キリストの足跡に続くように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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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聖書 ペトロの手紙一 2章18節~25節
2:18召し使いたち、心からおそれ敬って主人に従いなさい。善良で寛大な主人にだけでなく、無慈悲な主人にもそうしなさい。
2:19不当な苦しみを受けることになっても、神がそうお望みだとわきまえて苦痛を耐えるなら、それは御心に適うことなのです。
2:20罪を犯して打ちたたかれ、それを耐え忍んでも、何の誉れになるでしょう。しかし、善を行って苦しみを受け、それを耐え忍ぶなら、これこそ神の御心に適うことです。
2:21あなたがたが召されたのはこのためです。というのは、キリストもあなたがたのために苦しみを受け、その足跡に続くようにと、模範を残されたからです。
2:22「この方は、罪を犯したことがなく、/その口には偽りがなかった。」
2:23ののしられてもののしり返さず、苦しめられても人を脅さず、正しくお裁きになる方にお任せになりました。
2:24そして、十字架にかかって、自らその身にわたしたちの罪を担ってくださいました。わたしたちが、罪に対して死んで、義によって生き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そのお受けになった傷によって、あなたがたはいやされました。
2:25あなたがたは羊のようにさまよっていましたが、今は、魂の牧者であり、監督者である方のところへ戻って来たのです。日本聖書協会『聖書 新共同訳』
ペトロの手紙一 2章18節~25節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021년 2월 28일 센겐다이 교회 주일설교 카와에 토모아키 목사
베드로전서 2장 18~25절
서론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 자유를 얻었으니 기본적 인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혹은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고 노예해방운동에 앞장서서 참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혁명처럼 급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 아래 서서히,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마치 소량의 이스트가 전체에 섞여 들어가면 결국 전체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종들에게 기본적 인권이나 노예해방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법적이고 불합리한 노예제도를 용인하고, 종들이 처해진 그 힘들고 슬픈 상황 속에서 억울한 대우를 받더라도 선을 행하고 인내하는 것이 너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베드로의 아픈 실패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한 직후,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듣고, 십자가의 길로 가려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기 시작합니다. 「주님,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육적인 충고를 하자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는 아주 심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천국에 올라간 줄 알았는데, 지옥으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베드로에게 하나의 큰 신학이 되었습니다.
(1)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2:18~20절을 보시겠습니다.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18절에서「사환들(오이케테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16절의 「종(둘로스)」과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오이케테스」는 특히 가정에 거주하며 일하는 종을 의미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 그들의 일의 내용이나 대우가 많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환은 가신으로, 어떤 사환은 가정교사나 교사로, 어떤 사환은 의사로, 어떤 사환은 배우나 비서로, 어떤 사환은 부동산 관리자로 다양한 일을 하는 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주인에게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중에는 선하고 관대한 주인도 있었겠지만, 횡포를 부리는 주인도 있었습니니다. 임금이나 노동 조건에서 종을 부당하게 대하는 주인도 있었고, 혹은 종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일부러 무자비하게 대하는 까다로운 주인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인이 아무리 까다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주받은 운명처럼 싫다고 하지 말고, 진심으로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19절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은혜」라고 쓰여 있습니다. 한국어성경에서는 19절과 20절에 있어서 양쪽 다 「아름답다」라고 번역되어 있고, 일본어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를 보면 19절과 20절 모두 「그것이 모두 은혜(카리스)입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까다로운 주인을 섬기게 된 것이 도대체 어디가 은혜일까요? “단순히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베드로의 말이 우리에게는 잘 와 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은혜라면 차라리 필요없어요”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주석서에는 베드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32절에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이런 글을 썼던 것은 아닌가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6:32~3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여기서 세 번이나 은혜(카리스, 일본어 성경에는 은혜로, 한국어 성경에는 칭찬으로 번역)가 나옵니다. 만약 이 문맥이 베드로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베드로가 말하는 칭찬(은혜)이란, 믿음으로 인한 선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으니, 은혜로 말미암아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순풍에 돛단 배처럼 순조롭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죄인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까다로운 주인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순풍에 돛단 듯이 순탄할 때는 드러나지 않지만, 고난의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분이 누구신지 드러나고 그 진가가 드러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2) 그리스도의 본
베드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베드로전서 2:21절에서 더 깊이 파고듭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져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무려 21절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기 위해, 그 고난 속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뭐야, 고난을 받으라고 부르셨다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 마음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을 때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이 후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러 가신다고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요!”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본을 끼치시기 위해 십자가를 통해 구체적으로 발자취를 남기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자」라든지 「예수님을 본받아 따라가자」라고 말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셨다고 해서 우리도 기도하고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하셨으니 우리도 똑같이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것을 따라 하기를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온유하게 낮아지시고 자신을 섬기는 자로 삼으신 것, 그 점은 본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1:29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러므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고난을 통해 낮아짐을 통해 믿음이 연단되고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믿는 자들은 하늘에서 높이 들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함께 하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에베소2:6, 누가 22:30, 계시록 3:21), 하나님으로부터「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태복음 25:21,23)」라고 맞아들여질 것입니다.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이 땅에서 낮아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들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한 번 낮아졌다가 나중에 높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즉, 천국에 들어갈 때에는 이 세상과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 낮은 자는 높아지고 높은 자는 낮아지는 역전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늘의 영광과 특권을 다 버리시고 자신을 비우시고 낮아지셔서, 섬기는 자의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따르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시키시고 높이 들어올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발자취입니다. 우리는 이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먼저 고난을 받고 낮아지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약속을 의지하며 간구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 말씀이 몇 가지 있는데, 데살로니가전서 3:3절과 빌립보서 1:29, 디모데후서 2:11~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3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빌립보서 1장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2장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거시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이 고난 속에서 홀로 우리의 죄만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허무한 삶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본보기이며, 우리 각자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발차취를 따르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부르심은, 바로 눈앞에 있는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눈앞의 십자가를 건너뛰고, 이후의 영광에만 관심을 갖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하나님! 노아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당신이 직접 음성으로 들려주시고 가르쳐주세요.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를 내게 주소서. 이 나라가 주의 종이 되게 하고, 이 나라가 주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저도 이런 기도를 여러 번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야 그것이 십자가를 뛰어넘어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혹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불신앙적이고 어리석을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나 같으면 제대로 할 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투쟁의 장,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현장은, 실제로 내 눈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거듭하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스스로 죄를 쌓아가며, 나이를 먹을수록 확실히 패배감과 수치심이 더해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실 나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십자가를, 예수님이 함께 짊어지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이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에게는, 목자이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에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시며 아버지를 향한 순종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도, 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서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걸음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걸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고난을 받도록,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간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가 견디고 있는 고난은, 결국 큰 상급으로 돌아오는 고난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후에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그런 고난인 것입니다. 감독자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발걸음을 목자로서 인도해 주시고, 결국 천국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序】
キリスト教の信仰を持つということは、イエス様によって自由にされたのですから、基本的人権を主張することのように考えてしまいがちです。或いは社会の不正を正し、奴隷解放運動にでも率先して参加すべきではないかと考えてしまうかもしれません。確かにその通りでありますが、神様のやり方というのは、革命のように急激に行うのではなく、神様の主導の下、徐々に、少しづつ変化させていく仕方です。それはまるで、わずかなパン種が全体に混ぜ合わせられることによって、やがて全体が膨れあがるようになるようにです。本日の箇所においても、ペトロは、召し使いたちに対し、基本的人権の事や、奴隷解放運動について語ることは一切ありませんでした。むしろ、不法で合理的でない奴隷制度を許容し、僕たちのそのつらく、悲しい状況の中で、悔しい扱いを受けたとしても、善を行い、それを耐え忍ぶために、あなた方は神に召されたのだと励ましています。ペトロがそのようなことを語ることができたのは、おそらくペトロの痛い失敗談に起因し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マタイによる福音書16章にありますように、ペトロはイエス様に対し「あなたはメシア、生ける神の子です」と信仰告白をした直後に、イエス様の受難の話を聞かされて、彼は十字架の道に進まれようとするイエス様を諫め始めました。「主よ、とんでもないことです。そんなこと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と肉的なアドバイスを与えると、イエス様から「サタン、引き下がれ。あなたはわたしの邪魔をする者。神のことを思わず、人間のことを思っている。」という大変ひどい叱責を食らってしまいました。まさに天国に上げられたかと思ったら、地獄へ突き落されたような心地だったでありましょう。この時以来、キリストの十字架の足跡に従いゆくということは、ペトロにとって一つの大きな神学となっていきました。
【1】. 無慈悲な主人にもそうしなさい
本日の聖書箇所の2:18~20をご覧ください。
“召し使いたち、心からおそれ敬って主人に従いなさい。善良で寛大な主人にだけでなく、無慈悲な主人にもそうしなさい。不当な苦しみを受けることになっても、神がそうお望みだとわきまえて苦痛を耐えるなら、それは御心に適うことなのです。罪を犯して打ちたたかれ、それを耐え忍んでも、何の誉れになるでしょう。しかし、善を行って苦しみを受け、それを耐え忍ぶなら、これこそ神の御心に適うことです。”
18節において「召し使いたち(オイケテス)」という言葉ができますが、これは16節の僕(ドゥロス)とは、違う単語が使われています。この「オイケテス」とは、特に家庭に住み込んで仕事をする僕を意味していたようです。ですから、その家の主人がどんな人であり、どんな仕事をしているかによって、彼らの仕事の内容や待遇は、ずいぶん違ったようです。ある召し使いは家臣として、ある召し使いは家庭教師や教師として、ある召し使いは医師として、ある召し使いは俳優や秘書として、不動産管理者として、いろいろな仕事をする僕がいたようです。しかし、彼らの運命は、その主人次第というところがありました。中には善良で寛大な主人もいたでしょうが、横暴な主人もいました。賃金や労働条件において僕たちを不当に扱う主人や、あるいはその僕がキリスト者であると知って、あえてひどい仕打ちをする無慈悲な主人も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たとえ彼らの主人が無慈悲な人物であろうと、呪われた運命の下にあるようにいやいやするのではなく、心から恐れ敬って主人に仕えなさいと勧めています。そして19節には、そうすることが恵みであるとまで書かれています。新共同訳では19節と20節において両方とも「御心に適う事なのです」と翻訳されていますが、ギリシア語を見ますと、19節と20節の両方とも、ずばり「それこそ恵み(カリス)です」と書かれています。無慈悲な主人に仕えることになることの、一体どこが恵みなのでしょうか。「単に運が悪かっただけではないの?」と思ってしまいます。どうもペトロの言っていることが私たちにはピンと来ないのです。「そんな恵みなら、却って、いらないです」と思わず、言ってしまいそうです。
ところで、ペトロはおそらくイエス様がルカ6:32で言われた御言葉を思い起こしながら、このような書き方をしたのではないかと、ある注解書に書かれています。ルカによる福音書6:32~34を見てみましょう。
“自分を愛してくれる人を愛したところで、あなたがたにどんな恵みがあろうか。罪人でも、愛してくれる人を愛している。また、自分によくしてくれる人に善いことをしたところで、どんな恵みがあろうか。罪人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る。返してもらうことを当てにして貸したところで、どんな恵みがあろうか。罪人さえ、同じものを返してもらおうとして、罪人に貸すのである。”
ここでは三回も恵み(カリス)が出てまいります。もし、この文脈がペトロに影響しているとするなら、どうやらペトロの言う恵みとは、信仰による良き業のことを指しているようです。あなた方はキリストによって贖われたのだから、キリストによって自由とされたのだから、恵みによって善き業をしなさいという事です。「順風満帆の中で善い業をしてもそれは、罪びとでもすることができる。ところが、無慈悲な主人に恐れ敬って仕えることは中々できることではない。それは信仰によってのみ、神の恵みによってのみ可能だ」、ということです。実際に、私たちのイエス様に依り頼む信仰とは、順風満帆の時には顔を出すことはありませんが、苦難の時に初めて、私たちが本当に依り頼んでいる方が誰なのか顕わにされ、その真価が問われることになるんだと思います。
【2】. キリストの模範
ペトロはこれで終わらず、さらに突っ込んで、切り込んできます。1ペトロ2:21節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が召されたのはこのためです。というのは、キリストもあなたがたのために苦しみを受け、その足跡に続くようにと、模範を残されたからです。”
なんと、21節では、私たちキリスト者は、実に苦しむために、その苦しみの中で従順に歩むように召されたと言うのです。「なんだって、苦しむために召されただって?そんなことがあっていいものだろうか!」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が、まさにそのお気持ちは、ペトロ自身がイエス様を諫めた時の気持ちだったのでしょう。「なんだって、この後、エルサレムに、長老、祭司長、律法学者たちから苦しめられ、殺されるために向かうだって?そんなことがあっていいものだろうか!」しかし、イエス様はそのことのために、苦しまれ、模範を見せるために、十字架によって、具体的に足跡を残してくださったというのです。
ここで私たちは「イエス様の足跡に続いて、」とか「イエス様を手本として、真似よう」と言った時に、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あります。というのは、私たちが何が何でもイエス様の真似をするように、ということではないからです。例えば、イエス様がガリラヤ湖の上を歩いたからといって、私たちも、祈って信仰と共に踏み出すなら、海の上を歩くことが出来るはずだと考えたり、或いは、イエス様が40日の断食をされたので、私たちも同じようなことをしようとするなら、それは愚かなことでしょう。イエス様は私たちにそれを真似るようにとは願っておられないからです。しかし、イエス様が柔和にへりくだられ、ご自身を、仕える者にされたこと、そのことは見習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マタイ福音書に次のような御言葉があるからです。11:29をご覧ください。
“わたしは柔和で謙遜な者だから、わたしの軛を負い、わたしに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は安らぎを得られる。”
ですから、イエス様の足跡に続くというのは、どういうことかと申しますと、苦難を通して、低くされることを通して、信仰が練り清められ、従順を学ぶということです。皆様も良くご存じのように、私たち信者は、天国において高く引き上げられることになっています。1ペトロの手紙1:7にはイエス・キリストが現れる時に、称賛と光栄と誉れを与えられると書かれていますし、また、他の箇所では、やがての日に、私たちは共に天の王座に着座させてくださり(エペ2:6、ルカ22:30、黙示3:21)、神様から「忠実な良い僕だ。よくやった。お前は少しのものに忠実であったから、多くのものを管理させよう。主人と一緒に喜んでくれ(マタイ25:21, 23)」と迎え入れられるのです。そのことをじっくり黙想するなら、この地においてたとえ低くされることがあったとしても、それは大した問題ではないように、だんだん思えてきます。この世において一度低くされ、後に高く挙げられるのです。つまり、天国に入る時には、この世との逆転現象が起こり、低い者は高くされ、高い者は低くされるからです。イエス様はこの地において、天の栄光と特権を全て放棄され、ご自身を無にされ、低くなり、仕える者の姿を取られ、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が、神はイエス様を復活させて、高く引き上げてくださいました。これこそ私たちに示されている足跡なのです。私たちはこの足跡をたどっ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私たちはこの世において、最初苦難を受け、低められ、その中にあっても神に信頼し、約束に依り頼むように召されているのです。そのことを裏付ける聖書の御言葉がいくつかございますので確認してみましょう。1テサロニケ3:3とフィリピ1:29と2テモテ2:11~12です。ご覧ください。
1テサロニケ3:3
“このような苦難に遭っていても、だれ一人動揺す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した。わたしたちが苦難を受けるように定められていることは、あなたがた自身がよく知っています。”
フィリピ1:29
“つまり、あなたがたには、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だけでなく、キリストのために苦しむことも、恵みとして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
2テモテ2:11~12
“次の言葉は真実です。「わたしたちは、キリストと共に死んだのなら、/キリストと共に生きるようになる。耐え忍ぶなら、/キリストと共に支配するようになる。キリストを否むなら、/キリストもわたしたちを否まれる。”
従って、十字架というのは、イエス様がこの苦難の中で、単にお一人で私たちの罪だけを担われて、私たちの虚しい人生から私たちを贖い出すということだけではなく、それは私たちに対する一つの模範であり、私たち一人ひとりがそれぞれの十字架を担って、イエス様の足跡に従うようにさせる招きでも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十字架において招かれているのです。そしてその神様の召しとは、まさに目の前にある、自分の十字架を進んで負う事であります。ところが、私たちは、とかく目の前の十字架を飛び越えて、後の栄光にだけ関心を持ってしまいます。例えば、「神様!私が神様にもっと奉仕することが出来る機会をお与えてください」とか、「神様!ノアに示してくださったように、アブラハムに示してくださったように、私の将来の進むべき道をあなたが直接、御声で示して教えてください。私は従順します」とか、「神様!この国を私にください。この国が主の僕となるように、この国が御前に悔い改め、あなたを讃美できるようにいたします」という祈りを捧げたことはないでしょうか。私自身、このような祈りを何度も捧げたことがあります。しかし、後になって、それは十字架を飛び越えて、自分の栄光のために神を利用しようとしているに過ぎないという事に悟らされました。或いは、旧約のイスラエルの人々は、なんと不信仰で、愚かな人々なんだろうかと考えてしまい、もし、自分だったら、きちんとできるのに、と心の中で思ってしまったことも何度もあります。しかし、信仰の闘いの場とは、言い換えれば、神様に従順な業を捧げる場とは、実際、自分の目の前に置か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信仰生活を重ねて感じることは、人は年を取るにつれて自分自身が罪を重ね、年を取るにつれ確実に、敗北感と恥が増し加えられるという事です。それでも、なお、再び、自分の十字架を担って歩み出すべきだと思います。それは、実は私一人で担っていたと思っていた十字架が、イエス様が共に担ってくれていたことに気づかされるからです。最も低いところにおいて、イエス様が私と共におられることに気づかされるからです。25節をご覧ください。
“あなたがたは羊のようにさまよっていましたが、今は、魂の牧者であり、監督者である方のところへ戻って来たのです。”
イエス様の足跡に従い、自分の十字架を担って行く私たちには、羊飼いであるイエス様が共におられるので、もう何も心配することはないのです。
【結論】
イエス・キリストは、ご自身から進んで十字架に引き渡され、屠り場に引かれる小羊のように、毛を刈る者の前に物を言わない羊のように口を開くことなく、最後まで忍耐され、父に対する従順を完成されました。私たちの人生の目的も、このイエス様の御足に従い行き、全き者とされることであります。それは神様の召しに応答する歩みであり、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イエス様に従って行く歩みであります。この世においては、私たちは苦難を受けるように、苦難の中で神に信頼し、イエス様に依り頼むように召されていますが、私たちが耐え忍んでいる苦しみとは、やがて大きな報いとなって帰ってくる苦しみであり、それはキリストの御苦しみ参与させていただき、後にキリストの栄光に参与させていただく、そのような御苦しみなのです。監督者であるイエス様は、この世の私たちの歩みを羊飼いとして導いてくださり、やがて天国において「忠実な良い僕だ。よくやった。お前は少しのものに忠実であったから、多くのものを管理させよう。主人と一緒に喜んでくれ」とおっしゃってくださるのです。お祈りいたしましょう。