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を救うこと 생명을 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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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3章1節~6節
3:1イエスはまた会堂にお入りになった。そこに片手の萎えた人がいた。
3:2人々はイエスを訴えようと思って、安息日にこの人の病気をいやされるかどうか、注目していた。
3:3イエスは手の萎えた人に、「真ん中に立ちなさい」と言われた。
3:4そして人々にこう言われた。「安息日に律法で許されているのは、善を行うことか、悪を行うことか。命を救うことか、殺すことか。」彼らは黙っていた。
3:5そこで、イエスは怒って人々を見回し、彼らのかたくなな心を悲しみながら、その人に、「手を伸ばしなさい」と言われた。伸ばすと、手は元どおりになった。
3:6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出て行き、早速、ヘロデ派の人々と一緒に、どのようにして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始め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3章1節~6節
생명을 구하는 것
2022년 6월 12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마가복음 3장 1~6절
서론
3장 1절에는 「예수께서 회당에 다시 들어가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율법의 랍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다고 생각됩니다. 회당 가운데는 손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의 회당은 평소와 달리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여 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신을 의롭게 하기 위해 회당에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회당에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안식일이 사람을 심판하고 사람을 죽이는 날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불순한 동기에 의해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의 정체는 나중에 알 수 있지만,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오늘의 부분은 안식일을 둘러싸고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논쟁을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안식일은 지켜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거야! 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1) 안식일 규정은 지켜야 하는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이란 그들의 존재 기반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랍비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바리새인들을 존경하고 지지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준수하게 함으로써 유대교의 지배체제를 질서 있게 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자, 부정한 자, 죄인으로 간주되었고, 그러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차별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율법은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에 걸쳐 속박하는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바리새인이 가르치는 율법을 정면으로 비판한 사람이 예수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주 받은 사람, 부정한 사람, 죄인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며 그런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날도 예수님은 회당 안 바리새인들의 그 악의를 깨닫고 이에 대항하시듯 굳이 손 마른 사람을 향해 「한 가운데 일어서라」하시고 치유의 손길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2절을 보면 사람들은 주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때 예수를 안식일의 율법을 범한 자로 고발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십계명 제 4계명에 따르면 「이 날을 성별하기 위해 어른도 아이도 남녀 종도 가축도 기류자에 이르기까지, 그날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계명을 실천해 나가는 데 몇가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 어떻게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판단이 어려워 유대인들은 탈무드라고 불리는 입으로 전하는 「구전율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탈무드 속의 「가르침 (미슈나)」 부분에서 안식일을 보내는 법에 대한 규정을 39개 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수확해서는 안 된다」,「탈곡해서는 안 된다」, 「짐을 운반해서는 안 된다」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무엇을 가지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인지 그 판단의 어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생명의 위험에 빠진 경우에는 예외도 인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4장 5절) 이런 경우에는 생명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예외로 즉시 도와주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안식일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지 어기고 있는지 그걸 분간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바리새인 사이에서도 더 세밀한 파벌이 있었고(힐렐 학파, 샴마이 학파) 각각의 파벌에 따라 율법 해석이 달라 이는 명백히 안식일 위반이라고 단정할만한 객관적인 기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그 때 랍비의 주관적인 판단에 맡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에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성경 부분의 포인트는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실천해 나갈 때 형식적으로 갑갑하게 그것을 적용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 인간에게 다가선 적용, 피가 통하고 따뜻한 적용이 요구된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고 어떤 사람은 주장합니다. 예수님조차 안식일의 규정을 범하시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말하면 안식일의 예배라고 하는 것도 반드시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엄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답답한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자유로운 시간에 개개인이 원하는 장소에서 인간의 기쁨을 우선시하면서 예배는 드려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고방식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과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확실히 이런 생각은 우리도 자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획일적인 문구에 절대적으로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개별 사례에서 실천적으로 상대적으로 법을 적용해 나가자는 생각입니다. 흔히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이지만, 예를 들어 정부 관리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쫓기고 있고 아버지가 집안 헛간에 숨어 있었다고 칩시다. 그때 마침 정부 관리가 기관총을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네 아버지는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저기 헛간에 숨어 있어요”라고 바보같이 대답할 것이 아니라 “집 창문으로 나가서 숲 쪽으로 도망갔어요”라고 거짓말을 해도 무방하다는 겁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 죄가 되거나 죄가 되지 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소위 「결의론」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정해진 것을 의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실 평소 바리새인에게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율법 위반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형벌의 집행은 결국 바리새인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맡겨졌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짐을 운반해도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용서해 주겠다. 세 번째에는 처음으로 처벌을 받거나 그 비슷한 정도에서 정상 참작에 맡겨졌습니다. 율법을 조절하는 정도는 바리새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기서 바리새인과 같은 주장을 하셨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실제로 사도행전에 그려져 있는 초대교회로 눈을 옮겨 보면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 첫째 날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주 첫째날에 공적 예배를 함께 드리는 것이 중요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성경 부분의 핵심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 안식일 규정이라는 것은 상대적 경우에 따라서 달리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3장 4절에 적혀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안식일에 허용되는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3장 4절을 보십시오.
(2) 안식일의 의미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우리들은 이 부분을 읽고 “왜 예수님은 안식일에 치유를 하셔서 성전 당국자들에게 풍파를 일으키는 일을 하셨을까. 몇 시간만 기다렸다가 해가 진 뒤 치유를 베푸셨다면 안식일 규정에 걸리지 않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안식일의 절대적인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율법에서 허용하는 것이 무엇이냐며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이냐 라는 병행된 양자택일의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 질문의 대답이 선을 행하는 것이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장 27절에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졍해졌다라는 말의 의미는 지난 설교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것은 복음의 선언이지 안식일을 우리가 자유롭게 마음대로 지내도 된다는 식으로 인간지상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일곱 번째 날 안식일은 완전한 날, 하늘의 축복의 날을 상징했습니다. 이윽고 우리는 성경에 약속된 바와 같이 부활의 신체가 주어지고 죽음도 병도 없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예배란 하나님게서 죄인인 우리를 죄의 상태로 그대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분명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창조의 질서를 회복시켜 주신다. 분명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온전히 누리는 그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약속하듯 예수님께서는「안식일은 죄인인 너희들의 회복을 위해서 정해진 것이다」라고 복음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란 우리 인생의 골(goal)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은 이 안식을 향해서,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해서 믿음에 의한 걸음을 날마다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율법에서 허용되어 있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며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제시하신 것은 안식일에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의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언뜻 보기에는 우리들의 눈에는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처럼 보이지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기적을 본 바리새인들은 자신들과 전혀 공통점이 없는 헤롯당 사람들과 어울려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 것인가를 의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성전 당국자였다면 헤롯당은 헤롯 대왕을 추종하는 정치세력이자 여당이었습니다. 이 전혀 관계없는 「종교당국자」들과 「정치세력」이 오늘의 본문을 보면 결탁해서 의기투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들은 언뜻 보면 우리 눈에는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을 숭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안식일에 살인을 의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을 어긴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함」으로써 사실 안식일을 준수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바리새인들이 그날 살인을 의논함으로써 안식일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을 예배하는 안식일에 율법에서 허용되는 것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사람을 심판하고 사람을 죽이기 위힌 날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를 높이 내세우는 것입니다. 한편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신 메시아는 몇 시간을 더 기다려 해가 진 후 치유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굳이 그날 손 마른 사람에게 구원의 시대의 선물인 「완전함」과 「생명」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창조의 질서를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들에게 「완전함」과 「생명」을 주시는 약속이었음을 상기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이윽고 그날에 그 약속이 완성되는 것을 우리들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첫째 날에 함께 모여,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주일예배를 우리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이 날을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것처럼 서로 격려하고 서로 중보하는 날로 삼읍시다. 그리고 광야처럼 보이는 이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걷는 자로 살아갑시다.
【序】
3:1には、イエスは再び会堂にお入りになった。とあります。この日は安息日でありましたので、イエス様は会堂に入って、律法のラビとして神の言葉を教えていたと思われます。会堂の中には手の萎えた人がいました。しかし、この日の会堂は、いつもと違って何か様子が変でありました。人々は安息日に神様を礼拝するために集まって来たのではなく、律法を守っている自分を義とするために会堂に集まっていたのです。イエス様を罪に定めるために会堂に集まっていたのです。神に礼拝を捧げる安息日が人を裁き、人を殺す日となっていました。そのような不純な動機によって、礼拝を捧げる者は一体誰か!と思われるかも知れませんが、その人々の正体とは、後で分かりますが、ファリサイ派の人々でありました。本日の個所は、安息日をめぐりファリサイ派とイエス様が論争をされるお話しです。一見、イエス様が安息日規定を犯しているように見えるため、安息日というものが守っても、守らなくてもいいんだ!ということを教えているように見えますが、そう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様は私たちに安息日の本当の意味を教え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あります。
【1】. 安息日規定は守るべきか、守らないべきか
ファリサイ派の人々にとって、律法とは彼らの存在基盤を確かなものとするものでありました。彼らはラビとしてイスラエルの民に律法を教えています。民はファリサイ派の人々を尊敬し、支持していました。民に律法を遵守させることによって、ユダヤ教の支配体制を秩序づけていました。律法を守ることが出来ない人は呪われた者、汚れた者、罪人と見なされ、そういった人々はイスラエルの共同体から分離され差別される対象となりました。従って民にとって律法は、日常生活のすべての部分に渡り、束縛する重荷となっていたのです。そのようなファリサイ派の教える律法に、正面から批判したのがイエス様であったと言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イエス様は呪われた人、汚れた人、罪人たちと積極的に交わり、そのような人々に罪の赦しを宣言していたからです。この日もイエス様は、会堂の中のファリサイ派の人々のその悪意に気づき、それに対抗するかのように、あえて、手の萎えた人に向かって「真ん中に立ちなさい」と言われ、癒しの業をしてくださいました。2~3節をご覧ください。
“人々はイエスを訴えようと思って、安息日にこの人の病気をいやされるかどうか、注目していた。イエスは手の萎えた人に、「真ん中に立ちなさい」と言われた。”
2節に人々は、注目していたとあります。彼らは、この時、イエスを安息日の律法を犯した者として訴えるための機会を伺っていました。十戒の第四戒によれば、「この日を聖別するために、大人も子どもも男女の奴隷も家畜も寄留者に至るまで、その日、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と書かれています。しかし、実際にはその戒めを実践していく上で、いくつかの難しさもありました。それは、第一に、何をもって仕事をしなかったと言えるのか、ということです。その判断が難しく、ユダヤ人は、タルムードと呼ばれる、口で伝える「口伝律法」を作成しました。そのタルムードの中の「教え(ミシュナ)」の部分で、安息日の過ごし方に関する規定を39個、定めました。例えば、「収穫してはならない」、「脱穀してはならない」、「荷物を運搬してはならない」などです。このように何をもって、仕事をしなかったことになるのか、その判断の難しさがあった訳です。第二に、生命の危険に陥った場合には例外も認められていました。イエス様は次のようなたとえ話をされたことがあります。「あなたたちの中に、自分の息子か牛が井戸に落ちたら、安息日だからといって、すぐに引き上げてやらない者がいるだろうか。(ルカ14:5)」このような場合には、命に係わる問題ですので、例外としてすぐに助けてあげなければならないとされていました。ですから、このように見てきますと、安息日の律法をきちんと守っているのか、破っているのか、それを見分けるのが、非常に難しかったということが分かります。実際、ファリサイ派の間でもさらに細かい派閥があり(ヒレル派、シャンマイ派)、それぞれの派閥によって律法の解釈が異なっており、「これは明らかに安息日違反」だと断定できるような客観的な基準はなかったようです。ケースバイケースで、その時のラビの主観的な判断に委ねら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
マルコ2:27には、「安息日は、人のために定められた。人が安息日のためにあるのではない。」と書かれていますから、本日の聖書個所のポイントは、「律法という神の法を実践していく際に、形式的に、窮屈にそれを適用していくのではなく、もっと個々のケースにおいて、人間に寄り添った適用が、血の通った暖かい適用が求められるという事を言わんとしている」と、ある人は主張します。イエス様でさえ、安息日規定を犯していると思われるので、極端なことを言えば、安息日の礼拝というものを必ず、定められた時間と定められた場所において厳守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はなく、そういった窮屈な律法主義から抜け出して、個々人の自由な時間に、個々人の望む場所において、人間の喜びを優先しながら、礼拝は捧げられるべきだと主張するのであります。皆さんはこのような考え方をどのように思われるでしょうか。果たしてイエス様はそう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
確かに、このような考え方は、私たちもよく耳にすると思います。つまり法の適用にあたって、画一的な文言に絶対的に縛られるのではなく、個々のケースにおいて実践的に、相対的に法を適用していきましょうという考え方です。よく例えであげられるのは、嘘をついてはならないというのは、絶対的な真理ですが、例えば、政府の役人に自分の父親が追われていて、父親が家の物置に隠れていたとします。その時にちょうど、政府の役人が機関銃を持ってやって来ました。そして、「お前の父親はどこだ?」と言われた時に、「父親はそこの物置に隠れています」とバカ正直に答えるのではなく、「家の窓から出て行き、森の方へ逃げていきました」と嘘を言っても構わないということです。命を守るためには嘘をつくことも致し方ない。嘘をつくことも、個々のケースにおいて罪になったり、罪にならなかったりするという考え方です。これは、所謂、「決疑論」という考え方です。決められたことを疑うと書きます。
このような考え方は、実は、普段、ファリサイ派の人々において大いに利用されていました。律法違反に対する客観的な基準はなかったため、刑罰の執行は、結局、ファリサイ派の主観的な判断によって、委ねられていたのです。例えば、安息日に荷物を運搬しても一回目と二回目は許してやろう、三回目に初めて処罰をされたり、その辺のところは彼らの情状酌量に委ねられていました。律法のさじ加減は、ファリサイ派の人々の手に握られていたのであります。ですからイエス様がここで、ファリサイ派と同じような主張をされたとは考えられないのであります。それに、実際、使徒言行録に描かれている初代教会に目を移してみますと、彼らはイエス様の復活された、週の初めの日に共に集まり、礼拝を捧げている様子が描かれています。そこでは週の初めの日に、公けの礼拝を共に捧げることが大切にされていました。従って、本日の聖書個所のポイントは、「個々のケースに応じて、安息日規定とは、相対的にケースバイケースで適用されるべきだ!」ということ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むしろ、3章4節に書かれているイエス様のお言葉は、安息日に許されている、絶対的な基準を提示していると読み取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3章4節をご覧ください。
【2】. 安息日の意味
“そして人々にこう言われた。「安息日に律法で許されているのは、善を行うことか、悪を行うことか。命を救うことか、殺すことか。」彼らは黙っていた。”
私たちはこの箇所を読んで、「なぜ、イエス様は安息日に癒しを行い、あえてユダヤの宗教当局者たちに波風を立てるようなことをされたのだろうか。あと数時間待って、日が暮れてから癒しを行えば、安息日規定に引っかかることはなかったのに」と思ってしまいます。しかし、イエス様にとって、安息日の絶対的な基準に照らし合わせる時に、それではいけなかったわけです。
イエス様は安息日に、律法で許されていることとは何かということで、 “善を行うことか、悪を行うことか。命を救うことか、殺すことか”という並行した二者択一の質問を投げかけました。その質問の答えが、善を行うことであり、命を救うことであるということを強調しています。2章の27節において「安息日は人のために定められた」という言葉の意味は、前回の説教でも触れましたが、これは福音の宣言であって、安息日を、私たちが自由に、勝手気ままに過ごしてもよいというふうに、人間至上主義として理解してはならないと、説明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
七日目の安息日は、完全な日、天の祝福の日を象徴していました。やがての日、私たちは聖書に約束されているように、復活の身体が与えられ、死も病もない永遠の命が与え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安息日礼拝とは、神様が罪人の私たちを、罪の状態にそのまま放置されるのではなく、きっと、罪の奴隷から解放してくださり、創造の秩序を回復させてくださる。きっと、私たちに神の安息を完全に享受する、その日が来るであろうということを教えているのです。そのことを約束するかのように、イエス様は「安息日は罪人である、あなた方の回復のために定められた」と福音を語ってくださったのです。安息日とは私たちの人生のゴールを指し示しています。私たちはこの安息に向かって、天のエルサレムに向かって、信仰による歩みを日々歩ませていただいているのです。
従って、イエス様が「安息日に、律法で許されていることは、善を行うことであり、命を救うこと」だと提示されたのは、安息日にして良いことと、してはならないことの、絶対的な基準であると、読み取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イエス様はご自身、そのお言葉通り、一見、我々の目には安息日規定を破ったように見えましたが、安息日に「善を行うこと、命を救うこと」を実践されました。そして、このイエス様の奇跡を見た、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彼らと全く共通点のないヘロデ派の人々と一緒になって、どのように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始めたのです。ファリサイ派が宗教の当局者であったとすれば、ヘロデ派はヘロデ大王に追従する政治勢力であり、与党でありました。この全く関係のない、「宗教当局者」たちと「政治勢力」が、本日の個所では、結託し、意気投合しているのであります。その目的はイエス・キリストを殺すためでありました。大変皮肉なことです。彼らは、一見、我々の目には安息日を守り、神を崇めているように見えますが、実のところ安息日に殺人を企てているのです。つまり、安息日を犯しているように見えるイエス様は、「善を行い、命を救うこと」によって、実は安息日を遵守し、安息日を守っているように見える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その日に殺人を企てること」によって、安息日を破っているのです。
【結論】
神を礼拝する安息日に律法で許されていることは、善を行い、命を救う事によって、神を礼拝することです。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安息日を守っていると自負しながら、人を裁き、人を殺すための日としてしまいました。神を崇めているのではなく、自分たちの義を高く掲げているのです。一方、安息日の主として来られたメシアは、あと数時間待って、日が暮れてから癒しを行うのではなく、あえて、その日に、片手の萎えた人に、救いの時代の贈り物である、「完全さ」と「生命」を提供してくださいました。そのことを通して安息日というのが、まさに、罪の奴隷から解放され、創造の秩序を回復してくださり、私たちに「完全さ」と「生命」を与えて下さる約束であったということを思い起こさせるためでございます。やがての日に、その約束が完成されることを、私たちが信仰の目で眺め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私たちは週の初めの日に共に集まり、父・子・聖霊なる神様に礼拝を捧げています。この主日礼拝を私たちは大切にしながら、この日を「善を行い、命を救う」ように、互いに励まし合い、互いに執り成す日としてまいりましょう。そして、荒れ野のように見える、この厳しい現実の中にあっても、私たちは互いに愛し合いながら歩む者とさ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