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の恵みと知識における成長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의 성장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ペトロの手紙二 3章14節~18節
3:14だから、愛する人たち、このことを待ち望みながら、きずや汚れが何一つなく、平和に過ごしていると神に認めていただけるように励みなさい。
3:15また、わたしたちの主の忍耐深さを、救いと考えなさい。それは、わたしたちの愛する兄弟パウロが、神から授かった知恵に基づい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ことでもあります。
3:16彼は、どの手紙の中でもこのことについて述べています。その手紙には難しく理解しにくい個所があって、無学な人や心の定まらない人は、それを聖書のほかの部分と同様に曲解し、自分の滅びを招いています。
3:17それで、愛する人たち、あなたがたはこのことを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のですから、不道徳な者たちに唆されて、堅固な足場を失わないように注意しなさい。
3:18わたしたちの主、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と知識において、成長しなさい。このイエス・キリストに、今も、また永遠に栄光が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ペトロの手紙二 3章14節~18節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의 성장
2023년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베드로후서 3장 14~18절
서론
베드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몇 번이나 호소하며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대해 말하면서 이 편지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 편지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3장 전체에서 말하는 「주님의 재림」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지연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주의 재림입니다만 그 날은 반드시 온다고 하는 것을 베드로는 엄숙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하늘과 땅이 불로 멸망하고 불신자들이 심판받는 날(7절)인 「주의 날」입니다. 그날 하늘은 격렬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자연계의 여러 요소는 뜨거운 불에 녹아버립니다 (10절). 이 무서운 심판의 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날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심판은 불에 의한 정화가 목적이며 만물을 화로에서 반죽하고 재창조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완성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와 미신자의 차이는 이 주의 재림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중에서도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희 주보에도 인쇄되어 있습니다. 「주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주의 재림을 열심히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면서 눈을 뜨고 대비하는 자들입니다.
(1)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서
3장 14절을 참조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점도 없고 흠도 없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조금 전 2장 13절에서 거짓 선생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의 상태여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점도 없고」 「흠도 없다」라는 이 두 말은 희생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에게 사용된 말이고, 또 희생제사로 제단에 바치는 가축에게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흠집이나 얼룩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바치기에 적합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지기에 적합한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더 말하면, 이 말은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도 쓰이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예수님 자신도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흠 없고 점 없는 제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자가 될 수 있을까요. 심판받아야 할 마땅할 우리가 어떻게 「점도 없고 흠도 없는」자로서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로 지낼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이것은 우리의 힘, 우리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무리한 이야기입니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와 주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인해 이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구원자 예수님께 매달리고 이분에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죄는 용서받고 깨끗하며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여겨져 하나님 앞에 나서는 것이 허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잇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인 후에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인정받은 후에도 여전히 날마다 죄를 짓는 약한 자들이지만, 만약 그런 가운데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면,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자가 됩시다. 하나님은 진심어린 회개를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2) 성경을 왜곡 하는 자
3장 15절에는 갑자기 바울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 베드로의 편지가 쓰여졌을 무렵인 AD. 60년대에는 이미 바울의 편지는 초대 교회에 폭넓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사도 바울의 편지 중 어떤 편지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 구체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편지가 무엇이든 바울의 편지에서 재림이 반드시 오는 것, 그리고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것처럼 느겨지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한 명도 멸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도록 인내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3장 15,16절을 참조하십시오.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주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종말에 놓인 그리스도인의 절박함을 바울의 편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16절에서 바울의 편지가 성경의 다른 책과 동등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고자 합니다. 「성경, 그리스어로 γαφα」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즉 구약의 율법이나 구약의 예언서와 동등한 것으르서 바울의 편지가 각 교회에서 읽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사도 바울의 편지를 「무식한 자들이나 굳세지 못한 자들」이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베드로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무식한 자들」「굳세지 못한 자들」은 누구일까요? 거짓 선생으로 볼 수도 있지만 거짓 선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거짓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간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후서 2장 14절에서도 「굳세지 못한 영혼들」이라고 나오고 있는데, 거기서는 거짓 선생에 의해 유혹당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 속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다소 있음을 인정하지만 교회에서 그 편지가 성경과 동등한 것으로 인정되는 이상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인간에 의해 쓰여진 책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책이고, 진정한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식한 자들」「굳세지 못한 자들」은 그것을 마음대로 왜곡해서 전혀 정반대의 의미로 대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부분은 적혀 있지 않지만 많은 주해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는 바울의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구원 받는다」는 「신앙의인」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무법한 생활을 간과하여 마침내 무절제해지고 죄에 대해 대담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예를 들어 로마서 3장 7,8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즉,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나의 죄가 하나님의 의를 밝히는 것입니다. ‘내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면 더욱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절을 참조하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리스도인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지만 그러면 그 죄사함의 용서의 은혜가 더해지도록 계속해서 죄 속에 머물러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죄 용서의 은혜는 구원자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면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날마다 조금씩 변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흠 없고 점 없는 거룩한 분이시듯이 우리도 흠 없고 점 없는 거룩한 자로 변해가야 합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신앙의인」의 가르침을 결코 자기 마음대로 사는 방편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지만, 그 순간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속박되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7,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의 성장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서는 부도덕한 길로 끌고 가려는 거짓 선생들에게 우리는 속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베드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자라가라」라는 말은 현재 시제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라가라」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서점에 가면 자기개발을 위한 책들이 즐비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자람은 결코 자기개발의 종류가 아닙니다. 머리되신 예수님께 연합되어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자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첫째, 은혜를 통한 성장입니다. 위에서 은혜를 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교회생활을 통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지식에 의한 성장입니다. 이 지식 역시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 지식을 받을 수 없지만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축적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날마다 자라나야 할까요? 왜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성화를 이루어야 할까요?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일꾼에게 자기 재산에서 달란트 통화를 맡기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일꾼들은 충실하게 주인이 맡겨주신 달란트 통화를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장사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확대해야하는 의무가 일꾼들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조금 추상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포도원」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달란트가 맡겨진 일꾼은 「포도원」을 제대로 정비하고 더욱 확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맡겨진 달란트를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머지않아 여행지에서 주인이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맡겨진 달란트를 제대로 이용한 충실한 모습으로 발견되는 일꾼은 복된 자이지만 주인의 마음을 곡해하고 맡겨진 달란트를 이용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게으른 모습으로 발견되는 자는 불행한 자입니다. 그에게서 달란트는 몰수 되어 밖의 어둠 속으로 쫓겨나고, 거기서 울부짖으며 이를 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인 포도원에 열심히 비료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더 많은 묘목을 심는 것은 곧 주인이 여행지에서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이 오늘날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요? 주의 재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자라나야 하는 이유이며 그리스도인이 성화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은 만약 사후의 영원한 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즐기고 먹고 마시고 쾌락을 위해 지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후세계는 분명 존재하며, 곧 그리스도는 돌아오시고 이 세상에서 달란트를 맡기신 우리가 어떻게 지냈는지 청산할 날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깨어나 그 날을 대비해야 합니다.
결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희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눈을 뜨고 주의 재림을 열심히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최종적인 성화,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위로부터의 은혜와 지식으로 나날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윽고 주의 날이 오고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그때 우리는 바뀌고 영광을 받고 죽음은 승리에게 삼켜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序】
ペトロは「愛する人たち」と何度も呼びかけて、キリスト者の希望について語りつつ、この手紙を閉じようとしています。キリスト者の希望とは何か、それは3章全体で語られている、「主の再臨」でございます。人間的に考えるなら、遅延していると思われる主の再臨ですが、その日は必ず来るということを、ペトロは厳かに伝えています。その日とは、天と地が火で滅ぼされ、不信人な者たちが裁かれる日(7節)、「主の日」であります。その日、天は激しい音を立てながら消え失せ、自然界の諸要素は熱に熔け尽くされます(10節)。この恐ろしい審判の日が、なぜキリスト者にとって、希望の日となるのでしょうか。その理由は、審判は火による浄化が目的であり、万物を炉で練り清め、再創造し、新しい天と新しい地に回復させるということが目的だからです。その日、キリスト者の救いが完成し、新しい天と新しい地で、永遠に主と共に生きるようにされるからです。ですから、信者と未信者の違いとは、この主の再臨の希望を持っているのか、持っていないのか、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す。イエス様が弟子たちに教えられた「主の祈り」の中でも、「御国を来たらせたまえ」という祈りを教えてくださいました。私たちの週報にも印刷されていますね。「御国を来たらせたまえ」と祈りながら、キリスト者は主の再臨を熱心に待ち望む者たちなのです。その日を待ち望みながら、目を覚まして、備える者たちなのです。
【1】. きずや汚れが何一つない者として
3:14節をご覧ください。
“だから、愛する人たち、このことを待ち望みながら、きずや汚れが何一つなく、平和に過ごしていると神に認めていただけるように励みなさい。”
「きずや汚れが何一つなく」という言葉が出てまいります。この言葉は、少し前の、2:13(438ページ上)において、偽教師たちを描写するのに使われていました。「彼らは汚れやきずのようなもので、…」とあります。従って、私たちは神の前に「きずがない状態」、「汚れがない状態」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旧約聖書では、「傷がなく」、「汚れがない」という、この二つの言葉は、犠牲祭事を執り行う祭司に対して使用された言葉であり、また、犠牲の供え物として祭壇に献げられる家畜に対して使用された言葉でありました。きずや汚れが、何一つないとは、神に献げられるのに相応しい、神のものとされるのに相応しい、「神に取り分けられた聖なる状態」という意味です。もっと言えば、この言葉は、イエス様ご自身に対しても使われています。1ペトロ1:18-19をご覧ください。
“知ってのとおり、あなたがたが先祖伝来のむなしい生活から贖われたのは、金や銀のような朽ち果てるものにはよらず、きずや汚れのない小羊のようなキリストの尊い血によるのです。”
イエス様ご自身も、きずや汚れのない子羊のようだと言われています。神に供えられる生贄として十字架に掛けられました。それでは一体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が「きずや汚れが何一つない」者になる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裁かれて当然である私たちが、どのように、きずや汚れが何一つない者として、神と平和の関係に過ごす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ご存じのように、これは私たちの力、私たちの努力では、到底無理な話しでございます。救い主イエス様がこの世に来てくださり、私たちの代わりに十字架にかかられたために、イエス様にあってこのことが可能となるのです。罪人の私たちが救い主イエス様にすがり、この方に罪を告白することによって、私たちの罪は赦され、きれいにされ、きずや汚れが何一つない者とされ、神の御前に出ることが許されるのです。神と和解され、神との平和の関係を保つことができるのです。私たちはイエス様を受け入れた後でさえ、きずや汚れがない者と認められた後でさえ、なお、日々罪を犯してしまう弱い者たちでありますが、もしそのような中で自らの罪を示されたなら、その都度、御前に悔い改めるようにしましょう。そして、神様にきよめてくださいと、切に祈り求める者とさ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神様は真心からの悔い改めを受け入れてくださるからです。
【2】. 聖書を曲解する者
3:15節には、突然、パウロの名前が出てきます。このペトロの手紙が書かれた頃であるAD. 60年代には、既にパウロの手紙は初代教会に幅広く受け入れられていました。ただ、ペトロが使徒パウロの手紙の中の、どの手紙のことを指しているのかについては議論があり、具体的に確定するのは難しいようです。しかし、その手紙がどれであれ、パウロの手紙から、再臨が必ず来ること、そして、再臨が遅延しているように感じるのは、むしろ、神様が一人も滅びないで、すべての人が悔い改めるように忍耐しているということを、読み取る事ができると、ペトロは言っています。3:15~16節をご覧ください。
“また、わたしたちの主の忍耐深さを、救いと考えなさい。それは、わたしたちの愛する兄弟パウロが、神から授かった知恵に基づい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ことでもあります。彼は、どの手紙の中でもこのことについて述べています。その手紙には難しく理解しにくい個所があって、無学な人や心の定まらない人は、それを聖書のほかの部分と同様に曲解し、自分の滅びを招いています。”
主の再臨を待ち望みながら、終末に置かれているキリスト者の切迫感を、パウロの手紙からも読み取る事ができると言っています。ところで、ペトロは、16節で、パウロの手紙が聖書のほかの本と同等だということを暗示している点に、私たちは注目したいと思います。「聖書、ギリシア語でγραφή」というのは、旧約聖書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つまり、旧約の律法や、旧約の預言書と同等なものとして、パウロの手紙が各教会で読ま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聖霊の霊感によって書かれた使徒パウロの手紙を、「無学な人や心の定まらない人」は、自分勝手に曲解し、自分の滅びを招いているとペトロは警告しています。それでは、この「無学な人」「心の定まらない人」とは誰でしょうか。偽教師と見ることも可能ですが、むしろ偽教師というより、偽教師の教えに従って行った人々のことを指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なぜなら、「心の定まらない人」という言葉が2:14にも出てきていますが、そこでは、偽教師によって誘惑される人々のことを言っているからです。ペトロは、パウロの手紙の中に分かりにくい点が多少あることを、認めていますが、教会でその手紙が聖書と同等のものと認められている以上、霊感された神の御言葉として、細心の注意を払うべきだと注意喚起しているのです。聖書は、全て人間によって書かれた書物ではありますが、同時にそれは聖霊によって霊感された書物であり、本当の著者は聖霊なる神様だからです。ところが「無学な人」「心の定まらない人」は、それを勝手に曲解してしまい、全く正反対の意味に代え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具体的なところは書かれていませんが、多くの注解者が口を揃えて言うは、パウロの「信仰義認」の教えを歪曲したということ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です。「善い行いではなく、ただ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この信仰義認の教えを歪曲し、自分たちの無法な生活を看過し、いよいよ無節操になり、開き直った生き方をしていると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例えば、ローマ書の3:7~8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
“またもし、わたしの偽りによって神の真実がいっそう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のであれば、なぜ、わたしはなおも罪人として裁かれねばならないのでしょう。それに、もしそうであれば、「善が生じるために悪をしよう」とも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わたしたちがこう主張していると中傷する人々がいますが、こういう者たちが罰を受けるのは当然です。”
つまり、人間的に考えるなら、私の罪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ことになります。「私の罪を通して神の栄光が現わされるなら、そうならば、なお、罪深い生活を続けるべきだ!それが、神の栄光を現すことだから。」と考えてしまうのです。しかしそうではな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同じくローマ書6:1をご覧ください。
“では、どういうことになるのか。恵みが増すようにと、罪の中にとどまるべきだろうか。”
キリスト者は、一方的な神の恵みによって罪が赦されますが、それではその恵みが増し加えられるように、罪の中になお、留まるべきなのでしょう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パウロが言うには、罪の赦しの恵みは、救い主キリストに結ばれて、私たちに与えられるのですが、キリストに結ばれるなら、キリストの似姿に日々少しずつ変えられていくべきだということです。キリストが、きずも汚れもない、聖なるお方であるように、私たちも、きずも汚れもない聖なる者に変えられていくべきであります。「行いではなく、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という、信仰義認の教えを、決して自分の好き勝手に生きる方便にしてはなりません。私たちは罪の奴隷から解放されましたが、その瞬間、キリストのくびきに取り換えられたのです。キリストに結ばれて、キリストを主人として、キリストに仕えて生きていく者たちであります。最後に17~18節をご覧ください。
【3】. キリストの恵みと知識における成長
“それで、愛する人たち、あなたがたはこのことを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のですから、不道徳な者たちに唆されて、堅固な足場を失わないように注意しなさい。わたしたちの主、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と知識において、成長しなさい。このイエス・キリストに、今も、また永遠に栄光が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様々な理屈をつけては、不道徳な道に引きずり込もうとする偽教師たちに、私たちは騙されないように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ためにペトロは「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と知識において、成長しなさい」という言葉を最後に残しています。「成長しなさい」という言葉は、現在時制で書かれていますから、「成長し続けなさい」と訳すこともできます。本屋さんに行けば自己啓発のための本がずらっと並んでいますが、キリスト者の成長は、決して自己啓発の類ではありません。頭なるキリストに結ばれて、神の力によって成長していくことです。言い換えれば、聖化していくということです。キリスト者の成長は、第一に、恵みによる成長です。上から恵みを受けることから始まります。教会生活を通して、互いに愛し合い、互いに仕えあうことによって、神の恵みを受け取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第二に、知識による成長です。この知識もやはり神から受け取るものです。信仰がなければ、この知識を受け取ることはできませんが、信仰によって神の御言葉を聞くときに、真理の御言葉として、神についての知識が蓄積され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それでは、なぜ私たちは日々、成長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ょうか。なぜ私たちは日々、聖化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ょうか。福音書には次のようなたとえが出てきます。主人が僕たちに自分の財産から、タラントン通貨を預けて旅に出ました。僕たちは、忠実に主人から預けられたタラントン通貨を用い、神の国のために商売をいたします。神の国をさらに拡大する任務が僕に与えられたのです。「神の国」というのは少し抽象的ですから、例えば、「ぶどう園」として考えてください。この、神様から委ねられたぶどう園をきちんと整備し、さらに拡大していくために、預けられたタラントンを最大限に用いるべきです。やがて、旅行先から主人が帰ってこられることでしょう。その時に預けられたタラントンをきちんと用いた忠実な姿として見いだされる僕は幸いな僕ですが、主人の御心を曲解し、預けられたタラントンを用いず、開き直って、怠け者の姿として見いだされる僕は不幸な僕です。彼からタラントンは没収され、外の暗闇に追い出され、そこで泣きわめいて歯ぎしりすることになるからです。僕たちが神の国である、ぶどう園に対し、一生懸命、肥料をまいたり、雑草を取り除いたり、さらに多くの苗木を植えることは、やがて主人が旅行先から帰ってくることを知っているからです。同じことが今日、主の再臨を待ち望むキリスト者にも当てはま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主の再臨こそ、キリスト者が成長する理由であり、キリスト者が聖化する理由なのです。人はもし、死後の永遠の世界に目を向けないなら、今、生きているこの世を楽しみ、食べて、飲んで、快楽のために過ごすことは当然のことでしょう。しかし、死後の世界は確かに存在し、やがてキリストは帰って来られ、この世でタラントンを預けられた僕たちが、どのように過ごしたのか、清算する日が必ず来るのであります。だからこそ、キリスト者は目を覚まし、その日に備え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結論】
キリスト者の究極的な希望は、キリストの再臨にあります。キリスト者は、目を覚まして、主の再臨を熱心に待ち望む者たちです。私たちはこの世において、最終的な聖化、最終的な完成には至ることはありませんが、上からの恵みと知識において、日々キリストの似姿へと成長していくべきであります。やがて主の日が来て、最後のラッパの鳴る時に、その時に私たちは変えられ、栄光に与り、死は勝利に飲み込まれ、神の国が完成するからであり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