キリストの割礼である洗礼を受けて 그리스도의 할례인 세례를 받고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コロサイの信徒への手紙 2章8節~15節
2:8人間の言い伝えにすぎない哲学、つまり、むなしいだまし事によって人のとりこにさ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それは、世を支配する霊に従っており、キリストに従うものではありません。
2:9キリストの内には、満ちあふれる神性が、余すところなく、見える形をとって宿っており、
2:10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において満たされているのです。キリストはすべての支配や権威の頭です。
2:11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において、手によらない割礼、つまり肉の体を脱ぎ捨てるキリストの割礼を受け、
2:12洗礼によって、キリストと共に葬られ、また、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た神の力を信じて、キリストと共に復活させられたのです。
2:13肉に割礼を受けず、罪の中にいて死んでいたあなたがたを、神はキリストと共に生か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神は、わたしたちの一切の罪を赦し、
2:14規則によってわたしたちを訴えて不利に陥れていた証書を破棄し、これを十字架に釘付けにして取り除いてくださいました。
2:15そして、もろもろの支配と権威の武装を解除し、キリストの勝利の列に従えて、公然とさらしものになさいまし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コロサイの信徒への手紙 2章8節~15節
그리스도의 할례인 세례를 받고
2021년 7월4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골로새서 2장 8~15절
서론
교회는 목자이신 예수님이 돌보시는 양무리입니다. 늑대인 사탄은 목자가 있는 한 맛난 먹이인 양들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사탄이 거기서 생각해낸 전략은 양과 목자를 분리시키는 전략입니다. 만약 양이 혼자 방황하면 쉽게 양을 포로로 잡아 요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카레 광고에「오세치(일본의 설날에 먹는 설음식의 명칭)도 좋지만 카레도 좋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캐치프레이즈가 기억에 남습니다. 「오세치도 좋지만 카레도 좋습니다」라는 말은 결코 오세치 요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묘하게 카레를 끼워 넣는 수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탄의 수법도 이와 매우 비슷해서 「그리스도도 좋지만 ○○도 좋다」예를 들어 「그리스도도 좋지만 할례도 좋다」와 같이, 그리스도를 결코 부정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상대화시키거나 그리스도에 무언가 플러스 알파를 덧붙임으로써, 사실상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8~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중보자의 의미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의 권세의 머리시라
바울은 골로새 지방에서 유행하던 사상을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바울이 결코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철학도 하나의 학문이고, 학문 자체가 선도 악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그 철학을 가지고 종교를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혹은 인간의 전통과 풍습에 의해 인간이 신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어떤 종교를 마음대로 만들어내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영을 따라 그 줄에 서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따라 그 줄에 서느냐 둘 중 하나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이며, 우상이나 사탄을 숭배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인 이유는 그것이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주어진 종교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한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배 방식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율법의 규정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만약 율법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죄로 규정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도 없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보자」란 무엇인가 하면, 문자적으로는「중개자」「중매인」이라는 뜻입니다. 애초에 인간은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써 타락했고,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선천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에게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 자유롭게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깊고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 펼쳐져 있고, 누구도 그것을 뛰어넘어 초월하신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그리스도라는 사다리, 그리스도라는 계단을 만들어 주시고 다시 한 번 인간과의 교제를 회복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직후에 주어졌습니다. 이른바 원복음이라 불리는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너」라는 것은 뱀을 말합니다. 여자는 하와입니다. 이 약속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창세기 타락 직후부터 예언된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이며, 구약시대의 역사는 이 십자가를 향해 수렴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골로새 지방에서 유행하던 가르침은 어떤 가르침었을까 하면, 그들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개자는 중개자라 해도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개자가 아니라 다른 천사나 어떤 영적인 존재들도 역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로 생각햇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는 그러한 영적 존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중보자와 바울이 가르치는 유일한 중보자와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결정적인 차이는, 바울이 가르치는 중보자는 사람이 되셔서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신 갚아 주셨다는 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점에서 그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성자가 아버지 앞에 두신 그 영광을 다 버리고 사람이 되어 낮고 천한 종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 이유는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죄인들과 동등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인들의 눈높이에 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죄 없으신 분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반면 거짓 교사들은, 십자가를 그런 대리 속죄의 죽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영과 육을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영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순간에 나사렛 청년 예수에게서 떠났을 것이라고 공상을 펼칩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천사의 한 사람 혹은 어떤 영적 존재의 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의 그 십자가의 죽음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하며, 결코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의 중심」「역사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충만함이 깃들어 있고, 모든 통치와 권위의 머리가 되신다고 담대하게 주장합니다.
(2) 하나님 백성의 특권
다시 골로새서로 돌아와서 11~14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세례를 받은 골로새 교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특권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여기에「할례」와「세례」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원래 할례는, 남성의 포피를 잘라내는 것인데, 이는 생식기능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할례의 의미에 대해 조금 생각해볼까 합니다. 성경에서 할례는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 5절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16장에서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창세기 16장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16장 마지막에,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 17장으로 넘어가서,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데, 그 사이 13년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침묵을 지키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침묵은 「왜 나를 신뢰하지 않느냐!」라고 아브라함에게 징계를 주시기 위한 침묵의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힘으로 살겠느냐? 아니면 스스로 죽고 은혜의 힘으로 살겠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 힘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내가 죽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능력으로 살 것인가 하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령하셨는데, 17장 12~1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하나님은 이렇게 할례를 명령하셨고, 1년 후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 때 일어난 일입니다. 더 이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몸인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바로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약속의 아들이었고, 이스마엘이 육신의 힘으로 태어난 것에 반해, 이삭은 기적으로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할례는 자기 힘에 죽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골로새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도 옛 자아에 대한 죽음,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강물에 “첨벙!”하고 잠길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강에서 일으킴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난 것을 상징합니다. 이방인인 골로새 교인들은 당연히 몸에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사실 너희가 받은 그 세례는 구약에서 할례를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받은 세례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함이었지만, 바로 우리를 매일 비난하는 채무증서가 모두 못 박혀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대신 처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형벌은 이미 집행되었고, 죄인인 우리의 죄가 완전히 속량되어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교제가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함이, 충만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된 골로새 교인들에도 하나님의 충만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골로새서로 돌아가서 2장 15절을 보시겠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로마 황제가 승리의 개선행진을 위해 로마로 돌아갈 때, 무장해제된 적군들이 황제의 뒤를 이어, 쇠사슬에 묶인 채 비참한 모습으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는데, 이때 적군은 공개적으로 구경거리가 되어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도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예수님이 벌거벗겨지고 수치를 당하는 것으로 마치 사탄의 왕국의 승리인 것처럼 비춰졌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탕으로 새 언약이 세워지고, 우리를 고소하고 우리를 불리하게 만들었던 모든 채무증서가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완전히 성취되었고,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죽음에 승리하셔서, 마귀의 역사를 멸하셨고, 마귀와 악령들은 개선행진의 뒤를 이어 끌려가는, 수치를 당하고 구경거리가 되어 그대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을 보시겠습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처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받은 세례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돌아보며 가리키고 있다는 것, 즉 골로새 교인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골로새 교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문법적인 것인데, 12~13절에 「함께 장사되고」「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함께 살리시고」라는 세 개의 「함께」가 나옵니다. 이 후의 동사에 주목해보면 모두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장사된 것」「부활한 것」「살리심을 받은 것」이 모두 기정사실로서 과거의 사건이며,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미 부활은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비록 이 세상이 신비하고, 강렬하고, 자극적이고, 새롭고 매력적인 유혹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와 「그리스도도 좋지만 ○○하면 어떻겠느냐」고 여러가지 형태로 유혹할 때, 우리들에게는 유일안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이미 함께 묻혔고, 이미 함께 부활하였고, 이미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믿음의 삶이 기다림의 삶이라 할지라도, 말씀으로 혹은 성례전으로 날마다 공급받으면서 이 기정사실 위에 굳건히 서고, 거기에 주목하면서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걸어가도록 합시다.
【序】
教会は羊飼いであるイエス様に養われる羊の群れであります。狼であるサタンは羊飼いがいる限り、美味しそうな羊をさらって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サタンがそこで思いついた作戦というのは、とにかく羊を羊飼いから分離させる作戦です。もし羊が一人でさまようなら、簡単に羊を虜にして料理することが出来るからです。昔、カレーのCMで「おせちもいいけどカレーもね」というキャッチフレーズがありました。私は今でもそのキャッチフレーズを覚えています。「おせちもいいけどカレーもね」という言い方は、決しておせち料理を否定していませんが、したたかにカレーを挟み込んでくる手法だと思います。サタンの手口もこれと大変似ていて、「キリストもいいけども、○○もね」例えば「キリストもいいけども、割礼もね」という具合に、決してキリストを否定しませんが、キリストを相対化させたり、キリストに何かプラスαを加えることによって、実質的にキリストから離れさせようとするのです。8~10節をご覧ください。
【1】. 仲保者の意味
“人間の言い伝えにすぎない哲学、つまり、むなしいだまし事によって人のとりこにさ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それは、世を支配する霊に従っており、キリストに従うもの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の内には、満ちあふれる神性が、余すところなく、見える形をとって宿っており、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において満たされているのです。キリストはすべての支配や権威の頭です。”
パウロはコロサイ地方で流行していた思想のことを、「人間の言い伝えにすぎない哲学、つまり、むなしいだまし事」であると表現しています。ここで注意したいことは、パウロは決して哲学という学問そのものを否定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なぜなら哲学というのも一つの学問であって、学問それ自体、善でも悪でもないからです。それでは何が問題なのかと言うと、その哲学を持って宗教を作り出そうとする試みです。或いは人間の伝統や風習によって、人間が神を頭の中で想像し、ある宗教を勝手に作り出そうとすることが問題だというのです。究極的に言えば、私たちには、次の二つの内一つしかありません。それは、世を支配する霊に従ってその列に並ぶのか、或いは、キリストに従ってその列に並ぶのか、どちらかです。この世の全ての宗教は、人間によって考え出された宗教であり、偶像やサタンを拝む宗教であります。キリスト教が唯一、真の宗教である所以は、それが、人から出たものでなく、神の啓示によって与えられた宗教であり、神様が人間に、ご自身を啓示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あります。人間は、神様がご自身を現わしてくださった限りにおいて神知識をもつことが許されるのです。そして、人間は、神様がおっしゃられた礼拝の仕方を通して、神様に礼拝を捧げなければなりません。旧約の時代、神様はご自身の民に律法を与えてくださったので、律法の規定に従って神様に礼拝を捧げることが出来ました。もし、律法の規定に従わないで自分勝手に礼拝を捧げるなら、それは罪に定められました。新約の時代には、神様はご自身の民にイエス・キリストを与えてくださいました。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神様に礼拝を捧げ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イエス様を通してでなければ私たちは神様に近づくこともできませんし、神様に礼拝を捧げることもできません。このような意味においてイエス様は私たちの唯一の仲保者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それでは、仲保者とは何かと申しますと、文字的には仲介人、仲人という意味です。そもそも人間はアダムが罪を犯してしまったことによって堕落してしまい、人は誰でも例外なく、生まれつき罪ある者として生まれてくるようになりました。従って、罪人である人間には、アダムとエバが罪を犯す前に、自由に享受することができた神様とのあの交わりが、断絶されてしまいました。人間と神様の間には、深い、底知れない深淵が横たわっていて、誰もそれを飛び越えて、超越された神様と自由に交わることが出来なくなりました。ところが神様が、みずから進んで罪人の所に訪ねてきて下さり、キリストという梯子、キリストという階段を掛けてくださり、もう一度、人間との交わりを回復されようとされました。その約束が、エデンの園において堕落した直後に与えられています。所謂、原福音と呼ばれている創世記3章15節の御言葉です。
“お前と女、お前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わたしは敵意を置く。彼はお前の頭を砕き/お前は彼のかかとを砕く。」”
お前というのが蛇のことです。女はエバです。この約束は、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成就されました。十字架はまさに創世記の堕落直後から預言されていた「時の中心」であり、旧約時代の歴史は、この十字架に向かって収斂されていくのであります。
それでは、コロサイ地方において流行していた教えとは、どのような教えかと言いますと、彼らもやはり、イエス・キリストを、神と人間の間の仲介者として認めていました。しかし仲介者は仲介者でも、キリストは唯一の仲介者ではなく、他の天使たちや、ある霊的は存在も、やはり神と人との仲介者として考えられていました。あくまで、キリストはそのような霊的存在の中の一つに過ぎ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れでは、偽りの教師たちの教える仲介者と、パウロの教える唯一の仲保者とでは、一体何が違うのでしょうか。決定的な違いは、パウロの教える仲保者とは、人となって、私たち罪人の罪を代わりに償ってくださったという点でございます。つまりキリストの十字架の出来事をどのように捉えるかという点において、その違いが明瞭に出てくるのです。御子が、父の御許にいたあの栄光を全て放棄し、人となられ、低く僕としてこの世に来られたその理由は、罪は別として、あらゆる点で罪人と等しくなるためでありました。そして、私たち罪びとの目線に立たれ、私たちの罪を償うために、罪のないお方が、代わりに十字架に掛けられ、呪いを受けられたのです。
一方、偽りの教師たちは、十字架をそのような代理贖罪の死として捉えません。第一に、キリストが私たちの罪を贖うために、人となられたということを決して認めることができません。霊と肉を別々に考えようとします。もっと言えば、キリストの霊は十字架の瞬間に、青年ナザレのイエスから出て行ったに違いないと空想を広げるのです。第二に、キリストが神ご自身であることも認めません。キリストは天使の一人であったり、ある霊的存在の一人として考えます。ですからナザレのイエスのその十字架の死とは、たまたま偶然に起こった出来事であると考えて、決して「神の時の中心」、「歴史の転換点」などとは考えません。しかしパウロは、十字架に死なれたキリストにこそ、神の満ち溢れる充満が宿っておられ、そして、すべての支配や権威の頭であると大胆に主張するのです。
【2】. 神の民の特権
コロサイ書に戻って続いて11~14節をご覧ください。ここでは、洗礼を受けたコロサイ人が、イエス様から頂いた特権について書かれています。
“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において、手によらない割礼、つまり肉の体を脱ぎ捨てるキリストの割礼を受け、洗礼によって、キリストと共に葬られ、また、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た神の力を信じて、キリストと共に復活させられたのです。肉に割礼を受けず、罪の中にいて死んでいたあなたがたを、神はキリストと共に生か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神は、わたしたちの一切の罪を赦し、規則によってわたしたちを訴えて不利に陥れていた証書を破棄し、これを十字架に釘付けにして取り除いてくださいました。”
ここで、「割礼」と「洗礼」という言葉が出てまいりますね。そもそも割礼とは何かと言えば、男性の包皮を切り取ることですが、これは生殖機能の死を意味していました。割礼の意味について少し考えてみたいと思いますが、聖書の中で割礼はアブラハムにまでさかのぼります。アブラハムは神様から創世記15章5節において、あなたの子孫は星のように増し加えられるだろうという約束されていました。ところがその約束を待ちきれず16章において女奴隷のハガルを通してイシュマエルをもうけてしまいました。創世記16章2節をご覧ください。
“サライはアブラムに言った。「主は私に子どもを授けてくださいません。どうか私の女奴隷のところに入っ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私は彼女によって子どもを持つことができるかもしれません。」アブラムはサライの願いを聞き入れた。”
16章の最後に、イシュマエルを生んだ時のアブラハム年齢が86歳であったと書かれています。次に17章に移りまして、アブラハムが99歳になった時に、神様は再びアブラハムに、語り掛けますが、この間の13年間、神様はアブラハムに対して沈黙し続けたと考えられます。この沈黙は「なぜ私の力に信頼しないのか!」とアブラハムに懲らしめを与えるための沈黙期間のようでした。神様はアブラハムに対し「自分の力で生きるのか?それとも、自分に死んで、恵みの力によって生きるのか?」と問い質しているのです。この質問は現代に生きる私たちにも、そのまま適用できるでしょう。信仰とは、自分の力で生きるのか、それとも、自分に死んで、イエス様によって、恵みの力によって生きるのか、という闘い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アブラハムが99歳になった時に、神様はアブラハムに割礼を命じられました。17章12~13節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のうちの男子は皆、代々にわたって、生後八日目に割礼を受ける。家で生まれた者、また、あなたの子孫ではないが、外国人から銀で買い取ったすべての者がそうである。あなたの家で生まれた者、またあなたが銀で買い取った者は必ず割礼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私の契約は、あなたがたの体に記された永遠の契約となる。”
神様は、このようにして割礼を命じられ、その一年後にイサクが生まれました。アブラハムが100歳、サラが90歳の時の出来事です。もはや死んだも同然のような体であるアブラハムとサラから、イサクが与えられたのです。まさにイサクは神様の恵みによって生まれた約束の子であり、イシュマエルが肉の力によって生まれてきたのに対して、イサクは奇跡によって生まれてきた子でありました。従って割礼というのは、自分の力に死ぬということを象徴していたのです。コロサイ書の表現を借りるなら、肉の体を脱ぎ捨てるということを象徴していたのです。
これと同じように洗礼も、古い自分に死ぬこと、肉の体を脱ぎ捨てる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洗礼は、川の中にジャボン!と沈められた時に、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上で死んだという意味です。そして川から起こされる時にキリストの復活と共に蘇らされたことを象徴しています。異邦人であるコロサイ人は、当然、その身に割礼を受けていませんでしたが、「実はあなた方が受けたあの洗礼は、旧約において割礼を受けたことと同じですよ!」と、パウロは説明しているのです。コロサイ人の受けた洗礼とは、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を意味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罪のないイエス様が十字架につけられたのは、私たちの罪を代わりに償うためでありましたが、十字架上においてまさに私たちを日々責め立てている債務証書が全てくぎ打ちされて、イエス様によって処罰されました。すると、どういうことになるでしょうか。刑罰は執行されて、罪人である私たちの罪が完全に贖われ、自由に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様を通して神と和解され、交わりが再び回復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それだけではなく、キリストにおいて神の充満が、満ち溢れているように、キリストに結ばれているコロサイ人においても、やはり神の充満が満ち溢れているのです。コロサイ書に戻りまして2:15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して、もろもろの支配と権威の武装を解除し、キリストの勝利の列に従えて、公然とさらしものになさいました。”
ローマ皇帝が勝利の凱旋の為にローマに帰ってくるときに、武装解除された敵兵が皇帝の後を鎖につながれてみじめな姿で歩かされました。彼らはローマ帝国の奴隷としての身分になり下がる訳ですが、この時、敵兵は公然と見世物にされて辱めを受けるのです。このことが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においても起こったというのであります。キリストの十字架上で起こったことは、イエス様が裸にされ、辱められ、あたかもサタンの王国の勝利であるかのように映りました。ところがその後に大逆転が起こったのです。キリストが息を引き取られた瞬間に、神殿の幕が上から下に真っ二つに引き裂かれ、新しい契約がキリストの血潮に基づいて立てられ、私たちを訴え、私たちを不利に陥れていたすべての債務証書が完全に破り捨てられました。キリストにおいて律法が完全に成就され、隠されていた神の秘義が公然とされたのです。イエス様は十字架と復活によって死に勝利され、悪魔の働きを滅ぼし、悪魔と悪霊どもは凱旋において辱められ、見世物とされ、そのまま獄に縛り付けられました。ヘブライ人の手紙2:14-15をご覧ください。
“ところで、子らは血と肉を備えているので、イエスもまた同様に、これらのものを備えられました。それは、死をつかさどる者、つまり悪魔を御自分の死によって滅ぼし、死の恐怖のために一生涯、奴隷の状態にあった者たちを解放なさるためでした。”
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とは、このように栄光に満ちた神の御業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忘れてはならないのは、コロサイ人が受けた洗礼は、まさにこの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を振り返って指し示しているということ、つまり、コロサイ人もキリストと共に十字架に葬られ、復活のキリストがコロサイ人の一人一人の内に生き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もう一つ注目したいこととして、文法的なことですが、12~13節に共に葬られ、共に復活させられ、共に生かしてくださったという、三つの「共に」が出てまいります。この後の動詞に注目しますと、全て過去形になっています。つまり、葬られたこと、復活させられたこと、生かしてくださったことがすべて既成事実として過去の出来事であり、コロサイ人においてもう既に復活は起こったということが強調されています。
【結論】
ですから、たとえこの世が、神秘的で、強烈で、刺激的で、新しく魅力的な誘惑をもって、私たちに近づき、「キリストもいいけど○○したら」どうか、などと迫ってくる時に、私たちには唯一の仲保者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がいることを決して忘れてはなりません。パウロの強調していることは、すでに共に葬られたこと、すでに共に復活させられたこと、すでに共に生かしてくださったことであります。たとえ、キリスト者のこの世における信仰の歩みが、待ち望む歩みとなりますが、御言葉によって或いは礼典によって日々養われながら、この既成事実の上に堅く立ちつつ、そこに目を留めつつ、信仰が強固にされるように歩ま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