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の国への招き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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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章14節~20節
1:14ヨハネが捕らえられた後、イエスはガリラヤへ行き、神の福音を宣べ伝えて、
1:15「時は満ち、神の国は近づいた。悔い改めて福音を信じなさい」と言われた。
1:16イエスは、ガリラヤ湖のほとりを歩いておられたとき、シモンとシモンの兄弟アンデレが湖で網を打っているのを御覧になった。彼らは漁師だった。
1:17イエスは、「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人間をとる漁師にしよう」と言われた。
1:18二人はすぐに網を捨てて従った。
1:19また、少し進んで、ゼベダイの子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が、舟の中で網の手入れをしているのを御覧になると、
1:20すぐに彼らをお呼びになった。この二人も父ゼベダイを雇い人たちと一緒に舟に残して、イエスの後について行った。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マルコによる福音書 1章14節~20節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초대
2021년 3월 14일 센겐다이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목사
마가복음 1장 14~20절
서론
인터넷에서 어떤 설교를 듣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체험담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밭에 갔답니다. 그리고 저쪽에 있는 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잠시 후 다시 할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래도 대답을 안해요. 어쩔 수 없이 가까이 가서 “할아버지!라고 불렀더니 “저는 할머니예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할머니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가 되는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 우리 구원자를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실례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숭배하지 않는 것, 구원자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오늘 주어진 성경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함에 있어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탄에게 승리하시고 드디어 복음선교를 시작하시는 장면입니다.
(1) 때가 차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잠재 의식 속에는 구약성경에 증언된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맥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서 318회, 조상들의 전승 속에서 138회의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모세5경에서 75회, 예언서에서 243회, 성문서:에녹서, 솔로몬의 시편, 바룩서, 고대 로마의 신탁집, 제4에스라서등에서 138회). 특히 이방인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디 메이사가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곧 하나님의 통치가 온 땅에 임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영주 헤롯 안티파스의 악행을 비난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는 사건 역시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그런 때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선교를 시작하셧습니다. 「때」라는 말과 관련하여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전도서 3장 말씀을 참조하십시오.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에 다 때 (그리스어: 카이로스) 가 있나니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때가 있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란 선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선교의 시작도 당연히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졌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다」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4,15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복음이란 「좋은 소식」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복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면 15절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들었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떠올리셨습니까? 영광의 나라를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마 다윗 왕에 의해 초래된 이스라엘 왕국의 부흥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신 신정국가 였습니다. 때가 차매 그런 영광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때」라고 할 때 「크로노스」라는 말과 「카이로스」라는 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입니다.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을 나타내고 카이로스라는 말은 정해진 시간을 나타냅니다. 「때가 찼다」의 때는 카이로스라는 말이고, 그것은 「정해진 때」라는 것입니다. 아까 보았던 전도서 3장도 「때」라는 말에 모두 「카이로스」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 카이로스라는 말을 나타내는데 대표적인 것은 계절입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여름이 끝나면 수확의 가을이 오고 그리고 겨울이 옵니다. 때가 차면 정해진 대로 계절이 옮겨 가는 것입니다. 혹은 더 알기 쉬운 비유는 아이를 가진 경우입니다. 임신을 하고 나면 출산의 시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차서 카이로스가 와서 출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때가 차매 정해진 때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드디어 가까워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나라가 드디어 가까워졌다」대신에 「하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 걸까요? 가까워졌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았나?하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성경 부분에서, 예를 들어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는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단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확실하게 도래해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느냐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구약시대에도 숨겨진 형태로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 그러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결정적 차이는 복음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더욱 뚜렷해 졌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 숨겨져 계시되었던 것들이 모두 밝혀졌다고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이 구약 성경의 성취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9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문 19 당신은 이것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친히 계시하셨고, 후에는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儀式)들로써 예표 하셨고,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즉, 정해진 때가 차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 그리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히 계시해 주신 것, 이것이야말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이미 에덴동산 (창세기 3장 15절) 에서 계시 되었으나 예수님에 의해 계시의 뚜껑이 제거되고 베일이 벗겨지고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때가 차매 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고 우리를 믿음으로 초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에 의해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나를 따르라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15절에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적혀 있습니다. 회개와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면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신앙이라고 할 때 자칫하면 우리는 지식적인 신앙을 가리키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하는 신앙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180도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회개하며 180도 방향을 전환한 어부들의 모습이 매우 알기 쉽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때 제자로 지목된 시몬 (베드로 입니다)과 시몬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과 요한은 나중에 3장에서 사도로도 선출이 됩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저는 이 어부라는 말이 신약성경이 되어서야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구약성경에도 어부가 일꾼으로 쓰인다는 것이 적혀 있었습니다. 에례미야 16장 16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 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예수님은 4명의 어부가 태어나기 전에 영원 가운데 그들을 보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초대란 예수님이 우리를 보시는 데서 시작됩니다. 16절에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또 19절에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빛이 먼저 그들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 예수님께 선택될 만한 무언가 빛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 어필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는 말일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보셨다는 데에서 중요한 점이 무엇이냐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유대에서 선생을 택해서 “당신을 따르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제자쪽에서 제자가 되겠다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거꾸로 말씀을 걸어주셔서 4명을 제자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 일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믿어야 할 하나님을 열심히 찾은 결과 우리가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초대의 말씀을 걸어주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18절에서 시몬과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고 했고, 20절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은「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어부라고 하면 무학하고 가난한 자들이라고 무심코 생각하겠지만 갈릴리에서 어부라는 직업은 반드시 가난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방에서 고기잡이는 주요 산업으로 생각할 수 있고, 당시 배를 소유하지 못하는 어부들도 있었는데 시몬과 안드레는 자신들의 배를 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말하자면 세베대의 집에서는 품꾼을 고용하여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즉 4명의 제자들은 안정된 생활, 보장된 장래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셈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할 때, 그것은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거나 부모님이나 가족을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할 때 반드시 거기에 두고 회개를 통해 180도 방향 전환을 해야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회개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숭배하고, 우리들의 구원자를 구원자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고 은혜의 지배를 맛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며 구원자를 구원자로 인정하며 전심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첫 번째 회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께서 복음 선교를 시작하셨을 때 「때가 찼고」「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거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에덴동산에서 계시되고 거룩한 족장들과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되며 율법에 의한 희생이나 다른 의식을 통해 예형된 나라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완전히 계시된 영광스러운 나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우리들은 이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진다는 점입니다. 믿음과 회개란 한마디로 180도 방향을 돌려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섬기는 종으로서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양인 우리를 반드시 책임지고 인도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기쁨과 복을 주시며, 머지않아 주어지는 영광의 나라를 앙망하며 걷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序】
インターネットである説教を聞いていましたら、次のような体験談がございました。ある日、畑に行ったそうです。そして向こうの方にいる方に声を掛けました。「おじいさーん」「おじいさーん」。ところがおじいさんは何の返事もいたしません。しばらくしてから、再び「おじいさーん」と呼びました。それでも答えてくれません。しょうがなく近くまで行って「おじいさん!」と言ったら、「私はおばあさんです」と言われたそうです。皆さん、おばあさんをおじいさんと呼ぶのは失礼なことですね。これと同じように神様を神様と呼ばないこと、私たちの救い主を救い主として認めないことは大変失礼なことです。神様を神様として崇めないこと、救い主を救い主として受け入れないこと、これが罪なのであります。
本日与えられた聖書の箇所は、イエス様が、公生涯を始めるにあたって洗礼を受けられ、荒れ野においてサタンに勝利し、いよいよ福音宣教を開始される場面でございます。
【1】. 時は満ちた
イスラエルの民の潜在意識の中には、旧約聖書に証言されている、メシアに対する期待が脈々と生き続けていました。彼らは旧約聖書から318回、先祖たちの伝承の中から138回のメシアについての約束を発見したと言われています(モーセ五書から75回、預言書から243回、聖文書:エノク書、ソロモンの詩編、バルク書、古代ローマの神託集、第4エズラ書などから138回)。特に異邦人から迫害を受けた時に、イスラエルの民は、どうかメシアが来てくださり、神の国が、即ち神の統治が全地のすべての民に及ぶように、と祈りました。洗礼者ヨハネが、領主ヘロデ・アンティパスの悪行を非難したため、逮捕されたという事件も、やはりメシアに対する期待が高まっていた中で起こりました。そのような時に、イエス様はガリラヤにおいて、宣教を開始されました。「時」という言葉に関して、聖書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ございます。コヘレトの言葉3章(聖書協会共同訳)の御言葉をご覧ください。
3:1 “天の下では、すべてに時機があり/すべての出来事に時(ギ:カイロス)がある。”
3:11 “神はすべてを時(ギ:カイロス)に適って麗しく造り、永遠を人の心に与えた。だが、神の行った業を人は初めから終わりまで見極めることはできない。”
生まれるのに時があり、死ぬのに時がある、植えるのに時があり、抜くのに時がある。殺すのに時があり、癒すのに時がある。壊すのに時があり、建てるのに時がある。泣くのに時があり、笑うのに時がある…神様のなさることは全て時に適って麗しいと言います。なぜなら神様とは善いお方であるからです。イエス様の宣教の開始も、当然、神の時になされたに違いありません。イエス様は「時が満ちた」と言いながら、神の福音を宣べ伝え始めました。マルコ1章14~15節をご覧ください。
“ヨハネが捕らえられた後、イエスはガリラヤへ行き、神の福音を宣べ伝えて、「時は満ち、神の国は近づいた。悔い改めて福音を信じなさい」と言われた。”
福音とは「良き知らせ」という意味ですが、神の福音とは具体的に何かと言えば、15節にありますように、「神の国が近づいた」という事でありましょう。「神の国」と聞いた時に皆さんは何を思い浮かべるでしょうか。栄光の御国を思い浮かべるかもしれません。イスラエルの民にとっては、おそらくダビデ王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イスラエル王国の復興を思い浮かべたのだと思われます。イスラエル王国とは僕ダビデを通して神様が直接治められた神政国家でありました。時が満ちて、そのような栄光の御国が近づいたと書かれています。ところでギリシア語で「時」という際に「クロノス」という言葉と「カイロス」という言葉の二種類がございます。クロノスという言葉は一般的に使用する時間ですね。何年、何月、何日、何時、何分のことを表し、カイロスという言葉は「定められた時間」を表しています。「時が満ちた」の「時」は、カイロス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て、それは「定められた時」であるという事です。先ほどお読みしたコヘレトの言葉3章も、「時」という言葉に全て「カイロス」が使われています。このカイロスという言葉を表すのに、代表的なものは季節です。春が来て、夏が来て、夏が終わると収穫の秋が来て、そして冬が来ます。時が満ちると定められた通り季節が移り行くのです。或いは、もっとわかりやすい譬えは、子供を身ごもったケースです、妊娠をしましたら、出産の時が定められていますね。ですから、時が満ちて、カイロスが来て、出産するということです。同じようにイエス様は、時が満ちたから、定められた時になったから、「神の国が、いよいよ近づいた」と言われるのです。
それでは、なぜ、「近づいた」ではなく、神の国が到来したと言わ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近づいたということは、まだ、神の国は、来ていないのか、と考えることもできるでしょう。ところがイエス様は他の聖書箇所で、例えばルカによる福音書11:20では、「しかし、私が神の指で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のなら、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来たのだ」と、はっきりと神の到来を断言しています。
従いまして、「時は満ち、神の国は近づいた。」という言葉は、神の国は今、確かに到来しているけれど、まだ完成されていないということを表し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それではいつ神の国が完成されるのかと言いますと、それはイエス様の再臨の時に完成されるという事です。
この神の国というのは旧約の時代にも隠された形で到来していました。こんなことを言うと、「え、それでは、旧約の時代と新約の時代と何ら変わらないではないか」と言われる方もおられるでしょう。旧約と新約の決定的な違いとは、福音が、神の国の到来が、より鮮明にされたという点です。イエス様において、イエス様のご人格を通して、隠されて啓示されていたものが、全て明らかにされたと理解してください。このような意味から、イエス様ご自身が旧約の聖書の成就であるという事ができるのです。ハイデルベルク信仰問答問19には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
問19 あなたはこのことを何によって知るのですか。
答 聖なる福音によってです。それを神は自ら、まず楽園で啓示し、その後、聖なる族長たちや預言者たちを通して宣べ伝え、律法による犠牲や他の儀式を通して予型し、御自身の愛する御子を通してついに成就なさいました。
つまり、定めの時が満ちて、イエス様が世に来てくださったこと、そして、イエス様が来られたことによって、神の国を、明らかに啓示してくださったこと、これこそ福音であるという事です。神の福音は、既にエデンの園(創世記3:15)において啓示されていましたが、イエス様において啓示の覆いが取り除かれ、ベールがはがされ、明らかにされたという事です。時が満ちてこのことが起こったのです。
そして、悔い改めてこの福音を信じなさいと私たちを信仰に招いてくださっています。信仰によって私たちはこの神の国に入れられるからです。
【2】. 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
信仰によって神の国に入れ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が、15節では「悔い改めて福音を信じなさい」と書かれています。悔い改めと信仰というのは、異なるものではなく、コインの表裏であると考えてください。信仰と言う時、ともすれば私たちは知識的な信仰を指しているように誤解してしまう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悔い改めという具体的な行動を伴う信仰こそ真の信仰であるという事です。悔い改めるというのは、180度方向転換をすることですね。聖書を読み進んで行きますと、イエス様の招きに応答し、悔い改めて、180度方向転換した漁師たちの姿が、大変分かりやすく描かれています。この時、弟子とされたシモン(ペトロのことですが)とシモンの兄弟アンデレと、ゼベダイの子ヤコブとヨハネは、後ほど3章において使徒としても選出されることになります。彼らは漁師でした。私はこの漁師という言葉は、新約聖書になって初めて出て来るものと思っていましたが、不思議なことに、旧約聖書にも漁師が働き手として用いられるということが書かれていました。エレミヤ16:16をご覧ください。
“見よ、わたしは多くの漁師を遣わして、彼らを釣り上げさせる、と主は言われる。その後、わたしは多くの狩人を遣わして、すべての山、すべての丘、岩の裂け目から、彼らを狩り出させる。”
イエスさまは4人の漁師が生まれる前に、永遠において、既に彼らのことをご覧になっておられたのかもしれません。イエス様の神の国への招きとは、イエス様が私たちをご覧になられるところから始まります。16節で「ガリラヤ湖のほとりを歩いておられたとき、シモンとシモンの兄弟アンデレが湖で網を打っているのを御覧になった」とありますね。また、19節で、「また、少し進んで、ゼベダイの子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が、舟の中で網の手入れをしているのを御覧になると、」とあります。イエス様のまなざしが、まず彼らに注がれています。彼らの内にイエス様に選び出されるような、何か光るもの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イエス様にアピールできる秀でた能力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恐らくそうではないでしょう。イエス様の方から先にご覧になられたということにおいて大切な点は何かと言いますと次の事だと思われます。当時のユダヤにおいて、弟子の方から先生を選んで、「あなたに従っていくようにさせてください」と、弟子入りを申し出たと言われます。しかし、ここではイエス様の方から、逆にお声をかけられて、4人の漁師を弟子にされたというのです。このことは私たちにも同じことが言えるのです。私たちが、生きる上で信じるべき神様を一生懸命探して、その上で、私たちが最終的にイエス様を選んだのではなく、イエスさまの方から私たちをご覧になられ、招きの声をかけてくださり、イエスさまの弟子と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18節でシモンとアンデレは「すぐに網を捨てて従った。」とあり、20節ではヤコブとヨハネは「父ゼベダイを雇い人たちと一緒に舟に残して、イエスの後について行った」とあります。漁師と言えば、無学で貧しい者たちと、つい考えるかもしれませんが、ガリラヤにおいて漁師という職業は、必ずしも貧しいとは決めつけられませんでした。なぜならその地方において漁は主要な産業として考えられますし、当時、船を所有できない漁師もいましたが、シモンとアンデレは自分たちの船を所有しているようでありました。さらに言えば、ゼベダイの家では雇い人を雇って漁をしていました。つまり、4人の弟子たちは安定した生活、保障された将来が約束されていました。そういったものを捨てて、イエス様の招きに応答し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だからと言って、私たちがイエス様の招きに応答しようとするとき、それは現在の自分の仕事を止めることであったり、両親や家族を残していくことではありませんが、イエス様の招きに信仰によって応答しようとするときに、必ずそこにおいて、悔い改めを通して、180度の方向転回をしなければ、イエス様について行くことが出来ないという事です。その悔い改めの内容は人によって異なりますが、全てに人々に当てはまることとは、神を神として崇めること、私たちの救い主を救い主として受け入れることだと思います。私たちはイエス様を通して神の御国の幸いを享受し、恵みの支配を味わうことが許されました。イエス様を通して神様が生きて働いておられ、私たちと共にい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を知りました。この神様を神として崇め、救い主を救い主として認め、心から礼拝を献げることこそ、全てに人に共通した第一の悔い改めであるという事が言えるでしょう。その上で私たちはイエス様の足跡について行くのです。
【結論】
イエス様が福音宣教を開始された時に、「時が満ちた」「神の国が近づいた」と言われました。満を持して神の国が到来したことを宣言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この神の国の到来とは、エデンの園において啓示され、聖なる族長たちや預言者たちを通して宣べ伝えられ、律法による犠牲や他の儀式を通して予型された国でありますが、同時に御自身の愛する御子の中で、完全に啓示された栄光の御国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第二に、信仰と悔い改めを通して、私たちはこの栄光の御国に入れられ、神の民、神の子とされるという点です。信仰と悔い改めとは、一言で言うなら、180度方向転換し、イエス様に従ってついて行くということです。この世にあって私たちはイエス様の足跡に従いながら、仕える僕としての道を学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かし、羊飼いであられるイエス様は、羊である私たちを必ず責任をもって守り導かれ、私たちに喜びと幸いとを与えてくださり、やがての日に与えられる栄光の御国を仰ぎつつ歩ませてくださる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