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にあるものを求めよ 위의 것을 찾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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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コロサイの信徒への手紙 3章1節~4節
3:1さて、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と共に復活させられたのですから、上にあるものを求めなさい。そこでは、キリストが神の右の座に着いておられます。
3:2上にあるものに心を留め、地上のものに心を引か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3:3あなたがたは死んだのであって、あなたがたの命は、キリストと共に神の内に隠されているのです。
3:4あなたがたの命である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と共に栄光に包まれて現れるでしょう。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コロサイの信徒への手紙 3章1節~4節
위의 것을 찾으라
2021년 7월25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골로새서 3장 1~4절
서론
우리는 지금 골로새서를 읽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그리스도론」에 대해 쓰여졌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론의 클라이맥스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위의 것을 찾으라」로 정했습니다. 비슷한 제목으로, 예전에 사카모토 구루 씨의 「위를 향하여 걸어가자」라는 아주 유명한 히트곡이 있었습니다. 사물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비록 힘들고 슬픈 인생이라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가사입니다. 당시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기를 배경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 놓여있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 가운데,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메세지가 아니라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자매들에게 이 메세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1절을 보겠습니다.
(1) 위의 것을 찾으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바울은 골로새의 형제자매들에게「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고 말하면서 부활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일로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의 전조로, 이미 2장 20절의 말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고 말하고 있습니다. 2장 20~21절을 보시겠습니다.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20절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죽은 것」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일어난 사실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인이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라는 것입니다. 옛 자아가 죽고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이전의 나의 죄악된 삶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한번 종지부를 찍고 부활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살아있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기정사실을 바울은 그 사실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정사실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우편에 앉게 되었다는 것인데,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면 역시 그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서 우리는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역시 과거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 묘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이것은 결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막연하고 확실성이 희박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좀 더 형이상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살자」라거나 「좀 더 고상한 삶을, 한 단계 더 우아한 삶을 살자」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액세서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통치자와 적대하여 전 재산을 몰수당해도 아깝지 않은 그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목숨까지 빼앗겨도 아깝지 않은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국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본향인 하늘의 도성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순례자이지만, 하늘 예루살렘이야말로 우리의 기업이요, 목적지이며, 하늘 예루살렘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염세적이 되거나 세상을 포기하고 현실도피를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위의 것을 찾는 것」은 이 땅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할 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땅에서 땅에 발을 딛고 감사와 기쁨으로 경건하게 사는 것과 하늘의 도성을 추구하며 사는 것은, 확실히 양립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늘의 도성이란 무엇인가
하늘의 도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지난 2장에서 바울은 금욕주의와 거짓 겸손의 동기를 폭로하고 비판했습니다. 금욕주의 거짓 겸손이라는 것은「더 충만해지고 싶다」, 「더 거룩해지고 싶다」는 소망에서 나온 것이지만, 결국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떠난 자기중심적인 가르침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지혜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 지상의 것」이 아닌, 「위의 것」을 마음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시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위의 것을 찾으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2절에서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이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할까요? 3절을 읽어보면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게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의 생명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왜 땅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말고 땅의 것을 버리라고 권면하는가 하면, 그것은 너희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은 좀비와 같다는 말씀이군요. 이 또한 놀랍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짜 국적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여권을 보면 국적이 일본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의 이중국적을 가진 것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택하신 족속, 왕의 반열에 오른 제사장, 거룩한 백성」으로 찬란한 영광과 함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광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것처럼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요, 왕의 계보를 잇는 제사장임에 틀림없지만, 종으로 걸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시온주의 운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아모스 9장 11절)」라는 예언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입니다. 더 나아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현재 이슬람교의 바위의 돔(황금사원)이 세워져 있는 그 자리에 다윗의 성전을 다시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즉, 시온주의 운동은 「성경의 약속대로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성경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성전은, 진정한 예루살렘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왕 노릇을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왕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도성에서 왕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에 불과하며, 마치 광야를 헤매듯, 폭풍우 치는 바다를 헤엄치듯, 큰 환난 가운데서도 말씀을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의 걸음을 내딛으며 세상에 증거하도록 인도받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생을 마치면 즉시 하늘의 도성으로 끌어올려져 지상의 수고를 마치고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저 자신도 예전에 잘못 이해했던 점인데, 믿는 자들은 세상의 끝 날인, 그리스도의 재림 때 비로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키타 목사님이 쓰신 「종말의 소망으로 산다」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우리는 죽은 후 일단 대기실에서 쉬면서 세상 끝날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후에 「일단 한숨 돌리며서 재림이라도 기다리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동시에 우리의 영은 하늘로 끌어올려져 면류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가오는 핍박을 용감하게 견뎌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승리의 면류관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고, 죽으면 즉시 하늘의 도성에 들어가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왕으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지난 달 우리는 교인이었던 Y자매를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생각해보니 2019년 성탄절에는 교회에 오지 못하는 Y자매의 집을 방문하여 캐롤링으로 찬양을 전하고 교제의 시간을 가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매우 기뻐하셨고 돌아갈 때는 쥬스까지 챙겨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교회에 출석하던 시절, 남편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열심히 간구하며 남편의 병상에서 이와나가 목사님을 통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간증해 주셨던 일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유가족이나 자매와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분들에게는 매우 슬픈 경험이었지만, 자매의 영혼은 하늘의 도성으로 이끌려 승리의 면류관을 받고 이 세상의 임시 거처가 아닌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가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처럼 다스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천국은 여러 가지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강이 흐르고 생명나무가 있는 낙원이라든지, 혹은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지성소가 있는 성전이라든지, 혹은 모든 금과 보석을 가진 왕국으로 요한계시록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하늘에 실제로 존재하는 실제를 이 세상의 한정된 것들로 묘사한 것입니다. 천국은 말하자면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선하고, 가장 진실하고, 고귀하고,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들로 인해 최고의 영광으로 드높인 곳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하늘 도성은 언젠가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인가 하면, 예수님의 재림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다시 오셔서, 온 교회를 자신의 영광에 참여시키는 날입니다. 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절은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재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늘의 예루살렘이 지상에 내려옵니다. 그곳에서 천사들은 위대한 왕의 종들이고, 먼저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도성의 시민이 됩니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순식간에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어 이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휴거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9~11절과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1장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렇게 해서 하늘 도성이 실제로 지상에 강림하여 나타나고, 성도들은 그때 부활의 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부활하여 하늘의 우편에 앉게 된 이상, 우리의 진정한 국적은 영광의, 하늘 도성에 있고, 그리스도는 그곳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임시 거하는 동안, 항상 위의 것을 찾으며, 위의 것을 생각하며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걸어가도록 합시다. 우리의 사랑의 행위는 믿음으로 만들어지지만,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늘에 연결된 확실한 소망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하늘 도성의 소망에서 믿음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序】
私たちは、今コロサイ人の手紙を読み進めております。コロサイ書はキリスト論について書かれていると言われますが、本日の箇所は、キリストの再臨について触れているという意味から、キリスト論のクライマックスを迎えているのではと思わされます。
本日の説教題を「上にあるものを求めよ」と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似たようなタイトルで、昔、坂本九さんの「上を向いて歩こう」という大変有名なヒットソングがありました。物事を、肯定的に積極的に考えることによって、たとえ、つらく、悲しい人生でも、きっと乗り越えていく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歌詞でございます。当時の日本の高度経済成長期を背景とし、その厳しく劣悪な環境の中に置かれていた労働者の姿が思い起こされます。そのような中にあって、大きな慰めと希望を与えてくれる歌だと思いました。それでは、本日の箇所において、パウロはコロサイの人々に同じようなことを言っているのかと言うと、恐らくそうではないと思われます。なぜなら、パウロはすべての人々に対するメッセージとして語っているのではなく、コロサイとラオディキアにいる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兄弟姉妹に向けてこのメッセージを語っているからです。それではキリスト者にとって、「上にあるものを求めよ」とは一体どういう意味を持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1節をご覧ください。
【1】. 上にあるものを求めて
さて、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と共に復活させられたのですから、上にあるものを求めなさい。そこでは、キリストが神の右の座に着いておられます。
パウロはコロサイの兄弟姉妹に対し「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と共に霊的に復活させられた」と、復活が過去のある時点において起こったこととして語っています。この言葉が出る伏線として、すでに2章20節の御言葉で、「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と共に死んだ」ことが語られていました。2:20-21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と共に死んで、世を支配する諸霊とは何の関係もないのなら、なぜ、まだ世に属しているかのように生き、「手をつけるな。味わうな。触れるな」などという戒律に縛られているのですか。
この20節もやはり、「キリストと共に霊的に死んだ」ことが、過去のある時点において起こった事実として語られています。パウロに言わせるなら、キリスト者とは何かと言えば、洗礼を受けた時点で、キリスト共に十字架に死んで、そしてキリストと共に復活させられた者であると言うのであります。古い自分に死んで、聖霊によって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人であると言うのであります。従って、今、私たち聖徒が、この世にあって生きているのは、以前の私の罪深い命がそのまま継続しているのではなく、そこに一度終止符が打たれて、復活の命によって、キリストの命によって生かされている。つまり、生きているのはもはや私ではなく、キリストが私の中に生きているというのであります。このことが、これから起こる約束として与えられているのではなく、もう、既に起こった既成事実を、その事実通りにパウロは語っているのです。この既成事実をさらにたどっていくのなら、キリストの体である私たち聖徒たちは、既にキリストと共に復活させられ、キリストと共に天の右の座に着座させ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が、エフェソ書2:6を見るとやはりそのような内容が書かれています。エフェソ2:6をご覧ください。
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共に復活させ、共に天の王座に着かせてくださいました。
ここでは、私たちは既に、天の王座に「共に着かせて下さった」とやはり過去の出来事として書かれています。大変不思議な感じがいたしますね。そうしますと、キリスト者にとって、「上にあるものを求める」とはどういうことかと言うと、これは、決して「肯定的・積極的思考を持って生きよう」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のようなぼんやりとした確実性の薄いものでありません。或いは、「もう少し形而上学的に、哲学的に生きよう」とか、「もう少し高尚な生き方を、ワンランク上の優雅な生活をしよう」というのでもありません。キリスト教はそのような、アクセサリーの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たとえ、この世の統治者に敵対し全財産が没収されたとしても惜しくないようなものであります。たとえこの世においては迫害され、憂き目に遭い、命さえ奪われたとしても惜しくないようなものであります。それは「神の右に着座されたキリストがおられる天を求める」ということだからです。「聖徒たちの故郷である天の都を求める」ということだからです。私たち聖徒は、この世では、旅人であり、寄留者であり、巡礼者でありますが、天のエルサレムこそ、私たちの嗣業であり、目的地である、天のエルサレムこそ、本当の我が家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こんなことを言うと、厭世的になったり、この世を諦めて、現実逃避することを勧めているのかな?とも思ってしまうかもしれませんが、そういうことでもありません。なぜならキリスト者が「上にあるものを求める」ということは、この地において一人一人に与えられた神の召しに、忠実に応答する時に成就されるからです。キリスト者にとって、この世で地に足を付けながら、感謝と喜びをもって敬虔に歩むことと、天の都を追及して歩むことはしっかりと両立するからです。
【2】. 天の都とは何か
天の都とは具体的な何なのかということについてさらに考えを進め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コロサイ書3:2~3節をご覧ください。
上にあるものに心を留め、地上のものに心を引か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あなたがたは死んだのであって、あなたがたの命は、キリストと共に神の内に隠されているのです。
前回、2章において、パウロは、禁欲主義と偽りの謙遜の、その動機を暴露し、批判していました。禁欲主義や偽りの謙遜というものは、「もっと満たされたい」「もっと聖化されたい」という願いから出て来たものですが、結局、頭であるキリストから離れた自己中心的な教えであって、一見、知恵あるように見えるかもしれませんが、それらは神様から出て来たものではなく、人間から出てきたものだというのであります。
「人間的なもの、地上的なもの」ではない、「上にあるもの」に心を留めなさいと言っています。ところで、パウロは再び「上にあるものを求めなさい」という言葉を、違う言葉によって繰り返しています。1節では「熱心に追求しなさい」という表現を使い、2節では、「思いに抱きなさい、念じなさい」という表現を使っています。なぜ、上にあるものを求め、上にあるものに心に留めることを、パウロは口酸っぱく勧めるのでしょうか。3節を読み進めますと、「あなたがたは死んだのであって、あなたがたの命は、キリストと共に神の内に隠されている」からだと言っています。つまり、あなた方の命は、あなた方の本来の生活は、この地上にあるように見えるけれども、実は、キリストと共に神の内に隠されているからだと言うのです。なんと素晴らしいことでしょうか。そして、何故、地上のものに心を引かれないように、地上のものを捨てるように勧めるのかと言えば、それは、あなた方はこの世に依然として生きているように見えるけれども、実は、死んでいるからだと言うのです。この世においてあなた方はゾンビのようだということですね。これもまたびっくりです。こういうわけで私たちの本当の国籍は天にあるのです。パスポートを見ますと国籍は日本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ますが、実際は天と地に二重国籍を持つような者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ね。
聖書の中で私たちキリスト者は、「選ばれた民、王の系統を引く祭司、聖なる国民」として輝かしい栄光とともに紹介されています。しかしこの栄光は、地上において成り立つ事柄ではなく、天において成り立つ事柄でございます。聖徒たちはこの世にあってはイエス様が歩まれたように、既に神の子であり、王の系統を引く祭司には違いありませんけれども、僕として歩むことになるからです。
皆さんはシオニズム運動という言葉を聞いた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ダビデの幕屋が再び復興されるだろう(アモス9:11)」という預言に従って、パレスチナにユダヤ人国家を建設しようとする運動です。さらには、はっきりとは分かりませんが、現在イスラム教の岩のドームが建立されているその場所に、ダビデの神殿を建て直そうと目論んでいるかもしれません。つまり、シオニズム運動とは、「聖書の約束通り、この世において自分たちが神の栄光に入れられる」と主張しているのです。しかし、これは、明らかに誤った聖書解釈であります。なぜなら真の神殿は、真のエルサレムは、この世ではなく天にあるからです。聖徒たちが王として振舞うことになるのは、この地上においてではなく、天の都において王として振舞うことになるのです。この地においては、私たちは旅人であり、寄留者に過ぎず、まるで荒れ野を彷徨うかのように、まるで嵐の海を進んで行くかのように、大きな患難の中で御言葉にしがみつきながら、信実な歩みを一歩一歩重ねて、世に対し証しをしていくように導かれるのです。しかし信者たちはこの世で生を全うすると、直ちに天の都に引き上げられ、地上の労苦を終えて安息を得ることになります。
ここで一点、勘違いしてはならないことは、私自身も以前誤って理解していた点ですが、信者たちは世の終わりの日に、キリストの再臨において、初めて救いを受け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牧田先生の書かれた「終末の希望に生きる」という本に詳しく書かれていますが、私たちは死後、一旦、控室で休憩するように世の終わりの救いを待つ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死後に、「ま、とりあえず一服しながら、再臨でも待つか」というのではないのです。死ぬと同時に、私たちの霊は天に引き上げられ、冠を受けることになるのです。だからこそ、初代教会の聖徒たちは迫ってくる迫害に勇気をもって耐え忍ぶことが出来たのです。勝利の冠が私たちの為に準備されている、そして死後、直ちに天の都に入れられ、キリストと共に御座に座り、親しい交わりに入れられ、王として治めることになるのです。
先月、私たちは教会員であるY姉妹を天に送りました。思えば、2019年のクリスマスの時には教会に来られなくなったY姉妹のご自宅をキャロリングで訪問させていただき、賛美を届け、交わりの時を持たせて頂きました。その時大変喜んでいただいたことが思い起こされます。帰り際にジュースの差し入れまでしてくださいました。また、まだ教会に通っていた頃は、ご主人がイエス様を受け入れてくれるように一生懸命とりなし、ご主人の病床で岩永先生を通して洗礼を授けることができたことを、劇的にお証ししてくださったことなども覚えています。Y姉妹の死は、ご遺族の方々、或いは姉妹と特に親しい関係を持っておられた方々にとって、大変悲しい経験となりましたが、しかし、姉妹の霊は天の都に引き上げられ、勝利の冠が与えられ、この世の仮住まいではない、真の故郷に戻り、イエス様との親しい交わりの中に入れられ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そしてキリストと共に王のように治めているのです。
聖書で天の都とは、色々なイメージで描写されていますが、例えば、川が流れ命の木がある楽園であったり、或いは、神ご自身が住まわれる至聖所のある神殿であったり、或いはあらゆる金と宝石を持った王国として黙示録に描かれています。こういった描写は天に実際に存在するその実在を、この世の限られたものなどによって描写されたものであります。天の都とは、言ってみれば、天と地のすべての被造世界にある、最も良いもの、最も真実で、高貴で、聖く、愛らしく、美しいものによって、最高の栄光に高められた場所として考えてい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しかし、この天の都は、いつの日か人の目に見える形で顕わにされることになります。その日はいつかと言えば、イエス様の再臨の日です。イエス様が見える形で再び戻って来られ、全教会をご自身の栄光の中に参与させる日であります。3:4節をご覧ください。4節はまさにキリストの再臨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
【3】. キリストの再臨
あなたがたの命である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あなたがたも、キリストと共に栄光に包まれて現れるでしょう。
イエス様が再臨される時、天のエルサレムが、地上へ降りてきます。そこで、天使たちは、偉大な王の僕たちであり、先に死んだキリスト者たちは、その都の市民となっています。そして地上にいるキリスト者たちは、天を仰ぎながら、キリストの再臨によって一瞬に復活の体に変えられて、この天のエルサレムに携挙されるのです。黙示録21:9~11と1テサロニケ4:16~17をご覧ください。
黙示録21:9~11
さて、最後の七つの災いの満ちた七つの鉢を持つ七人の天使がいたが、その中の一人が来て、わたしに語りかけてこう言った。「ここへ来なさい。小羊の妻である花嫁を見せてあげよう。」この天使が、“霊”に満たされたわたしを大きな高い山に連れて行き、聖なる都エルサレムが神のもとを離れて、天から下って来るのを見せた。都は神の栄光に輝いていた。その輝きは、最高の宝石のようであり、透き通った碧玉のようであった。
1テサロニケ4:16~17
すなわち、合図の号令がかかり、大天使の声が聞こえて、神のラッパが鳴り響くと、主御自身が天から降って来られます。すると、キリストに結ばれて死んだ人たちが、まず最初に復活し、それから、わたしたち生き残っている者が、空中で主と出会うために、彼らと一緒に雲に包まれて引き上げられます。このようにして、わたしたちはいつまでも主と共にいることになります。
このようにして天の都が実際に地上に降って現れ、聖徒たちはその時復活の体によって、新しい天と新しい地において、永遠に生きることになるのです。
【結論】
私たちはキリストと共に霊的に死んで、キリストと共に霊的に復活させられ、天の右に着座させられた以上、私たちの本当の国籍は、栄光の天の都にあり、キリストはそこで神の右に着座しておられます。これが私たちの希望です。私たちはこの地上において寄留者として仮住まいしている間、常に上にあるものを求め、上にあるものを思いに抱きながら、希望の中を信仰によって歩ませていただきます。私たちの愛の行いは信仰によって生み出されますが、私たちの信仰は、まさに天に連結されている確かな希望によって支えられていて、天の都の希望から信仰が湧き出てく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