真の割礼を受けた者 마음에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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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聖書 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 3章1節~3節
3:1では、わたしの兄弟たち、主において喜びなさい。同じことをもう一度書きますが、これはわたしには煩わしいことではなく、あなたがたにとって安全なことなのです。
3:2あの犬どもに注意しなさい。よこしまな働き手たちに気をつけなさい。切り傷にすぎない割礼を持つ者たちを警戒しなさい。
3:3彼らではなく、わたしたちこそ真の割礼を受けた者です。わたしたちは神の霊によって礼拝し、キリスト・イエスを誇りとし、肉に頼らないからで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 3章1節~3節
마음에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빌립보서 3장 1-3절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2월 22일부터 교회력으로 수난절이 시작됩니다. 부활절에 가까운 주일을 제외한 40일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우리들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또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거나 현재 지진으로 재난 가운데 있는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지진 피해자들을 돕는 모금 활동등에도 참가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에서 기쁨과 재미의 차이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에 의하면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의미가 없는 것, 가치가 없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재미」이고 의미가 있는 것, 가치가 있는 것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쁨」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화투나 마장은 일시적인 재미를 줄 뿐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는 것, 가정을 가지는 것에서 오는 것은 기쁨입니다. 그 원천이 의미가 있으면 있는 만큼, 가치가 있으면 있는 만큼 거기에서 오는 기쁨은 더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기쁨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오는 기쁨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오늘은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어 언약에 의해서 사는 사람에 대해서 빌립보서의 말씀으로 부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행악하는 자들
1-2절을 보십시오.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첫 부분에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쓰여있습니다. 지금까지 기뻐하라고 하는 권면은 빌립보서에 몇번이나 나왔습니다만 “주 안에서”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옵니다. 주님께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부터 오는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1절의 후반부터는 돌연 어조가 변화합니다. 또 2절을 보면 “삼가라”는 단어가 연속해서 나옵니다. 이것은 그리스어 성경에는 전부 「Βλέπετε 부레페테」라고 하는 단어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번 나오는 단어가 “삼가라”라는 한 단어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말끝마다 “삼가라!”고 3번이나 연속으로 말하며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3장 1절의 후반에서 “같은 말을 쓰는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이 “같은 말”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가 애매하게 생각되어 집니다. 그냥 읽으려고 하면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는 말을 가리키는 것일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분명히 여기에서는 앞 부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에 말끝마다 하는 “삼가라!”는 말을 가르키고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어쩌면 바울은 예전에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있었고 같은 경고를 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들개처럼 어슬렁 거리며 울부짖어대는 그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개」는 성경에서 거룩한 것을 이해 할 수 없는 동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서 「개」라는 말을 사용하며 경멸해 왔습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매우 강한 분노와 경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삼가해야 할 개들, 행악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몸을 상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할례를 몸에 지니고 있는 자들을 삼가라고 하는 세 번째 말입니다. 그들은 갈라디아서에도 나왔습니다만, 소위 그 유대주의자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유대주의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정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유대인으로 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순회 선교사처럼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이방인 크리스챤들에게 할례를 권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구원을 인간의 행위로 돌려버렸습니다. 이것을 율법주의로 표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주의란 이것을 하면 구원 받는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을 매우 알기 쉽게 구원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알기 쉽기 때문에 한 번 율법주의에 빠지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쁨이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매일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 율법주의라는 사고방식은 은밀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또 유대주의자들과 율법주의는 결국 같다는 것도 함께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는 초대교회에서도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복음을 믿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하는 것이 문제시 되었고 예루살렘 회의에서 그 일을 논의하기에 이르렀고 논의의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7-11절을 참조해 주십시오.
7 짧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히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회의의 결론은 구원은 온전히 주 예수의 은혜라고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상관없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 받기 위해서 이방인이 다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의되었습니다.
(2 )하나님과의 언약에 의해서 사는 사람
그런데 할례라고 하는 그리스어는 「페리토메」라는 말이지만 사실은 2절을 잘 보면 「페리토메」라는 말이 아니라 「카타토메」(절단, 신체에 베인 자국을 남기는 것)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하고 있는 것은 계약의 표시인 할례도 아니고 오히려 단지 몸을 상하게 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이번에는 자신들에게 「페리토메」(할례)라는 말을 사용하고 우리야말로 진정한 할례를 받은 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3절을 봅시다.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단순히 할례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단순히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할례라는 말을 매우 소중히 하고 있는 것이 전해져 옵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게 주신 표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페리토메」를 받은 자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3개 열거하고 있으므로 3절 후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에 열거하는 3가지의 이유는 “주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이 완성되어졌다”라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서는 더 이상 예배를 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에 동물의 제물을 바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제의가 가리키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완전한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쓰여 있는 제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일부러 예루살렘 성전에 갈 필요가 없으며, 성령 안에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서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특히 신실하고 자비로운 분으로 등장할 때 성경에 기록된 이름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엘로힘」, 「엘샤다이」와 그밖에 하나님의 여러 다른 호칭이 나옵니다만 「엘샤다이」라면 「전능하신 분」, 「엘로힘」이라고 하면 「창조의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야훼」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날 때, 그것은 「자비로운 분」이라는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신약시대에 은혜(자비)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계시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을 보아 주십시오.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의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로서 오신 예수님께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이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 그야말로 주 야훼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동물의 제물을 바치거나 언약의 백성이라는 표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육적인 것, 형식적인 것을 통해 영적인 것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이 오신 이상 율법이 가리키는 실체가 나타났기 때문에 더 이상 육체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에게 할례는 언약 백성으로 여겨지는 표시였으면서 그들의 믿음을 지지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파나 율법학자가 그것을 잘못 이해하고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어서 의롭게 되고 난 후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언약 백성의 표시로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지지하기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교 지도자들이 잘못 이해할 것임을 예고하면서 경고를 줍니다. 표면적인 할례는 의미가 없는 것,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에레미야서 9장 24-2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칭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이 구절에서는 표면적인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날에 그들은 이집트, 에돔, 암몬, 모압 사람들처럼 심판을 받는다고 쓰여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야말로 본래의 의미가 있는 것이며 할례의 영적인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 경고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 신약교회이자 빌립보의 형제 자매들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며 신약은 구약의 성취라고 합니다만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구약 성경이란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그 의미가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신약 성경의 깊은 의미는 구약 성경에 숨겨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구약 성경만을 믿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둘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본질입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도 이와 똑 같습니다. 교회가 본질이고 이스라엘이란 교회를 그 몸 안에 품은 껍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미 닭이 달걀을 따뜻하게 품고 시간이 되면 달걀의 껍찔을 깨고 병아리가 부회되는 것처럼 실체인 교회가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교회가 탄생했을 때 그것을 품고 있던 이스라엘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구약 시대의 율법은 성전에 쳐저 있던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두 갈래로 찢어졌을 때 그 역할을 마치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새로운 계약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에 의해 형성된 빌립보의 교회가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참 이스라엘이며 하나님과의 언약에 살아있는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신약 시대의 빌립보 교회,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랍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 결론
바울이 빌립보 교회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고 구원자 예수님만을 의지하여 할례나 동물의 희생제사등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빌립보 형제 자매의 신앙생활은 아마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쌓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매일의 일상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변해서 고난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주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기쁨이 샘물처럼 넘쳐 흘렀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외모상의 유대인이 참된 유대인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 하나님과의 언약에 살아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유대인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序】
2月の22日よりキリスト教会の暦でレントに入りました。イースター迄の主日を除いた40日間、イエス様の十字架の御苦しみに思いを馳せながら、私たちも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歩んで行きたいと思います。また苦難の中にある兄弟姉妹に救いの手を差し伸べたり、或いは、現在地震の被害に遭っているトルコとシリアの人々に救援の手を差し伸べて行きたいと思わされています。
ある先生の説教で、喜びと面白さの違いについて語られていました。喜びと面白さの違いとは何か、説教によるとそれが一体どこからの来るのかによって決定されるということでした。意味のないもの、価値のないものから来るならば、それは面白さになり、意味のあるもの、価値のあるものから来るならば、それは喜びになるということでした。例えば、花札や、麻雀をしていても、そこから来るものは喜びではなく、面白さであります。花札や、麻雀は一時的で、あまり価値がないからです。しかし結婚をすること、家庭を築くこと、そこから来るものは喜びです。その源泉が、意味があればあるほど、価値があればあるほど、そこから来る喜びは大きくなるということです。もし、そうであるならば、神様から来る喜びはいかに大きいでしょうか。神に結ばれているキリスト者に来る喜びはいかに大きいでしょうか。本日は、神様に結ばれて、契約の中に生かされる喜びについて、フィリピ書の御言葉から恵みに与っ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1】. よこしまな働き手たち
1~2をご覧ください。
では、わたしの兄弟たち、主において喜びなさい。同じことをもう一度書きますが、これはわたしには煩わしいことではなく、あなたがたにとって安全なことなのです。あの犬どもに注意しなさい。よこしまな働き手たちに気をつけなさい。切り傷にすぎない割礼を持つ者たちを警戒しなさい。
冒頭の「主において喜びなさい」とは、ギリシア語を見ると「主の中で喜びなさい」となっています。これまで「喜びなさい」という勧めはフィリピ書に何度か出て来ましたが、「主にあって」、「主の中で」という言葉は、ここで初めて出て来ます。主に結ばれたキリスト者の喜びについて言っているのであります。主から来る喜びに満たされること、これは、キリスト者の特徴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
1節の後半からは、突然、様相が変化して行きます。また、2節を見ると、「注意しなさい」「気をつけなさい」「警戒しなさい」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が、これは、ギリシア語聖書では、すべて「Βλέπετε ブレペテ」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ます。ですから新しい聖書協会共同訳聖書では、三つとも全て、「気をつけなさい」という言葉で統一されていました。パウロは口酸っぱく「気をつけなさい!」と三連発で注意喚起をしている訳です。そうしますと、3章1節の後半で、「同じことをもう一度書きますが、…」とありますが、この「同じこと」とは、一体何を指すのかが、あいまいになって来ます。普通に読もうとすれば、直前の「主において喜びなさい」という言葉を指すのかなと思いますが、どうやら、ここでは前の部分を指しているのではなく、むしろ、後ろで口酸っぱく注意喚起した「気をつけなさい!」という言葉を指していると考えられます。もしかしたら、パウロは以前にもフィリピの教会に手紙を書き送ったことがあり、同じような警告をしていたのかも知れません。とにかく野良犬のようにウロウロしている彼らの教えに気を付けるように、ということです。因みに犬とは聖書の中で、聖なるものを理解できない動物として描かれています。ユダヤ人は、異邦人に対して「犬」という言葉を使用し、軽蔑して来ました。パウロのこの言葉の使用から、非常に強い憤りと軽蔑を見て取ることが出来ます。この注意すべき「犬ども」、「よこしまな働き手」とは、一体どのような人々だったのでしょうか。手がかりとなるのは、「切り傷にすぎない割礼を持つ者たちを警戒しなさい」という三番目の言葉です。彼らは、ガラテヤ書にも出て来ました、所謂、「ユダヤ主義者たち」のことであると思われます。ユダヤ主義者とは、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だけでは不十分であり、正式な神の民となるために、割礼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ユダヤ人に帰化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する人々でありました。そして、巡回宣教師のように、教会を巡っては、異邦人クリスチャンたちに割礼を勧めていたと思われます。彼らは、このように、神様の全く恵みによる救いを、人間の行いに帰してしまいました。これを律法主義と表現す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律法主義とは、「これをすれば救われる、これをしなければ救われない」ということで、大変分かりやすく救いについて教えてくれます。しかし、分かりやすいからと言って、一度、律法主義に陥ってしまうと、私たちの信仰生活から喜びが奪い取られるという現象が起こって来ます。私たちも、日々の信仰生活の中で、この律法主義という考え方はひそかに近づいてきますから、いつの間にか律法主義に陥ることがないように注意をしていく、このことを私たちも心に留めたいと思います。また、ユダヤ主義者たちとは、結局、律法主義のことであるということも併せて覚えていただけたらと思います。ユダヤ主義者に対する警戒は、初代教会においても、早くから見られました。福音を信じた異邦人に割礼を施すことが問題視され、エルサレム会議において、そのことが議場に挙げられました。議論の結果、次のような結論に導かれています。使徒15章7-11をご覧ください。
議論を重ねた後、ペトロが立って彼らに言った。「兄弟たち、ご存じのとおり、ずっと以前に、神はあなたがたの間でわたしをお選びになりました。それは、異邦人が、わたしの口から福音の言葉を聞いて信じ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人の心をお見通しになる神は、わたし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ように異邦人にも聖霊を与えて、彼らをも受け入れられたことを証明なさったのです。また、彼らの心を信仰によって清め、わたしたちと彼らとの間に何の差別をもなさいませんでした。それなのに、なぜ今あなたがたは、先祖もわたしたちも負いきれなかった軛を、あの弟子たちの首に懸けて、神を試みようとするのですか。わたしたちは、主イエスの恵みによって救われると信じているのですが、これは、彼ら異邦人も同じことです。」
会議の結論は、救いは、専ら主イエスの恵みを信じることによるのであり、そのことは異邦人についても全く同じである。ユダヤ人も異邦人も関係なく、救いは、神の恵みによるのであって、救いのために、異邦人があらためて割礼を受ける必要はないということが、エルサレム会議で決議されたのでした。
【2】. 神との契約に生かされている者
ところで、割礼というギリシア語は「ペリトメー」という言葉ですが、実は2節をよく見ると「ペリトメー」という言葉ではなく、「カタトメー(切断、身体に切り傷を入れること)」という言葉が使用されています。ですから、パウロは、ユダヤ主義たちがしていることは、「契約のしるしである割礼でもない!むしろ、ただ身体を傷つけているだけだ」と言っているようです。そして3節をみるなら、今度は自分たちに対し「ペリトメー(割礼)」という言葉を使用し、「我々こそ、真の割礼を受けた者だ」と主張しています。3節をご覧ください。
彼らではなく、わたしたちこそ真の割礼を受けた者です。わたしたちは神の霊によって礼拝し、キリスト・イエスを誇りとし、肉に頼らないからです。
ここから分かることは、パウロは単純に割礼を非難しているという訳ではないと言うことです。旧約の律法を単純に非難している訳ではないと言うことです。「割礼」という言葉を非常に大切にしていることが伝わってきます。割礼とは神との契約に生きる、神の民イスラエルに与えられたしるしであったからです。
それでは、自分たちこそ、真の「ペリトメー」を受けた者と主張する理由を三つ挙げていますので、3節後半を見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ここに挙げられた三つの理由は、主イエスが来られ、律法が成就したと言う前提で語られています。第一に、「神の霊によって礼拝をすること」です。新約時代において、もはや、礼拝をするために神殿に上る必要はなくなりました。神殿に動物の生贄を捧げる必要もなくなりました。なぜなら、律法祭儀が指し示した神の子羊が、完全な供え物として捧げられたからです。旧約聖書の書かれている生贄の実体が、キリストの十字架を通して現れたからです。これにより、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聖徒たちはわざわざ、エルサレム神殿に行く必要がなく、聖霊によって、いつでも、どこでも、神の御前に立ち、礼拝を献げ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第二に、「キリスト・イエスを誇りとすること」です。旧約においては、ヤハウェという神の名は、特に信実で、慈しみ深い方として登場する時に聖書に記された名前でした。旧約聖書ではエロヒーム、エルシャダイと色々の神の呼称が出て来ますが、エルシャダイと言えば、全能なる方、エロヒームと言えば、創造の神を表しています。ヤハウェとして神の御名が現わされる時、それは慈しみ深いお方という文脈で登場します。新約時代において、恵み(慈しみ)と真理がイエス・キリストにおいて完全に啓示されたという御言葉がございます。ヨハネ1:17をご覧ください。
律法はモーセを通して与えられたが、恵みと真理は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現れたからである。
ヨハネの福音書のこの御言葉は神ご自身の啓示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様に依り頼むことこそ、主を誇ることだと思います。イエス・キリストが神ご自身として、この世に来られました。イエス・キリストを見た者は神を見た者である。恵みと真理は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現れたからだと、ヨハネは言っています。このイエス・キリストを誇ること、それこそ、主ヤハウェを誇ること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第三に、「肉に頼らないこと」です。旧約時代には、動物の生贄を捧げたり、契約のしるしとして割礼を受けたりしました。肉的なもの、形式的なものを通して、霊的なものを指し示したからです。しかし、主イエスが来られた以上、律法が指し示す実体が現れたため、もはや肉に頼る必要はなくなりました。
元来、イスラエルにとって割礼とは、契約の民とされたしるしであり、彼らの信仰を支えるために与えられたものでした。ところがイスラエルの歴史の中で宗教指導者であるファリサイ派や律法学者がそれを誤って理解し、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義とされるという間違った考え方出て来てしまったのです。アブラハムも割礼を受けた後に義とされたのではなく、信じて義とされた後に、割礼を受けました。割礼は契約の民のしるしとして与えられたと言うことです。彼らの信仰を支えるために与え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聖書は宗教指導者たちが誤って理解することを予告しながら警告を与えています。表面的な割礼は意味のないこと、割礼の本当の意味は「心に割礼を受けること」だと語られています。エレミヤ書9:24-25をご覧ください。
見よ、時が来る、と主は言われる。そのとき、わたしは包皮に割礼を受けた者を/ことごとく罰する。エジプト、ユダ、エドム/アンモンの人々、モアブ/すべて荒れ野に住み/もみ上げの毛を切っている人々/すなわち割礼のない諸民族をことごとく罰し/また、心に割礼のないイスラエルの家を/すべて罰する。
この個所では、たとえ表面的な割礼を受けたユダヤ人であっても、主の日に彼らはエジプト、エドム、アンモン、モアブの人々と同じように裁かれると書かれています。心の割礼を受けることにこそ、本来の意味があるのであって、割礼の霊的な部分が大事であるということが警告されているのです。そして、この「心の割礼」を受けた者たちが、新約における教会であり、フィリピの兄弟姉妹たちなのです。
旧約は新約の影であり、新約は旧約の成就であると言われますが、これはどういう意味かと言いますと、旧約聖書とは、新約聖書において、初めてその意味が明らかに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逆に、新約聖書の深い意味は旧約聖書の中に隠されているという意味です。ですから、ただ旧約聖書だけを信じるというのは正しくありません。また、ただ新約聖書だけを信じるというのも正しくありません。旧約聖書と新約聖書、両方とも神の言葉として信じることが正しい信仰の在り方です。教会とイスラエルの関係もこれと全く同じです。教会が本質であり、イスラエルとは教会をその体内に身ごもった殻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親鳥が卵を温めていて、時が満ち、卵の殻を破って、ひなが孵化するように、実体である教会が新しく生まれ出ました。教会が誕生した時に、それを覆い包んでいたイスラエルの役割は終えたのです。旧約時代の律法は、神殿の垂れ幕が上から真っ二つに裂けた時に、その役目を終え、キリストの血による新しい契約として生まれ変わりました。そして異邦人によって形成されているフィリピの教会こそ、アブラハムの子孫であり、真のイスラエルであり、神との契約に生かされている真の割礼を受けた者であると、パウロは主張するのです。神様が常に慈しみを注いだ神の民が、まさに、新約のこの時、フィリピの教会、あなた方だと言うのです。これはものすごいことだと思います。
【結論】
パウロが、フィリピ教会こそ、真の割礼を受けた者と主張する理由は、フィリピの教会が神の霊によって礼拝を献げ、救い主イエス様だけに依り頼み、割礼や動物祭儀など、肉の行いに頼らないからでありました。フィリピの兄弟姉妹の信仰生活は、恐らく神様と人格的な関係を築くようになったことでしょう。そして、神との人格的な関係は、日々の営みの中で神への祈りと讃美に変えられ、苦難や困難の中にあっても、主にあって慰めと希望を受け取り、喜びが、泉のようにあふれ出て来たと思われます。パウロは、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聖霊によって心の割礼を受けたフィリピの兄弟姉妹こそ、真のユダヤ人であると、あなた方こそ主に結ばれている者、真の割礼を受けた者、神との契約の中に生かされている者であると言うのであり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