受肉された神の独り子の意味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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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ヨハネによる福音書 1章14節~18節
14言は肉となって、わたしたちの間に宿られた。わたしたちはその栄光を見た。それは父の独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って、恵みと真理とに満ちていた。
15ヨハネは、この方について証しをし、声を張り上げて言った。「『わたしの後から来られる方は、わたしより優れている。わたしよりも先におられたからである』とわたしが言ったのは、この方のことである。」
16わたしたちは皆、この方の満ちあふれる豊かさの中から、恵みの上に、更に恵みを受けた。
17律法はモーセを通して与えられたが、恵みと真理は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現れたからである。
18いまだかつて、神を見た者はいない。父のふところにいる独り子である神、この方が神を示されたのである。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ヨハネによる福音書 1章14節~18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의 의미
2019년 12월 24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요한복음 1장 14~18절
서론
성탄절 축하드립니다. 성경에는 구약과 신약이 있는데, 이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옛 언약이란, 모세에게 시내 산에서 주신「울법」을 가리키고,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성취된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은, 각각 율법과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두개의 언약에 관해서 쓰여져 있는 것일까요? 즉 율법과 복음이라는 두 가지 다른 언약이 있고, 구약의 성도는 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신약의 성도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장」이라는 기사가 있는데, 거기에는 구약의 성도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쓰여 있나요? 모두 믿음으로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차이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즉, 율법이란, 복음의 그림자이자 모형이며, 실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고 본질적으로 복음과 다르지 않지만, 선명도의 차이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어렴풋하게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와 진리,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적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신앙고백한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 18,19문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은혜의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졌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19문을 잘 보면, 복음이라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대립 구도 안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제 19문: 당신은 이것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친히 계시하셨고, 후에는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들로써 예표하셨고,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즉, 어슴푸레 하지만, 율법은 복음 그 자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구약에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구약에서 말씀이란,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절에는「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이 짧은 구절 속에,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표현되어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1:1절에는 「계시니라」,「계셨으니」,「이시니라」라는 동사, 세 개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 세 단어가 모두 미완료형이기 때문에 「계시니라」,「계셨으니」,「이시니라」라는 단어와 「태초에」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말씀은 창조의 시작 단계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또한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됩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함께」라는 단어는, with가 아니라, 오히려 방향을 나타내는 to나 towards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은 하나님과 대면하고 마주하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게다가, 세 번째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부분의 「하나님」에는, 보통 반드시 붙어야 할 「톤 테오스」의 정관사「톤」, 주격이라면 「호」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 세 번째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붙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전체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신성은 가지고 있지만, 말씀 하나님만으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전체인 「호 테오스」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절은, 말씀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마주하면서 영원부터 존재하면서, 본질적으로 「호 테오스」와 같은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상황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2) 말씀이신 하나님의 성육신
1:14절을 보십시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의 「스케노오: 거하다, 장막을 치다(하나님께서 임재하시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사도 요한만이 사용하는 희귀한 단어로(요한복음에 1회, 요한계시록에 4회), 보통, 「살다」나 「거주하다」라는 동사는 「메노」라는 헬라어를 사용하지만, 굳이 히브리어 「샤칸: 장막을 치다, 머무르다」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헬라어 「스케노오」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약 시대, 성막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이 나타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장막을 치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는데, 그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기둥이 성막을 떠날 때, 이스라엘도 구름기둥을 따라가듯 재빨리 장막을 접고 이동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영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성막 위에 계셨던 것처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0:35~38절을 보시죠.
출애굽기 40장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구약에서도, 희미하게나마, 말씀과 율법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사역을 하고 계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으로 돌아가서 15절에서 세례 요한은「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라고 말하는데, 세례 요한은, 실제로 예수님보다 몇 달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연장자 위치에 있고, 또, 공적으로 사역을 시작한 것도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시작했는데, 세례 요한이 그렇게 증언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중보자이신가
성경에서 「중보자」라는 칭호는 모세와 그리스도 두 분에게 주여졌습니다. 사실 모세는 제사장적인 역할을 맡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에 불과하며, 진정한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요한복음 1:16~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6절의「은혜 위에 은혜러라」를 자세히 살펴 보면 「은혜와 바꾸어 은혜를 받았다」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모세의 율법을 은혜로 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율법을 행위계약으로 보고 구약시대가 율법의 강제력 아래 놓여 있었다고 이해했다면, 율법과 복음은 본질적으로 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므로 율법에 대해 은혜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도 분명 은혜였지만, 율법과 복음은 본질적으로 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므로 율법에 대해 은혜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도 분명 은혜였지만, 율법의 완성이자, 율법의 목적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을 대신하여, 더욱 분명한 은혜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다음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지만, 모세는 사람과 하나님의 「완전한 중보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모세도 인간이고 죄인 중의 한 사람인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로 설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19절을 보면 모세가 중보자임은 분명하지만,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천사를 통해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여기서는 분명히 모세가 중개자, 중보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율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천사를 통해 율법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죄인인 자신을 위해서도 율법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백성을 위해서만 율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죄를 위해서도 율법을 받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라 하더라도,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중보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엄밀히 말하면「완전한 중보자」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3:20~23졀에 따르면,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었고, 하나님의 등만 볼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도 모세는 중보자라기보다는 백성들과 같은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떨까요? 그리스도는 자신이 말씀 그 자체이시며, 돌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십니다. 선지자처럼 말씀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스스로 말씀 그 자체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외부에서 불쑥 끼어드는 제 3자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적 속성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온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시며 온전한 사람이십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 편과 인간 편 두 진영 사이에 서 계신다기보다는, 자신의 인격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의 두 진영이 되신 것입니다. 이 참된 중보자에 의해 새 언약이 갱신됨으로써, 은혜가 말해진 것이라기보다는, 은혜와 진리 그 자체가 죄인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예수님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결론
첫째,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오직 하나의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족장 시대에는 주의 사자 등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셨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율법의 이름으로 나타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서, 마지막에는 그보다 훨씬 더 온전한 모습으로 육신을 취하여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과일이 익어서, 껍찔을 벌리고 나온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혹은, 이스라엘의 뱃속에 태아처럼 머물러 있던 교회가, 스스로 독립적인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안에서「성전」이나 「제물」이나,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서는 「대제사장 직분」등이 존재했지만, 그것들이 폐기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신약에서 성취되어, 한 점 한 점까지 상실되지 않고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껍데기가 벗겨지고 영원한 내용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수많은 말씀은, 우리를 향한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진리이시며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은,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다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55:11절을 읽겠습니다.
이사야 55장
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늘의 우편에 앉으셔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중보하시며, 쉬지 않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말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품고 걸어갑시다.
序論
クリスマス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聖書には、旧約聖書と新約聖書がありますが、これは旧い契約と新しい契約という意味です。古い契約とは、モーセがシナイ山において授与された「律法」を指しており、新しい契約とは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にかけられることにより成就した「福音」を指しています。それで古い契約と新しい契約とは、それぞれ律法と福音というふうに呼ばれたりいたします。
それでは聖書というのは、古い契約と新しい契約の二つの契約について書かれているのでしょうか、即ち、律法と福音という二つの異なる契約があって、旧約の聖徒は律法を守り行うことによって救われ、新約の聖徒は福音を信じ受け入れること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しょうか。そうではありませんね。旧約においても新約においても神の御言葉であられる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す。ヘブライ人の手紙11章には「信仰の章」と呼ばれている記事がありまして、そこには旧約の聖徒たちの名前が列挙されています。彼らは律法を守ることで救われたと書いてあるでしょうか。全員が信仰によって歩んだと書かれています。旧約においても新約においても、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す。それでは、旧約と新約の違い、これは一体何なのでしょうか。その違いとは、イエス様の受肉を通して明らかにされました。つまり、律法というのは、福音の陰であり、模型でありまして、実はキリストを指し示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律法とはそれ自体神の恵みの契約であって、本質的には福音と違わないのですが、鮮明度の違いがあり、一方は神の恵みをおぼろげに示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が、一方は恵みと真理、「そのもの」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が直接、現れたということです。本日、信仰告白しましたハイデルベルク信仰問答、問18、19には、神と神の民との間に「恵みの契約」の仲保者、イエス・キリストが与えられた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が、問19をよく見ますと、福音というのは旧約と新約の対立の構図の中には置かれていないということに気づかされます。答えを御覧ください。何と書いてありますか。
“聖なる福音によってです。それを神は自ら、まず楽園で啓示し、その後、聖なる族長たちや預言者たちを通して宣べ伝え、律法による犠牲や他の儀式によって象り、ご自身の愛する御子によってついに成就なさいました。”
つまり、おぼろげでありますが、律法とは福音そのもの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
主題1 旧約において御言葉とは、イエス・キリストである。
それでは、旧約において御言葉とは、イエス・キリストであったということ点について見ていきましょう。ヨハネの福音書1:1には、「初めに言があった。言は神と共にあった。言は神であ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神学的には、この短い一節の中に、実は三位一体の神が表されていると言われています。どういうことかと言いますと、1:1には「あった」「あった」「あった」という動詞が三つ続いておりますが、これらの三つの単語は全て未完了形になっていることから、「あった」という単語と「初めに」という単語と組み合わされることで、言は創造の初めの段階において、すでに存在しており、なお、継続して存在し続けているというふうに解釈されます。天地の創造される前に、すでに言葉は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共に」という単語は、withではなく、むしろ方向を示すtoとかtowardsでありますから、言葉は神と対面し、向き合ってい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しかも、三つ目の「言葉は神であった」というところの「神」には、普通必ずついているはずの「トン テオス」の冠詞「トン」、主格なら「ホ」がついていません。この三つ目の神には冠詞が付いていないのです。これはどういう意味かといいますと、神の全体である三位一体の神を形成しないということです。父なる神と聖霊なる神と同じように、神性は持っていますが、ことばなる神だけでは三位一体の神全体、「ホ テオス」をなしては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ヨハネ福音書1:1は、言葉は神に向き合いながら永遠から存在していて、本質的に「ホ テオス」と同じ神性をもった神であるという状況が見えてくるのです。
主題2 次に言葉なる神の受肉を見てまいります。
1:14を御覧ください。「言は肉となって、わたしたちの間に宿ら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から、ここで使徒ヨハネは、神の言葉とは、世に来られたイエス・キリストであると述べています。
「私たちの間に宿られた」という言葉の「スケネオー:宿られる、テントを張る、(神に対して:臨在する)」という単語は、新約聖書の中では使徒ヨハネしか使わない珍しい単語でありまして(ヨハネの福音書に1回、ヨハネの黙示録に4回)、普通、「住む」とか「住まう」という動詞は「メノー」というギリシャ語が使われますが、あえてヘブライ語の「シャカン:テントを張る、留まる」という言葉に由来する、ギリシャ語のスケネオーを用いているのです。つまり、旧約の時代、幕屋の聖所に神の臨在を現わす雲が現れた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間に宿られた、テントを張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イスラエルの民は出エジプトをした後に荒れ野において40年を過ごしますが、その間、神の臨在を表す雲の柱が幕屋の聖所から離れるときに、イスラエルも雲の柱についていくように速やかに幕屋を畳んで移動しました。荒れ野において神の霊が、昼は雲の柱として、夜は火の柱としてテントを張られたように、まさに神の言葉が私たちの間に宿られたということを使徒ヨハネは言っているのでしょう。出エジプト40:35~38を御覧ください。
“モーセは臨在の幕屋に入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雲がその上にとどまり(テントを張られ)、主の栄光が幕屋に満ちていたからである。雲が幕屋を離れて昇ると、イスラエルの人々は出発した。旅路にあるときはいつもそうした。雲が離れて昇らないときは、離れて昇る日まで、彼らは出発しなかった。旅路にあるときはいつも、昼は主の雲が幕屋の上にあり、夜は雲の中に火が現れて、イスラエルの家のすべての人に見えたからである。”
イエス・キリストは、すでに旧約においても、ぼんやりとしてではありますが、御言葉や律法という形式によって、ご自身の働きをされていたと言うことができるのです。ですからヨハネの福音書に1章に戻りまして15節では、洗礼者ヨハネは、「彼は私より優れていて、わたしよりも先におられたから」と言っていますが、洗礼者ヨハネは、実際イエス様より数か月早く生まれているので、年長の立場ですし、また、公に働きを始めたのも、洗礼者ヨハネの方が、イエス様より早く始めたのですが、洗礼者ヨハネがそのように証言するのも理解できるのであります。
主題3 それでは、次にイエス・キリストは唯一なる仲保者なのかという点を見てきましょう。
聖書の中で、仲保者という称号は、モーセとキリストの二人に与えられています。実際モーセは祭司的な役割を担い、神とイスラエルの民の間の仲保者的な働きを担いました。しかし、モーセとはキリストのひな型、影に過ぎないのであり、真の仲保者はイエスさまお一人であられます。ヨハネ1:16~18節を御覧ください。
“わたしたちは皆、この方の満ちあふれる豊かさの中から、恵みの上に、更に恵みを受けた。律法はモーセを通して与えられたが、恵みと真理は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現れたからである。いまだかつて、神を見た者はいない。父のふところにいる独り子である神、この方が神を示されたのである。”
16節をよく見ると、「恵みの上に、さらに恵みを受けた」直訳すると「恵みに交換して、恵みを受け取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使徒ヨハネはここで、モーセの律法を恵みとして捉えていることに注意する必要があります。もし、律法を行いの契約として捉え、旧約の時代は律法の強制力の下に置かれていたと理解していたなら、律法と福音は、本来、敵対するものだと考えてしまいますので、律法に対し恵みという言葉は出てこなかったでしょう。旧約の律法も確かに恵みであったが、律法の終わりであり、律法の目的あるキリストが来られて、律法に代わって、さらにはっきりした恵みを受け取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理由が次の17節に書かれています。律法は、モーセを通して与えられたのですが、モーセは人と神の「完全な」仲保者ではなかったからです。考えてみればモーセも人間であり、罪びとの一人であって、神と人の間に立つ仲保者として立てるはずがありません。ガラテヤ3:19を見るとモーセは確かに仲保者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が、律法を、神から直接受けたのではなく、天使を介して受け取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
“では、律法とはいったい何か。律法は、約束を与えられたあの子孫が来られるときまで、違犯を明らかにするために付け加えられたもので、天使たちを通し、仲介者の手を経て制定されたものです。”
ここでは、確かにモーセを仲介者、仲保者と書かれていますが、モーセは、神さまから直接ではなく、天使を通して律法を受け取ったとあります。つまり、神に対しは、イスラエルの民と同じ側に立っていて、罪びとである自分自身のためにも律法を受け取る必要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単に民のためだけに律法を受け取ったのではなく、自分自身の贖いのためにも受け取る必要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モーセといえども、罪がありますので神に直接向き合うことは出来ません。モーセは仲保者には違いありませんが、厳密にいうと「完全な仲保者」ではなかったのです。出33:20~23によれば、モーセは神の御顔を直接見ることができず、神さまの後ろ姿だけを拝むことが許さ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このことからもモーセが仲保者というより、民の側に立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では、キリストはどうでしょうか。キリストはご自身が御言葉そのものであられ、石板によって与えられるというより、自らが直接神の御言葉として、神の家を治められます。預言者のように御言葉を語られると同時に、自らが御言葉そのものであ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さらに言えば、キリストは、神と人間との間に、外部からひょこっと、介入する第三者ではなく、イエス様ご自身が神の子であり、神的な属性を所有し、神の栄光の輝き、まったき神でありながら、それと同時に人の子であり、全き人であられるのです。つまり、キリストは神の側と人間の側の二つの陣営の間に立っているというより、ご自身の人格そのものが、神と人間の二つの陣営となっておられるのです。この真の仲保者によって新しい契約が更新されることで、恵みが語られたというより、罪びとに対して恵みと真理そのものが現れたということです。神の罪びとを救済するという、恵みの契約がイエス様を通して鮮明に現れたということです。
結論
第一に、新約聖書と旧約聖書は本質上同じものであって、ただ一つの神の恵みの契約が、聖書全体に一貫して書か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キリスは族長時代には主の使いなどを通して現れたりいたしました。モーセの時代には律法の名のもとに現れたりして、救済の働きをされました。そして時が満ち、最後には、それより遥かに十全なかたちによって、肉のからだをお取りになって現れたのです。それは例えば、果物が熟して、皮を破って出てきたという感じです。或いは、イスラエルのお腹の中に胎児のように過ごしていた教会が、自分自身の独立的な歩みを始めた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旧約のイスラエルの中において「神殿」や、「供え物」や、神と民の間に立つ「大祭司の職分」などが存在しましたが、それらは廃棄されたというより、むしろ、新約において成就され、一点一画までも喪失されることなく完成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一時的なうわべという殻から、永遠の中身が現れたということです。第二に、イエス様が福音書の中で語ってこられたたくさんの御言葉は、私たちに対する約束とも受け取れます。ご自身が真理でありご自身が御言葉そのものであられる方は、必ず全て語られた通りに成就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最後にイザヤ55:11をお読みいたします。
“そのように、わたしの口から出るわたしの言葉も/むなしくは、わたしのもとに戻らない。それはわたしの望むことを成し遂げ/わたしが与えた使命を必ず果たす。”
御言葉なるイエスキリストは、今も天の右の座にお着きになり、聖徒一人一人のためにとりなし、休むことなく救済の業をされておられます。ですから私たちも聖書の約束を握りしめて、祈ることを決してあきらめず、御子イエス・キリストの内に希望を抱いて歩んでまいり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