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年07月10日「一人の魂 한 사람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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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人の魂 한 사람의 영혼

日付
説教
川栄智章 牧師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3章7節~12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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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句のアイコン聖書の言葉

3:7イエスは弟子たちと共に湖の方へ立ち去られた。ガリラヤから来たおびただしい群衆が従った。また、ユダヤ、
3:8エルサレム、イドマヤ、ヨルダン川の向こう側、ティルスやシドンの辺りからもおびただしい群衆が、イエスのしておられることを残らず聞いて、そばに集まって来た。
3:9そこで、イエスは弟子たちに小舟を用意してほしいと言われた。群衆に押しつぶされないためである。
3:10イエスが多くの病人をいやされたので、病気に悩む人たちが皆、イエスに触れようとして、そばに押し寄せたからであった。
3:11汚れた霊どもは、イエスを見るとひれ伏して、「あなたは神の子だ」と叫んだ。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3章7節~12節

原稿のアイコン日本語メッセージ

【序】

 本日の箇所は、初期ガリラヤ伝道における要約が書かれています。つまり福音を宣べ伝え、病を癒し、悪霊を追い出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のお働きの要約部分として本日の箇所が機能しているのですが、このイエス様のお働きによって、イスラエルの指導的な立場にある宗教当局者たちは、メシア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様を受け入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判明し、そして、それにもかかわらず、おびただしい群衆がイエス様の下に押し寄せて来たと言うことが書かれています。群衆は我先にと、競争するように押し寄せて来ました。なぜなら、イエス様の噂を聞いて、とにかく自分自身の病気を癒してもらいたい、自分が置かれているあまりにも悲惨な状況から解放してもらいたいと願ったからです。私たちが普段、教会中心の信仰生活を送っている時に、世の中には、救われていない人々が、外見は大丈夫そうに見えても、まだ神さまの愛を知らず、どれほど悲惨な生活を送っているのかということを、ふと忘れてしまう傾向が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クリスチャンホームで育った方々にとっては、もしかしたらこの点を理解するのが難しいかもしれませんが、成人洗礼を受けられた方であれば、ご自分がイエス様を信じる前、どのような悲惨な生活をしていたのかを思い出してくださればと思います。私も成人洗礼を受けたのですが、イエス様を信じる前は、全くの絶望の中で、たばこを吸ったり、酒を飲んだり、退廃的な生活を送っていました。私たち教会が福音を伝えていく上で、何よりも忘れてはならないことは、まだイエス様を知らずに苦しんでいる大勢の方々がいるという事でございます。そのような方々が真の意味でイエス様とお会いし、彼らが抱えている悲惨な状況が解決されるように、私たちは日々祈っていきたいと思わされます。

【1】. 群衆から一定の距離を取られたイエス様

 さて、7節には、「イエス様が弟子たちと共に湖の方へ立ち去られた」と書かれています。会堂から湖の方へ退かれたということです。前回見ましたように、ファリサイ派とヘロデ派が結託し、イエス様を殺そうと企てましたが、まだイエス様の十字架に架かられる時ではなかったので、ガリラヤ湖の方へ立ち去られたという事でしょう。そこへ、おびただしい群衆が押し寄せて来たというのです。南側は「ユダヤ、エルサレム、イドマヤ」からやってまいりました。地図をご覧ください。イドマヤとは、当時エドム人が支配していた地域をイドマヤ地方と言っていました。イエス様が生まれた頃、ローマからユダヤの統治を任されていたヘロデ大王も、実はエドム人でありました。東側は、「ヨルダン川の向こう側」とあります。おそらくペレア地方とデカポリス地方のことを指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北側は「ティルスやシドン」からやって来ました。つまり異邦人の地フェニキアからも人々が集まってきました。パレスティナ全域から、しかも異邦人の土地も含めて、群衆がイエス様目指してやってまいりました。その勢いたるや、現在の朝の電車の通勤ラッシュを思わせるような、ものすごい勢いであ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3:9~10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こで、イエスは弟子たちに小舟を用意してほしいと言われた。群衆に押しつぶされないためである。イエスが多くの病人をいやされたので、病気に悩む人たちが皆、イエスに触れようとして、そばに押し寄せたからであった。”

パレスティナの全域から、群衆が、イエス様のしておられることを残らず聞いて、我先にとイエス様に向かって押し寄せてきました。預言者として信じられていた洗礼者ヨハネの時には、マルコ1:5を見ると、「ユダヤとエルサレムの住民が皆、ヨハネのもとに来た」と書いてありますので、おそらく、この洗礼者ヨハネの時よりもさらに広い地域から多くの群衆が、イエス様の下に集まってきたと思われます。

イエス様が彼らをいやされたため、病気に悩む人たちは、とにかくイエス様に触れようとして、押し合い、へし合いになったのでしょう。イエス様は弟子たちに小舟を用意してほしいと願い、押しつぶされないよう、そこから離れることにしました。言い換えれば、押し寄せて来る人々が、ご自分に触れ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イエス様は、多くの人々を癒されましたが、片っ端から病を癒し、苦しみや悲しみを取り除かれた訳ではなかったという事です。これには群衆もがっかりしたに違いありません。イエス様に触れて、病を癒していただこう、問題を解決していただこうとして、わざわざ遠くから来たのに、イエス様は小舟に乗られて、群衆と一定の距離を取られたからです。「なんだ、とんだ期待外れだ」と思ったことでしょう。これは一体何を意味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そして、さらに私たちには理解できないことを、イエス様はこの後に言われました。11~12節をご覧ください。

【2】. 霊どもを厳しく戒められたイエス様

 “汚れた霊どもは、イエスを見るとひれ伏して、「あなたは神の子だ」と叫んだ。イエスは、自分のことを言いふらさないようにと霊どもを厳しく戒められた。”

イエス様は神の国の到来と、キリストの福音を宣教するために、弟子たちを召されたはずです。しかし「あなたは神の子だ!」と叫ぶ霊どもに対し、そのことを言いふらしてはならないと厳しく戒められるのです。汚れた霊どものこの証言が間違っていたのでしょうか。それが嘘、偽り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ある神学者はまさにそのように考えました。「メシアの秘密」という問題を提起し、実際、ナザレのイエスは、神の子でもメシアでもなく、それはイエスが十字架に架かられて死んだ後に、十字架で死んだイエス様の意図に反して、彼の弟子たちによって創作された物語であって、マルコによる福音書というのは、実は弟子たちの新興宗教の教理本であると、そのために書かれたのだと主張するのです。

しかし、もし、イエス様がメシアでなかったとしても、イエス様のように数多くの不思議と奇跡を行う人は、この世に現れなかったことでしょう。そして、もし、イエス様がメシアでなかったなら、ユダの裏切りによってオリーブ山で捕らえられた夜、その夜、即席に開かれた裁判の中で、大祭司から「お前はほむべき方の子、メシアなのか」と質問をされた時に、大祭司の言葉に同意されることもなかったはずです。あの夜、大祭司の質問に対し、イエス様は「いや実は私はメシアでも何でもないのに、このように逮捕されてしまいました。」と弁明するどころか、むしろ大祭司の言葉に同意され、次のように断言されたのです。マルコ14:61-62をご覧ください。

“しかし、イエスは黙り続け何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そこで、重ねて大祭司は尋ね、「お前はほむべき方の子、メシアなのか」と言った。イエスは言われた。「そうです。あなたたちは、人の子が全能の神の右に座り、/天の雲に囲まれて来るのを見る。」”

この箇所以外にも、イエス様が、ご自身が神の子であること、そして、ダビデの子つまりメシアであることを否定されなかったケースが、マルコ福音書の中にいくつか見受けられます(1:11、10:46-52、9:7-9)。「あなたは神の子だ」と叫ぶ汚れた霊どもの声が正しいのなら、それではなぜイエス様は、汚れた霊どもが、イエス様について証しすることを禁じられたのでしょうか。そして、何も汚れた霊どもだけに限らず、弟子たちに対しても、同じように戒められました。イエス様が変貌の山でお姿が変わり、白く光り輝き、そして、そこにモーセとエリヤが現れ、雲の中から「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これに聞け」という声を聞いた後でございます。その時、全く同じようなことを言われました。マルコ9:9をご覧ください。

“一同が山を下りるとき、イエスは、「人の子が死者の中から復活するまでは、今見たことをだれにも話してはいけない」と弟子たちに命じられた。”

イエス様は何も汚れた霊どもだけに限らず、弟子たちにも、ご自身が復活するまでは、神の子であることを、証ししてはならないと戒められたのです。ナザレのイエスが「神の子」であるということ、その理解は、彼の十字架の受難と、復活の光に照らされる時に、初めて可能になるからです。従って、イエス様は、ご自分がメシアであり、神の子であることを隠したり、否定しようとされたのではなく、むしろメシアとは何か、神の子とは何かについて、その理解を完全にさせようとされたということが分かってくるのです。イエス様が十字架に架けられ、復活した後に、初めて私たちは信仰によって、イエス様がメシアであること、イエス様が神の子であることの完全な理解に達するのです。

私たちにとってメシアとは何なのでしょうか。それは、私たちは全て神さまの御前に裁かれるべき罪人であり、私たちの人生の営みにおいて、この罪から来る様々な悲惨な原因を取り除いてくださる救い主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私たちを罪の奴隷から解放してくださるお方という事です。

私たちにとって神の子とは何なのでしょうか。それは、私たちの罪を贖うために、神の形でありながら、ご自身を無にされ僕の形をとり、人間の姿を取られへりくだり、私たちの身代わりに十字架に架かって死んでくださったという事です。罪のないお方が私たちの代わりに死んで下さり贖いを成就されたという事です。

この知識は聖霊によって、信仰を通して与えられるのですが、その際、私たちは悔い改めとイエス様への献身、自己否定とイエス様にすべてを委ねるという、ライフスタイルの180度の方向転換が伴うことになるのです。イエス様がメシアであり、神の子であることを、本当の意味で知るということは、それは、あたかも魂において新たな生まれ変わりを体験するような、そのような変化が伴うものなのです。それは、あたかも目のうろこが取れて今までに見たことのない新しい景色がそこに広がるような、そして今まで自分が持っていた価値観が完全にくつがえされるような、そのような変化が伴うものなのです。真の意味でイエス様とお会いし、イエス様を知るということは、知識的な現象ではなく、信仰によってもたらされる人格的な現象なのであります。

鎌倉雪の下教会の引退牧師で、加藤常昭先生という方がおられますが、先生の執筆した説教集には、次のような体験談が書かれていました。加藤先生の尊敬されていた先生が、しばしば加藤先生に語ってくださった言葉だということですが、その個所をそのままお読みいたします。

『教会は決して、いわゆる大衆伝道というのをしてはならない。何万もの人をスタジアムに集めて、たくさん集まった、たくさん集まったと大喜びするような伝道をしてはいけないのだ。われわれはまとめて人間を扱わないのだ。一人びとり、膝つきあわせるような言葉を交わし合うようなことでしか伝道はできない。だから、加藤さん、牧師は一人では伝道できない。ひとりでやろうと思ったら、疲れるだけだ。教会の皆に協力してもらって、教会の人たち一人びとりが膝つき合わせて、痛みの中にある人と対話ができるようにならなければ、教会の伝道はできない。』と言われたそうです。

イエス・キリストも魂を求め、救いへと導く時に、群衆をまとめて扱うことはなされませんでした。一人びとりを大切にされ、一人の魂をかけがえのないものとして大切に扱ってくださいました。伝道というのは、そういうものだと思います。そして、イエス様がご自分のことを言いふらさないように、ここに「神の子がいる!」と吹聴しないように、厳しく戒められたのも、同じ理由から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もし、私たち教会の伝道の方法が、単に群衆を惹きつけることを目標としているならば、そこで語られた言葉やそこで催されたイベントは、実はキリスト教的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様が人間の罪と、そこから生まれてくる病や苦しみや悲惨の中にうめいている群衆の悩みに、押しつぶされそうになりながら、群衆をまとめて扱うことはなさいませんでしたが、それにも拘わらず、そういった一人ひとりの悩みをはね返し、一人ひとりにもたらせてくださった命の力、それこそ私たちの頼るべきものなのです。教会が伝道することができるのは、まさにその力に生きた時だけであります。群衆の悩みによって私たちも押しつぶされそうになるでしょう。群衆の病によって私たち自身も押しつぶされそうになるでしょう。しかし、そこで主が私たち一人ひとりと共に耐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復活の主がそこに一緒に立っていてくださる。その命に生きる時に、私たち教会は、初めて一人ひとりの魂に、福音を宣べ伝えてい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

【結論】

 イエス・キリストは一人ひとりの魂に目を留められるお方です。私たちが救われたのも、イエス様が私たちのことを群衆としてではなく、一人の魂として取り扱っ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イエス様の目に、私たちは群衆ではなく一人ひとりなのです。そのような思いを持って、私たちもまだ、福音を聞かされていない世の人々に近づいてまいりましょう。まだ神の愛を知らず、病や苦しみの中に置かれている人々に、悲惨のうちにある人々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る病の癒しと、罪の支配の解放と、新しい命が与えられるように祈ってまいりましょう。

原稿のアイコンハングル語メッセージ

한 사람의 영혼

2022년 7월 10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마가복음 3장 7~12절

서론

오늘의 본문은 초기 갈릴리 전도에 대한 요약이 적혀 있습니다. 즉 복음을 전하며 병을 치유하고 악한 영을 쫓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요약부분으로서 오늘 살펴볼 본문이 기능하고 있습니다만 이 예수님의 사역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적인 입장에 있는 성전 당국자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군중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몰려왔다는 것이 적혀 있습니다. 군중들은 앞다퉈 경쟁하듯 몰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어쨌든 자기 자신의 병을 고침받기 바라고, 자신이 처한 너무나 비참한 상황에서 해방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세상가운데는 외견은 괜찮아보여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 채 얼마만큼 비참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문득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크리스챤 홈에서 자란 분들에게는 어쩌면 이 점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성인세례를 받은 분 중에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떠한 비참한 생활을 했었는지를 상기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성인세례를 받았는데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완전히 절망가운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퇴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고통가운데 힘들어 하는 많은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진정한 의미로 예수님과 만나 그들이 안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 해결될 수 있도록 우리는 날마다 기도해 나가고자 합니다.

(1) 군중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신 예수님

자, 7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회당에서 바다쪽으로 물러가셨다고 합니다. 지난 번에 보셨듯이 바리새파와 헤롯파가 결탁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지만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갈릴리 호수 쪽으로 물러나셨습니다. 거기에 엄청난 군중이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남쪽은 「유대, 예루살렘, 이두메」에서 왔습니다. 지도를 참고해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두메는 당시 에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이두메 지방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무렵 로마로부터 유대의 통치를 맡고 있던 헤롯 대왕도 실은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동쪽은 「요단 강 건너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펠라 지방과 데카폴리스 지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북쪽은 「두로와 시돈」에서 왔습니다. 즉 이방인의 땅 페니키아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게다가 이방인의 땅까지 포함하여 군중이 예수님을 향해 몰려왔습니다. 그 기세라면 오늘날의 아침 전철의 통근 러시를 연상시키는 엄청난 기세였음에 틀림없습니다. 3장 9,10절을 보십시오.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군중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다 듣고 앞다퉈 예수님을 향해 몰려왔습니다. 예언자로 믿었던 세례자 요한 때에는 마가복음 1장 5절을 보면 유대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요한에게로 왔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 세례자 요한 때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고치셨기 때문에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어쨋든 예수님을 만지려고 밀고 서로 밀치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명하시고 군중에게 짓눌리지 않도록 거기서 물러나기로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밀려오는 사람들이 자신을 만질 수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지만 닥치는 대로 병을 치유하고 고통과 슬픔을 제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군중도 실망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지고 병고침을 받으려고 일부러 멀리서부터 찾아 왔는데 예수님은 작은 배를 타고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뭐야, 엉뚱한 기대를 한 거잖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게다가 우리들이 이해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은 이후에 말씀하셨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2) 영들에게 많이 경고하신 예수님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교하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외치는 영들에 대해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습니다. 더러운 영의 이 증언이 틀렸다는 걸까요? 그것이 거짓말이고 속임수였다는 것일까요? 어떤 신학자는 바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실제로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도 메시아도 아니고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후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의도와 달리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창작되어진 이야기이며 마가복음서라고 하는 것은 실은 제자들의 신흥종교의 교리본이고 그래서 쓰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처럼 수많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었다면 유다의 배신으로 올리브 산에서 붙잡힌 밤, 그날 밤 즉석에서 열린 재판 중에 대제사장으로부터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대제사장의 말에 동의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날 밤 대제사장의 질문에 예수님은 「아니, 사실 저는 메시아도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라고 변명하기는 커녕 오히려 대제사장의 말에 동의하셔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61~62절을 참조하십시오.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 부분 외에도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다윗의 아들 즉 메시아임을 부정하지 않으신 경우가 마가복음에서 몇 가지 발견됩니다 (1장 11절, 10장 46~52절, 9장 7~9절).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외치는 더러운 영들의 목소리가 맞다면,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많이 경고하셨을까요? 그리고 더러운 영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훈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모습이 변하여 새하얗게 빛나고, 거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할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를 들은 뒤입니다. 그때 똑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마가복음 9장 9절을 참조하십시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은 더러운 영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제자들에게도 자신이 부활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 이해는 주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빛에 비춰질 때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숨기거나 부정하려고 하신 거이 아니라 오히려 메시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 이해를 완전히 시키려고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메시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야 할 죄인이며,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 죄로부터 오는 여러가지 비참한 일의 원인을 제거해 주시는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을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이시면서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태를 취하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무고한 분이 우리 대신 죽어주시고 속죄를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성령에 의해,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데 이때 우리는 회개와 예수님에 대한 헌신, 자기 부정과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라이프스타일의 180도 방향전환이 뒤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진정한 의미로 안다는 것은 마치 영혼이 새롭게 태어남을 체험하는 것 같은 그러한 변화가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눈의 비늘이 떨어져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경치가 거기에 펼쳐지는 것과 같은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완전히 뒤바뀌는 그런 변화가 동반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지식적인 현상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초래되는 인격적인 현상입니다.

카마쿠라의 유키노시타 교회의 은퇴목사님으로 카토 쓰네아키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만, 목사님이 집필한 설교집에는 다음과 같은 체험담이 적혀 있었습니다. 카토 목사님의 존경을 받던 목사님이 자주 카토 목사님께 해 주신 말이라고 하는데, 그 부분을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교회는 결코, 이른바 대중전도라고 하는 것을 해서는 안돼네. 몇만명의 사람을 스타디움에 모이게 해서 “많이 모였다, 많이 모였다”라고 크게 기뻐하는 전도를 해서는 안돼네. 우리는 한꺼번에 인간을 다루지 않는다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릎을 굻는 듯한 말을 주고 받는 것으로만 전도를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카토 씨, 목사님은 혼자서는 전도할 수 없어요. 혼자 하려면 피곤해질 뿐이야. 교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교회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아픔 속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 교회 전도를 할 수 있는 거라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영혼을 구하고 구원으로 인도하실 때 군중을 한꺼번에 모아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고 한 사람의 영혼을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로 다루어주셨습니다. 전도라는 게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도록,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도록 많은 경고를 하신 것도 이런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 교회의 전도 방법이 그저 군중을 끌어들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거기서 이야기된 말이나 그곳에서 열린 행사는 사실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죄와 거기서 태어나는 병과 고통, 비참함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군중의 고민에 짓눌릴 것 같으면서도 군중을 한데 묶어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민을 물리치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거져다 주신 생명의 힘,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전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힘에 살 때뿐입니다. 군중의 고민으로 인해서 우리 자신도 짓눌릴 것 같아요. 하지만 거기서 주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견디고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거기에 함께 서 계셔 주십니다. 그 생명에 살 때, 우리 교회는 비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주목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도 예수님이 우리를 군중으로서가 아니라 한 영혼으로 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우리는 군중이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도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다가갑시다.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병과 고통 속에 놓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비참함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병의 치유와 죄의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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