妻と夫(信者の妻と未信者の夫) 아내와 남편(신자인 아내와 불신자인 남편)
- 日付
- 説教
- 川栄智章 牧師
- 聖書 ペトロの手紙一 3章1節~7節
3:1同じように、妻たちよ、自分の夫に従いなさい。夫が御言葉を信じない人であっても、妻の無言の行いによって信仰に導か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3:2神を畏れるあなたがたの純真な生活を見るからです。
3:3あなたがたの装いは、編んだ髪や金の飾り、あるいは派手な衣服といった外面的なものであってはなりません。
3:4むしろそれは、柔和でしとやかな気立てという朽ちないもので飾られた、内面的な人柄であるべきです。このような装いこそ、神の御前でまことに価値があるのです。
3:5その昔、神に望みを託した聖なる婦人たちも、このように装って自分の夫に従いました。
3:6たとえばサラは、アブラハムを主人と呼んで、彼に服従しました。あなたがたも、善を行い、また何事も恐れないなら、サラの娘となるのです。
3:7同じように、夫たちよ、妻を自分よりも弱いものだとわきまえて生活を共にし、命の恵みを共に受け継ぐ者として尊敬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の祈りが妨げら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ペトロの手紙一 3章1節~7節
아내와 남편(신자인 아내와 불신자인 남편)
2021년 3월 7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베드로전서 3장 1~7절
서론
오늘 설교 제목을 보고 “아, 혹시 남편과 아내가 바뀐 것 아닐까?”라고 생각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실 오늘 성경 구절의 1~6절이 아내에 대한 권면이고, 마지막 7절만 부록처럼 남편에 대한 권면으로 되어 있어서, 설교 제목을「아내와 남편」으로 정했습니다. 3:1절에 「이와 같이」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는 지난 시간에 보았던 2:18절에서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라는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사환들에 대한 교훈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 가운데 놓여져도 순종하며 걸어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확인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비기독교인 남편을 둔, 기독교인 아내에 대한 교훈이 있지만, 아내에 대한 교훈으로만 읽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으로 읽어나가고자 합니다.
(1) 믿음의 본질인 순종
사환들이 주인에게 순종하듯, 그리스도인인 아내들도 믿지 않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말로 말미암지 않은 행실로 남편을 지지하고, 온유하고 평온한 심령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한 일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있겠지만, 당시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강했기 때문에 아내의 지위는 낮았고,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나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먼저 신앙을 가지면 가족 모두가 같은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내가 먼저 신앙을 가지게 되면, 아내는 믿지 않는 남편과 어떻게 함께 걸어가야 할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복음을 믿은 아내들은, 남편의 집안의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하며 당시 풍습을 거스르면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갖게 된, 강인한 여성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3:1~2절을 보시겠습니다.
1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만약 신자인 아내들이, 불신자인 남편을 따르지 않을 구실을 찾으려 한다면, 베드로는 단호하게 구원받은 너희(아내들)는 더욱 겸손하게「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라는 권면은,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훈으로 널리 가르쳐졌지만,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더욱 앞장 서서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라」라는 말이 베드로서신에 여러 번 나오는데, 성경에서 「순종하라(헬라어:휘파쿠오)」는 어느 한 쪽이 더 뛰어나고, 중요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따랐습니다. 누가복음 2:51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삼위일체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도 영광과 위엄과 존귀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즉, 상대가 뛰어나서, 상대가 중요해서, 가치가 있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질서를 지키고 세워진 권위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순종 그 자체가 믿음의 본질이며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23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렇기 때문에「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라는 권면은, 당시 시대적 배경인 남녀 차별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남편을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내가 뒤에 받쳐주면서, 세워진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완전히 동등하다는 것은 7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7절을 보시겠습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는 남편과 아내가,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공동 상속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여자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고 여겨졌지만, 하나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완전히 동등하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아마도 혁신적인 메시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라는 권면은 세워진 권위에 복종하라는 것이며, 이는 아내뿐만 아니라 남편이든, 자녀든, 종이든, 주인이든, 신자라면 누구나, 세워진 권위 앞에 하나님 때문에 순종하고 그 안에서 선한 행실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2)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그리스도인 아내가, 불신자 남편을 따를 때, 특히 아내의「말로 말미암지 않은 행실」로 남편이 믿음으로 인도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 아내가 비기독교인 남편에게 어떻게든 전도를 하려고 이것저것 복음을 말하려고 애쓰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오자마자 기독교 라디오 프로그램의 볼륨을 한껏 높여서 틀어놓거나, 일부러 거실 테이블 위에 기독교 서적을 올려 놓는 식입니다. 그러면 남편은 점점 아내의 태도에 두려움을 느끼고 집에 돌아가기 싫어질 것입니다. 한 설교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기독교인 아내를 둔 불신자 남편은 이미 아내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불신자 남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남자로서 항상 2등입니다. 제 아내에게는 이미 다른 남자,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넘버원인 남자가 있습니다. 게다가 아들이 생기면 저는 3번이 될 것입니다.”이렇게 불신자 남편은 늘 위협을 받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요일에 가족들이 모두 교회에 가서 남편 혼자만 집에 남겨지는 일이 생기면, 엄청난 외로움이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2,000년 전, 베드로도 똑같은 이유로 아내가 남편에게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내의 말로 말미암지 않은 행실이 중요하다고 설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3~4절을 보시겠습니다.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아름다움은「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외모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인데,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심령」은 헬라어 성경에서 「영(프뉴마)」라고 쓰여 있습니다.
즉,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이야말로,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대신할 진짜 외모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음으로써, 아름다움의 근원인 「썩지 아니할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에 접붙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은 마음속에 숨겨져 있고, 결코 자신의 온유함을 어필하지 않으며, 자신의 안정됨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과 같은 썩어질 외모가 아니라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해야 하며, 이는 숨겨져 있지만 주님 보시기에 참으로 가치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아름다움의 비결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자매의 다음과 같은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불신자인 남편의 바지를 빨아서 말린 후 개어서 장롱에 넣는 것인데, 그 자매는 남편의 바지를 매일 매일 정성껏, 기도하는 마음으로 개어서 장롱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믿음으로 인도받았다는 간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은밀한 행실을 하나님은 분명히 보시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하나님께 소망을 맡기는 자에게 요구되는 선한 행실
어떤 사람은, 이「마음에 숨은」으로 번역된 단어에 주목하며 종말론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숨겨져 있는 것은, 마지막 날에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4절과 6: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6장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구약성경에서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말미암은 선할 행실로 자신을 단장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께 소망을 맡긴 거룩한 부녀들을 들며, 특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예로 들고 있는데, 3:5~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것이니라
「그의(사라)의 딸이 된것」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말의 비유이며, 즉 「구원에 들어간다」라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에는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기사는 숨겨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라에 대해서도 아브라함만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아 우리는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다만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며 따랐다는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창18:12).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의 여정을 떠날 때, 도대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을 따랐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매우 불안한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안정한 심령으로 그저 아브라함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5절에 있는 것처럼 그녀가 그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라의 아브라함에 대한 순종처럼 숨겨져 있고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계십니다. 믿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순종과 선한 행실이 요구되는데, 특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로 말미암지 않은 행실, 온유하고 안전한 심령에서 나오는 은밀한 행실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순종과 선행이 요구되고, 역경 가운데 있을 때 더욱더 선행이 요구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꼽자면 성경에서 여러 가지 답이 떠오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첫째,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또는 둘째로, 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해 그리스도에게게 속한 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또는 셋째로, 그들이 성령의 전이 되어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혹은 넷째로, 그들은 빛의 자녀들이고 반드시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답이 떠오르겠지만,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미래의 영광이라는 보상을 위해서라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장차 받을 기업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각 사람의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주어집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마지막 날에 상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한 행실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은신, 예배해 놓으신 선한 행실이며, 그 위에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하는 형태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구원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마지막 날에 주어질 그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행한 행실에 따라 구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눈물과 함께 뿌린 것은, 영광 가운데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 천국의 법칙은, 은혜로 말미암아 결코 폐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행해지는 선한 행실을, 하나님은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풍성히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
불신자 남편을 위해, 불신자 가족을 위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증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선한 행실을 우리에게 예비해 주십니다. 우리는, 말로 말미암지 않은 행실과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에서 나오는 은밀한 일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 간구의 기도를 드립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序】
本日の説教題をご覧になって、「おや、もしかしたら夫と妻の間違いでは?」と思われた方がいらっしゃるかもしれません。実は、本日の聖書箇所の1~6節が妻に対する勧めになっており、最後の7節だけがおまけのように夫に対する勧めとなっていましたので、説教題を「妻と夫」といたしました。3章1節には「同じように」という言葉によって始められていますが、これは、前回見ました2:18で、「召し使いたち、心からおそれ敬って主人に従いなさい」という言葉と、全く同じ文脈の中から語られています。召し使いたちへの訓戒を通して、私たちもイエス様の足跡に続き、苦難の中に置かれても、従順に歩むように召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を前回確認いたしました。本日の箇所も同じです。とりわけノンクリスチャンの夫を持つキリスト者の妻に対しての訓戒がなされていますが、妻に対する訓戒としてだけではなく、私たち全員に対する訓戒として読み進んで行きたいと思います。
【1】. 信仰の本質である従順
召し使いたちが主人に従うように、同じように、キリスト者の妻たちも、未信者の夫に従い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が、具体的には無言の行いによって夫を支え、柔和で穏やかな霊によって、隠れた所で善き業を行いなさいと勧められています。今日でも、ある程度重なるかもしれませんが、当時のギリシア・ローマの世界においては、男性中心的な考え方が強くありましたので、妻の立場は低く、妻は夫の所有物や財産として見做されていました。ですから、もし、夫が先に信仰を持った場合、家族全員が同じ信仰を持つようになることが一般的でしたが、妻が先に信仰を持った場合には、妻は未信者の夫と、どのように歩んでいったらいいのかという難しい問題に直面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しかし、逆に考えるなら、福音を信じた妻たちは、夫の家の宗教を受け入れず、ローマの皇帝崇拝を拒否し、当時の風習に逆行しながらも、なお福音を受け入れ、信仰を持つようになった、屈強な女性たち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るかもしれません。3:1~2節をご覧ください。
“同じように、妻たちよ、自分の夫に従いなさい。夫が御言葉を信じない人であっても、妻の無言の行いによって信仰に導かれ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神を畏れるあなたがたの純真な生活を見るからです。”
もし、信者である妻たちが、未信者の夫に従わないようにする口実を見つけようとするなら、ペトロは断固として、救われたあなた方(妻たち)が、なおさら、へりくだって「自分の夫に従いなさい」と勧めているのです。この「妻は夫に従いなさい」という勧めは当時、何ら新し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訓戒として広く教えられていましたが、キリスト者であるあなた方は、なおさら、率先して、そうしなさ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従いなさい」という言葉が、ペトロの手紙に何度か出てきますが、聖書の中で「従う」(ギ: フィポタソー)というのは、一方が優れていて、重要であり、価値があるから、従う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様も幼少時代に両親に従われました。ルカによる福音書2:51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ございます。
“それから、イエスは一緒に下って行き、ナザレに帰り、両親に仕えて(ギ: フィポタソー)お暮らしになった。母はこれらのことをすべて心に納めていた。”
三位一体の御子であるイエス様は、御父なる神に完全に従われました。イエス様も父なる神様も栄光と威厳と誉れにおいて、本質的に等しいお方でありますが、イエス様は常に父なる神様に従われますね。つまり、相手が優れているから、相手が、重要だから、価値があるから、従うのではなく、単純に秩序を守り、立てられている権威に従うことによって、神を畏れる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す。従順とは神を畏れる信仰から出ているのであって、従順それ自体が、信仰の本質であり、キリスト者の取るべき態度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エフェソ5:23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ございます。
“キリストが教会の頭であり、自らその体の救い主であるように、夫は妻の頭だからです。”
ですから、「妻は夫に従いなさい」という勧めは、当時の時代の背景にあった男女差別を甘んじているというより、むしろ、妻が家長としての責任を負っている夫を認めてあげること。家庭の頭として妻が陰で支えつつ、立てられている権威に対して服従することであり、そうすることによって神様も喜ばれるのです。夫と妻が全く同等であることは、7節においてはっきり現れています。3:7をご覧ください。
“同じように、夫たちよ、妻を自分よりも弱いものだとわきまえて生活を共にし、命の恵みを共に受け継ぐ者として尊敬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の祈りが妨げら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
ここでは夫と妻が共同の相続人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当時、女は嗣業を受け継ぐことはできないとされていましたが、神の御前で男と女が全く同等であると断言されています。これは当時の状況を考えるなら、おそらく、革新的なメッセージだ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従って、「妻は夫に従いなさい」という勧めは、立てられている権威に対して服従することであり、これは、妻だけでなく、夫であろうと、子どもであろうと、僕であろうと、主人であろうと、信者であれば誰であれ、立てられている権威の前に神様の故に従順し、その中で善い行いをするように召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2】. 柔和で穏やかな霊によって
キリスト者の妻が、未信者の夫に従う時に、特に妻の「無言」の行いによって、夫が信仰に導かれるようになる可能性について触れています。これは、今日においてもキリスト者の妻が、ノンクリスチャンの夫に対して、何とか伝道をしようと、これでもか、これでもかと福音を語ろうとする状況を思い浮かべていただければ分かりやすいかと思います。例えば、夫が仕事から帰ってくると、すかさず、キリスト教のラジオ番組を、ボリューム一杯に掛けたり、例えば、リビングのテーブルの上にキリスト教の本をわざとらしく置いておくわけです。そうすると、夫はだんだんと妻の態度に恐怖を覚え、家に帰るのが嫌になってくることでしょう。ある説教者の話しによりますと、クリスチャンの妻を持つ未信者の夫は、もう既に妻から脅されている感覚に陥っていると言います。その理由について夫は、次のように言ったというのです。「私は男性として常にナンバー2なんです。私の妻には他の男性で、既にナンバー1の方がいるんです」イエス・キリストのことです。「さらに息子が出来てしまうと、私はナンバー3という事です。」このようにして、未信者の夫は、常に脅されているような感覚を覚えるのです。そして、日曜日には家族全員が教会に行き、夫が一人だけ、家に取り残されるようなことがあろうものなら、ものすごく寂しさがこみあげて来るということでした。恐らく2,000年前に、ペトロも全く同じような理由から、妻が夫に対して説教者になるのではなく、むしろ妻の無言の行いが、重要であると説い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3~4節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の装いは、編んだ髪や金の飾り、あるいは派手な衣服といった外面的なものであってはなりません。むしろそれは、柔和でしとやかな気立てという朽ちないもので飾られた、内面的な人柄であるべきです。このような装いこそ、神の御前でまことに価値があるのです。”
美しくありたいという気持ちは、女性の中に常にあるものだと思います。本当の美しさとは「編んだ髪」や、「金の飾り」、或いは「派手な衣服」ではないと書かれています。それでは一体何かということですが、「柔和でしとやかな気立て」であると書かれています。ここで、「気立て」というのはギリシア語の聖書で「霊(プニューマ)」と書かれていますから、3:4は、聖書協会共同訳では次のように翻訳されています。
“柔和で穏やかな霊という朽ちないものを心の内に秘めた人でありなさい。これこそ、神の前でまことに価値があることです。”
つまり「柔和で穏やかな霊という朽ちないもの」こそ、「編んだ髪」や、「金の飾り」や、「派手な衣服」に替わる本物の装い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キリスト者は新しく生まれ変わり、イエス・キリストに接ぎ木されることによって、美しさの源である「柔和で穏やかな霊」に接ぎ木されました。そしてこの「柔和で穏やかな霊」というのは、心の中に隠されていて、決して自らの柔和さを大っぴらにアピールすることもなければ、自らの穏やかさを自慢することもありません。キリスト者は「編んだ髪」や、「金の飾り」や、「派手な衣服」のような朽ちていく装いではなく、「柔和で穏やかな霊という朽ちないもの」で装い、それは隠されていますが、主の目にはまことに価値があるのです。これこそ、美しさの秘訣であり、神様に喜ばれるものなのです。
以前、ある婦人の次のような証しを聞いたことがあります。未信者の夫のパンツを洗濯して干した後に畳んで箪笥にしまうわけですけれども、その婦人は夫のパンツも来る日も来る日も心を込めて、祈り心で畳んで箪笥にしまったそうです。そうしたらある日、夫が信仰に導かれたという証しでした。そのような隠れた業を神様は確かにご覧になられ、不思議な働きが起こされるんもんなんだなと思いました。
【3】. 神に望みを託すものに要求される善き行い
ある人は、この「秘めた」、「隠された」と翻訳されている言葉に注目し、終末論的な内容が語られていると指摘しています。なぜならイエス様が隠されているものは、やがての日に顕わにされると教えられたからです。マタイによる福音書6:4と6:6をご覧ください。
マタイによる福音書6:4
“あなたの施しを人目につかせないためである。そうすれば、隠れたことを見ておられる父が、あなたに報いてくださる。”
マタイによる福音書6:6
“だから、あなたが祈るときは、奥まった自分の部屋に入って戸を閉め、隠れたところにおられるあなたの父に祈りなさい。そうすれば、隠れたことを見ておられるあなたの父が報いてくださる。”
旧約聖書の中で柔和で穏やかな霊によって生じる善き業によって自分を装った人の代表例として、神に望みを託した聖なる婦人たちを挙げて、そして特に、アブラハムの妻サラを引き合いに出しています。3:5~6節をご覧ください。
“その昔、神に望みを託した聖なる婦人たちも、このように装って自分の夫に従いました。たとえばサラは、アブラハムを主人と呼んで、彼に服従しました。あなたがたも、善を行い、また何事も恐れないなら、サラの娘となるのです。”
「サラの娘になる」というのは「アブラハムの子孫となる」という言葉の類比であり、つまり「救いに入れられる」という意味として使われていると思われます。聖書には相対的に、女性たちの記事は隠され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サラについてもアブラハムほど詳細には記述されていませんので、私たちは想像するしかありませんが、ただ、サラは確かにアブラハムを「主人」と呼んで従ったということは聖書にも書いてあります(創18:12)。アブラハムが神からの召しを受けて信仰の旅に出発する時に、一体どこに行くのか分からないまま、サラはアブラハムに従いました。人間的に考えればとても不安な旅であったことでしょう。しかし、彼女はおそらく静かな心で、ただアブラハムに従って行ったと思われます。なぜそうすることができたのかと言えば、それは、5節にありますように彼女がただ、神に望みを託したからと思われます。サラのアブラハムに対する従順のように、隠されていて表に出てこ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神は全てをご覧になられ、一つ残らず覚えておられます。信者たちにも、同じように、従順と善き業が要求されていますが、特に隠れたところにおいてなされる無言の行い、柔和で穏やかな霊から出て来る隠された業が要求されているのです。なぜこのように従順と善き業が要求され、逆境の中にある時は、なおさら、善き業が要求されるのでしょうか。その理由を挙げようとするなら、聖書からいろいろと答えが浮かんでくることでしょう。例えば、第一に、彼らがキリストと共に罪に死んで、新しい命に生き返ったからであります。
或いは第二に、彼らが律法の下にいるの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って、神のために実を結ぶために、キリストに属する者とされたからです。
或いは第三に、彼らが聖霊の宮であり、肉に従って生きるのではなく、聖霊に従って生きるものとされたからです。
或いは第四に、彼らは光の子供たちであり、必ず光の中で働き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です。いろいろと答えが浮かんでまいりますが、さらに付け加えるなら、未来の栄光という報いのために、というのも、その理由の一つとして挙げられるでしょう。キリスト者がやがての日に報いとして与えられる嗣業は、神の恵みの賜物でありますが、それは同時に、各人の行いの報いとして与えられます。どういうことかと申しますと、私たちがやがての日に報いが与えられますね。それは私たちの善き業に応じて与え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の善き業というのは、神様が前もって準備してくださった、備えてくださった善き業であり、その上を神様に応答するという形によって、私たちは歩ませて頂いているのです。たとえ救いが全ての信者たちに与えられると言っても、やがての日に与えられるその栄光の中で、キリスト者は自分たちの行った業に従って区別されることでしょう。ですからこの地において涙と共に蒔かれたものは、栄光の中で収めることになるのであります。天国のこの法則は、恵みによって決して破棄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私たちは蒔いたものに従って刈り取るのです。隠された所で献げられた善き業に、神様は何一つお忘れになることなく、豊かに報いに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です。
【結論】
未信者の夫のために、未信者の家族のために、私たちは神様の御前に証しを立てるように、神様が善き業を私たちに備えてくださっています。私たちが無言の行いと、柔和で穏やかな霊から出て来る隠された業を、神の御前に捧げ、そして、まだ救われていない家族のためにとりなしの祈りを捧げてまいりましょう。これこそ、神の御前に美しい装いであり、神様が喜ばれるものな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