サムエルの預言者としての召命 사무엘의 선지자로서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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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サムエル記上 3章1節~4章1節
1少年サムエルはエリのもとで主に仕えていた。そのころ、主の言葉が臨むことは少なく、幻が示されることもまれであった。
2ある日、エリは自分の部屋で床に就いていた。彼は目がかすんできて、見えなくなっていた。
3まだ神のともし火は消えておらず、サムエルは神の箱が安置された主の神殿に寝ていた。
4主はサムエルを呼ばれた。サムエルは、「ここにいます」と答えて、
5エリのもとに走って行き、「お呼びになったので参りました」と言った。しかし、エリが、「わたしは呼んでいない。戻っておやすみ」と言ったので、サムエルは戻って寝た。
6主は再びサムエルを呼ばれた。サムエルは起きてエリのもとに行き、「お呼びになったので参りました」と言った。エリは、「わたしは呼んでいない。わが子よ、戻っておやすみ」と言った。
7サムエルはまだ主を知らなかったし、主の言葉はまだ彼に示されていなかった。
8主は三度サムエルを呼ばれた。サムエルは起きてエリのもとに行き、「お呼びになったので参りました」と言った。エリは、少年を呼ばれたのは主であると悟り、
9サムエルに言った。「戻って寝なさい。もしまた呼びかけられたら、『主よ、お話しください。僕は聞いております』と言いなさい。」サムエルは戻って元の場所に寝た。
10主は来てそこに立たれ、これまでと同じように、サムエルを呼ばれた。「サムエルよ。」サムエルは答えた。「どうぞお話しください。僕は聞いております。」
11主はサムエルに言われた。「見よ、わたしは、イスラエルに一つのことを行う。それを聞く者は皆、両耳が鳴るだろう。
12その日わたしは、エリの家に告げたことをすべて、初めから終わりまでエリに対して行う。
13わたしはエリに告げ知らせた。息子たちが神を汚す行為をしていると知っていながら、とがめなかった罪のために、エリの家をとこしえに裁く、と。
14わたしはエリの家について誓った。エリの家の罪は、いけにえによっても献げ物によってもとこしえに贖われることはない。」
15サムエルは朝まで眠って、それから主の家の扉を開いた。サムエルはエリにこのお告げを伝えるのを恐れた。
16エリはサムエルを呼んで言った。「わが子、サムエルよ。」サムエルは答えた。「ここにいます。」
17エリは言った。「お前に何が語られたのか。わたしに隠してはいけない。お前に語られた言葉を一つでも隠すなら、神が幾重にもお前を罰してくださるように。」
18サムエルは一部始終を話し、隠し立てをしなかった。エリは言った。「それを話されたのは主だ。主が御目にかなうとおりに行われるように。」
19サムエルは成長していった。主は彼と共におられ、その言葉は一つたりとも地に落ちることはなかった。
20ダンからベエル・シェバに至るまでのイスラエルのすべての人々は、サムエルが主の預言者として信頼するに足る人であることを認めた。
21主は引き続きシロで御自身を現された。主は御言葉をもって、シロでサムエルに御自身を示された。
1サムエルの言葉は全イスラエルに及んだ。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サムエル記上 3章1節~4章1節
사무엘의 선지자로서의 소명
2019년 9월 1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사무엘상 3장 1~4장 1절
14세기의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르네상스란 고대 문화를 부흥시키는 운동이었습니다. 이 문예 부흥의 움직임은 이윽고 16세기에 들어 독일이나 스위스에 있어서의 종교개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즉 「성경으로 돌아가자, 원문으로 돌아가자」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시작해 나갔습니다. 그 배경을 보면 본래 카톨릭 교회에 있어서 라틴어 이외의 성경은 금지되어 있고 예배에서도 성경의 낭독은 어려운 라틴어로 이루어졌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회중은 성경말씀을 잘 몰라도 된다, 다만 주교의 말만 듣고 있으면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세가 암흑시대라고 불리우는 이유입니다. 그런 가운데 “라틴어 성경이 정말 맞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나온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에는 도대체 무엇이 쓰여 있는지,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을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평범하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도 부유층에 국한됐지만 종교개혁 때 루터가 처음 히브리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불똥이 튄 것입니다. 이런한 종교개혁에 일어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운동이 바로 사사시대의 끝 무렵에 사무엘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을 때 일어났습니다. 당시 제사장을 통해 주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임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기적이나 이상도 드물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영적인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3장 1절을 참조하십시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장 11절을 보면 3장 1절과 비슷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소년이나 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같은 단어로 히브리어의 「나알」이라는 말입니다. 사무엘과 엘리의 아들들을 비교할 때 이 「나알」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2장 13절의 「사환」이라는 말도 「나알」입니다. 제사장의 소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15절의
「사환」역시 소년입니다. 17절의 「이 소년들의 죄가」라고 되어 있는데, 역시 같은 말입니다. 18절의 경우는 사무엘은 에봇을 입고 소년이면서 여호와를 섬겼다는 뜻이 됩니다. 21절에서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고 되어 있고 26절에서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결국 이런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소년 사무엘도 엘리의 아들 소년들도 마찬가지로 엘리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육적으로는 제사장 엘리에게 종속되면서 양육을 받고 있었는데 사무엘은 비록 엘리에게 종속되어 있더라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성장해갔습니다. 반면 엘리의 아들들은 엘리에게 종속되면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타락해 갔습니다. 즉, 사람은 환경에 의해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결코 인격 형성이나 믿음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에 놓여도 사무엘과 엘리의 아들처럼 정반대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제사를 관장하는 제사장이 하나님을 모르고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흘러오지 않습니다. 3장 2절을 보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로 엘리의 눈이 침침해진 것이기도 한데, 바로 제사장 엘리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제사장이 이런 상태라면, 나아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도 어두운 상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29장 9~12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11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 청하노니 이를 읽으로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12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로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할 때 이스라엘의 영적 고갈은 어느 정도 일까요? 아모스서 8장 11,12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근원이신 주님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이 있었습니다. 3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언약궤가 놓인 방의 촛대 불빛이 율법에 적혀 있듯이 한밤중 내내 켜져 있어야 했기에 시각이 아직 동트기 전이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에는 아직 희망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닌, 완전한 어둠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지금 제사장 엘리에게서 사무엘에게로 바톤이 넘겨져 어둠 속에서 해가 뜨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로의 성전은 예루살렘의 성전처럼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던 바로 그 방에 사무엘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여호와의 말씀이 세무엘에게 세 번 임합니다. 사무엘은 그것이 여호와의 말씀인지 몰랐어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을 경험해 본적이 없었다고 해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사장 엘리가 사무엘을 부르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깨닫고 네 번째가 되어서야 겨우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4절에서 9절까지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세 번 부르는 기사가 쓰여져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부르셨을 때 사무엘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엘리에게 달려 갔어요.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엘리는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여호와는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이번에는 사무엘이 어떻게 했을까요? 역시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엘리가「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시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읍니다. 이번에는 사무엘이 어떻게 했을까요? 역시 엘리에게 달려 갔습니다.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제사장 엘리는 이 때 자신이 양육하고 있는 견습생 사무엘을 부르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조언합니다. 아마 네 번째에도 엘리에게 달려갔다면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사무엘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10~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고하신 심판의 말씀과 같은 내용을 이번에는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이 말씀을 받고 다음날 아침 엘리에게 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엘리 쪽에서 「내 아들 사무엘아」라고 부르며 17절에 쓰여 있는 것처럼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1) 청하노니 내게 (2)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3) 모든 것(4)을 하나라도(5)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17절의 말씀은 매우 희한한 말씀입니다. 17절 한 구절에는 말이라는 단어가 지금 확인한 것처럼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 제사장 엘리가 견습생 사무엘에게 말씀을 간청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 엘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었던 그 조급함이 17절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은 임하지 않았고 이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드물었지만, 그런 가운데 엘리는 자신이 양육하고 있는 사무엘을 통해 엘리의 집에 대한 심판의 말씀에 대한 자초지종을 모두 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엘리에게 끔찍하고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요? 이때 제사장 엘리에게게서 사무엘로 제사장의 주도권이 옮겨 갔음이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나의 기도 속에 나와 있는 역전극을 확인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확인해 봅시다. 사무엘상 2장 4~8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4 용사의 활은 꺽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이 역전극을 사무엘과 엘리에게서 보게 된 것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제사장이자 하나님의 말씀의 대변자인 선지자로 세워졌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봇물 터지듯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사무엘은 성장해 갔고 여호와께서는 그와 함께 계셨고, 사무엘을 통해 하신 그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의 악한 관습을 본받지 말고 여호와께서 세우신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백성의 삶의 규범이었고 말씀은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에 일어난 일이 사사시대의 마지막에 바로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의 책인 성경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성경 말씀을 따라 생활의 모든 것이 규정되고 인도되는 것입니다.
14世紀のイタリアで始まったルネサンスとは、古代の文化を復興させる運動でした。この文芸復興の動きは、やがて16世紀に入ってドイツやスイスにおける宗教改革へと発展していきました。つまり「聖書に帰ろう、原文に戻ろう」というスローガンをもとに始まって行きました。その背景を見ると、本来カトリック教会において、ラテン語以外の聖書は禁じられていて、礼拝でも聖書の朗読は、難しいラテン語でなされていました。正直に言えば、会衆はあまり聖書の御言葉を知らなくてもよい、ただ、司教の話だけ聞いていれば良いというスタンスだったのです。これが中世の暗黒時代と言われる所以です。そのような中で「ラテン語聖書って本当に正しいのだろうか」という疑問が出てきたのです。ヘブライ語の聖書とギリシャ語の聖書には一体何が書いてあるのか、神さまの御心は一体何だろうかということを、探り求めるようになっていきました。そもそも、普通に文字を読み書きができる人も、富裕層に限られていましたが、宗教改革の時になって、ルターが初めてヘブライ語聖書をドイツ語に訳すことによって「聖書に帰ろう」という運動の火ぶたが切られたのです。このような宗教改革に起こった「神さまの御言葉に帰る」という運動がまさに、士師時代の終わりに、サムエルが神さまによって立てられた時に起こりました。当時、祭司長を通して主の御言葉がイスラエルに臨むことは少なく、奇蹟や幻もまれでした。つまりイスラエルは霊的な暗闇の中に置か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3:1節を御覧ください。
“少年サムエルはエリのもとで主に仕えていた。そのころ、主の言葉が臨むことは少なく、幻が示されることもまれであった。”
2:11を見ると3:1節と同じような節が出てきます。「幼子は祭司エリのもとにとどまって、主に仕えた」少年とか幼子という言葉がでてきますが、実はこれは同じ単語で、ヘブライ語の「ナアル」という言葉です。サムエルとエリの息子たちを比較する際に、このナアルという単語が何度も何度も出て来ました。例えば2:13の「下働き」という言葉もナアルです。祭司の少年たちという意味になります。15節の「下働き」もやはり少年です。17節の「この下働きたちの罪は」とありますが、やはり「この少年たちの罪は」という意味になります。18節の場合は、「サムエルは、エフォドを着て少年でありながら、主の御前に仕えていた」という意味になります。21節で、「少年サムエルは主のもとで成長した」とあり、26節で、「少年サムエルはすくすくと育ち、主にも人々にも喜ばれる者となった」とあります。結局これらのことから分かることは、少年サムエルもエリの息子の少年たちも同様に、エリの家で生活し、肉的には祭司長エリに従属しながら、養育を受けていたのですが、サムエルは、たとえエリに従属していても、霊的には神に仕えながら成長していきました。一方、エリの息子たちはエリに従属しながら、霊的に神を知ることはなく、堕落していきました。つまり、人は環境によって育つ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の置かれている環境は、決して人格形成や、信仰の成長に決定的に影響を与えること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全く同じ環境に置かれても、サムエルとエリの息子たちのように正反対に成長することもあるからです。もし、神の祭儀を司る祭司が、神を知らず、御言葉を聞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なら、神の恵みはイスラエルの民に流れてくることはありません。3:2節を見ますと、“エリは目がかすんできて、見えなくなっていた。”とありますが、これは、実際エリの目がかすんできたということもありますが、まさに祭司長エリの霊的状態を象徴していて、神さまの御言葉が臨むことがまれ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イスラエルの祭司長がこのような状態であるなら、ひいては当時のイスラエルの霊的状態も暗い状態であったと言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イザヤ書29:9~12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あります。ご覧ください。
“ためらえ、立ちすくめ。目をふさげ、そして見えなくなれ。酔っているが、ぶどう酒のゆえではない。よろめいているが、濃い酒のゆえではない。主はお前たちに深い眠りの霊を注ぎ/お前たちの目である預言者の目を閉ざし/頭である先見者を覆われた。それゆえすべての幻は、お前たちにとって封じられた書物の中の言葉のようだ。字の読める人に渡して、「どうぞ、読んでください」と頼んでも、その人は「封じられているから読めない」と答える。字の読めない人に渡して、「どうぞ、読んでください」と頼んでも、「わたしは字が読めない」と答える。”
祭司や預言者が主の御言葉を聞くことができないとき、イスラエルの霊的な枯渇はどれほどでしょうかアモス書8:11~12をご覧ください。
“見よ、その日が来ればと/主なる神は言われる。わたしは大地に飢えを送る。それはパンに飢えることでもなく/水に渇くことでもなく/主の言葉を聞くことのできぬ飢えと渇きだ。人々は海から海へと巡り/北から東へとよろめき歩いて/主の言葉を探し求めるが/見いだすことはできない。”
ですから、私たちは、恵みの根源である主の御言葉を聖書を通して切に求め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しかし、まだ希望がありました。3:3を見るなら、“まだ神のともし火は消えておらず、サムエルは神の箱が安置された主の神殿に寝ていた”と書かれています。これは、契約の箱が置かれた部屋の燭台のともし火が、律法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夜中、ずっと灯さ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時刻がまだ夜明け前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もありますが、同時に、イスラエルにはまだ、希望の火が完全に消えたのではない、完全な暗闇になった訳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まさに今、祭司エリから、サムエルにバトンが引き渡され、暗闇の中から太陽が昇ろうとしていたのでした。
ところで、シロの神殿は、エルサレムの神殿のように、聖所と至聖所とに区別されてはいなかったようです。契約の箱が安置されていたまさにその部屋にサムエルは眠っていました。そこへ主の言葉が、サムエルに三度臨みます。サムエルはそれが主の言葉であるのか分かりませんでした。主の御言葉が臨むということを経験したことがなかったと解釈してください。祭司エリがサムエルを呼ばれたお方は主であることを悟り、四度目にやっと応答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4節~9節まで、主がサムエルを三度、呼ばれる記事が書かれています。主が呼ばれた時、サムエルはどうしたでしょうか。…そうです。エリのもとに走って行きました。「お呼びになったので参りました」と言いました。エリは「私は呼んでいない。戻っておやすみ」と言いました。すると、再度、主はサムエルを呼ばれます。今度は、サムエルはどうしたでしょうか。…やはりエリのもとに走って行きました。「お呼びになったので参りました」「私は呼んでいない。わが子よ、戻っておやすみ」三度目に主はサムエルを呼ばれます。今度は、サムエルはどうしたでしょうか。…やはりエリのもとに走って行きました。「お呼びになったので参りました」祭司エリはこの時、自分が養育している研修生サムエルを呼ばれたのが主であることを悟りました。それで、「もしまた呼びかけられたら、『主よ、お話しください。僕は聞いております』と言いなさい」とアドバイスをします。恐らく、四度目もエリの下に走っていったなら主は、継続してサムエルを呼び続けたことでしょう。10~14節を御覧ください。
“主は来てそこに立たれ、これまでと同じように、サムエルを呼ばれた。「サムエルよ。」サムエルは答えた。「どうぞお話しください。僕は聞いております。」主はサムエルに言われた。「見よ、わたしは、イスラエルに一つのことを行う。それを聞く者は皆、両耳が鳴るだろう。その日わたしは、エリの家に告げたことをすべて、初めから終わりまでエリに対して行う。わたしはエリに告げ知らせた。息子たちが神を汚す行為をしていると知っていながら、とがめなかった罪のために、エリの家をとこしえに裁く、と。わたしはエリの家について誓った。エリの家の罪は、いけにえによっても献げ物によってもとこしえに贖われることはない。」”
前に神の人がエリのもとに告げた裁きの言葉と同じような内容を、今度はサムエルを通して語られました。サムエルは御言葉を受け取り、翌朝エリに対してこの神のお告げを伝えることを恐れました。しかしエリの方から「わが子、サムエルよ」と呼び出し、17節にありますように「お前に何が語られたのか〔1〕。わたしに〔2〕隠してはいけない。お前に語られた〔3〕言葉〔4〕を一つでも〔5〕隠すなら、神が幾重にもお前を罰してくださるように。」と言いました。この17節は非常に不思議な御言葉です。17節の一節には言葉という単語が今確認したように5回も出て来ます。つまりイスラエルの指導者、祭司長エリが研修生サムエルに御言葉を懇願しているという姿を見て取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祭司長エリに神さまの御言葉を聴きたくても聞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そのあせりが17節に現れているのです。当時、神さまの御言葉は臨むことはなく、幻が示されることもまれでしが、そのような中で、エリは自分が養育しているサムエルを通してエリの家に対する裁きの言葉を一部始終の全て聞くことになりました。これほどエリにとって無残で残念な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この時祭司長エリからサムエルに祭司の主導権の移っていったことが証明されているのです。そして、ここにハンナの祈りの中にでている逆転劇を確認させられるのです。ハンナの祈りを確認してみましょう。サムエル記上2:4~8をお読みします。
“勇士の弓は折られるが/よろめく者は力を帯びる。食べ飽きている者はパンのために雇われ/飢えている者は再び飢えることがない。子のない女は七人の子を産み/多くの子をもつ女は衰える。主は命を絶ち、また命を与え/陰府に下し、また引き上げてくださる。主は貧しくし、また富ませ/低くし、また高めてくださる。弱い者を塵の中から立ち上がらせ/貧しい者を芥の中から高く上げ/高貴な者と共に座に着かせ/栄光の座を嗣業としてお与えになる。”この逆転劇をサムエルとエリにおいて見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サムエルは神と人の間を取り持つ祭司長であり、同時に神の御言葉の代弁者である預言者としても立てられました。サムエルを通して堰を切ったようにイスラエルに神の御言葉が語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サムエルは成長していき、主は彼と共におられ、サムエルを通して語られたその御言葉は一つでも成就しないで地に落ち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ダンからベエルシェバに至るまでの全てのイスラエルの民は、サムエルが主の預言者ということを認めたのです。主はイスラエルの民にカナンの地の原住民の汚れた習慣に見習わないで、主の立てられた預言者を通して御言葉に聞きなさいと言われるのです。主の御言葉は民の生活の規範であり、御言葉は民の生活を潤す希望でもありました。このように民が主の御言葉に立ち帰らされたのであります。宗教改革に起こったことが士師時代の最期にまさに起こったのです。現代の私たちには神の啓示の書物である聖書が与えられています。この聖書の御言葉を通して神様は私たちに希望を与え、聖書の御言葉によって生活すべてが規定され、導かれ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