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깨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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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4章37節~51節
37人の子が来るのは、ノアの時と同じだからである。
38洪水になる前は、ノアが箱舟に入るその日まで、人々は食べたり飲んだり、めとったり嫁いだりしていた。
39そして、洪水が襲って来て一人残らずさらうまで、何も気がつかなかった。人の子が来る場合も、このようである。
40そのとき、畑に二人の男がいれば、一人は連れて行かれ、もう一人は残される。
41二人の女が臼をひいていれば、一人は連れて行かれ、もう一人は残される。
42だ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いつの日、自分の主が帰って来られるのか、あなたがたには分からないからである。
43このことをわきまえていなさい。家の主人は、泥棒が夜のいつごろやって来るかを知っていたら、目を覚ましていて、みすみす自分の家に押し入らせはしないだろう。
44だから、あなたがたも用意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からである。」
45「主人がその家の使用人たちの上に立てて、時間どおり彼らに食事を与えさせることにした忠実で賢い僕は、いったいだれであろうか。
46主人が帰って来たとき、言われたとおりにしているのを見られる僕は幸いである。
47はっきり言っておくが、主人は彼に全財産を管理させるにちがいない。
48しかし、それが悪い僕で、主人は遅いと思い、
49仲間を殴り始め、酒飲みどもと一緒に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いるとする。
50もしそうなら、その僕の主人は予想しない日、思いがけない時に帰って来て、
51彼を厳しく罰し、偽善者たちと同じ目に遭わせる。そこで泣きわめいて歯ぎしりするだろう。」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4章37節~51節
깨어 있으라
2019년 3월10일 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마태복음 24장 37절~51절
성경에는「깨어 있으라」는 권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가 왜 깨어 있어야 하느냐 하면, 종말이 곧 임박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종말은 언제일까요? 시간에 대해서는 36절에도 기록된 대로,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를 들어 오늘 본문처럼, 종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올 것이라고, 48절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면, 이번에는 반대로, 25장의 열 처녀 비유에서는, 종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늦어지기 때문에 무심코 잠들어 버리는 사람도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재림의 사실 그 자체는 강조되고 있지만, 재림의 시간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 「깨어 있으라」는 권면의 말씀은 복음서 이외의 곳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예를 들어 바울 서신에 두 번, 요한계시록에 두 번, 베드로 서신에 한 번 나옵니다. 그중 두 곳만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전서 5장
8 근신하라 개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요한계시록 16:15절을 보세요.
요한계시록 16장
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인자의 재림이 「노아의 방주」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을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경험한 우리는, 혹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과 유황의 심판을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경험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지구 환경 가운데서, 즐거운 지상 생활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역사를 배움으로써, 장차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37-39절로 돌아가 봅시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노아의 방주 때는 어땠을까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었습니다. 즉, 현재의 이 즐겁고 유쾌한 삶이 천 년, 만 년, 영원히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의 문이 닫힌 바로 그날,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어 40일동안 밤낮으로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폭우와 대홍수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지상의 평안과 그 즐거움을 누리면서, 홍수가 닥쳐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휩쓸려 갈 때까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의 전조는 전혀 없었던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약 100년에 걸쳐 거대한 방주를 짓는 것을, 그들은 매일 확실히 눈으로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영의 눈은 잠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곧 홍수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 온갖 종류의 동물을 수컷과 암컷, 한 쌍씩 방주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일, 즉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도 바로 이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40-41절을 보십시오.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은 소집되어 하늘로 올려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을 받아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반면, 버림받은 자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어떻게 내려질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적으로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계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 복된 하늘의 안식에 영접되셨기 때문입니다. 왕 중의 왕, 주 중의 주로서 하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멍에에 매여 이 세상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 때문이며, 실제로 예수님 자신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가셔서 우리를 위해, 영원한 안식의 장소를 예비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가벼운 여행자의 모습으로, 하늘에 있는 참 성소로 순례하는 여행자로서, 예수님의 곁으로 가기 위해, 순례하는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즉 천국 이외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곳에서도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거나 그곳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식은 하늘에 있고, 예수님의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42-46절을 보면,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2절의「깨어 있으라」는 권면은 44절에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두 종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 두 종은 모두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는지, 주인으로부터 어떤 일을 맡았습니다. 즉,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 일입니다. 중간 관리직과 같은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준비한다」는 것은, 주인으로부터 맡겨진 일을 「충실히 지키고 행하는」 종이며, 「언제 주인이 돌아오더라도 주인을 기쁘게 하도록」 준비하고 있는 종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개를 키워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키워본 적이 없지만, 개는 언제나 주인의 귀가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죠. 그러니 집 주인이 귀가해서 그런 충실한 개를 보면 정말 안도하고 기뻐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경우에도 다시 돌아오셨을 때 종의 충실한 모습을 보실 수 있다면, 그 기쁨은 매우 클 것이며, 예수님 스스로가 오히려 우리를 섬기시며, 발을 씻겨 주시거나, 주님의 식탁을 차려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복이 있는 종」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주인의 전 재산을 종에게 상속시켜, 그것을 관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한편, 악한 종은 어떨까요? 48-49절을 보십시오.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제멋대로 짐작하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기는 커녕,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더니, 술친구들을 불러 마치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인 양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종은, 똑같이 능력이 있고 리더십이 있으며, 겉으로만 보면 전혀 똑같이 보이지만, 왜 한쪽은 충실한 종이 되고 다른 한쪽은 악한 종이 되었을까요? 그 차이는 아마도 주인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충실한 종이 주인의 귀가를 준비하고, 시킨 일을 확실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주인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진심으로 기대하며, 끈기 있게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악한 종은 자신의 이익만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맡겨진 재산이나 하인들의 수에만 관심이 쏠려버렸고, 주인에 대한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고, 돌아오실 것을 기대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주인이 가능하다면 이대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마음 한구석에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악한 종은, 당시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사나 장로, 임원들은 이 비유를 자신에게 깊이 적용하여 겸손해져야 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따위는 전혀 없었고, 위선자처럼 겉모습만 꾸미면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성전, 하나님께서 맡기신 제사 의식, 문자 그대로의 율법, 그런 것들만을 꽉 움켜쥐고, 본래 해야 할 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 일을 소홀히 해버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옷자락의 술을 길게 하거나, 큰길의 사거리에서 기도를 드리거나, 백성의 성전세를 자신들의 개인적인 수입으로 삼거나,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자신들이 먹을 것으로 빼앗거나, 이방인의 뜰에 환전상을 운영할 장소를 알선하고 그 대가로 장소비를 받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성전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내면적으로는 수많은 죄를 저질러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결말은 50-51절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여러분, 우리 교회의 결혼하신 분들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잠시 여기서 신혼 시절을 떠올려 보세요. 아내가 집에서 남편이 퇴근해 오기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남편을 생각하며, 남편이 집에 오기 전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저녁 식사를 준비합니다.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요리라도 도전해 봅니다.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모를 때는 친정에 전화를 걸어 「엄마, 이 요리는 어떻게 만들어요?」라고 물어보기도 하겠죠. 어쨌든 남편이 집에 오면 정신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아내는 전혀 피곤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준비하고 마련해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가짐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깨어 있고, 준비하며 계속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종에게 있어, 주님의 날,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조금도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기대하며, 「마라나타, 주여 오소서!」라고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직 전도를 다 하지 못했으니 아직 오지 말아 주세요」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안식에 집착하여 잠들어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신자에게 있어 예수님을 뵙는 날인데, 어찌 두려워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은 확실히 슬픈 일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깨어 있는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종은, 이 땅에서 생을 다하는 그날을 감사함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날이 오늘이라 할지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개인적인 종말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준비해야 할 것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적용해 보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 각자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를 맡겨 주셨습니다. 첫째로 건강을 들 수 있겠지요. 주님께서 주시고 주님께로부터 맡겨진 건강을 「때를 따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건강을 통해, 형제자매들에게 섬겨야 합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적극적으로 교회 모임에 함께 모여,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교제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의 봉사로 뒷받침되는 것입니다. 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를 따라,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헌금입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것은 깨어 있는 것,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은사와 재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때를 따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세이며,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준비입니다.
우리는 오직 자기 일에만 몰두하여,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며 잠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매일 깨어 준비하며,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종으로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합시다.
聖書の中には「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勧めが、何度も出てきます。なぜ私たちが目を覚まし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言いますと、終末が間もなく差し迫っているからです。それでは、その終末とはいつなのでしょうか。時間については、36節にも書いてある通り、聖書は沈黙しています。これは例えば、本日の箇所のように、終末は私たちが考えているより、ずっと早く来ると48節で、イエスさまは譬えの中で語っています。しかしそうかと思えば、今度は反対に、25章の十人のおとめの譬えでは、終末は私たちが考えているより、ずっと遅くなるために思わず眠りこけてしまう者も出るとあります。結局、再臨の事実そのものは強調されていますが、再臨の時間については、聖書は沈黙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時間が明らかにされていないからこそ、キリスト者はいつでも目を覚ましている必要があるのです。
因みに、この「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勧めの言葉は、福音書以外に目を転じても、例えばパウロ書簡に二回、ヨハネの黙示録に二回、ペトロの手紙に一回、出てきます。その中で二か所だけ調べてみましょう。1ペトロ5:8をご覧ください。(p434)
身を慎んで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ほ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またヨハネの黙示録16:15をご覧ください。(p471)
―見よ、わたしは盗人のように来る。裸で歩くのを見られて恥をかかないように、目を覚まし、衣を身に着けている人は幸いである。―
イエスさまは「目を覚まし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として、人の子の再臨が「ノアの箱舟」の時と同じようだからだと言います。ノアの箱舟の事件を過去の歴史事件として経験している私たちは、或いはソドムとゴモラの火の硫黄の審判を過去の歴史事件として経験している私たちは、永遠に、この美しい地球環境に守られた、楽しい地上の生活が続くと考えてはなりません。過去の歴史を学ぶことによって、将来、必ず神の審判の日があることを悟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マタイ24章37-39に戻りましょう。
人の子が来るのは、ノアの時と同じだからである。
洪水になる前は、ノアが箱舟に入るその日まで、人々は食べたり飲んだり、めとったり嫁いだりしていた。
そして、洪水が襲って来て一人残らずさらうまで、何も気がつかなかった。人の子が来る場合も、このようである。
ノアの箱舟の時は、どうだったでしょうか。ノアが箱舟に入るその瞬間まで人々は食べたり、飲んだり、娶ったり、嫁いだりしていました。つまり、現在のこの楽しくて、愉快な生活が千年、万年と永遠に変わらずに続くだろうと信じていたのです。しかし、箱舟の扉が閉じられたその日に、神の審判が始まり40日40夜の大雨と大洪水が起きました。彼らは、地上における安寧とその楽しみを享受しながら、洪水が襲って来て、一人残らずさらわれるまで、何も気づかなか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それでは、神の審判の前兆は、全く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いいえ、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ノアが約100年かけて巨大な箱舟を作り上げるのを彼らは日々、確かに目にしながらも、何も感じないで霊の目は眠りこけ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ノアがまもなく洪水が起こるために、あらゆる種類の動物を雄と雌、つがいにして箱舟の中に入れているのを確かに目撃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相変わらず彼らはそれが何を意味するのか悟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ひたすら自分たちの事だけに、食べたり、飲んだり、娶ったり、嫁いだりすることだけに明け暮れていたのです。イエスさまが再び来られる日もまさにこれと同じよう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40-41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のとき、畑に二人の男がいれば、一人は連れて行かれ、もう一人は残される。
二人の女が臼をひいていれば、一人は連れて行かれ、もう一人は残される。
ラッパの号令と共に天使によって、神の民は召集され引き上げられます。神の民は救われて、そして天のイエスさまのもとへ導かれるのです。一方で、捨て置かれた者たちは、神の恐ろしい審判がどのように下ってくるのかそこで待っている人々です。
このように神の御子が、私たちから離れておられるのは、イエスさまが復活された後、あの幸いな天の安息に迎え入れられたからです。王の王、主の主として天の父の右の座にお座りになりました。ですから私たちが日々イエスさまと共に、イエスさまの頸木に結ばれて、この世を歩むことができるのは、聖霊の働きによるのであって、実際イエスさま御自身は、私たちから遠く離れておられるのです。それは先に行って、私たちのために永遠の安息の場所を備えてくださるためな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この世にあっては、袋ももたず、二枚目の下着ももたず、履物も杖も一つしか持たないで、身軽な旅人の状態で、天にある真の至聖所に巡礼する旅人として、イエス様の身元に巡礼するものとして生きていくのです。つまり天国以外に、この世のどのような場所にも、安息できる場所を探し求め、そこに執着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の安息は天にあり、イエスさまの御許にあるからです。それでは、目を覚ますとは一体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42-46節を見ると、そのことが具体的に説明されています。ご覧ください。
だ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いつの日、自分の主が帰って来られるのか、あなたがたには分からないからである。
このことをわきまえていなさい。家の主人は、泥棒が夜のいつごろやって来るかを知っていたら、目を覚ましていて、みすみす自分の家に押し入らせはしないだろう。
だから、あなたがたも用意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からである。」
「主人がその家の使用人たちの上に立てて、時間どおり彼らに食事を与えさせることにした忠実で賢い僕は、いったいだれであろうか。
主人が帰って来たとき、言われたとおりにしているのを見られる僕は幸いである。
42節の「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勧めの言葉は、44節で「用意していなさい」という言葉に言い換えられているのが分かります。イエスさまは比喩として二人の僕について話されますが、この僕たちは二人ともリーダーシップがあったのでしょうか、主人からある仕事を委ねられました。つまり、「時間通りに使用人たちに食事を与えさせる」仕事です。中間管理職のような立場です。ですから、用意するというのは、主人から委ねられた仕事を「忠実に守り行う」僕であり、「いつ主人が帰って来ても、主人に喜ばれるように」、用意している僕のことです。皆さんは犬を飼ったことがありますでしょうか。私は飼ったことがありませんが、犬は何時でも主人の帰りを期待しながら待っていますね。ですから家の主人が帰宅して、そのような忠実な犬を見ると本当に安堵し、うれしくなると思います。同じように、イエスさまの場合も、再び戻って来られた時に僕の忠実な姿を見ることが出来たなら、その喜びは大変大きく、イエスさまご自身が、逆に僕たちに仕え、足を洗ってくれたり、主の食卓を調えてくださるに違いありません。そして神さまは、この「幸いな僕」に対し、さらに大きなものを任せることでしょう。主人の全財産を僕に相続させて、それを管理させるようになるのです。一方、悪い僕はどうでしょうか。48-49節をご覧ください。
しかし、それが悪い僕で、主人は遅いと思い、
仲間を殴り始め、酒飲みどもと一緒に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いるとする。
悪い僕とは、主人の帰宅は遅いと勝手に思い込み、食事を与えるどころか、使用人を殴り始め、酒飲みどもを呼んで、あたかも自分がこの家の主人であるかのように、彼らと一緒に食べたり飲んだりし始めました。
この二人の僕は、同じように能力があり、リーダーシップがあり、表面だけ見たら全く同じように見えるのですが、なぜ、一方は、忠実な僕となり、そして一方は悪い僕となったのでしょうか。その差は、恐らく主人に対する愛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つまり忠実な僕が主人の帰りを用意して、言い付けをしっかり守ることができたのは、主人を愛するが故であったからでしょう。イエスさまを愛しているので、イエスさまの再臨を心から期待しながら、粘り強く待ち続け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悪い僕は、自分の利益しか考えていなかったために、自分に任せられた財産や、使用人たちの人数だけに関心が行ってしまい、主人に対する愛はありませんでした。そして、主人の顔も見たくないし、帰ってくることを期待もしないし、むしろ、主人ができれば、このまま帰って来なければいいと、心のどこかで思っていたのでしょう。
この比喩に出て来る悪い僕とは、当時のユダヤの宗教指導者たちであったと考えられます。ですから教会の牧師や長老、役員はよくよく自分自身に適用してへりくだ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ユダヤの宗教指導者は神に対する愛など一切なく、偽善者のように表面だけ繕いながら、神さまから委ねられた神殿、神さまから委ねられた祭りの儀式、文字面だけの律法、そのようなものだけを握りしめて、本来しなければならない、イスラエルの民に「時間通りに使用人たちに食事を与えさせる」事を怠ってしまったのです。例えば、着物の房を長くしたり、大通りの四辻で祈祷を捧げたり、民の神殿税を自分たちの個人的な収入としたり、生贄として捧げられた生贄の肉を自分たちが食べる物として奪い取ったり、異邦人の庭に両替商を営む場所を斡旋し、その見返りに場所代を受け取ったりしました。表向きは神殿を守っているように見せかけて、内面においてたくさんの罪を犯してきたのです。ですから彼らのゆくすえはとは、50-51節に書かれている通りです。
その僕の主人は予想しない日、思いがけない時に帰って来て、
彼を厳しく罰し、偽善者たちと同じ目に遭わせる。そこで泣きわめいて歯ぎしりするだろう。」
みなさん、私たちはご結婚をされて、もうずいぶんと時間が経ちますね。ちょっとここで新婚当時のことを思い出してみてください。夫が仕事から帰ってくるのを妻は家でワクワクしながら待っています。一日中、夫のことを考えながら、夫が帰宅する前に大好物の夕食を準備します。作ったことのない料理でも挑戦します。どうやって料理するのか分からない時は、実家に電話しながら「お母さんこの料理の作り方はどうするの」と聞くことでしょう。とにかく夫が帰宅するのに合わせてパニックになります。でも妻は一切疲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それは、夫を愛しているからです。愛しているからこそ、準備し、用意しても疲れることがないのです。この心持ちこそ、イエスさまの来られるのを待ち望む新婦の心だと思います。イエスさまを愛しているなら、目を覚まし、用意して待ち続け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ですから、この忠実な賢い僕にとって、主の日が、イエスさまの再臨される日が、少しも怖いことではありません。心の底から期待しつつ、「マラナタ、主よ来たりませ!」と真実に祈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神さま、まだ伝道が出来ていないので、まだ来ないでくださいと心の中で思っている人は、実はこの世が与える楽しみと、安息に固執して眠りこけ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死は信者にとって、イエスさまに遭いまみえる日なのに、どうして恐れる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死は確かに悲しいものでありますが、必要以上に恐れるのは、私たちの側にイエスさまとお会いする用意ができていないからかもしれません。目を覚ましている忠実で賢い僕は、この地上において生を全うするその日を、感謝をもってお迎え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まさにその日が今日であっても、喜んで受け入れ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これがイエスさまを愛する者たちの個人的終末論です。
それでは、イエスさまを愛する者が用意することとして、ユダヤの宗教指導者に適用しましたが、これを私たちに一人ひとりに適用するならどうなるでしょうか。イエスさまは私たちにも、色々なものを任せてくださいました。第一に健康が挙げられるでしょう。主から与えられ、主に任せられた健康を「時に適って分かち合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健康を通して兄弟姉妹に仕えるべきです。時間もそうです。積極的に教会の集会に共に集まり、聖徒と共に祈り、共に交わ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信仰とは、知識ではなく、愛の奉仕によって裏打ちされるものです。財産もそうです。時に適って、お金が必要な人に財産を分かち合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が献金です。私たちが献金するのは、目を覚ましていること、主の日を用意することなのです。賜物や才能もそうです。主から与えられた賜物や才能を、時に適って必要な人々に分かち合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こそ、私たちが主を愛する姿勢であり、イエスさまの再臨を待ち望む準備なのです。
私たちは、自分たちの事だけに没頭して、食べたり、飲んだり、娶ったり、嫁いだりしながら眠りこけていてはなりません。この世にあっては旅人として、私たちはイエスさまを愛し、毎日目を覚まし、準備している、忠実な賢い僕として主の再臨を待ち望み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