔의 예언은 이렇게 성취되어 간 것입니다.
결론
오늘 나훔의 예언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우상의 신들과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위의 사람들과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세상의 관습이나 일본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방식을 따르는 것은 확실히 인간적인 시점에서 볼 때, 현명한 생활방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신전에 바알이나 아세라 상을 세우거나 앗수르의 우상들을 맞아들여 함께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것처럼 성경에 쓰여져 있는 가르침과 새상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가르침을 혼합하여 섞으면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의 매일의 생활에서 참된 예배가 회복되고 바른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주님 앞에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비록 삶에 어려움이 찾아 오더라도 세상에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합시다.
【序】
ナホム書が書かれたのは、アッシリア帝国が繁栄し、最も絶大な勢力を誇っている時でありました。ナホム書の中に、上エジプトのテーベがアッシリアによって滅ぼされたことが暗示されているため、この預言は、紀元前663年のテーベの陥落から、紀元前612年のアッシリアの首都ニネベが陥落されるまでの間に書かれ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ています。本日は、ナホム書の預言を通して、今日に生きる私たちに何が語られているのか、耳を傾け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1】. マナセの妥協
預言者ナホムが生きた時代とは、アッシリアの王が、センナケリブ、エサルハドン、アッシュルバニパルと代替わりして行った中にありました。一方で、南ユダの王は、この時代、主にマナセとヨシヤが統治していました。抜粋のプリントをご覧ください。それぞれの王の治世がグラフで表されています。ヨシヤの治世期間は31年、アモンの治世期間はわずか2年に比べ、マナセ王は、なんといってもその治世期間が長いことが特徴です。55年(2列王21:1)とも、45年とも言われています。グラフでは、その期間を45年としていますが、45年であれ、55年であれ、いずれの場合でも、北イスラエルと南ユダの中で、もっとも長く統治したのが、このマナセ王であったと考えられています。マナセによる統治方法は、人間的に見るなら、安定して南ユダを治めたと評価することができ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聖書の視点から見るなら、彼の統治は最悪でした。列王記下21:1~6をお開きください。
“マナセは十二歳で王となり、五十五年間エルサレムで王位にあった。その母は名をヘフツィ・バと言った。彼は主がイスラエルの人々の前から追い払われた諸国の民の忌むべき慣習に倣い、主の目に悪とされることを行った。彼は父ヒゼキヤが廃した聖なる高台を再建し、イスラエルの王アハブが行ったようにバアルの祭壇を築き、アシェラ像を造った。更に彼は天の万象の前にひれ伏し、これに仕えた。主はかつて、「エルサレムにわたしの名を置く」と言われたが、その主の神殿の中に彼は異教の祭壇を築いた。彼はまた、主の神殿の二つの庭に天の万象のための祭壇を築いた。彼は自分の子に火の中を通らせ、占いやまじないを行い、口寄せや霊媒を用いるなど、主の目に悪とされることを数々行って主の怒りを招いた。”
この記録の中で特に注目すべき点は、マナセ王の統治が、北イスラエルの王、アハブ王の統治に対比されている点です。北イスラエルは、既に紀元前722年に滅びていましたが、その滅びを招いた直接の原因が、アハブによって異教の神々が持ち込まれ、民を堕落させたからと考えられています。列王記上16:30~33にその手がかりとなる御言葉がございます。
“オムリの子アハブは彼以前のだれよりも主の目に悪とされることを行った。彼はネバトの子ヤロブアムの罪を繰り返すだけでは満足せず、シドン人の王エトバアルの娘イゼベルを妻に迎え、進んでバアルに仕え、これにひれ伏した。サマリアにさえバアルの神殿を建て、その中にバアルの祭壇を築いた。アハブはまたアシェラ像を造り、それまでのイスラエルのどの王にもまして、イスラエルの神、主の怒りを招くことを行った。”
ここにありますように、「誰よりも主の目に悪とされる」、北イスラエルのアハブのような統治を行った、マナセ王こそ、南ユダの民を堕落させたという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滅亡の憂き目をもたらした王が、北はアハブであるとすれば、南はマナセであると、列王記は語っているのです。それでは、なぜ、マナセは信仰の篤いヒゼキヤ王を父に持ちながら、父の政策に背き、アッシリアの神々を受け入れていったのかが疑問として浮かび上がります。その理由は、何と言ってもアッシリアの守護神であるアッシュールや、戦争の女神イシュタル、そしてバアルやアシェラの脅威があったと思われます。おそらく、アッシリアの王たちは、征服した国々に守護神アッシュールや女神イシュタル、そしてバアルと同等視されているニスロクへの忠誠を要求したと考えられています。通常、アッシリアが戦争を始める口実は、「アッシュールの命令によって」という彼らの神の神託でありました。ですから、周辺諸国は、守護神アッシュールに恐れをなしていた訳です。列王記下18:32途中~35節には、センナケリブの部下である将軍ラブ・シャケが、エルサレムを包囲した時の状況が書かれていますが、この時もアッシリアの守護神がいかに強いのかが強調されています。列王記下18:32b~35をご覧ください。
“ヒゼキヤの言うことを聞くな。彼は、主は我々を救い出してくださる、と言って、お前たちを惑わしているのだ。諸国の神々は、それぞれ自分の地をアッシリア王の手から救い出すことができたであろうか。ハマトやアルパドの神々はどこに行ったのか。セファルワイムやヘナやイワの神々はどこに行ったのか。サマリアをわたしの手から救い出した神があっただろうか。国々のすべての神々のうち、どの神が自分の国をわたしの手から救い出したか。それでも主はエルサレムをわたしの手から救い出すと言うのか。」”
将軍ラブ・シャケは「主」と呼んでいますが、「ヤハウェיהוה 」というヘブライ語の四文字が使われています。つまり、主ヤハウェを名指しして、頼りにならな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この時ヒゼキヤは、反アッシリアの態度を明確にしており、最終的には主なる神は、アッシリア軍の攻撃からエルサレムを守ってくださいましたが、ヒゼキヤの治世の間に、城壁を持つ46のユダの町々が奪われ、約2万人のユダの民が捕虜としてアッシリアに捕らえられたのも事実であります。そのような強力なアッシリア軍を知っていたヒゼキヤの子マナセは、主なる神に助けを求めることより、積極的にアッシリアの神々を受け入れ、アッシリアの軛を付けられることを喜んだと考えられるのです。しかし、主なる神はアッシリア帝国の滅亡と、南ユダの礼拝の回復を約束してくださいます。
【2】. アッシリアへの託宣とユダへの託宣
本日の1:9~11節をご覧ください。最初にアッシリアに対する託宣です。
“お前たちは主に対して何をたくらむのか。主は滅ぼし尽くし/敵を二度と立ち上がれなくされる。彼らは酒に酔いしれ/絡み合った茨のようになっているが/乾ききったわらのように焼き尽くされる。主に対して悪事をたくらみ/よこしまな事を謀る者が/あなたの中から出た。”
9節の「お前たちは」という言葉は、アッシリアの王たちを指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ナホム書では、アッシリアを表す代名詞が女性形になったり、男性形になったりするため、時々その代名詞が何を指しているのか分からなくなるのですが、男性形で使用されている時は、アッシリアの王を指していると考えてください。一方、10節の「彼らは」という言葉は、女性形になっています。やはりアッシリアを表していますが、女性形の場合は、ニネベの都を指しており、それが複数形の場合は、ニネベの都とニネベを守る女神を指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また、11節には、注目すべき言葉が出て来ます。「よこしまな」とありますが、ヘブライ語で「בְּלִיָּֽעַל ベリアルの」となっています。「ベリアル」とは、邪悪なもの、虚しいもの、悪魔的なことを意味します。ですから「あなたの中から、悪魔的なことを謀る者が出た」つまり、「アッシリア王の中から、悪魔的なことを謀る者が出た」という意味です。聖書の中で、当時のニネベが(バビロンもそうですが)、なぜ悪の象徴として描かれているのか、その理由がここに書かれている訳です。アッシリア王の中から悪魔的なことを謀る者が出たからです。私たちの人生において、それがどんなに成功的見えても、それがどんなに裕福さを約束してくれても、悪魔的な方法によって、人生の成功や経済的な裕福さを望んではなりません。それは主に背くことであり、同時に悪魔の手先に成り下がることでもあります。アッシリア王のしたこと、そして南ユダのマナセ王のしたこととは、まさに自分の目先の成功や、目先の豊かさ、目先の安泰を望んで、主なる神に背いてしまったという事なのだと思います。続く12節~13節をご覧ください。今度はユダに対する託宣です。
“主はこう言われる。「彼らは力に満ち、数が多くても/必ず、切り倒され、消えうせる。わたしはお前を苦しめたが/二度と苦しめはしない。今、わたしは彼の軛を砕いてお前から除き/お前をつないでいた鎖を断ち切る。」”
いかに、アッシリアの王たちが力に満ち、兵士が多くても、必ず切り倒され、消え失せると、主は言われます。そして、主はユダを苦しめましたが、二度と苦しめることはない。なぜなら、アッシリアの軛がユダから砕かれ取り除かれるからと、言われます。北イスラエルのサマリアが滅ぼされてから、南ユダはアッシリアに対し、100年以上、朝貢を強いられました。一時、ヒゼキヤの治世において朝貢が停止されましたが、マナセの治世になると再び元に戻りました。そのようなアッシリヤの軛から解放されるというのです。続いて14節と15節をご覧ください。アッシリアの王に対する託宣とユダに対する託宣が順番に語られています。
“主はお前について定められた。「お前の名を継ぐ子孫は、もはや与えられない。わたしは、お前の神の宮から/彫像と鋳像を断ち/辱められたお前のために墓を掘る。」見よ、良い知らせを伝え/平和を告げる者の足は山の上を行く。ユダよ、お前の祭りを祝い、誓願を果たせ。二度と、よこしまな者が/お前の土地を侵すことはない。彼らはすべて滅ぼされた。”
14節の「お前の名を…」という代名詞が、ヘブライ語では男性形になっていますから、14節の「お前」とはアッシリアの王について語られ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す。つまり、アッシリア王の子孫はもはや与えられず、アッシリア王の墓が掘られるだろうと、主は言われるのです。実際にニネベはバビロンによって歴史から完全に消されてしまいました。現代ニネベの場所は、イラクのバグダッドの北に位置するモスルという町の近辺でありますが、19世紀に発見された「ニネベ遺跡」によって、当時、いかに建物が密集しており、道路が整備され、発展していたのかが分かって来ました。その都が墓に葬られるのです。
2:1には、「よこしまな者(ベリアル)」とう言葉が再び出て来ます。アッシリア王の子孫は絶え、そして、悪魔の手先ベリアルが、二度とユダを侵入すること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れでは、「良い知らせを伝え/平和を告げる者」とは一体誰のことでしょうか。預言者イザヤも同じような言い回しを、使っていますので、イザヤ書の52:7を調べてみましょう。
“いかに美しいことか/山々を行き巡り、良い知らせを伝える者の足は。彼は平和を告げ、恵みの良い知らせを伝え/救いを告げ/あなたの神は王となられた、と/シオンに向かって呼ばわる。”
このイザヤの預言では、「良い知らせを伝える者」とは、平和を告げ、恵みの良い知らせを伝え、救いを告げ、あなたの神は王となられたと呼ばわる者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つまり、良い知らせを伝える者とは、主の福音を託されたユダの民であり、新約に生きる私たち教会である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預言者ナホムが預言しているユダの回復とは、ユダの民が、主なる神に立ち返り、彼らが本来の使命に生きる姿なのであります。主の民が、まだ福音を知らされていない世に出て行き、「悪の力は滅ぼされ、神の国が到来した」、その福音を告げ知らせること、それこそ彼らの使命であり、彼らの回復された姿なのです。そして、その告げ知らされた福音に、信仰によって応答する民こそ、まさに主の民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その後の歴史は、ナホムの預言の通りに動いて行きました。アッシリアでは、アッシュルバニパルの死後、内紛が起こり、大帝国アッシリアがあっけなくメディア・バビロニア連合軍によって滅ぼされてしまいます。また、南ユダにおいては、ヨシヤが王になると、宗教改革が始まり、神殿の修復工事の最中に、神殿の中から律法の書が発見されました。おそらく先代のマナセとアモンの治世において、多くの忌み嫌うべきものと、偶像が神殿の中に取り入れられたため、それらの中に埋もれていた律法の書を、偶然に発見す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ヨシヤは律法の書を発見し、それを開いた時、心から悔い改めました。自分たちがこれまでどんなに神の律法に背いて来たのかが示されたからです。ヨシヤは律法の書に従って、エルサレムで盛大な過ぎ越しの祭を再開しました。ヨシヤによって礼拝が回復され、ユダの民に正しい福音が知らさ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主なる神は、ヨシヤ王による宗教改革をどれほど喜ばれたことでしょうか。ナホムの預言は、このようにして成就されて行ったのです。
【結論】
今日、ナホムの預言は私たちにも同じように語られています。私たちの日々の生活の中で、偶像の神々と妥協してい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か。周りの人々に波風を立てないよう、世間の習わしや、日本古来から伝わる信心に従うことは、確かに人間的な視点から見る時、賢い生き方のように思えます。しかし、神様は、主の神殿にバアルやアシェラ像を設置したり、アッシリアの神々を迎え入れて、一緒に礼拝されることをお喜びになられないように、聖書に書かれている教えと、世間一般において信じられている教えを混合して、混ぜ合わせながら信仰生活を送ることを、お喜びになりません。私たちの日々の生活から真の礼拝が回復され、正しい福音が宣べ伝えられるよう、御前に悔い改めて、新しく出発さ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そして、たとえ人生に困難が訪れても、世から助けを求めるのではなく、世と妥協しない信仰によって、神様を喜ばせる私たちとなら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