裁きが神の家から始まる時が来た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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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ペトロの手紙一 4章12節~19節
4:12愛する人たち、あなたがたを試みるために身にふりかかる火のような試練を、何か思いがけないことが生じたかのように、驚き怪しんではなりません。
4:13むしろ、キリストの苦しみにあずかればあずかるほど喜びなさい。それは、キリストの栄光が現れるときにも、喜びに満ちあふれるためです。
4:14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の名のために非難されるなら、幸いです。栄光の霊、すなわち神の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とどまってくださるからです。
4:15あなたがたのうちだれも、人殺し、泥棒、悪者、あるいは、他人に干渉する者として、苦しみを受けることがないようにしなさい。
4:16しかし、キリスト者として苦しみを受けるのなら、決して恥じてはなりません。むしろ、キリスト者の名で呼ばれることで、神をあがめなさい。
4:17今こそ、神の家から裁きが始まる時です。わたしたちがまず裁きを受けるのだとすれば、神の福音に従わない者たちの行く末は、いったい、どんなものになるだろうか。
4:18「正しい人がやっと救われるのなら、/不信心な人や罪深い人はどうなるのか」と言われているとおりです。
4:19だから、神の御心によって苦しみを受ける人は、善い行いをし続けて、真実であられる創造主に自分の魂をゆだねなさい。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ペトロの手紙一 4章12節~19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2021년 5월 2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서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구원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 때 하늘에서 받을 상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상급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면, 선한 행위에 대한 상급인데, 선한 행위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것이「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전에 닌텐도 게임기로 마리오 브라더스 게임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1단계부터 시작해서 클리어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보너스 스테이지가 나옵니다. 보너스 스테이지에서는 금화를 마음껏 획득할 수 있고, 마리오가 점프하면서 모든 금화를 획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나타나는 고난도 사실은 이 보너스 스테이지처럼 금화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한 일은, 하나하나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하늘에 쌓아두셨다가 마지막 날에 구원받은 자들에게 보너스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급은 각각 균등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10달란트, 어떤 사람은 4달란트 등 사람에 따라 받는 상급이 다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 달의 빛과 별들의 광채가 각각 다르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에서 받을 영광과 상급도 각각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어진 생명은 장차 영원히 살게 될 생명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짧고 덧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선한 일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생명이 비록 짧더라도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 될까요? 이 생애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풍성히 쌓을 수 있습니다. 12~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첫머리에「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식으로 쓴 것이 아니라, 이 편지가 애초에 로마에 있던 베드로가, 소아시아 사람들에게 회람판처럼 읽힌 서신이고, 수신자는 소아시아의 흩어진 유대인과 그들에 의해 전도된 이방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베드로는 아마도 서신의 독자가 될,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을 가리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격려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박해라고 하면 지금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신 등을 보면 당시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박해와 그에 다른 순교가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6:17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 흔적이란 보통 노예나 가축에게 새기는 굴욕적인 낙인 또는 문신을 말합니다. 주인이 누구인지 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의 경우, 아마도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박해 중에 받은 39번의 채찍질을 다섯 번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몸에 남아있는 생생한 흉터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흔적을 몸에 새겼다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는데, 바울은 그 채찍질을 5번이나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바울의 몸에는 정말 깊은 상처가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는 베드로전서 1,2장을 쓰고 얼마 후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 베드로가 「너희도 곧 그런 박해를 당하게 될지 모르나 놀라거나 의심하지 말고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재림 때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고, 크게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의 의미로서 첫 번째 의미가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이란 사랑하는 주 예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 형제자매들도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만났을 때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사도행전 5:40~4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5장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1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이때 사도들은 채찍을 맞고 능욕을 당했는데, 이것이 매우 기뻤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더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하고 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그분의 고난에 함께 동참할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의 고난을 함께 맛본다면 그 이후의 영광도 함께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빛의 자녀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14~16절을 보시겠습니다.
(2)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것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난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라고 베드로는 지적합니다. 이 표현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쉐키나의 구름」을 떠올리게 합니다. 임재의 구름은 언약궤가 보관된 성막의 지성소 위에 떠올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진을 치고 장막을 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침에 일어나 장막에서 나오면 진의 중심에 항상 하나님의 쉐키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치욕을 받을 때에 너희에게, 즉 교회 위에 임하실 것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성소로서 영광의 영이 우리 위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상상만 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가 미우라 아야코 씨는 투병 생활 중에 요한복음 9:3절의 말씀에 용기를 얻었다고 자서전에서 간증했습니다.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이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물었을 때의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폐결핵과 척추측만증이라는 난치병을 앓고 있던 미우라 아야코 씨는 이 말씀과 만나기 전까지 ‘왜 나만.. 왜 나만..’이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며 갈등의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이 말씀을 만나고, 자신의 난치병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시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큰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영이 머물고, 실제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6절에는 「그리스도인(헬라어:크리스티아노스)」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이 구절과 사도행전 11:26, 26:29, 단 세 번만 나오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신자들에게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우습게 보기 위해 차별적인 용어로 붙여진 것입니다. 「크리스티아노스」라고 하면서 우습게 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차별을 받고, 고난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4:9절에서 자신은 그리스도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4장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단언컨대, 이 구절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을 원망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의 말씀입니다. 보통은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사람들에게 드러났을 때 “이봐,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야, 쳐다보지 말고 저리 가라!”고 말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그렇게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구경거리가 됨으로 낮아지고 비천하게 되어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바울이 몸소 본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소수자의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항상 부꾸러운 자로 비천하게 여겨지고 낮아지지만, 사실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그리스도인에게 머물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견뎌냄으로써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세상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7~19절을 보시겠습니다.
(3) 고난은 그리스도인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고난의 세 번째 의미는, 고난이 그리스도인을 정결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12절에「불 시험」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은 금을 정련하는 「도가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금세공인에게 “당신이 금을 도가니 불 속에 넣을 때 얼마나 오랫동안 불 속에 넣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금세공인은 “금을 불 속에서 꺼내어 보고, 금에서 내 얼굴이 거울처럼 선명하게 보일 때까지 금을 불 속에 넣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금을 만들 때 불을 통과시키면 주변에 있는 더러운 철이나 다른 물질이 모두 타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순수한 금만 남게 됩니다. 완벽하게 정련된 금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비추는 것처럼 빛이 납니다. 이 불 같은 시련, 즉 고난을 통해 정련되는 과정은 17절의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에서의 심판이 교회의 시련, 정결케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은 이미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화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시간에 여유가 있고, 돈에 여유가 있다면, 아마도 사람은 그 시간과 여유로운 돈으로 죄밖에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죄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며, 세상의 유혹의 힘에 굴복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시련을 통해 정결케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라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지만, 「겨우 구원을 받으면」이라는 것은 혹시 믿는 자들 중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지만, 다만 믿는 자에게 인생을 결코 넓은 입구로 들어가는 평탄한 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가시밭길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다음과 같은 반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의인이 예수님 때문에 이미 받았어야 할 구원, 안식, 승리는 언제쯤 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온전히 소유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죽을 때」라고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경건한 자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시련을 당하거나 고난을 겪는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즉, 신자의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성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화는 우리 생전에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후에는 더 이상 불의 심판이 없습니다. 죽음은 성화의 절정이며, 이때 비약적인 성화가 일어나 죄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우리는 긴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게 됩니다(요한계시록 7:9,14절). 그러므로 신자에게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며, 육체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날마다 범하는 죄를 완전히 끝내는 것입니다. 반면 불신자에게 죽음은 죄의 형벌이며, 사후에 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일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면서 고나을 당할 때에도 선한 일을 계속하며 자신의 영혼을 창조주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결론
지금까지 고난의 의미에 대해 세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주 예수님이 겪으신 그 고난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둘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고,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하나님 눈에는 영광으로 빛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병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기에 기쁘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쩨 의미는 고난이 그리스도인을 정련하여 순금같이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생 동안 시련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성화를 위한 것이며,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하늘에 큰 상급이 쌓이고, 마지막 날에 이 하늘에 쌓인 상급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序】
神さまは私たちキリスト者に二つのプレゼントを与えてくださいました。一つは救いであり、もう一つは私たちがその時に天から受ける報い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この報いというのは、一体何かと言いますと、良き業に対する報いですが、良き業の最たるものが、「キリストの苦難に与ること」だと言えるでしょう。
皆さんは昔、ファミコンのマリオブラザーズというゲームをした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ステージ1から始まりまして、クリアをしていくと、ある場面でボーナスステージが出てきます。ボーナスステージでは金貨を取り放題になっていてマリオがジャンプしながら全ての金貨をゲットできるようになっています。私たちの人生に現れる苦難というのも、実はこのボーナスステージのように金貨をゲットすることだと考えてみてください。キリスト者の良き業は一つ一つ神様に覚えられていて、天に積まれており、それが、終わりの日に救いに入れられた者たちにボーナスとして分かち合われるのです。そしてこの報いは、それぞれ均等に分け与えられるのではなく、ある人には10タラントン、ある人には4タラントンというふうに、人によって受ける報いは異なります。夜空の星を見るならば、月の輝きや星々の輝きがそれぞれ異なるように、神の子らの天で受ける栄光と報いもそれぞれ異なってくるのです。従いまして私たちのこの世で与えられている命は、やがて永遠に生きることになる命と比べるなら、それは比較にならないほど短いものであり、あっという間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この世での、良き業を通してのみ、私たちは天に宝を積む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を考えるなら、この生涯は、たとえ短くとも、何とかけがえのなく、貴重な時間となることでしょうか。この生涯の中で、キリストの苦難に与ることを通して私たちは天に豊かに宝を積むことができるのです。12~14節をご覧ください。
【1】. キリスト者の苦しみはキリストの苦難に与ること
“愛する人たち、あなたがたを試みるために身にふりかかる火のような試練を、何か思いがけないことが生じたかのように、驚き怪しんではなりません。むしろ、キリストの苦しみにあずかればあずかるほど喜びなさい。それは、キリストの栄光が現れるときにも、喜びに満ちあふれるためです。”
冒頭に「愛する人たち」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これは、ペトロが信者たち一人ひとりの顔を思い浮かべて「愛する人たち」というふうに書いた訳ではなくて、この手紙が、そもそもローマにいたペトロから小アジアの人々に回覧版のように読まれた手紙でありまして、受け取り人は小アジアの散らされたユダヤ人と、彼らによって伝道された異邦人であると考えられますから、ペトロはおそらく、手紙の読者となる、直接会ったことはない多くの人々に指して「愛する人たち」と呼びかけているのはないかと思われます。それは、苦難の中にあっても信者たちが一つになるように、励ますためだと思われます。迫害と言いますと、今、日本に住んでいる私たちにとって、中々想像しにくいところ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使徒言行録やパウロの書簡などを見ますと、当時、キリストの御名を証しする、初代教会の信者たちに対して、大変深刻な迫害とそれに伴う殉教があったことが記録されています。例えばガラテヤ書6:17でパウロは次のように断言しています。
“これからは、だれもわたしを煩わさないでほしい。わたしは、イエスの焼き印を身に受けているのです。”
この焼き印とは何かと言いますと、普通、奴隷や家畜につけられる屈辱的な焼き印ですとか入れ墨のことであります。所有者が誰かを表示するためです。パウロの場合、おそらくパウロが迫害の中で受けた39のむち打ちを五回も受けたと使徒言行録に書かれていますが、その、体に残った生々しい傷跡を指して、キリストの焼き印を身に受けていると言っていると思われます。40回、鞭打ちをするなら死んでしまうので、39回にしておこうということですが、パウロはその鞭打ちを5回も受けたということで、パウロの身体には本当に深い傷が残されていたと推測できるのです。ペトロも同じように多くの迫害に会いました。彼はペトロの手紙1、2を書き終えて、しばらくの後にローマにおいて殉教したと言われています。そのペトロが、「あなた方もそのような迫害を間もなく経験することになるかもしれないが、驚き怪しむことのないように。むしろ喜び続けなさい、いっそう喜びなさい」と言うのです。なぜなら、キリストの苦しみに与ることができるからであり、キリストの再臨の時、喜びに満ち溢れることになる、大喜びすることになると言うのです。私たちの苦難の意味として第一の意味がここで語られています。それは、苦難とは愛する主イエスのその苦しみに共に与らせていただくということです。初代教会の兄弟姉妹もイエス様の故に苦難に会ったときに、そのことを大変誇りに感じました。使徒言行録5:40~42の御言葉をご覧ください。
“使徒たちを呼び入れて鞭で打ち、イエスの名によって話してはならないと命じたうえ、釈放した。それで使徒たちは、イエスの名のために辱めを受けるほどの者にされたことを喜び、最高法院から出て行き、毎日、神殿の境内や家々で絶えず教え、メシア・イエスについて福音を告げ知らせていた。”
この時、使徒たちは鞭で打たれ、辱められたこと、これがとても嬉しかったわけです。イエスの名によって話してはならないと命じられたのにも拘わらず、なお一層メシア・イエスについて福音を告げ知らせ続けたということです。キリストの名に故に、その苦しみに共にあずからせていただくこと、これは何という大きな恵みでしょうか。彼の苦しみを共に味わうなら、後の栄光も共に味わうことになるでしょう。そして、何よりキリストの故に苦しむということは、私たちがまさにキリストの所有であり光の子であることの証拠でもあるのです。続いて14~16節をご覧ください。
【2】. 苦しみは神の栄光がとどまること
“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の名のために非難されるなら、幸いです。栄光の霊、すなわち神の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とどまってくださるからです。あなたがたのうちだれも、人殺し、泥棒、悪者、あるいは、他人に干渉する者として、苦しみを受けることがないようにしなさい。しかし、キリスト者として苦しみを受けるのなら、決して恥じてはなりません。むしろ、キリスト者の名で呼ばれることで、神をあがめなさい。”
苦難の意味の第二の意味として、神の栄光がとどまるということです。「栄光の霊、すなわち神の霊が、あなた方にとどまってくださる」とペトロは指摘しています。この表現は、旧約聖書の神の栄光の雲、「シェキーナの雲」を思い起こさせます。臨在の雲は、契約の箱が収められている幕屋の至聖所の上から立ち上り、モーセとイスラエルの民が荒れ野に宿営した時に、昼は雲の柱として、夜は火の柱として、いつも彼らと共にいてくださり、彼らを導いてくださいました。イスラエルの民はこの神の幕屋を中心に、東西南北に三部族ずつ陣営をとって天幕を張りました。ですから彼らが朝起きて、自分の天幕から出ると陣営の中心にいつも神のシェキーナの栄光を仰ぐことができたのです。この神の霊が、キリストの名のために非難される時に、あなた方に、つまり教会の上に臨むとペトロは言うのです。私たちが神の至聖所として、私たちの上に栄光の霊がとどまるのです。それは目には見え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想像するだけでも物凄いことですね。
作家の三浦綾子さんは、闘病生活の中で、ヨハネによる福音書9章3節の御言葉に励まされたと自伝の中で証しされていました。ご覧ください。
“イエスはお答えになった。「本人が罪を犯したからでも、両親が罪を犯したからでもない。神の業がこの人に現れるためである。”
弟子たちが、「彼が盲目なのは、彼自身が何か罪を犯したからか、それとも彼の家系の先祖が罪を犯したからでしょうか」と尋ねた時のイエス様のお答えです。肺結核と脊椎カリエスという難病を患っていた三浦綾子さんは、この御言葉に出会うまでは葛藤の日々を送りながら「なぜ私が…なぜ私だけが…」という質問を神様にぶつけていたようです。そのような中で、この御言葉と出会い、私の難病とは、神様が御業を現してくださるためであったと受け止めて、大変勇気づけられたそうです。このように私たちがキリストにある苦難に与る時、神の霊が留まり、そして実際に人々に認識できるような形で神の御業が現れるのです。
16節には「キリスト者(ギ:クリスチアノス)」という言葉が出てきます。この言葉はこの箇所と使徒言行録の11:26、26:28の、たったの三回だけしか出て来ない言葉ですが、この言葉はアンティオキア教会で初めて信者たちに対してつけられたあだ名でありました。それは馬鹿にするために、差別用語として付けられたのです。クリスチアノスと言いながら馬鹿にしていた訳です。従って、「キリスト者として苦しみを受ける」とは、キリスト者として社会から辱められ、差別を受け、苦しみを受けるという意味です。同じよう脈絡からパウロは1コリント4:9において、自分はキリストの故に辱められ、見せ物のようになったと証ししています。ご覧ください。
“考えてみると、神はわたしたち使徒を、まるで死刑囚のように最後に引き出される者となさいました。わたしたちは世界中に、天使にも人にも、見せ物となったからです。”
断っておきますが、これはパウロのコリントの人々に対する恨み節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感謝の言葉であります。普通は、自分の辱められた姿が人々に曝された時「こら、見せ物じゃない、じろじろと見るな、あっちに行け!」と言いますが、パウロはむしろそのようにされて、多くの人々の見せ物とされたことを、感謝しているのです。一体なぜでしょうか。それは、辱められることによって、僕のようにへりくだらされ、低くさせられ、人々に仕えることを、パウロが身をもって模範として示すことができたからだと後で言っています。この世にあって私たちキリスト者は、常にマイノリティの存在であるかもしれません。常に恥ずかしい者として卑しめられ、低くされるのですが、実はその時に、神の栄光の霊がキリスト者にとどまってくださるのです。そして苦難を耐え忍ぶことによって、善を行うことによって、神様に栄光をお返し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キリスト者の苦難とは、世の人々には全く理解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が、神の目から見るなら、その苦難を通してご自身の栄光がとどまること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引き続き17~19節をご覧ください。
【3】. 苦しみは、キリスト者を清くすること
“今こそ、神の家から裁きが始まる時です。わたしたちがまず裁きを受けるのだとすれば、神の福音に従わない者たちの行く末は、いったい、どんなものになるだろうか。「正しい人がやっと救われるのなら、/不信心な人や罪深い人はどうなるのか」と言われているとおりです。だから、神の御心によって苦しみを受ける人は、善い行いをし続けて、真実であられる創造主に自分の魂をゆだねなさい。”
苦難の意味として第三の意味は、苦しみがキリスト者を清くするという意味です。私たちの聖化のために苦難が用意されているという事です。12節に「火のような試練」とありましたが、これは金を精錬する「るつぼ」をイメージしてください。もし私たちが金細工人に対して、」「あなたが金をるつぼの火の中に通すときに、どれだけ長い時間、火の中に入れているのですか?」と質問するなら、金細工人は、「金を火の中から出して見て、金から私の顔が鏡のように、くっきりと見えるようになるまで、金を火の中に入れる」と答えるでしょう。金を作る時に、火を通すことによって、周りにある汚い鉄とか、その他の物質が全て燃やされるのです。そして最後に純粋な金だけが残るのです。完全に精錬された金は、鏡のようでありキリストの似姿を映し出すかのように輝くのです。この火のような試練、つまり苦難によって清められるプロセスとは、17節の神の家に起こる裁きとして言い換え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神の家、教会における裁きが、教会の試練、清められるプロセスだと言うのです。裁きが既にキリスト者から始まっているのです。聖化するためです。もし、時間に余裕があり、お金にも十分な余裕がある場合、おそらく人はその時間と有り余るお金を持って、罪しか犯すことができないでしょう。それほど私たちは罪に傾きやすいものであり、世の誘惑の力に屈服しやすい者な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常に、試練を通して清められるプロセスを歩むのです。そしてペトロは、さらに続けます。「私たち義とされた者がやっと救われるのなら、不信心な人や罪深い人はどうなるだろうか」と箴言の言葉を引用していますが、「やっと救われる」というのは、もしかしたら信じている者の中で救われない人もい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信仰によって確実に救われるのですが、ただ、信者にとって人生とは決して、広いエントランスから入る平たんな道ではなく、むしろ狭い門から入る茨の道であるという事です。こんなことを言いますと、次のような反論が出て来るかもしれません。「それでは私たち義人が、イエス様の故に、もう既にいただいているはずの救いは、安息は、勝利は、いつ、法的な意味だけでなく、完全に所有することができるのか?」という質問が出て来るでしょう。聖書はこの質問に対して、それは「死ぬとき」だとはっきり答えています。聖書は、そのどこにおいても、敬虔な者が死後においても、なお、試練にあったり、苦難にあうということは書かれていません。つまり信者の死後において、もはやこれ以上、聖化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聖化は私たちの生涯にのみ起こる現象です。死後において、もはやこれ以上、火の裁きはありません。死は聖化の絶頂であり、この時に飛躍的な聖化が起こり、罪との関わりを完全に絶ち、私たちは長い白い服を着て手にナツメヤシの枝を持ち、御座の前に、子羊の前に立つことが許されるのです(黙7:9、14)。従って信者にとって死というのは、罪に対して死ぬことであって、肉の弱さと欠けのために日々犯してしまう罪を完全に終えることなのです。一方で、不信心な人にとっての死とは、罪の刑罰であり、死後に火の裁きが待ち受けていて、これはどれほど凄惨でむごたらしいものだろうかということを暗示しているのです。このようなわけですから、キリスト者はこの世にあって、苦難に会う時も善い業をし続けて、自分の魂を創造主に委ねなさいと言うのです。
【結論】
以上、苦難の意味について三点を見てきました。第一に、主イエスが味わわれたその苦しみに共に与らせていただくことです。これほど栄誉なことはありません。第二に、苦難を通して神の栄光がとどまるということです。苦難は、世の人々にとっては恥ずかしいことであり、見せ物のように受け取られても、神の目には栄光として光輝いているとおっしゃってくださるのです。従いまして私たちがこの世にたとえ病をもって生まれてきても、それゆえに神様の栄光が共にあるが故に、喜んで感謝して歩むことができるのです。第三の意味は、苦難がキリスト者を精錬し純金のようにするという事です。キリスト者は生涯にわたって試練の中を歩むことになりますが、それは私たちの聖化のためであり、日々キリストに似たものとして作り変えられるプロセス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このプロセスを通して、天に大きな報いに積まれて、やがての日にこの天に積まれた報いが私たちに分かち合われるのです。従いまして苦難の中を私たちは喜びつつ歩ませていただけ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