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なた方は主キリストに仕えなさい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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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聖書 コロサイの信徒への手紙 3章18節~4章1節
3:18妻たちよ、主を信じる者にふさわしく、夫に仕えなさい。
3:19夫たちよ、妻を愛しなさい。つらく当たってはならない。
3:20子供たち、どんなことについても両親に従いなさい。それは主に喜ばれることです。
3:21父親たち、子供をいらだたせてはならない。いじけるといけないからです。
3:22奴隷たち、どんなことについても肉による主人に従いなさい。人にへつらおうとしてうわべだけで仕えず、主を畏れつつ、真心を込めて従いなさい。
3:23何をするにも、人に対してではなく、主に対してするように、心から行いなさい。
3:24あなたがたは、御国を受け継ぐという報いを主から受け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は主キリストに仕えているのです。
3:25不義を行う者は、その不義の報いを受けるでしょう。そこには分け隔てはありません。
4:1主人たち、奴隷を正しく、公平に扱いなさい。知ってのとおり、あなたがたにも主人が天におられるので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コロサイの信徒への手紙 3章18節~4章1節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라
2021년 8월15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골로새서 3장 18~4장 1절
서론
골로새서도 어느덧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골로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골로새 지방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경계하라는 서신이었습니다. 3장부터 4장까지 바울은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벗어야 할 것과 입어야 할 덕목을 열거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넘어가서 소위「가훈」이나 「가정교훈」이라고 불리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가훈」이나 「가정교훈」이라고 불리는 것은 교회가 처음으로 새로운 율법 같은 것으로 내세운 것은 아닙니다. 당시 헬레니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가정을 돌아보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고, 이런 가훈을 가르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바울은 전통적인 가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가르치는 가정교훈이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가훈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왜냐하면 형식적으로는 매우 유사하지만, 동기에 있어서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헬레니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가정교훈는 대개 가장이 어떻게 아내를 다스리고, 자녀를 다스리고, 노예를 다스리고, 사회를 평정할 것인가, 가장의 입장에서 지배하는 방법으로서의 「How to book」으로서 그 비결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3:17에 기록되어 있듯이 모든 동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를 가르치더라도 그 동기가 다르다면 그 결과도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솝 우회에 나오는 「세 명의 벽돌공」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여행자가 어느 마을 외곽의 외길을 걷고 있는데, 한 남자가 힘든 표정으로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여행자는 그 남자 곁에 멈춰 서서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뭘 하는지 보면 알잖아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는 여기서 벽돌을 쌓아야만 해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더운 날도 추운 날도, 바람이 부는 날도 벽돌을 쌓아야 합니다. 허리는 아프고 손은 이렇게 돼요.”남자는 자신의 갈라진 손을 보여주었습니다. “힘드시겠어요”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며 여행자는 계속 걸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열심히 벽돌을 쌓고 있는 또 다른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아까의 남자처럼 힘들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행자는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저는 여기서 큰 벽을 쌓고 있어요. 이게 제 일입니다.” “힘드시죠?”라고 물었더니 “별거 아니에요. 이 일 덕분에 나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어요. 여기서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일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힘들다고 하면 벌 받지요”라며 웃으며 말했습니다. 여행자는 계속 걸음을 옮겼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눈을 반작이며 활기차게 벽돌을 쌓고 있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아, 우리 말입니까? 우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성당을 짓고 있어요!” “대단하시네요.” “천만에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축복을 받게 될 텐데,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여행자는 그 남자에게 감사의 말을 남기고 다시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첫째, 일의 동기가 전혀 없든지 둘째, 혹은 동기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인지 셋째, 혹은 동기가 성당을 짓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여하기 위한 것인지, 그 동기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감사의 정도와 눈빛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가정교훈의 가장 중요한 동기 부분에 주 그리스도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세우면 어떤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생활비」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성취감」이나 「보람」을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의 상속을 받는다는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다는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하늘의 왕족이 되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1) 주안에서 마땅하게 남편에게 복종하라
오늘 본문의 성경 말씀 3:18~19절을 보시겠습니다.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먼저 부부 관계입니다.「남편에게 복종하라」라는 말이 나오고, 24절에도 「섬기느니라」로 번역된 단어가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다른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24절은 「하나님을 섬기라」는 뜻으로 「예배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18절은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 밑에 있으라」는 뉘앙스입니다. 당시 여성의 종속이라는 것은 사회적 관습과 같은 것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남성에 비해 여성의 권리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한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내들이 처한 위치, 신분은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아내들에게 강한 명령형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를 믿는 자로서 합당하게 자발적으로, 자유의지로 복종하라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복종하라」는 말은 결코 남녀의 평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1절에서 주안에서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는 주 안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갈라디아서 3:28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렇게 남녀 평등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무슨 뜻일까요?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셨다는 말씀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고전 15:28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15:28에서 복종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이 단어는 아내가「남편에게 복종하라」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복종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동등하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도 질서라는 것이 존재하듯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의 복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업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아내가 자발적으로 남편에게 복종할 때,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께 한 것처럼 거룩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이렇게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헬레니즘의 가정교훈에서는 보통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한 후에 「남편들아」라고 부르면서 아내를 어떻게 다스리고, 지배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놀랍게도 아내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남자보다 힘이 약한 여자에게 냉혈한 태도로 대하거나, 차가운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내의 실패를 자신이 짊어질 각오로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 점이 성경이 가르치는 가정교훈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어서 3:20~21을 보겠습니다.
(2)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둘째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강한 명령조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 강한 명령형 뒤에는 믿는자의 자녀들은 이미 언약의 자녀라는 것이 암암리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자의 자녀들은 결코 믿음을 가질지 안 가질지는 본인의 자유이며, 그들은 중립적인 입장의 인물로 취급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신자의 자녀들은 자신의 입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못해도 어른들과 똑같이 약속을 소유한 언약의 자녀들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고, 거룩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불신자의 아이들에 비해 본질적으로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의 특권으로 인해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비록 어떤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들은 무조건적으로 부모에게 순종함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업에 참여하며 자녀로서 성직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특히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힘으로 복종시키거나 때리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신앙양육을 맡은 자로서 자녀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낙심시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는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부모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녀의 그런 마음을 부모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지 말고, 자녀를 위해 항상 기도하면서 자녀의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믿음이 자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이어서 3:22~25를 보시겠습니다.
(3)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특히 종들을 향하여 많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열번을 토하고 있습니다. 종들은 자녀들과 마찬가지로「모든 일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상전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는 종들의 수적 우위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습니다. 종의 상전인 주인은 소수 계급이었고, 종은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계층으로 존재했습니다. 즉 노예제도는 사회에서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의 가정교회에도, 아마 종들이 주인들보다 수적으로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종에게는 상속재산 같은 것은 없습니다. 종의 자식은 여전히 종으로 살아갑니다. 종은 주인의 가재도구처럼 취급되어 결혼 할 권리도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종이라도 주님을 섬기면 주님으로부터 유업을 상속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바울 서신의 3:22부터 4:1까지를 읽었을 때, 독자인 종들은 혹시 자신이 지금 과연 상전을 섬기고 있는지, 주님을 섬기고 있는지 헷갈려서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헬라어로 「상전」과 「주」라는 단어는 똑같은 단어, 「키리오스」입니다. 이 단어가 복수형인 「키리오스」이면 인간의 상전을 가리키고, 단수형인 「키리오스」이면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상전들에게 순종하되」라고 명령하면서, 그 다음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는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상전을 섬기는 일이 어느새 주님께로 대체된 듯한 착각을 느낀 것은 아닐까요?
24절에는 결론처럼「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24절의 「섬기다」라는 단어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을 섬기다, 하나님을 예배하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번역으로는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섬기십시오」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사람들의 종으로, 노예로 섬기기 위해 오셨으니 노예들은 바로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주인을 진심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주인은 항상 우리를 게으른 자로 여기며 잔소리만 할 뿐이야. 어차피 우리는 주인에게 보상을 받을 수 없으니까”라고 말하면서 주인의 눈치를 보며 눈가림만으로 섬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의를 행한다면 그 불의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종이 주인을 성실히 진심으로 섬긴다면 그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고, 그 일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며, 하나님의 사업이며, 성직이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아직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그 사역을 감당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사업으로서, 성직으로서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역이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은혜로 구속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각자 맡은 사역도 아담이 감당했던 사역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업이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거룩한 사역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각자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감당하며 성직을 감당할 때, 하늘에서 얼마나 큰 상급이 준비될까요?
결론
각자 처한 위치는 다르지만, 무엇을 말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주 예수를 그 동기로 삼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 되고, 일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사업, 성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일상의 작은 사역들은 하늘에 쌓여 있고 마지막 날에 유업으로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序】
コロサイ書もいよいよ終わりに近づいてまいりました。このコロサイ書とは、イエス・キリストをはっきりと提示し、コロサイの地方に入ってきた偽りの教師たちの教えを警戒するようにという手紙でした。3章から4章にかけて、パウロは新しい人を着たあなた方は、どのように歩めばよいのか、具体的に脱ぎ捨てるべきものと、そして身に着けるべき徳目をリストアップしてきました。本日の箇所では、さらに具体的な内容に進み、所謂「家庭訓」とか、「身分律」と呼ばれているものを教えています。この「家庭訓」とか「身分律」と呼ばれるものは、教会が初めて新しい律法のようなものとして唱えた訳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当時のヘレニズム社会において一般的に見られたものでありました。しかし、偽りの教師たちは家庭を顧みることにあまり関心がなく、このような家庭訓を教えるケース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パウロは、伝統的な家庭訓を教えています。それでは、パウロの教える家庭訓とは、当時、一般的に見られた家庭訓と変わらないものだったのかと言えば、答えは「ノー」と言えるでしょう。なぜなら、形式的には非常に似ていますが、動機の部分において全く異なるからです。当時、ヘレニズム社会に見られた家庭訓は、凡そ、主人がどのようにして妻を治め、子供を治め、奴隷を治め、社会を平定するのか、主人の目線から、支配の仕方としての「ハウツー本」として、その秘訣が書かれていました。ところが、パウロは3章17節に書かれてありますように、すべての動機を、主イエスの名によって行うようにということです。同じ行為を教えていても、その動機が異なるのなら、もたらされる結果も変わってくることでしょう。皆さんはイソップ物語の「三人のレンガ職人」というお話を聞いた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簡単に紹介しますと、
ある旅人が、ある町外れの一本道を歩いていると、一人の男が難しい顔をしてレンガを積んでいました。旅人はその男のそばに立ち止まって、「ここで何をしているのですか?」と尋ねました。「何って、見ればわかるだろう。レンガ積みに決まっているだろ。朝から晩まで、俺はここでレンガを積まなきゃいけないのさ。あんた方にはわからないだろうけど、暑い日も寒い日も、風の強い日も、レンガを積まなければならないのさ。腰は痛くなるし、手はこのとおり」と言って、男は自分のひび割れた手を見せてくれました。「大変ですね」といたわりの言葉をかけて、旅人は、さらに歩き続けました。
しばらく行くと、一生懸命レンガ積みをしている別の男に出会いました。彼は先ほどの男のように、辛そうには見えませんでした。旅人は同じ質問をします。「ここで何をしているのですか?」「俺はね、ここで大きな壁を作っているんだよ。これが俺の仕事でね。」「大変ですね」といたわると、「なんてことはないよ。この仕事のおかげで俺は家族を養っていけるんだ。ここでは、家族を養っていく仕事を見つけるのに一苦労する。大変だなんていっていたら、バチがあたるよ」と笑いながら話してくれました。旅人は、さらに歩き続けました。
しばらく行くと、男が活き活きと目を輝かせて、レンガ積みをしているのに出くわしました。「ここで何をしているのですか?」「ああ、俺達のことかい?俺達は、歴史に残る大聖堂を造っているんだ!」「大変ですね」といたわると、「とんでもない。ここで多くの人が祝福を受けることになるんだ、なんと素晴らしいことだろう!」旅人は、その男にかえってお礼の言葉を残して、また元気いっぱいに歩き続けた、という内容です。
このように、①仕事の動機が全くないのか、②或いは動機が家族を養うためなのか、③或いは動機が大聖堂を建築し多くの人々に貢献するためなのか、その動機をどこに置くかによって感謝の度合いと、目の輝きが変わってくるということであります。これと同じように、パウロは家庭訓の最も大切な動機の部分に、主キリストを据えているのであります。それでは、キリストを据えることによって、結果として何がもたらされると言うのでしょうか。それは家族を養うための「食いぶち」どころ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多くの人に資するという「達成感や」、「やりがい」どころ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天の嗣業に与るという報いを受けるのです。神の相続に与るという報いを受けるのです。それが、どれほど栄光に満ちたものか言葉で言い表すことはできません。これこそキリスト者がロイヤルファミリーとされた特権である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
【1】. 主を信じる者にふさわしく、夫に仕えなさい。
本日の聖書箇所の3:18~19節をご覧ください。
“妻たちよ、主を信じる者にふさわしく、夫に仕えなさい。夫たちよ、妻を愛しなさい。つらく当たってはならない。”
最初に夫婦の関係です。「夫に仕えなさい」という言葉が出てきます。24節にも「仕えなさい」と翻訳された言葉がありますが、実は、これは違う言葉が使われていて、24節は、「神に対するサービス」のことで、「礼拝しなさい」という意味です。ところがこの18節は、「夫に服しなさい、夫の下につきなさい」というニュアンスです。当時、女性の従属というのは、社会的慣習のようなものでありまして、女性が男性に服従するのは当然のことと考えられていました。時代が時代だけに、男性と比べて、女性の権利は、現在とは比べものにならないほど制限されていました。従って妻たちの置かれていた立場、身分はどうしても低くなります。パウロはここで、妻たちに対し、強い命令形ではなく、何が何でも、ということではなくて、主を信じる者に相応しく、自発的に、自由意志によって服しなさいと、表現を和らげています。この「服しなさい」という言葉は、決して男女の平等を否定しているというのではありません。パウロはコロサイ3:11において、主にあって、ギリシア人も、ユダヤ人も、奴隷も、自由人も差別はないと明言していました。また、ガラテヤ書3:28には、主にあって、男女が平等であることをはっきり教えていました。ガラテヤ書3:28をご覧ください。
“そこではもはや、ユダヤ人もギリシア人もなく、奴隷も自由な身分の者もなく、男も女も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皆、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一つだからです。”
このように男女平等がはっきりと教えられています。それでは、「夫に服する、夫の下につく」とは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この言葉はイエス様が父なる神に服されたという時にも使われています。1コリント15:28をご覧下さい。
“すべてが御子に服従するとき、御子自身も、すべてを御自分に服従させてくださった方に服従されます。神がすべてにおいてすべてとなられるためです。”
15:28において、服従という言葉で三回出てきますが、この言葉は、妻が夫に仕えるという言葉と同じ言葉であります。御子は御父に服従されると書かれています。本質において同等であられる御父と御子の関係においても、秩序というものは存在するように、夫と妻の間にも神の創造の秩序が存在するということです。女は男の助け手として創造されました。
妻が夫に自発的に服する時、それは神の秩序に従うことになります。そして、その妻の服従は聖なる神の働きと見做されることでしょう。妻が自発的に夫の下につく時、それは、御子が御父にしたように聖職を全うしていると見做されることでしょう。このように妻が夫に服すること、これは御心に適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ヘレニズムの家庭訓では、普通、妻に服従するように命じた後に、「夫たちよ」と呼びかけて、妻をどのようにして、治めるのか、支配するのかということが語られます。しかしパウロは、驚くべきことに、どのように妻を愛するのか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夫は、男性より、力の弱い女性に対して、つらく当たったり、冷たい言葉をかけてはなりません。イエスの名によって、夫は妻の失敗を自分が担う覚悟で、妻を愛し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この点が、聖書の教える家庭訓の美しさだ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続いて3:20~21節をご覧ください。
【2】. どんなことについても両親に従いなさい。
“子供たち、どんなことについても両親に従いなさい。それは主に喜ばれることです。父親たち、子供をいらだたせてはならない。いじけるといけないからです。”
第二に親子の関係です。子供は、「両親に従いなさい」と強い命令口調になっています。どんな場合でも、絶対的に、無条件的に、従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それが主に喜ばれることだと言います。この強い命令形の背後には、信者の子供たちは、既に契約の子供たちであるということが暗に込められ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信者の子供たちは決して信仰を持つか、信仰を持たないかは本人の自由であって、彼らは中立の立場の人物として扱われ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つまり、信者の子供たちは信仰告白するまでは異邦人ということ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彼らは大人たちと全く同じように、約束を所有した契約の子供たちでありました。子供たちは既に契約の中に含まれていて、聖い者たち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子供たちが、よその子供たちと比べて本性的に聖いという意味ではなく、契約の特権によって聖いという意味です。たとえ、どのような親であっても、子供たちは無条件的に両親に従順することによって、主に喜ばれ、子供たちは神の働きに参与し、子供として聖職を全うしている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す。
そして両親は、特に父親たちは、子供たちを力によって服従させたり、子供たちを殴ったりするのではなく、子供たちを神様からの賜物として受け入れ、信仰の養育を任された者として、子供たちをいらだたせることなく、また、落胆させることがないように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子供は誰でも、どのような形であれ、親を喜ばせたいという気持ちを持っています。子供のそのような気持ちを親が自分のために都合よく利用するのではなく、子供のために常に祈りつつ、子供の信仰が育まれるように、信仰が自立していくように最善を尽くしていきましょう。続いて3:22~25節をご覧ください。
【3】. どんなことについても肉による主人に従いなさい。
“奴隷たち、どんなことについても肉による主人に従いなさい。人にへつらおうとしてうわべだけで仕えず、主を畏れつつ、真心を込めて従いなさい。何をするにも、人に対してではなく、主に対してするように、心から行いなさい。あなたがたは、御国を受け継ぐという報いを主から受け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は主キリストに仕えているのです。不義を行う者は、その不義の報いを受けるでしょう。そこには分け隔てはありません。”
パウロはここで、特に奴隷たちに対して、言葉を多く用いながら、熱く語っています。奴隷たちは、子供たちと同じように「どんなことについても」という言葉を添えながら、絶対的に主人に従順するように勧められています。
当時の社会というのは、奴隷たちの、その数の力によって支えられていました。奴隷の所有者、主人たちは少数階級であり、奴隷は社会になくてはならない階層として存在していました。つまり奴隷制とは、社会で当たり前の現象として受け止められていたのです。ですからコロサイの家の教会も、恐らく、奴隷たちが、主人たちより人数的に多かったと思われます。当然ですが、奴隷には相続財産などありません。奴隷の子はやはり奴隷として生きていきます。奴隷は主人の家財道具のように扱われ、結婚の権利もなかっただろうと言われます。そんな奴隷であっても主に仕えるのなら、主から相続に与ることができると言うのです。このパウロの書簡の3章22節から4章1節まで読んだ時、読者である奴隷たちは、もしかしたら、果たして自分が今、主人に仕えているのか、主に仕えているのか、分からなくなってきた、混同してきたという思いを持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ギリアシア語で、「主人」と「主」という言葉は全く同じ言葉で、キューリオスです。この言葉が複数形:キューリオイであれば人間の主人たちを指しており、単数形:キューリオスであれば主イエスを指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22節では「主人に絶対的に従順しなさい」と命令しておきながら、その後には「人にへつらおうとしてうわべだけで仕えず、主を畏れつつ、真心を込めて従いなさい。」とあり、また、さらに、23節では、人間に対してではなく、主に対してするように、心から行いなさいと勧めています。主人に対して仕えていた働きが、いつの間にか主に置き換えられているような錯覚を覚え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24節では結論のように、主キリストに「仕えなさい」、「礼拝しなさい」と言っています。この24節の、「仕える」という言葉ですが、先ほども触れましたが、神にサービスする、神を礼拝するという意味です。また、訳としては「仕えているのです」という翻訳も「仕えなさい」という翻訳も可能ですが、新しい聖書協会共同訳では「仕えなさい」と翻訳されていました。いずれにせよ、イエス様ご自身がこの世に人々の僕として、奴隷として仕えるために来られたので、奴隷たちはまさにイエス様の手本に倣って自分たちの主人に真心から仕え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万が一、「主人はいつも我々を怠け者と見做して、ガミガミ怒鳴るだけだ。どうせ我々は主人から報われることがないのだから」などと言って、主人の顔色を伺いながら、うわべだけで仕え、見えないところで不義を働くのなら、その不義の報いを受け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反対に、奴隷が、自分たちの主人に誠実に心から仕えるならば、その働きは神を礼拝することであり、その働きは神の御心に適い、神の働き、聖職となるとパウロは言うのです。
まだ、この世に罪が入って来る前、アダムは「この世界を治めよ」(創1:28)という使命を神様から頂きました。アダムがその働きを従事する時に、それは神の働きとして、聖職としてどれほど神を喜ばせる働きであったことでしょうか。今、私たちは、恵みによって贖われ、神の愛される、聖なる民とされました。それぞれが担っている働きもアダムが担っていた働きと同じように、神の働きであり、御心に適った、聖なる働きであるとパウロは言うのであります。それぞれが、それぞれの現場において神の働きに与り、聖職を全うする時に、天においてどれほど大きな報いが備えられることでしょうか。
【結論】
それぞれ、置かれている立場は異なりますが、何を話すにせよ、行うにせよ、すべてのことを主イエスの名によって行い、主イエスをその動機に据える時に、それは神の御心に適った働きとなり、日常の全ての仕事が神の働き、聖職、神礼拝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のその日々の小さな働きは天に積まれていて、やがての日に、相続に与るという報いを受け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