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キリスト・イエスを誇る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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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 3章3節~11節
3:3彼らではなく、わたしたちこそ真の割礼を受けた者です。わたしたちは神の霊によって礼拝し、キリスト・イエスを誇りとし、肉に頼らないからです。
3:4とはいえ、肉にも頼ろうと思えば、わたしは頼れなくはない。だれかほかに、肉に頼れると思う人がいるなら、わたしはなおさらのことです。
3:5わたし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の民に属し、ベニヤミン族の出身で、ヘブライ人の中のヘブライ人です。律法に関してはファリサイ派の一員、
3:6熱心さの点では教会の迫害者、律法の義については非のうちどころのない者でした。
3:7しかし、わたしにとって有利であったこれらのことを、キリストのゆえに損失と見なすようになったのです。
3:8そればかりか、わたしの主キリスト・イエスを知ることのあまりのすばらしさに、今では他の一切を損失とみています。キリストのゆえに、わたしはすべてを失いましたが、それらを塵あくたと見なしています。キリストを得、
3:9キリストの内にいる者と認められるためです。わたしには、律法から生じる自分の義ではなく、キリストへの信仰による義、信仰に基づいて神から与えられる義があります。
3:10わたしは、キリストとその復活の力とを知り、その苦しみにあずかって、その死の姿にあやかりながら、
3:11何とかして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達したいので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 3章3節~11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빌립보서 3장 4-11절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우리들은 지금, 4월 9일의 부활절을 앞두고 수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우리들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쫓아 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우리들은 주일마다 빌립보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오늘의 구절에서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와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를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은 보디빌더처럼 멋진 육체를 자랑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육체를 신뢰하는 자」라는 것은 할례를 권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신뢰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을 자랑하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태어나면서 부터 속한 가문, 혈통,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얻은 업적 등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한층 더 말하자면 「육체를 신뢰한다」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이며 세상적으로도 당연히 가치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을 의지한다라는 것이겠지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랑한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은 육체를 신뢰하는 것의 정반대이며 그것은 상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보여지지 않는 것」이며, 「세상적으로는 숨겨져 있는 것」,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 하는 단어를 「믿음」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만 오늘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자랑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분이 나에게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개인적으로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은 빌립보서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얻으려고 합니다.
(1) 바울이 육체를 신뢰 할 경우에는
바울은 이전의 자신은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육체를 신뢰하는 삶의 방식은 필연적으로 율법주의로 흘러가게 됩니다만 그 일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이전에 바울이 의지한 육체란 무엇인가하면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자신의 과거입니다. 그것은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견주어 보아도 조금도 열등한 점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생후 8일째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인생의 도중에 유대교로 개종하고 할레를 받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태어나 율법에 따라 8일째에 할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에 속해」란 의미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하나님이 직접 왕으로써 다스리는 「하나님의 백성」, 「선민」을 의미합니다. 「베냐민 출신」이란 이스라엘 12부족 중에서 특히 바빌론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귀환한 백성이 유다와 베냐민의 2 부족이었습니다. 반대로 나머지 10부족은 이방인과 혼혈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베냐민족에서 나온 유명인으로서 에스더기에 나오는 모르드개를 들 수 있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왕도 베냐민족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의 원래 이름도 사울이었는데 이 사울 왕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베냐민 부족에 대해 매우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표현은 확실히는 알수 없지만 아마도 유대인 가운데서도 그리스어밖에 할 줄 모르는 유대인과 히브리어도 말 할 수 있는 유대인이 있었고 히브리어를 말할 수 있는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생각됩니다. 사도행전6 장1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조하십시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이처럼 당시 히브리어를 할 수 있는 유대인이 우위적인 입장에 있어 그리스어를 말하는 유대인을 차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어를 말 할 수 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이처럼 태생적으로 갖춰진 조건 외에도 바울의 평생에서 얻은 업적도 열거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관해서는 바리새파의 일원이었고 열정적인 점에서는 교회의 박해자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에 대해서는 나무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4절에는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라고 쓰여져 있고 사도행전에는 위대한 바리새파 사람인 가말리엘 밑에서 지도를 받았다고도 적혀 있습니다. 이처럼 출세코스를 확실히 밟아온 바울의 경력은 유대주의자들이 봐도 부러울 정도로 완전한, 육체를 신뢰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래 완전히 견해가 바뀌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로부터 탈락자, 배신자라고 매도될 정도로 가치관이 완전히 반대로 변한 것입니다.
(2) 예수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유리한 것으로 생각된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가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났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침몰의 위기에 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배의 짐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배를 가볍게 해서 어떻게든 침몰을 피하려고 하겠지요. 배는 그리스도이고 짐은 바울이 지금까지 신뢰해왔던 육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전에는 유리하다고 생각된 것을 지금은 열심히 그것을 던져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 배설물이라고 하는 말을 그리스어로 조사해보면 「대변」이라든가 「잔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화장실에 가서 대변을 보면 후련하지요. 대변은 체내에 없는 편이 좋고 배출해야 깔끔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유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하고 훌륭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주님이시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라는 표현입니다만 그저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그리스도/예수」라
고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하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 바울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아가면서 느꼈던 놀라움과 솟구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여기에는 바울의 개인적인 신앙체험이 적혀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전까지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그 변화는 결국 「자신의 의」와 「육에 의한 의」로서는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 육에 의한 의로는 마지막 심판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죄 많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육에 의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하나님의 의」라는 겉옷을 입혀 주셔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진리에 의한 의」, 「그리스도의 진실에 근거한 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의 믿음 자체가 의로운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깊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뜨겁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행위에 의해 의로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로의 공로로 인해 의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일뿐입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 받는 것,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즉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께 달려 있습니다. 온전히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성경에서 예수님은 보화로 비유되지만 우리들은 보통 이 보화의 가치에 대해서 눈을 뜨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 보화의 가치가 눈에는 보이지 않고 이 세상에게는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막대한 가치를 지닌 보화를 돌 처럼 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 보화의 가치를 완전히 깨닫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매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에서 이 보화의 가치에 대해 인식이 새롭게 되어 예수님을 이전보다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자신의 의와 육체를 신뢰하는 자부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을 참조하여 주십시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밭에 보화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바로 바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유리하게 보였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서 보화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놀라움에 바울은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고난
바울은 그런 그리스도를 더욱 알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조금 의외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마침 수난절의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방법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종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요.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만약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에 우리도 비슷한 취급을 이 세상에서 받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면 신뢰할수록 주위와의 마찰과 갈등을 느끼고, 이 세상에서 고난과 불합리한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난과 어려움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의 「참여하다」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코이노니아」라는 말이며 「교제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를 위해 고난을 받거나 불합리한 취급을 받는다면 바로 그 때 그리스도와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가 더욱 구축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보화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고 부활의 능력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합니다만 이것은 물론 바울이 최종적으로 자신이 영광의 상태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이 마지막 날까지 그 역사를 완전히 성취하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승리는 확정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이르는 행보, 마지막에 도달할 행보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며 그 길은 「가시밭 길로 들어가는 길」이며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서 전투하는 교회로서 분투하고 노력할 필요가 있는 길인 것입니다.
(4) 결론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과 육체를 신뢰하는 것은 정반대이며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에 있는 어떠한 자랑도, 출신 배경이나 지위도 자신이 이룬 어떠한 업적이나 선한 행위도 마지막에 있을 활활 타오르는 불의 심판을 견딜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피난처 되시며 그리스도야 말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우리의 삶에서 직면하는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 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보화를 얻는 것이며 그 보화의 가치를 매일 개인적으로 재발견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자랑한다는 것은 「좁은 길」, 「가시밭 길」을 걷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더욱 깊게 해 나가는 길이기도 하고 확실한 부활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모든 것을 온전히 의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으로서 걸어가십시다.
【序】
私たちは今、4/9の復活祭に向けて受難節を過ごしています。お一人お一人がキリストの十字架の御苦しみ思い、私たちも自分の十字架を背負い、キリストの御足に従って行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お祈りいたします。私たちは主日ごとにフィリピ書の御言葉に耳を傾けておりますが、本日の箇所で、パウロは肉を誇る者と、キリストを誇る者を並立させています。肉を誇るとは、ボディービルダーのように、美しい身体を誇る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肉を誇る者」とは、割礼を勧めるユダヤ主義者たち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そして「肉を誇る」とは、人間的なものを誇り、依り頼むということです。例えば、生まれ持って与えられている家柄、血統、社会の中で自分の得た業績などに依り頼むということです。さらに言うと、「肉を誇る」とは常識的であって、世間一般においても当然価値あるものと見做されているものを頼みとする、ということでしょう。それとは対照的に、パウロは、「キリストを誇る」という言葉を使っています。キリストを誇るとは、肉を誇ることの正反対であり、それは常識的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形のないものであり、世間一般には隠されているもの、価値のないものと見做されています。この「キリストを誇る」という言葉を、「信仰」という一言で片づけてしまうことも出来ますが、本日の箇所でパウロが言うには、「キリストを誇る」とは、まずそのためにキリストというお方が、私にとってどのような方なのか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そして、キリストとの個人的な関係が重要であると言っているようであります。キリスト者の営みとは、主イエス・キリストのことをさらに個人的に深く知っていく営みなのです。本日も私たちは、フィリピの御言葉から恵みに与っ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1】. パウロが肉に頼る場合
パウロは最初に、以前の自分が、肉に頼る者であったことを告白しています。因みに肉に頼る生き方というのは、必然的に律法主義に陥って行きますが、そのことは先週お話し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以前、パウロが頼った「肉」とは何かと言えば、エリートコースを歩んだ自らの過去のことであります。それは割礼を誇るユダヤ主義者たちに、少しも劣るところがないということを示しています。
パウロ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ました。人生の途中で、ユダヤ教に改宗し、割礼を受けたのではなく、ユダヤ人として生まれ、律法に則っ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たと言うのです。また、「イスラエルの民に属し」とは、神と契約を結び、神様が直接、王として治める選民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ベニヤミンの出身」とは、イスラエル12部族の中で、特にバビロン捕囚からイスラエルに帰還した民が、ユダとベニヤミンの二部族でした。逆に言えば、残りの10部族は、異邦人と混血してしまった可能性が高いと思われています。ベニヤミン族から出た有名人として、エステル記に出て来るモルデカイが挙げられますし、イスラエルの初代の王であるサウル王もベニヤミン族でありました。パウロ自身の本当の名前であるサウロは、このサウル王に由来しています。ですからパウロは、ベニヤミン族に対し、とても強い誇りを持っていました。「ヘブライ人の中のヘブライ人」というのは、はっきりとは分かりませんが、恐らくユダヤ人の中でもギリシア語しか話すことのできないユダヤ人と、ヘブライ語を話すことのできるユダヤ人いまして、ヘブライ語を話すことができるユダヤ人のことを言っていると思われます。使徒言行録6:1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あります。そのままお聞きください。
そのころ、弟子の数が増えてきて、ギリシア語を話すユダヤ人から、ヘブライ語を話すユダヤ人に対して苦情が出た。それは、日々の分配のことで、仲間のやもめたちが軽んじられていたからである。
このように当時、ヘブライ語を話すことのできるユダヤ人が、優位な立場にあり、ギリシア語を話すユダヤ人を差別していたというのです。パウロは、ヘブライ語を話すことができるユダヤ人でした。
このような、持って生まれた条件に加えて、パウロの生涯の中で得た業績も数え挙げています。律法に関してはファリサイ派の一員であり、熱心さの点では教会の迫害者でありました。そして律法の義については非のうちどころのない者でした。ガラテヤ書には、「多くの同胞よりもユダヤ教に精進し、先祖の伝承に対しては極めて熱心(1:14)」であ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し、使徒言行録には、偉大なファリサイ人であるガマリエルの下で指導を受けたとも書かれています。このように出世コースまっしぐらパウロの経歴は、ユダヤ主義者たちから見ても、それは羨むほどの完全な「肉の誇り」であったことでしょう。しかし、パウロが復活の主と出会って以来、完全に見方が変わってしまいました。ファリサイ派の人々からは「脱落者」、「裏切り者」と罵られるほどに、価値観が完全にひっくり返ってしまいました。
【2】. イエスを知ることのすばらしのゆえに
パウロにとって、これまで有利であったと思われた全てのものが「損失」と見做すようになり、「塵あくた」と見做すようになりました。あってもなくてもどちらでもいいということではなく、むしろ損であ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海で船が嵐に遭遇した時のことを想像してください。沈没の危機にある時に、とにかく船の荷を海に投げ捨てようとしますね。船体を軽くして何とか沈没しないように、何とか命拾いしようと、慌てふためきながら荷物を海に投げ捨てるのです。まさに船はキリストであり、荷物はパウロがこれまで誇っていた肉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以前は有利と思われたものが、今では、一生懸命にそれを投げ捨てようとしているのです。また、「塵あくた」という言葉を、ギリシア語で調べると、「大便」とか、「食べかす」を意味する言葉です。皆さん、トイレに行って大きい方をすると、すっきりしますね。大便は、体内に、ない方が良い、出しきって、むしろすっきりするのです。パウロはキリストによって、そのことに気づか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理由は、私の主、キリスト・イエスを知ることがあまりにもすばらしかったからだと言います。「私の主、キリスト・イエス」とは、「私にとって、主であり、キリストである、イエス様」というパウロの信仰告白のような表現です。ここに、ナザレのイエスをパウロが個人的に少しずつ知るように至った、その経緯においてパウロの感情がほとばしっていると、この表現から見て取ることが出来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3:8~9節を聖書協会共同訳でご覧いただけますでしょうか。週報の抜粋のプリントの方をご覧ください。
そればかりか、私の主キリスト・イエスを知ることのあまりのすばらしさに、今では他の一切を損失と見ています。キリストのゆえに私はすべてを失いましたが、それらを今は屑と考えています。キリストを得、キリストの内にいる者と認められるためです。私には、律法による自分の義ではなく、キリストの真実による義、その真実に基づいて神から与えられる義があります。
ここには、パウロの個人的な信仰体験が書かれています。パウロはキリストと出会い、以前までの価値観が完全に変わってしまったのですが、その変化とは、結局、自分の義、肉による義では、神の御前に到底、義とされ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ことに悟ったということです。自分の義、肉による義では、最後の審判をとても耐えることが出来ず、御前に立ち尽くすことができないと言うことに悟ったのです。罪深い自分が、神の御前に立ち尽くすことができるのは、肉による義ではなく、神から与えられる義による、上から服のように着させていただく「神の義」です。そして、その「神の義」というのは、キリストの真実による義、キリストの真実に基づいた義であるということに気づいたのです。この点が大変重要だと思います。注意すべきことは、私たちの持っている新共同訳聖書と読み比べれば分かりますが、私たちの信仰そのものが、義とされる根拠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の信仰が篤いので、私たちの信仰が熱心なので、それによって義とさ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のような誤解が生じないように、新しく出た聖書協会共同訳では、きちんと翻訳されていると思います。信じるという業によって義とされるのではなく、あくまでも、キリストの真実が義とされる根拠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信仰とは神の恵みを受け取る手段に過ぎません。私たちが罪を赦されること、神の家族の一員として、神の国に入れられること、即ち、神の御前で義とされるのは、私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専らイエス様の中にのみ、神の恵みを信頼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時々、聖書の中でイエス様は宝として比喩されますが、私たちは、中々この宝の価値について目が開かれないのであります。それは、この宝の価値が目には見えないからであり、この世には隠されているからです。むしろこの莫大の価値を持つ宝を、石ころのように見てしまうことが度々起こるのです。私たちが生きている間に、この宝の価値について、全て、完全に把握することは、不可能かもしれませんが、私たちは、日々、イエス様との人格的な交わりの中で、この宝の価値について認識を新たにされ、イエス様のことを以前より増して、誇るようになるのであります。そして、それは同時に、自分の行い、肉の誇りを捨て去ることでもあります。マタイによる福音書13:44をご覧ください。
天の国は次のようにたとえられる。畑に宝が隠されている。見つけた人は、そのまま隠しておき、喜びながら帰り、持ち物をすっかり売り払って、その畑を買う。
畑に宝が隠されているのを見つけた人とは、まさにパウロであったのでしょう。パウロはこれまで、有利と思われたものをすべてすっかり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宝を得たのです。そして、現在もキリストを知ることのすばらしさに、パウロは虜にされているのです。
【3】. キリストの復活の力と、キリストの苦しみ
さて、キリストを最も深く知るためには、パウロにとってそれは、キリストの苦難に与ることであると言いました。これは少し意外に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キリストの苦難に与るだって?」私たちはちょうど今レントの時期を過ごしております。この世において私たちは僕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様のように低め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10~11節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は、キリストとその復活の力とを知り、その苦しみにあずかって、その死の姿にあやかりながら、何とかして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達したいのです。
もし、私たちがイエス様を信じ、キリストを誇る生活をしようとするなら、この世はキリストを十字架につけ、殺したくらいですから、私たちも同じような扱いを、この世から受けるだろうことは、当然予想されます。私たちがキリストを誇れば誇るほど、私たちがキリストに信頼すれば信頼するほど、周囲との摩擦や軋轢を感じ、この世から苦難や、理不尽な取扱いを受け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しかし、パウロは、苦難や困難こそ、キリストの苦しみに与ることであり、キリストとの個人的な交わり、キリストとの個人的な人格的関係であ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10節の「あずかる」という言葉は、ギリシア語のコイノニアという言葉であり、「参与する」とか「交わる」という意味です。私たちがもし、キリストを誇って、そのために苦難や、理不尽な取扱いを受けるのなら、まさにその時、キリストとの深い人格的な関係がさらに構築されて行くのです。まさにその時、宝であるキリストを深く知り、復活の力を知るようにされるのです。
パウロはここで「何とかして復活に達したい」と言っていますが、これは、もちろん、パウロが最終的に、自分が栄光の状態に達することが出来ないかもしれないと、心配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フィリピ1:6で見ましたように、パウロは救いの業を始めてくださった神は、最後の日までに、その業を完全に成し遂げてくださると確信しているからです。しかし勝利は確定されていますが、最終的に死者からの復活に至る歩みは、最後の栄光に至る歩みは、決して簡単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パウロは言っ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その道のりは、狭い道であり、茨の門から入っていく道であり、私たち教会は、この世において、戦う教会として、奮闘努力することが必要になって来るのであります。
【結論】
「キリストを誇ること」と、「肉を誇ること」は正反対であり、キリストを誇ることは、世の人々に理解され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しかし、私たちの肉にあるどのような誇りも、生まれや地位も、自分が成し遂げた、いかなる業績や、善い業も、最後の燃えるような火の審判に耐えうることは出来ません。キリストこそ私の避け処であり、キリストこそ救いであり、キリストこそ復活の力であります。このイエス・キリストの中に、神の全ての恵みと、私たちの人生において直面する全ての問題の解決があるのです。わたしたちにとって、キリストを誇るということは、まさにこの宝を得ることであり、その宝の価値を日々、個人的に再発見することであります。同時にキリストを誇るとは、狭い道、茨の道を歩むことでもありますが、それにより、イエス様との人格的な関係をさらに深めていく道でもあり、確実に復活へ至らせる道でもあります。このイエス様に、全き信頼を寄せて、全てを委ね、主キリスト・イエスを誇る者として、歩ま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